오차장의 사람들(1)
‘그간의 비리를 모두 폭로해서 오차장을 잡는다.’
그렇게 결정한 한록은 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식물>감독님 맞으시죠? ck의 이한록 대리라고 합니다.”
나중에 가장 중요한 증인이 되어줄 식물감독과의 만남.
“박사장님. 이한록입니다. 잠깐 통화 가능하신가요?”
오차장에게 피해를 받았을법한 거래처들을조사하기.
“영도야. 여기 계약서들에 문제 없는지 찾아봐.”
오차장과 구과장이 담당했던 모든 업무를 검토하는 일까지.
“어, 이거 왜 독점 계약서를 안 썼지? 형. 이것 좀 이상한데?”
법무팀인 영도가 오차장의 계약서를 보며 눈을 찌푸렸다.
한록의 예상대로 오차장은 이미 이 시점부터 많은 곳에 비리를 저지르고 있었다.
자료가 차곡차곡 쌓여가는 상황.
그러나 문제는...
“근데, 형. 확실히 이상한건 맞는데...엄청 문제가 될 만한 부분은 없어.”
오차장이 계약을 몰아준 업체들. 평균 이상의 금액으로 계약을 체결한 프로젝
트들.
분명 이상한 점은 있지만, 그 모든 것이 ‘수상하다’ 정도에서 그친다는 점이
었다.
‘증인이 필요하다.’
오차장이 뇌물을 받아 특정 업체와 영화에 수혜를 줬다는 사실.
그걸 밝혀내기 위해선 식물감독과 함께할 증인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대체 누가 있지?’
그러나 그 일에 엮인 당사자라면 오히려 입을 열지 않을게 분명한 상황.
‘...상황이 좋지 않군.’
한록이 생각에 잠겼다.
*
‘직접적인 증인이 없다면, 간접적인 증인이라도 데려가야해. 오차장이 수상하
다는 걸 말해줄 수 있는 사람들.’
그렇게 결론을 내린 한록은 ck의 거래처들 중, 한록과 친분이 있는 곳에 전화
를 걸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조 디렉터님.”
“이대리님, 안녕하세요.”
한록이 전화를 건 곳은 지구특공대의 예고편 제작을 맡아준 조 디렉터.
한록과 유독 친한 프로덕션이었다.
“대리님. 대리님 덕분에 저희 대박난거 아시죠? 지구 특공대 예고편처럼 만들
어달라고 의뢰가 엄청 들어와요.”
“디렉터님이 잘 만들어주신 덕분이죠.”
조 디렉터와 적당히 인사를 나눈 한록이 본론을 꺼냈다.
“다른게 아니라, 이번에 삼일의 삶 영화제용 예고편을 제작해야해서요. 일정
이 가능한지 확인하려고 전화드렸습니다.”
“아, 가능하죠. 이대리님이 맡기시는거라면 잠을 줄여서라도 만들어야죠.”
조 디렉터의 진심이 담긴 넉살에 미소를 짓는 한록.
잠깐 웃던 한록이 자연스럽게, 아주 부드럽게 조 디렉터에게 물었다.
“정말 괜찮으신가요? 이번에 구과장님 영화<변명>도 맡으셨다고 들었는데요.”
오차장은 어차피 실무에서 손을 뗐고, 업체와의 컨택은 구과장이 진행할 것이다.
한록의 말에 조 디렉터가 대답한다.
“아, 아뇨. 그거 취소됐어요.”
‘오케이.’
한록이 모르는 척 다시 질문을 던졌다.
“취소요?”
“네. 갑자기 제작사를 다른 곳으로 교체한다고 하시더라구요. 저희가 콘티 다
만들어놨는데...저희 입장에서도 좀 당황스러웠죠.”
이후 <변명>의 예고편 제작은 kj 프로덕션으로 변경되었다.
갑작스러운 계약 변경. 그것만으로도 대기업의 갑질이지만, 오차장은 거기서
끝낼 인물이 아니다.
‘그 뒤에는 뇌물이 있었겠지.’
대기업 직원들이 뒷돈을 받고, 거래처를 한 곳으로 몰아주는 것.
전형적인 일감 몰아주기 수법이었다.
‘일단 정황 증거로는 충분하다.’
그렇게 생각한 한록이 큰 기대 없이 질문을 던졌다.
“그래요? 혹시 이유는 들으셨나요?”
“유대리님이 일정이 안 맞는다 그러더라구요. 구과장님이랑 전화할땐 그런 말
없었는데.”
“...유대리님이요?”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튀어나왔다.
유대리.
오차장의 팀원이고, 1년 뒤 회사를 나가는 사람이다.
“네. 저희로는 뭐, 사정을 알 수가 있나요. 그냥 알았다고 했죠.”
“....네, 알겠습니다.”
구과장과 같은 팀이긴 하지만, 유대리는 <변명>의 담당자가 아니다.
‘그런데 왜 지금 유대리가 나오는거지?’
질문에 대한 답은 간단했다.
‘유대리가 이 일에 얽혀있구나.’
*
“영도야.”
조 디렉터와의 전화를 끊은 한록은 바로 영도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형! 형은 휴가지만 난 일하는 중이라고!”
“너, 사내 인트라망에서 유정연이라고 검색해 봐. 그리고 이 사람 서류 확인
해 봐.”
“형, 내가 무슨 검색창인줄 알아?”
“빨리 해 줘. 급한 거야.”
“급한 거라면 어쩔 수 없지...”
한록의 말에 영도가 툴툴대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잠시 후 영도에게서 온 메시지.
[형, 이 사람 뭐야?]
[이 사람 프로젝트 중에 70%가 kj 프로덕션이랑 체결됐는데?]
[중간에 업체 바꾼것도 엄청 많아. 이 정도면 갑질로 신고 당할 수준이야.]
상황은 명백해졌다.
수상하지만, 그래도 서류 자체는 깨끗한 오차장과 구과장.
반대로 문제가 많은 유대리.
‘오차장이 유대리한테 일을 떠넘겼군.’
상황이 심각해지면 유대리 하나만 잘라내고 끝낼 수 있도록 오차장이 사주를
한 것이다.
‘상황이 잘못되면...오차장이 아니라 유대리가 모든 걸 뒤집어쓰고 끝날 수
있다.’
증인이 필요한 사건.
그리고 그 사건의 가해자이자, 동시에 피해자인 사람.
‘유대리를 잡아야 한다.’
한록의 목표는 명확해졌다.
*
다음날 마케팅 부서.
“내부 시사회 결과 나왔다. 단편선 상영작은 <식물>이야.”
정부장의 약간 아쉬운듯한 발표와-
-쾅!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오차장.
오차장이 거친 발걸음으로 사무실을 빠져나갔고, 오차장의 앞자리에 앉아있던
유대리가 깜짝 놀라 몸을 웅크렸다.
‘슬슬 오차장이 움직이겠군.’
비록 슬럼프를 겪고 있지만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감독 중 한명이 주감독과,
신인 감독의 데뷔작인 식물.
심지어 식물은 개봉 일정이 어긋나 개봉이 반년째 밀린 상황이었다.
오차장은 주감독의 영화가 데뷔작인 식물에게 질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결과가 나왔으니, 오차장이 회귀 전 그랬던 것처럼 손을 쓸 상황.
‘아마 일주일 안에 식물 쪽에 연락을 하겠지,’
<식물>의 이감독과는 이미 여러번 연락을 해뒀고, 녹음도 당부해놓았다.
예상대로만 흘러간다면 오차장이 비리를 저지른 것은 저절로 밝혀질 것이었다.
‘문제는 유대리가 뒤집어쓴 일들인데.’
과거의 일들은 여전히 유대리의 이름으로 올라가 있는 상황.
‘어떻게 해야하지?’
유대리가 진실을 말하게 할 방법.
협박, 혹은 회유, 혹은 취조. 혹은 함정.
그런 생각을 하던 와중, 유대리가 겁에 질린 얼굴로 유선에게 다가가는 모습
이 보인다.
유선과 몇마디를 나누더니 굳은 표정으로 자리를 뜨는 유대리.
한록은 재빨리 유선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유선씨. 유대리님이랑 무슨 얘기했어요?]
[아, 안그래도 대리님한테 말씀드리려 했어요. 식물 관련해서 해야할 말이 있
다고 식물 이감독님 번호 좀 알려달라고 하셨어요.]
‘-이거다.’
지금이 바로 기회다.
[고마워요, 유선씨.]
한록은 유선에게 메시지를 남기고 바로 유대리의 뒤를 따랐다.
*
12층의 소품 창고로 들어가는 유대리.
한록은 뒷문으로 조용히 창고에 들어갔다.
“아, 빨리 받으라고...”
유대리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더니 초조한 얼굴로 짜증을 냈다.
‘식물 감독한테 걸고 있는거야.’
“<식물> 이감독님 맞으시죠?”
그리고 한록의 예상은 적중했다.
한록은 재빨리 녹음기를 키고 귀를 기울였다.
‘<식물>을 단편선에서 내리라고 협박을 한다면 아주 좋은 증거가 될 거야.’
아쉬운게 있다면, 오차장이 아니라 유대리의 음성이라는 점.
아쉽지만 유대리를 협박해서 오차장과의 연결고리를 캐내는 수 밖엔 없었다.
“감독님. 감독님 영화에 문제가 생길 수 있어서 전화드렸어요. 이번에 부산영
화제 단편선 출품하시죠?”
‘좋아. 조금만 더.’
한록은 조용히 유대리의 말을 기다렸고-
“계약에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제작사 쪽에 다시 한번 확인해달라 하세요.”
유대리의 말은 전혀 상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
“정확히 어떤 문제인지는 말씀 드릴 수 없습니다. 제작사 측에 문의해보시고,
아니다, 감독님이 그냥 ck담당직원한테 직접 전화하세요.”
‘뭐지?’
유대리가 이감독에게 하는 것은 협박이 아닌 조언.
“제 얘기는 하지마시고, 그냥 담당 직원한테 여쭤보시라니까요. 감독님 이러
다 데뷔 못하실 수 있어요. 지금 벌써 개봉 반년 밀렸다면서요?”
거기에 혹시 자신이 조언해줬다는 걸 들킬까봐 곤란해하는 유대리.
‘아.’
그때,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유선씨. 유대리님이랑 친하죠? 유대리님은 어떤 분이에요?’
어제 저녁. 유대리가 이 일에 엮인걸 알고 유선에게 질문한 한록.
그 말에 유선은 이렇게 대답했다.
‘유대리님 좋은 분이세요. 제가 입사 초기에 적응 못할 때 되게 많이 도와주
셨어요.’
‘자기도 영화 찍다가 회사로 넘어온거라 처음에 힘들었는데, 나중엔 다 적응
되고 참고 살게 된다고 하시더라구요.’
‘영화를 찍다 오셨다구요?’
‘네. 감독이 되고싶어서 조연출을 계속 하셨는데 데뷔는 못하셨다고 하셨어요.’
감독과 배우를 꿈꾸다가 회사원이 되어버리는 케이스.
이 바닥에서는 정말 흔한 케이스였다.
그리고 유대리가 그런 사람 중 한명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마 <식물>감독님이랑 동문이실 거예요. 거기 나온 사람들은 다 감
독되는데, 자기만 못됐다고 하셨어요.’
감독이 되고 싶었던 회사원.
이제는 비리에 얽힌 회사원.
그리고 데뷔작이 무산 될 위기에 처한 영화감독.
“감독님. 제가 누군지가 뭐가 중요해요. 그냥 선배라고 알아두세요. 네? 이러
다 데뷔 못하실까봐 하는 말이라고요.”
유대리는 이감독이 자신처럼 될까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퇴사를 했구나.’
이제야 상황이 이해가 간다.
‘지금 반응을 보니까 좋아서 가담한건 아닐거야. 아마 오차장한테 협박을 받
았겠지. 입닫고 시키는대로만 하면 뒤를 봐주겠다는 말에 혹하기도 했을 거고.’
‘그러다가 이번 일로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거고. 그런데 오차장을 고발할 용
기는 없겠지. 업계가 워낙 좁으니까.’
‘그러다가 본인이 퇴사를 한 거군.’
회사생활이란 게 그렇다.
누군가에 의해 양심을 테스트 받을 때가 너무 많은 회사원의 삶.
버티면 공범이 되고 못 버티면 회사를 나가야 한다.
‘상사를 고발한다. 회사는 징계를 내리고, 정의는 승리한다.’
-라는 제 3의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번 오차장의 편에 선 유대리.
그러나 마지막에는 결국 양심을 버리지 못하고 퇴사를 선택한 것이다.
“감독님. 저는 분명 말했습니다. 알았죠? 제작사 말고 ck에 직접 전화하세요.
전화해서 다른 사람 말고 이한록 바꿔달라고 해요. 그 사람이 해결할 겁니다.
그 사람 말고는 아무도 믿지 마세요.”
거의 화를 내며 통화를 끊은 유대리.
그리고 그 속에 언급된 자신의 이름.
한록은 손에 들고 있는 녹음기를 바라보았다.
녹음으로 유대리를 협박하거나, 유대리를 감사실에 넘겨 오차장과의 연결고리
를 밝혀내려던 한록.
‘...이게 오차장이 하는 일과 뭐가 다르지?’
남을 협박해서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방식.
한록은 이제는 다른 방법을 선택하고 싶었다.
‘유대리를 협박하는게 아니라, 유대리가 직접 오차장의 비리를 증언해줄 수
있다면 상황이 더 쉬워질 거야.’
한록의 생각이 서서히 바뀐다.
‘현과장님한테 부탁해볼까?’
그러나 잠시 생각하던 한록은 고개를 저었다.
회귀 전, 유대리는 오차장을 고발하지 못하고 본인이 회사를 나가는 걸 선택
했다.
아마 좁은 업계에 소문이 나는걸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 현과장님한테까지 일을 알릴 순 없어. 내가 해결해야해.’
결국 남은 것은 한록 자신.
‘내가 유대리를 설득할 수 있을까?’
항상 인간관계를 어려워했던 한록.
자신을 배신했던 영도와 부서사람들.
현과장이 그랬던 것처럼, 실패의 기억들이 한록을 짓누른다.
그리고...
‘이제는...나도 달라졌잖아.’
자신을 믿어준 윤감독. 유선. 현과장.
그들에 대한 믿음 역시 마음 한 구석에 떠오른다.
여러번 망설이던 한록이 고개를 들었다.
‘그래, 한번 해보자.’
유대리는 오차장의 사람인 동시에, 오차장을 보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사람
이다.
그런 기회를 망설이느라 놓칠 수는 없었다.
“유대리님. 이한록입니다.”
한록이 유대리의 앞에 나섰다.
작가의말
영도 이제 배신 안합니다!
마음 편하게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