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를 고르시겠죠(3)
“말씀드렸죠. 이제 저한테 안 통한다고요.”
한록의 말에 오차장의 이마에 핏줄이 선다.
오차장이 한록의 어깨를 잡으려는 듯 손을 들었지만, 한록의 걸음이 더 빨랐다.
혼자 남은 오차장이 한록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다가 한록의 뒤를 따랐다.
*
한록이 본부장실 앞에 도착하자, 비서가 문을 열어주었다.
비서실을 지나 본부장실에 도착한 한록은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게.”
문을 열고 들어가니, 커다란 의자에 앉아있는 최경준의 모습이 보인다.
“앉지.”
최경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앞에 놓인 쇼파에 앉는다. 한록 역시 그 앞에 앉았다.
“대리랑 면담이라. 오랜만이군.”
최경준이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일개 대리가 본부장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누군가 들으면 회사가 발칵 뒤집힐 사건이었지만 최경준은 나름대로 즐거워
보였다.
“그래. 요즘 회사는 좀 어떤가? GV 준비 때문에 고생이 많을텐데. 정부장이
잘 챙겨주나?”
“잘 지내고 있습니다.”
“나랑 농담 따먹기 할 생각은 없나보군.”
최경준이 옅게 미소를 지었다.
“본론으로 들어가지. 면담을 요청한 이유가 뭐지?”
“GV팀 개설 때문에 찾아왔습니다. 지금 지원자가 많이 부족한 상황입니다.”
“그래?”
“네. GV전담 팀이 개설되는게 아니라, 기존 업무에 GV가 추가되는데에 대한
부담이 큰 모양입니다.”
한록은 주간회의 때부터 의문을 가져왔던 부분을 물었다.
“GV를 신설 팀으로 배정해주실 수는 없는겁니까?”
사장이 직접 지시한 프로젝트이다. 그러나 이상하게 팀 신설이 아니라 기존
업무에 일이 추가되는 상황.
한록의 말에 최경준이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눈으로 한록을 바라보았다. 그
러더니 최경준이 입을 열었다.
“자네는 사업을 성공시키는 역할이지만, 나는 다른걸 생각해야하는 위치야.
많은 걸 생각해야하지.”
“어떤 생각 말씀이십니까?”
“하하. 설명을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말이야. 이렇게 궁금해하니 대답해주는
수밖에 없군.”
쇼파에 기대고 있는 등을 일으킨 최경준. 그가 허벅지에 손을 올리더니 얘기
를 시작한다.
“지금은 부산영화제 직전이네. 영화사업본부 전체가 매달린 프로젝트지. 그
직전에 부서 구성을 변경하는 건 좋지 못한 선택이야. 지금 진행중인 영화제
에 차질이라도 가면 어쩔건가.”
계속 말을 잇는 최경준.
“게다가 마케팅 부서에는 부산영화제를 위해 장기출장을 간 사람들이 많지.
회사를 위해 일하다가 GV팀에 합류할 기회를 놓친거야. 그들이 돌아왔을 때,
GV팀이 신설된 걸 보면 어떤 기분일 것 같은가?”
기존 사람들에게 업무가 추가된 것과, 아예 팀 하나가 분리된 것. 그 둘은 확
실히 다르다.
한록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다.
“회사엔 변화가 필요한 순간이 있고, 지금의 위치를 지켜야하는 순간이 있네.
자네같이 뛰어난 직원이 사업을 만들어오면 그 타이밍을 조절하는 것. 그리고
사람들을 취합해 실현시키는 것. 그게 경영진이 해야할 일이지.”
대리, 차장, 부장, 그리고 본부장.
각자의 위치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회사.
최경준은 지금 그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자네 입장에선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다고 느낄수도 있지. 이해하
네. 영화제만 끝나면 곧 팀을 신설해줄테니 양해해주게.”
합리적인 설명. 거기에 대리에게 부탁을 하는 겸손한 본부장의 모습.
누구라도 완벽히 설득이 될 모습이다.
최경준이 물었다.
“팀구성은 잘 되고 있나?”
“아직입니다.”
“그래, 문제가 있을 거라 예상은 했지. 큰 프로젝트니까.”
상황을 알고 있다는 듯 대답하는 최경준.
“어떤 문제가 있는지 얘기해보게.”
“제가 할 얘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약속하지. 오늘 있을 얘기들은 전부 비밀로 할테니 말해보게.”
한록이 신중하게 말을 줄였다. 그러자 최경준이 다시 한번 묻는다.
“나는 자네들 사이의 일을 모르니 잘못된 결정을 하기 쉬워. 이 일은 자네의
의사가 가장 중요한거니, 무엇이든 말해보게.”
“...”
“오차장인가?”
최경준의 입에서 먼저 오차장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좋아, 이 정도면 됐다.’
흐름이 잘 흘러가고 있다. 한록이 최경준에게 물었다.
“본부장님도 제가 오차장님과 함께 일하길 원하십니까?”
그 말에 최경준이 다시 한번 웃었다.
“내 입장은 중요하지 않지. 나는 정부장에게 자네가 편한 사람과 팀을 꾸리라
고 지시했네.”
“그래도 윗선의 동의가 필요한건 알고 있습니다.”
GV팀이 신설되지 않는다. 거기에, 기존에 GV를 진행하던 현과장이 맡지도 않
는다.
이건 분명히 ‘현과장이 아닌 다른 사람을 찾아보라’라는 의도가 숨어있는 지
시였다.
한록이 현과장과 함께 일을 하고 싶다고 해도 아마 최경준 선에서 반려될 것
이다.
GV팀이 신설되지 않는다. 심지어, 오차장이 GV를 담당하게 된다.
한록의 입장에서는 최악의 결과였다.
“이한록. 아직 너무 젊군. 이렇게 돌아가는 법이 없어서 어떡하나.”
가볍게 웃은 최경준이 대답했다.
“그래, 나는 오차장이 GV를 맡길 원하네. 하지만 결과는 자네 선택이지.”
“GV는 현과장님과 진행한 프로젝트입니다.”
“알고 있네. 그런데 오차장이 맡으면 더 좋은 결과가 나올거야.”
“제가 편한 사람과 일을 하라고 하셨죠. 저는 현과장님과 맞습니다.”
한록의 굽히지 않는 태도에 최경준이 신중하게 답했다.
“자네가 오차장과 그렇게 좋은 사이가 아니란 건 나도 알고 있네. 오차장이
현과장처럼 부하들에게 세심한 타입이 아니지.”
‘최경준이 오차장의 정체를 알고 있는가.’
한록이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의문.
그러나 최경준은 쉽게 답을 보여주지 않았다. 과연 최경준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자네 말이 맞아. GV는 현과장이 진행했고, 결과도 좋았어. 현과장이 GV를 맡
는게 공정하지. 그래도 나는 GV를 오차장에게 맡기고 싶네.”
“어째서 입니까?”
“오차장이 원하니까.”
“...그게 이유입니까?”
“그래. 난 오차장에게 특혜를 주고 싶거든.”
최경준의 말은 한록은 전혀 생각지 못한 답이었다.
“미안하지만, 경영진 입장에선 공정성을 따질 필요가 없네.”
최경준이 아주 솔직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회사가 어떤 방식으로 굴러가는지 아나? 아주 뛰어난 사람 2명이 평범한 사
람, 혹은 부족한 사람 8명을 이끄네. 회사 입장에선 그 두명을 지원하는게 최
대의 결과를 만들 수 있는 상황이지.”
“그리고 오차장은 내가 본 직원 중 가장 뛰어난 사람 중 한명이야. 그런 사람
에게 특혜를 주고, 그 사람은 회사에 결과로 보답하는 것. 그게 이상적인 경
영이라네.”
솔직하다 못해 냉정한 말을 하던 최경준이 한록을 바라본다. 그리고 묻는다.
“이한록. 나는 오히려 자네에게 묻고 싶네.”
“내가 왜 현과장을 신경써야 하지?”
‘뛰어난 사람에게 특혜를 준다.’
‘그 사람이 회사에 결과로 보답한다.’
그 말에 반박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최경준이 다시 온화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생각에 잠긴 한록에게 말했다.
“오늘 좀 위험한 발언을 했군. 그래도 무슨 뜻인지 이해했을거라 믿네.”
“본부장님, 그 특혜 말입니다.”
“자네 입장에선 납득하기 어려운 말이겠지. 알고있네.”
최경준의 말에 답하는 한록. 최경준은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한테도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한록은 최경준의 말에 반박할 생각이 없었다.
최경준이 놀란 눈으로 한록을 바라본다.
완벽하고 젠틀해보이는 최경준. 그러나 뼛속까지 능력지상주의인 최경준. 오
차장에게 호의를 가진 최경준.
그를 설득할 방법은 바로 이것이다.
“GV를 기획하고, 성공시킨건 접니다. 충분히 특혜를 받을만한 입장이라고 생
각합니다.”
바로 한록 자신이 오차장만큼 중요한 인물이라는 점을 상기시키는 것.
“...원하는게 뭐지? 팀장을 바라나?”
최경준이 탐색하듯 한록을 바라본다.
“아뇨. 저는 원래대로 현과장님과 일하고 싶습니다. 원래 gv에 참여한 사람이
진행하는 것. 그리고 제가 편한 사람들과 일하는 것, 이게 제 방식입니다.”
“하하...”
최경준이 어이가 없는지, 얼굴을 가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한록의 말
을 곱씹었다.
“특혜, 특혜라...”
한동안 한록의 말을 반복하던 최경준. 최경준은 순식간에 웃음을 지우고 한록
을 바라보았다.
‘내가 특혜를 줄 만한 놈인가.’
다시 말해,
‘내 라인에 들어올만한 놈인가.’
그런 눈으로 한록을 탐색하는 최경준.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최경준의 실이 한록의 발밑을 맴돌고 있었다.
*
숨 막히는 정적 속에 회의실의 전화기가 울렸다.
“아, 오차장. 기다리라고 해.”
대답과 함께 짧게 전화를 끊은 최경준.
아마 오차장이 최경준을 찾아온 모양이었다.
‘분명 오차장도 최경준을 설득하려 하겠지.’
전화기를 바라보던 최경준이 다시 한록을 바라보더니 입을 연다. 최경준의 눈
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약속대로 오늘 했던 얘기들은 내 선에서 정리하겠네. 새어나가면 좋을 얘기
들이 아니야.”
그러더니 한록에게 윙크를 하는 최경준.
“자네 역시 비밀을 지켜주기 바라네.”
본부장과 대리 사이에 생긴 비밀. 그건 그만큼 최경준이 한록에게 많은 모습
을 보여주었다는 걸 뜻했다.
최경준이 한록을 바라보다 말한다.
“이한록. 자네는 아주 매력있는 친구야.”
“...감사합니다.”
“내가 왜 자네한테 현과장에 대한 얘기를 했는지 아나?”
“절 설득하기 위해서 하신 것 같습니다.”
“아니야. 자네를 설득하려면 듣기 좋은 말을 했겠지. 자네는 좋은 사람이니까.”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는 최경준. 최경준이 문에 다가가는 것을 보고 한록
도 몸을 일으켰다.
“언젠가, 아주 먼 미래겠지. 그래도 만약에...자네가 이 위치에 온다면. 그때
도움이 되라고 한 말이라네.”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최경준. 그가 한록을 위해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자네를 보면 자꾸 기대가 생기거든.”
그리고 문이 열렸을 때. 그 앞에는 오차장이 서 있었다.
“본부장님.”
“들어오게.”
오차장이 최경준에게 인사를 하고 본부장실로 들어선다. 반대로 한록은 본부
장실에서 걸어나왔다.
아까 그랬던 것처럼 오차장과 한록의 어깨가 스쳐지나간다.
‘아마 오차장은 GV를 자신에게 달라고 말하겠지.’
지금부터 얼마간은 한록이 그랬던것처럼 오차장이 최경준을 설득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그리고 최경준은 한록을 바라본 것처럼 오차장을 탐색할 것이고 선택을 내릴
것이다.
누구에게 특혜를 줄것인가.
‘본부장님이 나와 너 중 누굴 선택할 거라고 생각하나?’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자네를 보면 기대가 생기거든.’
누구를 자신의 라인으로 만들 것인가.
“이한록, 내려가있게. 곧 결정해서 답해주지.”
그 결정이 내려지기 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
그날 저녁 8시.
<삼일의 삶>을 위해 야근을 하는 중인 한록을 정부장이 불렀다.
“무슨 일이십니까?”
“너 오늘 본부장님한테 뭐라고 했냐?”
조용한 사무실에 울려퍼지는 정부장의 목소리.
‘약속대로 오늘 했던 얘기들은 내 선에서 정리하겠네. 새어나가면 좋을 얘기
들이 아니야.’
그 말처럼,정말 최경준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은 모양이었다.
“GV팀이 신설되길 바라고, 현과장님이 팀장이 되셨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려습
니다.”
“하...진짜 할 말은 다 하고 사는구만.”
정부장이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그리고 한록에게 물었다.
“이한록. 현과장이 여기서 끝날 사람이 아니란건 나도 안다.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야.”
현과장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정부장. 그러나 본론은 그게 아니었다.
“근데, 쉬운 길이 있잖아. 왜 굳이 그걸 두고 현과장을 고르는거냐?”
정부장이 말하는 쉬운 길.
아마 자신과 오차장으로 이어지는 라인을 말하는 듯 했다.
“난 널 이해를 못하겠다. 그래, 오차장이랑 네가 좀 안 맞긴하지. 근데 그 정
도는 참을 수 있는거 아니냐? 오차장이 회사에서 입지가 어떤데. 고작 그 계
약직이랑 현과장 때문에 오차장을 버리냐?”
정부장은 회귀 전 일을 모르니 당연히 할 법한 말이다.
‘사실 부장님 말도 틀린건 아니지.’
한록이 오차장에게 충성한다면 오차장 역시 한록과 대립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차장처럼 남을 착취하는 선택.
구과장처럼 그런 오차장에게 고개를 숙인 인생.
쉬운 삶이지만...
‘난 그렇게 살 생각은 없다.’
“부장님. 부장님은 회사생활의 목표가 뭡니까.”
이번엔 한록이 정부장에게 물었다.
“말했잖아. 임원이다. 난 여기서 만족 못해.”
“저는 아닙니다.”
“그럼 뭐. 사장?”
코웃음을 치는 정부장에게 답하는 한록.
“아뇨. 부장님. 제 목표는 제대로 일하는 겁니다.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을 만
들어서, 걱정 없이 일하는 거요. 저는 임원이나 사장이 되려고 회사에 다니는
게 아닙니다.”
정부장이 그 말에 말문이 막힌듯한 표정으로 한록을 바라보았다.
“부장님은 무엇을 위해 일을 하십니까?”
다시 이어진 한록의 질문. 그리고 그 앞에 놓인 정부장.
정부장.
그도 처음엔 영화가 좋아서 ck에 입사한 사람이었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고, 좋은 결과를 만들었다. 그 결과 이제는 한 부서의
부장이 되었다.
아침 6시에 출근해서 일하고, 아들의 교통사고 당일에도 회사에 나왔다.
그래서 부장이 된 지금. 임원을 노리는 지금. 지금 한록의 질문에 답을 하자
면...
“나는...”
나는.
나는...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 회사를 다니나.
이제는 아무런 답을 할 수가 없다.
“저는 이 일이 좋습니다. 일을 할때면 즐거워요.”
정부장이 답이 없자, 대신 한록이 차분하게 답했다.
확실히 요 몇 달간 한록의 모습은 정말 즐거워보였다. 그리고 한록과 일하는
사람들도 즐거워보였다.
“그래서 앞으로도 즐겁게 일할 수 있길 바랄뿐입니다.”
한동안 한록의 말에 대답이 없던 정부장.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본부장님께서 연락주셨다. gv팀, 네가 원하는대로 꾸리라고 하신다.”
“...감사합니다. 부장님께선 괜찮으십니까?”
전적으로 한록의 편의를 봐주라는 최경준의 지시.
그 말을 들었을때는 최경준이 한록에게 왜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는지 납득할
수 없었다.
최경준, 정부장, 오차장, 이한록으로 이어지는 라인.
‘누구보다 완벽하고 강력한 라인이다. 본부장님도 알고 계실거야.’
그리고 그 라인을 거부하는 한록.
하지만 그럼에도 최경준은 한록의 편을 들었다.
그 이유는, 아마...
“그래. 네 맘대로 해봐라.”
일이 즐겁다고 말하는 한록과 한록이 꿈꾸는 회사 생활.
그리고 한록이 만들어갈 회사의 모습들.
그 모습을 보고 싶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
“부장님, 들어가보겠습니다.”
자리를 정리한 한록이 정부장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그러자 정부장이 한록에
게 말했다.
“이한록. 너랑 나는 회사를 다니는 이유가 다른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회사를 즐겁게 다니고 싶다라. 그런 말도 안 되는걸 꿈꾸기에 나는 너무 나
이가 많아.”
승진을 위해 십여년간 미친 듯이 달려온 정부장.
그는 여전히 오차장을 포섭하려 할 것이고, 다소 비정한 회사생활을 할 것이다.
“너랑 나는 길이 달라, 이한록.”
“그래도...”
“그래도, 네가 하고싶은 건 다 해봐라.”
하지만 그래도 계속 한록을 지켜볼 것이다.
정부장의 말에 한록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문을 나서기 직전 정부
장에게 말했다.
“부장님.”
“어.”
“저는 부장님과 제 길이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뭔 소리야.”
“그러니까...”
“저는 부장님과 일하는게 즐겁단 얘깁니다.”
그 말과 함께 사라진 한록.
정부장이 한록이 떠난 자리를 보며 중얼거렸다.
“나도다, 이 자식아.”
*
다음날 아침.
잔뜩 기가죽은 구과장과 남과장의 모습을 보니, 아마 오차장에게도 최경준의
선택이 전해진 듯 했다.
오차장의 완벽한 패배.
그러나 오차장은 여기서 꼬리를 내릴 사람이 아니었다.
‘또 수작을 부리겠지. 아마 영화제에 대한 일일거고.’
과거 현과장이 회사에서 나가게 되었던 사건. 구과장, 현과장, 오차장. 그리
고...정부장이 엮인 일.
그 사건이 벌어지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대비를 해야해.’
그런 생각을 하며, 한록은 현과장의 자리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현
과장이 슬쩍 손을 흔들었다.
그때 유선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대리님! <삼일의 삶> 재개봉 문의 들어왔는데 이제 공개할까요?]
영화제는 영화제고, 일단 오늘 당장 해야할 일들이 있었다. 한록이 유선에게
답장을 했다.
[아뇨, 아직이요.]
[재개봉 기획전은 슬슬 공지해야하지 않나요..?!]
[괜찮아요. 한달 전에만 올리면 돼요.]
삼일의 삶이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상황이며, 재개봉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나 한록은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선씨. 삼일의 삶 상영 일정 확인했죠?”
한록이 유선에게 다가가 물었다.
“네! 목요일 대관 변동 없고, 필름 준비 끝났습니다.”
최근 한록이 진행하고 있는 것은 삼일의 삶 기대평 이벤트.
[#삼일의 삶 못 본 사람 손! 기대평 쓰고 ck 본사에서 보고 오자!]
ck 본사에는 영화를 보기 위한 시사회실이 있다.
sns에 기대평을 쓴 사람 중 몇 명을 추첨해, 그곳에서 삼일의 삶을 짧게 상영
하는 게 이벤트의 내용이었다.
기대평 이벤트의 반응은 실로 대단했다.
“저 이렇게 반응 좋은거 처음 봤어요. sns 다 합치니까 댓글이 1000개가 넘더
라구요.”
“고르느라 힘들었겠네요. 미안해요. 다음에 내가 밥 살게요.”
“아니에요! 그래도 재밌었어요. 사람들이 삼일의 삶 좋아하니까 저도 기분 좋
더라구요.”
이제는 어디서도 볼 수 없게 된, 그러나 너무 유명한 삼일의 삶.
그걸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란 사실에 사람들은 엄청나게 이벤트에 응모했다.
그러나 그 중 삼일의 삶을 볼 수 있는건 스무명 뿐이다.
[이럴거면 그냥 재개봉을 하라고요...]
[50:1 ㅋ?ㅋㅋ?ㅋ?이게 맞아?]
[내 대입 경쟁률보다 높네]
[꼭 영화관에서 보고 싶습니다.]
[나 로또되면 삼일의 삶 판권 산다 ㅅㅂ]
[ㄴ돈 있어도 못 보는 영홥니다...]
삼일의 삶에 대한 기대치는 끝도 없이 올라가고 있었다.
“대리님, 근데...이러다가 본 사람들이 재미없다고 하면 재개봉때 타격이 크
지 않을까요?”
걱정스러운 듯 말하는 유선.
아무래도 윤감독이 많이 신경쓰이는 모양이었다.
“괜찮아요. 그럴수록 좋아요.”
그러나 한록은 여유롭게 답했다.
“그게 무슨...”
“유선씨, 현과장님이 부르시는 것 같아요.”
“아, 네!”
현과장의 부름에 유선은 후다닥 자리로 달려갔다. 그리고 한록은 sns의 반응
을 확인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목요일 저녁 8시.
<삼일의 삶>을 보기 위한 사람들이 ck의 로비에 모였고, 한록과 현과장이 그
들을 통솔했다. 고맙게도 현과장이 한록을 도와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10명씩 엘리베이터에 타주시기 바랍니다. 10층에서 내리신 뒤에는 이동하지
마시고, 엘리베이터 앞에 모여주세요.”
“저기...”
“네.”
안내를 하는 한록에게 누군가 다가와 질문을 연다. 조금 수줍은 목소리로 묻
는 여자.
“그...<지구 특공대> 마케팅 직원분 맞으시죠?”
“...맞습니다.”
“아, 저 인터넷에서 봤어요! 지구 특공대도 재밌게 봤어요.”
“감사합니다.”
질문을 한 사람만이 아니라, 로비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이 한록을 보며 웃는다.
‘...여기 있는 사람은 다 그 글을 본 거군.’
삼일의 삶을 보겠다고 남의 회사까지 날아온 사람들이다. 영화계의 이슈쯤은
섭렵하고 있는게 당연하다.
그러나 그건 그거고, 민망한 건 민망한거다. 한록이 헛기침을 하자 옆에서 현
과장이 장난스레 미소를 지었다.
“이대리, 진짜 회사 때려치우고 연예인 한번...”
“과장님. 엘리베이터 문 닫힙니다.”
“어! 잠시만요!”
한록의 말에 현과장이 후다닥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한록은 그 뒤를 따랐다.
*
ck enm의 시사회실.
그 내부는 일반 영화관과 거의 똑같았다. 사운드와 상영기도 일반 영화관과
완전히 같은 것들이다.
<삼일의 삶>이 처음 선보여지기에 딱 알맞은 장소.
한록은 사람들 틈에 섞여서 삼일의 삶을 관람했다. 아니, 사람들의 반응을 관
찰했다.
처음에는 조금 지루해하던 사람들이 10분 정도가 지나자 영화에 몰입하기 시
작한다.
20분 정도가 지나자 핸드폰을 만지거나 몸을 뒤트는 사람이 완전히 사라졌다.
어느새 영화에 나오는 바다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진 사람들.
“어우. 분위기 끝내준다.”
“쉿!”
한록에게 속삭이던 현과장에게 앞자리에 앉은 관객이 눈치를 준다.
그만큼 <삼일의 삶>에 푹 빠진 사람들.
[삼일의 삶 리뷰 이벤트 후기]
[삼일의 삶 보고 왔습니다. 제가 20명중 한명이었네요 ㅎㅎ. 씨네인들 많이
계셨죠?]
[ck enm 방문 인증샷 ><]
[삼일의 삶 보겠다고 퇴근하고 부랴부랴 달려갔네요 ㅡ.ㅡ]
그들은 영화가 끝나자 한록의 예상대로 영화 사이트에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완벽한 영화였습니다. 못보신 분들이 정말 안타깝네요.]
ㄴ영화관에서 보는게 훨씬 나은가요?
ㄴ네. 웹으로 볼때랑은 차원이 다릅니다. 좀 과장해서 웹개봉은 cg처리 덜 된
3d 영화예요.
[올해 본 영화 중 가장 좋았습니다. 정식 개봉하면 작품상은 따놓을텐데...]
ㄴ지구특공대가 있는데 작품상은 ㅋ;
ㄴ지구특공대보다 좋았습니다.
ㄴ아 이제 슬슬 뇌절하네요ㅋㅋ 지구특공대보다 낫다니
삼일의 삶을 본 사람들.
그리고 보지 못한 사람들.
그들 사이에서 뜨거운 공방이 오가기 시작한다.
[삼일의 삶 저만 재미없었나요?]
그리고 드디어, 한록이 바라던 글이 올라왔다.
[오늘 ck 간 건 아니고 웹개봉때 봤습니다. 솔직히 그냥 다큐 영화던데 이렇
게 반응이 좋은게 이상하네요. 보고오신 분들이 너무 과장하시는 것 같습니다.]
삼일의 삶을 보기 위해 ck enm까지 다녀온 사람들.
삼일의 삶에 크게 만족한 사람들.
삼일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
아예 삼일의 삶을 보지 못한 사람들.
그들이 모인 상황에서 던져진 분란의 씨앗.
아니나 다를까, 게시글은 불타기 시작했다.
[웹개봉으로 보시니까 그러죠. 극장에서 보면 이해하실 겁니다.]
[ㄴ아니 웹개봉 관객은 관객도 아닌가요?]
[전 웹개봉도 좋았어요. 반응 이해 되는데요.]
[솔직히 과장된 거 맞는 것 같음. 씨네인들 다 응모했을텐데 본인들만 보고
와서 잘난척하는거 꼴보기 싫음.]
[ㄴ용자 등장.]
[ㄴ잘 가세요, 용자여.]
[ㄴ운영자: 타인을 향한 비방으로 3일간 이용 정지 알려드립니다.]
[저도 웹개봉은 그냥 그랬는데 극장에서 보니까 진짜 좋더라구요.]
[걍 보고 말하셈 보면 알아요]
[ㄴ아니 볼 수가 없는데 어케 알아요]
게시글은 싸움판이 됐고, 삼일의 삶은 사이트의 모든 이슈를 잡아먹었다.
‘지금이다.’
그리고 한록은 오래 기다려왔던 때가 도달했음을 직감했다.
모두가 퇴근한 사무실. 혼자 남은 한록이 ck 홈페이지에 공지 사항을 올린다.
[필름하우스 걸작선 재개봉.]
[<동화 속 미로> <삼일의 삶> <강을 건넌 님>]
그리고 10분 뒤.
[상황 종결. <삼일의 삶> 재개봉 한답니다.]
[다들 보고 와서 싸웁시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작가의말
부장님이랑 본부장님 꼬신 썰 푼다.txt
연참 대신 만자를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