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33화 (33/263)

기대되지 않으십니까?(3)

*

“대리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한록의 손을 잡고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는 윤감독.

“감독님, 명작을 만드신 기분이 어떠십니까.”

분위기를 풀어주려는 듯 약간의 장난기가 담긴 질문에 윤감독이 한참이나 답

을 생각했다. 그리고 겨우 말했다.

“저는...”

단 한 작품만을 남기고 사라진 전설적인 감독.

“앞으로 평생 영화를 만들고 싶습니다.”

그가 50이 넘는 나이에 새로운 꿈을 가진다.

나이가 무색하게 젊은 청년처럼 반짝이는 눈과 꿈을 꾸는 표정.

눈앞에서 펼쳐지는 영화 한편에 한록은 전율을 느꼈다.

윤감독이 한록을 바라보더니, 다시 한번 손을 잡고 말했다.

“대리님. 이런 말씀 드리기엔 아직 제가 너무 부족한 건 압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저는 계속 영화를 만들겁니다. 그리고 언젠가 유명해질겁니다.”

“그때가 오면 또 제 영화를 맡아주시겠습니까?”

윤감독의 하얀 실이 한록에게 이어지고, 매듭이 지어진다.

그 사실이 의미하는 건, 윤감독의 영화에서 한록이 절대 빠질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네, 당연하죠.”

앞으로 세계적인 거장이 될 윤감독. 그런 윤감독이 만들어갈 영화와, 그곳에

참여할 자신.

한록 역시 꿈을 담은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중년의 감독. 젊은 대리.

앞으로 자신들이 만들어갈 미래에 미소를 짓는 둘.

그리고...

그 둘을 지켜보는 굳은 표정의 현과장.

*

밤 10시의 마케팅 부서.

한록과 현과장은 사진과 자료를 업로드하기 위해 회사로 돌아왔다. 거의 큰절

을 하려는 윤감독을 돌려보내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이대리. 잠깐 담배 한 대 필까?”

내일 보낼 보도자료를 작성하던 한록에게 현과장이 물었다.

<삼일의 삶>을 보다가 갑자기 나가버린 현과장.

그 현과장이 두시간만에 한록에게 한 말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한록의 대답에 둘은 함께 옥상으로 향했다.

*

옥상에서 담배 한모금을 핀 현과장이 입을 열었다.

“이대리. 나는 말이야.”

“나도 한때는 너처럼 되고 싶었다. 너처럼 될 수 있을 줄 알았어.”

그리고 다시 침묵.

긴 침묵을 깬 것은 현과장의 벨소리였다.

발신인은 아내.

“잠깐만. 집에서 전화왔다.”

한록에게 양해를 구한 현과장이 구석에 가서 전화를 받았다.

*

[여보. 언제 와?]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아내의 목소리가 들린다. 오늘따라 왠지 더 정겹게 느

껴지는 목소리였다.

“응, 여보. 한 시간 정도 걸려. 또 늦어서 미안해.”

[아냐, 됐어. 그냥 물어본거야.]

“늦었는데 화 안내? 당신 요즘 친절하네.”

[당신이 야근해서 인센 타오니까!]

그렇게 말하며 꺄르르 웃는 아내. 아내의 장난에 현과장도 피식 미소를 지었

다. 잠시 후 아내가 웃음을 거두고 말했다.

[그리고 당신 요즘 즐거워 보이거든. 우리 남편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내가

뭐라 하겠어.]

‘아, 그래.’

아내의 말처럼, 현과장은 요즘 정말 즐거웠다.

한록과 일을 하는 것. 큰 프로젝트를 맡아 성공시키는 것. 그리고 더 큰 꿈을

꾸는 것.

그게 바로 현과장이 바라던 삶이었다.

“여보, 있잖아. 나-”

나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

그 말을 하고 싶었으나, 핸드폰 너머로 딸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여보, 은서가 바꿔달래.]

[아빠아. 아빠!]

현과장의 딸, 은서의 부름에 현과장이 얼른 대답했다.

“어, 은서야. 아빠 집에 늦게가서 미안해. 요즘 맨날 늦네. 아빠가 집 갈때

곰인형 사갈게.”

[그거 말고 레고 사 와. 영화관 레고. 큰 걸로.]

딸의 확고한 취향에 피식 미소를 짓는 현과장.

주위 아이들에 비해 당차고, 똑똑한 성격의 은서. 은서는 언제봐도 자랑스러

운 딸이었다.

“응, 그럴게.”

[응. 아빠 내일은 늦으면 안돼. 알았지? 민하 놀러온다고 했단 말이야.]

“아빠 민하랑 놀아?”

[응. 내가 아빠 영화 티비에서 나온다고 자랑했단 말이야. 꼭 7시까지 와.]

“그래?”

언제나 현과장의 자랑인 딸. 그런 딸이 친구들한테 자기 얘기를 했다니. 오늘

하루종일 처져 있던 기분이 겨우 살아난다. 기분이 나아진 현과장이 딸에게

물었다.

“그럴게. 우리 은서 티비에 아빠 영화나와서 좋아?”

그 말에 은서는 바로 대답했다.

[응, 아빠.]

[아빠 멋있어.]

예상치 못한 은서의 대답에 현과장이 이를 악물었다. 딸한테 듣는, 세상에서

가장 기쁜...

[나도 커서 아빠처럼 될 거야.]

칭찬.

그리고...

‘현주훈, 이 겁쟁아.’

반성.

*

전화를 끊은 현과장이 한록에게 다가갔다. 현과장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한록. 나는 너처럼 되고 싶었다. 너처럼 되고 싶었어.”

현과장이 횡설수설하며 솔직한 속내를 말하기 시작했다.

“나도 마케팅으로 유명해지겠다고 회사에 들어왔어. 한국 영화에 한 획을 긋

고 싶었어. 여기 온 모두가 그랬겠지. 그런데 어느 순간 알았다. 나는...”

“나는 못한다는 걸.”

현과장의 담배가 짧게 타들어간다.

“gv 거절한 거, 가족을 위해서 못하겠다 했지. 근데 이제 잘 모르겠다. 이대

리. 내 딸이 내가 멋있대. 내 영화가 티비에 나와서 좋대. 나 같은 사람이 될

거래. 근데 나는, 가족을 생각해서 못하겠단 소리나 했다.”

“이대리. 나는 그냥 무서운 것 같아. 오차장이 무섭고 또 실패할까봐 무서워.

왜냐면. 왜냐면 나는 너무 많이 실패했어.”

한참이나 얘기를 하던 현과장이 한록을 바라본다.

현과장이 아주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눈빛.

한록이 회귀 전부터 현과장에게 보아온 눈빛이었다.

장난스럽고 다정한 눈빛. 그러나 그 속에 후회와 절망, 그리고 미련을 가진

눈이었다.

“근데 나는 아직도 이대리처럼 되고 싶어.”

“이대리.”

“나 어떻게 해야하냐?”

“나 팀장해야하냐?”

“근데 말이야. 내가 팀장을 해도. 이대리랑 같은 팀이 되도.”

“내가 이대리처럼 될 수 있을까?”

“또 실패하는거 아닐까?”

현과장이 맞닿은 질문.

그리고 한록은 답을 아는 질문이었다.

한록이 진심을 담아 현과장에게 답했다.

“과장님. 과장님은 실패하지 않으실 겁니다.”

“이대리는 몰라. 나는 이대리가 아니야. 이대리처럼 천재도 아니고, 최연소

대리도 아니야. 난 그냥 현주훈이라고.”

“네, 과장님은 현과장님이시죠. 그러니까 제가 아니라 현과장님이 되시면 됩

니다.”

“내가 되면 된다고? 내가 뭐가 되겠어. 가족 핑계대는 만년과장?”

그 말에 한록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뇨, 멋진 아빠요.”

현과장이 한록을 바라보았다.

“천재도 아니고, 최연소 대리도 아니지만, 티비에 나오는 영화를 마케팅 하는

사람이요. 야근을 해도 딸을 위해서 매일 집으로 달려가는 사람이요. 그래서...”

“은서의 자랑이 되는 아빠요.”

*

현과장은 한록의 말에 한동안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대신, 한록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현과장에게 내밀었다.

금연 껌이었다.

“그러니까 담배는 끊으세요.”

그리고 인사를 하더니 자리를 뜨는 한록.

현과장은 한록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

현과장을 내버려둔 한록은 사무실로 돌아왔고, 가방을 챙겼다. 그리고 엘리베

이터를 잡아 1층으로 향했다.

‘버스가...멀었군.’

회사 앞 버스 정거장에 앉은 한록은 생각에 잠겼다.

[가족을 생각해야 해서 못하겠다.]

한록은 현과장의 그 말이 변명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 역시 한서의 병원

비 때문에 억지로 회사를 다녔으니까.

사람들은 한록이 아무것도 두려울게 없고, 거만한 천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삶에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느껴지는 순간들이 한록에게도 있었다.

‘우리 오빠 진짜 멋있다.’

현과장처럼 한록도 그때 가족에게 많은 위로를 받았다. 그 말이 없었으면 버

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한록은 달랐다.

이제는 일이 너무나 즐겁고, 누군가와 함께 일하는 것도 즐거웠다.

손발이 맞는 사람과 함께 프로젝트를 성공시킬 때면. 사람들이 영화를 보고

열광할때면. 감독들이 기뻐할때면.

그럴때면 자신이 꿈꾸던 삶이 바로 이런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현과장의 삶도 이렇게 바뀔 수 있길 바란다.

‘하지만 이건 현과장님이 선택할 문제야.’

그러니 자신은 현과장의 결정을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불안하지는 않았다. 한록은 현과장을 믿고 있었다.

현과장의 능력과,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

현과장. 아니, 현과장뿐만이 아닌 수많은 회사원.

그들은 자신이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단 한번의 계기일지도 몰랐다.

‘나는 과장님의 삶이 달라질 거라 믿는다.’

‘그로 인해 내 삶도 달라질거고.’

때마침 버스가 도착했고, 한록이 몸을 일으켰다.

*

옥상에 혼자 남은 현과장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저는 평생 영화를 찍을겁니다.’

윤감독의 말.

‘은서의 자랑이 되는 아빠요.’

한록의 말.

그리고...

‘나는 커서 아빠처럼 될 거야.’

은서의 말.

거기까지 생각한 현과장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로 달려갔다.

15층의 마케팅부서 사무실로 뛰어갔지만, 한록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다시 엘리베이터로 뛰어갔으나 엘리베이터는 이미 옥상으로 올라가버린 상황.

“빨리 와!”

현과장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연타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나 엘리베이터

는 내려올 생각이 없어보였다.

“아씨!”

바닥을 걷어차던 현과장이 창문을 바라보았다. 저 아래 까마득하게 한록이 정

거장에 앉아있는 모습이 보인다.

‘가버릴지도 모른다.’

‘이 기회를 놓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었고,

“기다려, 이대리!”

현과장이 계단으로 뛰기 시작했다.

15층. 14층. 13층. 12층. 11층. 10층.

수많은 계단을 뛰어내리며 현과장은 생각했다. 아니, 이미 사라져버린 자신의

야망과 자신감에게 선포했다.

‘할 수 있다.’

‘나는 현주훈이다.’

‘할 수 있다.’

‘나는 충북고 장학생이고, 청주의 명물이다.’

‘할 수 있다.’

‘나는 가족의 든든한 가장이고 ck enm의 과장이다.’

‘할 수 있다.’

‘나는 현주훈이다. 나는 우리 가족의 가장이다. 나는 ck enm의 과장이다. 그

리고 차장, 아니 부장이 될 사람이다.’

‘나는-’

현과장은 드디어 1층에 도착했고 한록을 발견했다.

버스를 바라보는 한록. 버스 문이 열리고, 버스로 다가가는 한록. 그리고 한

록이 버스에 한 발을 올렸을 때 현과장이 소리쳤다.

‘나는-’

‘나는 내 딸의 자랑이다.'

한록과 이어진 현과장의 끈이 매듭지어진다. 그리고-

“이대리, 끝까지 가자!!!”

현과장이 소리쳤다.

*

일주일 후, 마케팅 부서.

현과장이 한록에게 종이를 내밀며 말했다.

“이대리, GV팀 구성이야. 남과장네 팀원 하나 빼올거다.”

“괜찮으시겠습니까?”

한록의 우려에 현과장이 답했다. 그 어느때보다 진지한 목소리였다.

“응.”

“나 현주훈이거든.”

현주훈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작가의말

현과장 각성 완료!

[현과장

랭크:C

최대 각성 랭크:S

스킬: 딸바보(SS), 설득(S), 칼퇴(A)

좋아하는 영화: UP, 맘마미아]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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