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되지 않으십니까?(1)
2주 후. 오후 1시 58분의 마케팅 부서.
한록과 유선이 자리에서 뚫어져라 컴퓨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화면에 띄워둔 것은 네이버 시계 화면과 ckv 예매 결과 화면.
“대리님...저 수강신청 다시하는 것 같아요...긴장돼서 심장 터질 것 같아요...”
“괜찮아요. 심장은 쉽게 터지지 않아요.”
“네...”
한록의 위로 아닌 위로에 유선이 고개를 끄덕인다.
오늘 2시는 걸작선 재개봉의 예매가 열리는 날.
한록과 유선은 그 결과를 바로 확인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하, 미치겠군.”
한록의 주위에서 얼쩡거리던 정부장이 결국 유선의 옆에 선다.
“부장님. 사람은 쉽게 미치지 않습니다.”
“이한록 니가 이럴때마다 난 야마가 돈다.”
“야마도 쉽게 돌지 않습니다.”
“하....”
옹기종기 모여 예매 결과창을 바라보는 한록, 유선, 정부장.
59분. 59분 40초. 50분 50초. 55초, 59초.
두시 정각.
“대리님!”
유선의 말과 함께 한록은 새로고침을 눌렀고-
[la랜드-1관 300석/잔여석 27석]
[강을 건넌 님-3관 300석/잔여석 40석]
[삼일의 삶-6관 300석/매진]
매진.
매진.
매진!
“매진!”
“매진이에요!”
한록과 유선이 함께 소리를 지른다.
2시 정각, 예매창을 오픈하자마자 매진.
수많은 사람들이 삼일의 삶의 개봉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비켜봐!”
정부장이 의자에 앉은 한록을 밀더니 스크롤을 내린다.
[동화 속 미로-4관 300석/잔여석 12석]
“...됐다.”
12석이면, 당일이 되면 매진이 될 정도의 여석이다.
그러나 정부장은 만족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아마 삼일의 삶이 개봉 1초만에 매진이 된 모습을 봤기 때문인 것 같았다.
“부장님, 잠시만요.”
“뭐야.”
“다시 보십시오.”
그리고 새로고침을 하는 한록.
곧 화면이 바뀐다.
[la랜드-1관 300석/잔여석 13석]
[강을 건넌 님-3관 300석/매진]
[삼일의 삶-6관 300석/매진]
[동화 속 미로-4관 300석/매진]
la랜드를 빼고 모두 매진.
“매진!!”
이번엔 정부장이 화면을 보고 소리지른다.
유선이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자, 정부장이 제정신이 돌아온건지 헛기침
을 하고 표정을 바꿨다.
“큼. 뭐해. 이제 돌아가서 일해.”
그러더니 자리로 돌아가려는 정부장.
그 뒷모습에 한록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부장님. 즐거우시죠?”
“.......”
“그래.”
‘역시나, 츤데레.’
한록은 기분좋게 웃으며 다시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정부장의 말은 거기
서 끝이 아니었다.
“고맙다.”
깜짝 놀라 돌아봤지만, 이미 자리에 앉아버린 정부장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한록은 정부장의 마음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손에서 망한 영화.
그리고, 그 영화가 다시 태어나 세상에서 인정을 받는 경험.
그게 얼마나 짜릿하고, 즐겁고, 또...감사한 일인지 지구 특공대를 통해서 알
고 있으니까.
한록은 메신저를 켜서 정부장에게 쪽지를 보냈다.
[부장님.]
[저도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정부장의 답장.
[일해.]
한록은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
[삼일의 삶 양도 구합니다 ㅠㅠ 친구 생일선물이에요.]
영화 사이트의 반응.
[삼일의 삶/아트나인 월요일 9시 1매 5만원]
중고 판매 사이트의 *프리미엄 거래.
*프리미엄:암표
[구독자 이벤트! 삼일의 삶 1석을 나눔해드립니다 ><]
인플루언서들의 참여.
여기저기서 올라오는 삼일의 삶 반응.
“아악! 이대리랑 또 겹쳤어! 검색어 밀리잖아!”
“아 씨발, 이한록...!”
개봉일정이 겹친 김대리와 구과장의 비명.
“이대리 또 인센 받겠네. 이번엔 이대리가 밥 사라~.”
박과장의 친근한 장난까지.
모든 반응이 좋았지만, 그 중 가장 기분 좋은 것은 역시 윤감독의 반응이었다.
“네? 매진이라구요??”
“네, 감독님. 이번주 예매건 전부 매진입니다.”
윤감독은 또 일을 하다 전화를 받은건지 뒤에서 배달어플의 알림소리가 나오
고 있었다.
“그, 그럼 대리님, 혹시 조회수는 얼마나...”
“씨네하우스에서는 5만. 극장 확대되면 80만은 예상 중입니다.”
80만. 100만을 예상했지만 상당히 보수적으로 잡은 수치다.
그러나 윤감독은...
“경수야! 80만이란다! 80만!”
“사장님! 집게 내려놓으세요!”
그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하게 흥분해 있었다.
“아, 아 대리님!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흥분해서...!”
“네, 이해합니다. 축하드려요, 감독님. 오픈 1초만에 매진됐습니다.”
“경수야!!!!!”
핸드폰 너머로 또다시 경수를 찾으러 간 윤감독.
한록은 윤감독이 회포를 풀게 냅두기 위해 잠시 기다리다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이제 한록의 전화가 쉴새없이 울리기 시작한다.
“이대리님. 영화관사업부 강정혁입니다. 삼일의 삶 개봉 관련해서 연락드렸습
니다.”
“네, 말씀하세요.”
“지금 <배드엔딩>이 관객수가 안 나오고 있어서 조기 종영 예정인데요. 이 타
임에 삼일의 삶 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전달 감사합니다.”
남과장이 감독하고 있는 예술영화 배드엔딩. 그 자리에 삼일의 삶이 대신 들
어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거 웹개봉만 진행한거죠?”
“네.”
“상영관을 늘렸으면 하는데...일정 괜찮으신가요?”
한록이 원하던 것. 씨네하우스만이 아니라, 전국에서의 개봉.
그게 지금 바로 눈앞에 도착해있었다.
“네, 전혀 문제 없습니다. 회의 후 배정되면 꼭 연락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아마 이대리님 영화니까 통과될거예요.”
당연하다는 말하는 영화관사업부의 대리.
‘됐다. 모든게 다 잘 되고 있다.’
일주일 뒤의 개봉. 그때까지 계획한 모든 일이 완벽히 풀리고 있었다.
그러나 4시쯤, 한록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발생했다.
“이대리님...!”
윤감독이 회사에 도착한 것이다.
“감독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마침 1층에 볼일이 있던 유선과 함께 올라온 윤감독.
일터에서 금방 달려온 듯 반팔티에 편한 바지였다.
동네 치킨집 사장님. 혹은, 우리 아버지들 같은 윤감독의 모습.
윤감독이 한록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대리님, 이거 드세요.”
윤감독이 내민 것은 치킨이 담긴 박스.
“대리님 선물 아무것도 안 받으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래도 이건 제가 만든 겁
니다. 받아주세요. 제가 너무 감사해서 그렇습니다.”
“....”
선물을 일체 받지 않기로 유명한 한록.
하지만 이것만은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감독님. 잘 먹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대리님. 다음에는 양념을...”
“아닙니다, 감독님. 그냥 편지만 주셔도 됩니다.”
“아,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한록이 지구특공대 장감독의 생각을 하며 편지를 얘기하자, 윤감독이 고개를
끄덕인다.
감독이란 사람들은 낭만이 있어서 그런지 손편지를 참 좋아한다.
“감독님, 바쁘시잖아요. 얼른 들어가보셔야죠.”
“네, 네. 대리님도 일하셔야죠.”
한록의 배웅을 받으며 로비로 향한 윤감독.
한록이 윤감독에게 고개를 숙이려 하자, 윤감독이 손을 불쑥 내밀었다.
한록은 윤감독의 손을 잡고 악수를 했다.
여기저기 화상자국이 가득한 거친 손.
하지만 군데군데 박힌 굳은살에서 느껴진다. 이 사람은 치킨집 사장이고, 은
퇴한 월급쟁이지만, 평생 카메라를 만져온 감독이라고.
“대리님.”
손을 놓기 직전, 윤감독이 벅찬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대리님 말이 맞았어요. 대리님을 믿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그때 절 설
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그 때 일 전화주셔서 감사합니다.”
오차장의 협박을 한록에게 얘기해줬던 윤감독.
그에게 이렇게라도 보답을 할 수 있어서 기쁠 따름이었다.
“대리님. 다시 한번 정말 감사드립니다. 오늘이...애들 태어날때말고 제 인생
최고의 날일 것 같습니다.”
몇 번이나 고맙다고 말하는 윤감독에게 한록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뇨, 감독님. 아직 첫상영이 남았습니다.”
그 말에 윤감독의 미소가 더욱 환해진다.
“네, 그렇죠.”
이제 개봉이 얼마 남지 않은 삼일의 삶.
객석을 꽉 채운 관객들의 모습...
그걸 어서 윤감독에게 보여주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며, 한록이 윤감독에게 말했다.
“아마 그 날이 감독님 인생의 가장 기쁜 날이 될 겁니다.”
*
“이열, 이대리.”
사무실로 돌아오자 현과장이 한록을 바라본다.
현과장 외에 부서 사람들도 모두 한록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감독들이 몇 번 찾아오는거야?”
“다들 좋은 분들이셔서 그렇습니다.”
“이대리가 잘해서 그런거지.”
그렇게 말하며 한록의 등을 치는 현과장.
분명 기쁜 얼굴이었지만,
“부럽다, 진짜.”
그 속에 얼핏 느껴지는 부러움과 쓸쓸함.
‘...이제 때가 왔다.’
그리고 한록이 입을 열려 할 때, 정부장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주목. GV 팀 배정에 관한 얘기다.”
그 말에 사람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귀를 기울인다.
“신설팀은 영화제 전까지 미룬다. 그리고 팀장은...”
사람들을 한번 둘러본 정부장이 말을 이었다.
“현과장이다.”
“!”
정부장의 말에 현과장이 바닥에서 펄쩍 뛰어올랐다가 주먹을 움켜쥔다.
반면 송과장은 아쉬운 듯 한숨을 쉬었고, 박과장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록의 마지막 시선이 향한 곳은 오차장이었다.
오차장은 아무런 표정이 없었으나...그 시선만은 정확히 한록을 향하고 있었다.
“팀원 배정은 아직 논의중이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이상.”
발표를 마치고 자리에 앉은 정부장.
한록이 살짝 현과장을 바라보자, 아니나 다를까 현과장이 애타게 입모양으로
한록을 부르고 있었다.
서로 시선이 마주친 둘. 그러자 현과장이 입모양으로 속삭인다.
‘이한로옥! 너 어떻게 한 거야 도대체?’
피식 미소를 지은 한록. 자리로 돌아간 한록은 현과장에게 메신저를 보냈다.
[현과장님. 끝나고 잠깐 옥상에서 얘기 좀 가능할까요?]
[지금 당장 올라와. 아니 당장 접선하면 수상하니까, 10분 뒤에 올라 와.]
*
한록은 옥상에서 담배를 피우며 현과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는 결론을 내릴때다.’
현과장에게 물어야할 질문. 들어야할 대답.
이제는 더 미룰 수 없었다.
그때 누군가 옥상 문을 열고 들어왔고, 한록이 인사를 하려는 찰나.
“이한록.”
오차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일이십니까.”
오차장은 대답도 없이 한록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한록을 내려다보
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묻지. GV는 현과장과 진행할 건가?”
“네. 본부장님께도 말씀드렸습니다.”
“본부장님이라.”
한록이 최경준을 찾은 날.
그날 오차장도 최경준을 찾았다.
그리고 최경준의 답.
“이한록에게 전권을 줬네. 이한록이 결정할 문제야.”
‘본부장님이 나와 너 중 누굴 선택할거 같지?’
그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최경준은, 적어도 지금은, 이한록을 선택했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오차장이 한록의 얼굴로 손을 내민다.
그리고 한록이 미처 피하기도 전, 한록의 담배를 잡아채 바닥에 던졌다.
“나한테 싸움을 거는군. 대가는 각오하고 있겠지.”
뺨을 맞은 것은 아니지만, 거의 맞은 것 같은 세기로 고개가 돌아간 한록.
한록은 고개가 돌아간채로 숨을 골랐다.
‘깡패도 아니고, 이게 뭐하는 짓이지?’
화가 난다.
더 이상 오차장의 행동을 참고 있을 순 없다.
한록은 오차장을 똑바로 바라보았고,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보란 듯이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이는 한록.
명백한 도발이다.
“손 잘라버리기 전에 치워.”
어찌나 화가 났는지, 오차장의 목소리가 싹 가라앉았다.
그러나 한록은 연기를 한 번 뱉은 후 다시 오차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대가 같은건 없습니다, 차장님. 저한테 아무 짓도 못하실테니까요.”
그 말에 오차장이 손을 확 들어올린다.
그러나 천천히 주먹을 쥘 뿐, 한록의 말처럼 아무짓도 하지 못하는 오차장.
회사에서 한록에게 폭력을 가하면 최경준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한록.”
손을 올린채 심호흡을 하던 오차장이 결국 손을 내린다. 대신, 한록을 향해
고개를 숙인 후 속삭였다.
“기대해. 대가는 네가 아니라 현과장이 치르게 될 거다.”
그리고 등을 돌려 걸어가는 오차장.
한록은 그 뒷모습을 계속 지켜보았다.
얼마후, 현과장이 드디어 옥상문을 열고 나타났다.
“이대리!”
“과장님 오셨어요.”
“이 사단을 내놓고 오셨어요?!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과장님이랑 같이 일하고 싶다고 한 게 다입니다. 정부장님이랑 이미 논의도
다 했고요.”
“뭐라고 안 하셔?!”
“뭐 별로...”
한록은 정부장과의 대화를 회상했다.
한록을 부른 정부장은 당연히 한록이 신설 프로젝트의 전권을 결정할 거라 생
각한 모습이었다.
“팀구성은 끝났나?”
“예. 끝났습니다.”
“어떻게?”
“현과장님이 팀장이 되셨으면 합니다. 유선씨도 팀으로 배정하구요. 그 외 인
원은 현과장님 결정에 따르겠습니다.”
“...네가 아니라 현과장이 고른다고?”
“네. 현과장님이 팀장이시고, 과장이시니까요. 제가 사람들을 고르는건 아니
라고 생각됩니다.”
“허.”
그러나 한록은 깔끔하게 결정된 사안을 이야기했다.
그 모습이 퍽 공손하여 정부장은 더욱 어이가 없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부산영화제가 남았으니, 그 전까지는 팀 신설이 아니라 업무 추가로
진행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일단 저만 현과장님 팀으로 이동하면 되는 쪽
으로요.”
“이한록, 이 자식 진짜...”
한록을 노려보다가 한숨을 쉬는 정부장.
“그렇게 바락바락 대들어놓고, 생각보다 결정은 무난하네. 바뀐 것도 별로 없
고.”
“제가 바란 건 원래 합을 맞춘 사람들과 일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
으니까요.”
“그래. 이 정도면 다른 사람들도 반발은 없겠지.”
한록의 절충안이 마음에 든 모양인지, 정부장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오늘 부서에 공지한다. 들어가 봐.”
“예, 알겠습니다.”
“야, 이한록.”
“예.”
“잘했다. 이게 맞는 것 같다.”
*
회상을 마친 한록이 담담하게 말했다.
“잘했다고 하시던데요.”
“이대리! 그게 진짜겠어?! 비아냥대는 투는 아니었어?”
“그럴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제가 프로젝트 진행하려면 과장님이 필요하다
고 한 것뿐인데요.”
“이이대애리이! 이런 발표가 있을 거면 미리 나한테 말을 하던가.”
“진짜 말씀드려야할 내용은 따로 있습니다.”
현과장을 진정시킨 후 품에 가지고 있던 녹음기를 꺼내는 한록.
“들으셔야 하는 내용이 있어요.”
한록은 녹음기에 이어폰을 끼워서 현과장에게 내밀었다.
“이게 뭔데?”
현과장은 의아해 하면서도 녹음기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이내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녹음기에 든 것은 한록과 오차장의 대화내용.
-널 보내는건 쉬워
-그리고 현주훈을 보내는 건 더 쉽지.
“오차장님이 말씀하신 겁니다.”
그 말에 완전히 경악한듯한 얼굴의 현과장.
한록이 틈을 놓치지 않고 말했다.
“오차장님께서 현과장님과 GV를 진행할거냐고 물어보셨습니다. 그리고 방금
전에도 다녀가셨구요.”
“....뭐, 뭐라시는데?”
“현과장님이 대가를 치루게 될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에 현과장은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그러다가 겨우 입을 연 현과장이 묻
는다.
“이대리. 이거 지금 나한테 말하는 이유가 뭐야?”
“과장님도 엮이신 일이니 말씀드리는 겁니다.”
“하....”
한참 머리를 싸매고 있던 현과장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이대리. 나 이거 못하겠다. 그냥 오차장님이랑 해.”
현과장의 패배선언.
이미 예상한 일이었다.
“이대리. 이대리랑 일하는거 재밌어. 진짜 좋은데. 나는...그냥 회사 조용히
다니고 싶어.”
현과장이 말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전에 본 적 없이 진지했다.
“나는 이대리처럼 못해. 그럼 절대 못 살아남을거고.”
한록과 얽힌 그의 실이 점점 가늘어진다. 두려움 때문이다.
-하지만 완전히 끊어지지는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본 한록이 신중히 말했다.
“과장님.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나간다고 해도 오차장님은 어떻게
해서든 과장님과 저한테 보복을 하려고 할 겁니다.아마 과장님이 회사를 다니
는 내내 그럴겁니다.”
딱히 이렇다할 말이 없는 현과장.
오차장이 지독한 인간이란걸, 그리고 한록의 말이 맞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
는 반응이었다.
“과장님.”
“응,”
“저는 오차장님 밑에 있을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면...”
“저는 과장님이랑 갈 생각입니다.”
한록의 말에 현과장이 입술을 깨물고 한록을 바라보았다.
마치.
‘올 것이 왔다.’
라는 듯한 얼굴.
“이대리.”
“예.”
“내가 왜 과장에서 못 올라가는지 알아?”
“오차장님이 반대가 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몇 년 전에 오차장님이랑 한번 붙은적 있어. 그리고...그때부터 승진
완전 막혔다.”
현과장이 만년과장에서 물러난 이유. 바로 오차장 때문이었다.
“이대리. 나는 솔직히 오차장님이 어디까지 끈이 있는지 모르겠다.”
현과장의 앞날 정도는 간단히 묻어버릴 수 있는 오차장.
현과장은 오차장을 한 번 겪고, 회사에서 출세하는 대신 조용히 살아남는 길
을 택한 것이다.
“집에 나만 보는 애랑 와이프가 있다. 나는 못해. 그리고...이대리도 조심해.”
현과장의 경고와 조언. 패배선언.
그걸 잠자코 듣고 있던 한록이 말했다.
“현과장님.”
“응.”
“과장님 목표는 거기까지십니까?”
“...”
“차장자리도 뺏기고, gv도 뺏기고, 오차장님이 부장이 되실 때까지 눈치보는
게...과장님이 바라시는 겁니까?”
“그만하자, 이대리.”
자신의 현재. 그리고 눈에 보이듯 뻔한 미래. 그리고 가족.
그 사이에서 현과장이 눈을 감고 말했다.
‘현명하게 굴자. 현과장. 내 주제를 알자. 나는 가족이 있다.’
몇 번 고개를 숙이고, 몇 번 좀 비굴하게 굴고, 자신의 야망을 꺾더라도.
그래도 살아남아야 한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
‘가족을 위해서.’
속으로 되뇌이는 현과장.
현과장을 지켜보던 한록이 말했다.
“gv를 맡게 되신다면, 아마 오차장님과 정식으로 다시 한번 붙게 되시겠죠.
크게 질수도 있고, 어쩌면 지금보다 더 안 좋아질수도 있습니다.”
한록이 그리는 미래. 눈을 감은 현과장의 얼굴에서 체념과 공포, 불안이 스쳐
지나간다.
“그래도 과장님.”
“그래도, gv도 같이하시고, 영화제도 같이 나가시겠죠. 앞으로 제가 할 프로
젝트도 맡으실 거고요. 오차장님한테 밀려서 못하셨던 일도 다 해보실 겁니다.”
그러나 한록은 그 사이에서 보이는, 아주 희미한...
“과장님.”
“그게....”
“기대되지 않으십니까?”
기대를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