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28화 (28/263)

저를 고르시겠죠(1)

부서 사람들이 한록을 바라보며 나간다.

gv는 한록의 프로젝트다.

정부장이 한록과 긴밀하게 할 말이 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것.

한록이 gv팀을 정할 권한을 가졌다는 의사표시나 마찬가지였다.

-툭.

자리를 나서며 괜히 한록의 어깨를 한 번 두드리고 가는 사람들. 그리고 한록

에게 눈으로 인사를 하고, 미소를 짓는 사람들.

gv팀에 들기 위해 어떻게든 눈도장을 찍으려는 모습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나가자, 한록이 정부장에게 다가갔다.

“부르셨습니까.”

“누굴 원해?”

한록의 질문에 정부장이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한다.

“gv팀에 배정받고 싶단 사람 꽤 많을 거야. 지원 안한 사람도 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원하는 사람 말해.”

한록이 원하면 누구든 붙여주겠다는 제안.

그러나 한록의 선택은 언제나 같았다.

“현과장님과 유선씨입니다.”

“이한록. 잘 생각해 봐.”

정부장이 냉정한 말을 한다.

“어차피 이건 너랑 팀할 사람 고르는 거야. 그걸 다들 알고 있을 거고. 그러

니까 널 좀 편하게 대해준다고 현과장을 고를 필요는 없어. 이 팀에 들어온

이상 어차피 너한테 잘 보여야 할 사람들이니까.”

인간관계에 어려움을 겪는 한록이 자신과 그나마 친한 현과장을 골랐다고 생

각하는 정부장.

그러나 한록은 단호하게 말했다.

“현과장님이 편해서 현과장님을 고른 게 아닙니다. 손발이 잘 맞기 때문에 고

른겁니다.”

“그게 그거지. 결국 너랑 잘 맞는 사람을 데려가고 싶단 거 아냐.”

“그게 문제가 됩니까?”

“내가 생각한 구성이 있어. 오차장을 넣어. 그 외는 김유선이든, 누구든, 네

가 원하는 사람으로 맞춰줄 테니까.”

오차장.

‘...정부장과 오차장은 사이가 나쁘지 않다.’

오차장도 실적이라면 따라올 자가 없는 사람 중 한명이다.

거기에 오차장이 회사에 가지고 있는 수많은 인맥.

지방에서 올라와 이렇다할 끈이 없는 정부장에겐 그게 필요한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정부장은 아직 오차장과 한록의 사이가 어디까지 틀어졌는지 모른다.

“오차장이랑 현과장만큼 친하지 않다는 건 알아. 그래도 능력있는 사람이야.

잘 생각해, 이한록. 사회생활이란 게 네가 좋아하는 사람하고만 지낼 수는 없

는 거야. 이제 좀 알잖아? 예전의 이한록이 아니니까.”

오차장에 대한 얘기를 하는 정부장.

하지만 진짜 하려는 얘기는 바로 이것이었다.

“이한록. 줄을 잘 서. 현과장은 미래가 없어.”

만년과장. 거기에 최근 이렇다할 성과를 보여주지 못하는 현과장.

그런 현과장에게 주기엔 gv가 아까운 것이다.

‘오차장이 윤감독에게 접근한걸 말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지금은 너무 이르다. 정부장이 나름대로 오차장을 신뢰하는

상황에서는 말이 제대로 통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바로 며칠 전 사장의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성공적으로 끝낸 한록.

한록에 대한 정부장의 신뢰는 그 어느때보다 높았다.

그렇다면 지금은 좀 강하게 나갈 때다.

“제 프레젠테이션 보셨죠.”

“그래. 같이 있었잖아.”

“그 자료조사를 누가 해줬다고 생각하십니까?”

한록의 대본을 빼곡이 채워준 자료들. 모두 현과장, 유선, 영도가 밤을 새서

만들어준 자료들이었다.

‘이대리! 음악사업본부에서 투자 줄인다는데?’

문오석을 당황시켰던 그 뉴스를 전해준 것도 바로 현과장이다. 현과장은 딸을

유치원에 등교시키면서도 뉴스를 찾아서 한록에게 보내주었다.

사실, 현과장이 없었어도 프레젠테이션은 성공했을 것이다. 한록이 모든 걸

해결했을테니.

‘하지만 자료조사에서 대본까지 모든걸 나 혼자 했겠지.’

그리고 그런 원맨팀은 언젠가 무너지기 마련이다. 관계나, 분위기의 문제가

아니다. 현실적으로 한록의 체력이 버텨주질 못한다.

“현과장이 이번에 노력한건 알아. 현과장도 예전 생각이 났나보지.”

결국 어쩔 수 없단 표정으로 정부장이 현과장의 노력을 인정한다.

다소 공격적인 한록의 말투에도 큰 불만이 없어보이는 얼굴.

다행히 강하게 나가는 전략은 잘 먹힌 것 같았다.

‘그럼 조금 더 해보자.’

한록이 조금 더 정부장의 선을 넘는다.

“부장님. 오차장님이 현과장님처럼 저를 도와주실 수 있을 것 같습니까?”

“...”

답이 없는 정부장. 정부장이 생각하기에도 현과장과 오차장의 역할을 다르다.

현과장은 부하의 불편을 돕는 상사다. 반면 오차장은 부하를 이끄는, 아니 착

취하는 상사였다.

“어차피 저랑 일할 사람을 고르는 거라고 말씀하셨죠.”

그리고 한록에게 필요한 것은...

“그럼 저한테 필요한 사람을 넣어주십시오.”

상사. 그리고 자신을 지켜봐 줄 사람.

“하...”

정부장이 한숨을 쉬더니 한록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솔직한 말투로 얘기를 꺼

냈다.

“이한록. 내가 생각해둔게 있다.”

회의실 창문으로 다가가는 정부장.

강남역에서 가장 높은 건물. 그 곳의 15층. 그 위에서 정부장은 땅을 내려다

보았다.

저마다의 업무를 지닌 회사원들이 마치 레고처럼 조그맣게 강남역을 지나다닌다.

한참이나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정부장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임원 회의실 봤지? 여기랑은 비교가 안 된다. 여기보다 두배는 높은 곳이지.”

“네.”

그러더니 한록을 바라보는 정부장. 그가 마치 ‘오늘은 날씨가 좋다’라고 말하

듯, 당연하다는 목소리로 선언했다.

“나는 임원이 될 거다.”

정부장의 선언에 한록은 목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부장.

사원들에겐 하늘같이 높은 자리로 보이지만, 동시에 회사를 나가느냐, 임원이

되느냐의 길목에 서있는 위치다.

‘내년엔 임원이 될 수 있을까.’

‘그게 아니라면 명예퇴직인걸까.’

매년, 아니 매일 그런 압박에 시달리는 부장들.

그러나 정부장의 목소리에는 두려움이라곤 찾아 볼 수 없었다.

‘나는 임원이 될 거다.’

마치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말한다는 듯한 태도.

그 말을 하는 정부장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본부장실 쪽이었다.

“나는 이 정도에서 만족 못해. 내 자리는 지금 여기가 아니다.”

자신에 대한 믿음과 강렬한 목표. 그걸 거리낌없이 드러내는 태도.

‘정부장이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이 자리까지 왔는지...이제야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정부장이란 사람의 본모습을 보게 된 기분이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그 모습이...

‘나쁘지 않다.’

아니, 오히려 꽤나 매력적이었다.

당당한 야망. 그걸 뒷받침 하는 실력.

그 둘을 모두 가진 사람이 얼마나 매력적으로 보이는지, 한록은 처음 깨달았다.

“나 혼자 잘해서는 부장이 끝이다. 아니, 부장도 어렵지. 이것도 본부장님이

불러주셔서 올라온 거니까.”

본부장실을 향하던 불타는 시선. 그걸 거둔 정부장이 다시 얘기를 시작했다.

“‘라인’을 생각중이다. 본부장님. 나. 그리고...”

사람을 끌어들이는 리더 정부장. 그런 정부장이 그려나가고 있을 계획.

“너.”

그 속에 포함된 한록.

“문제는 네가 너무 어려. 중간 다리가 하나 필요하다. 내가 임원으로 올라가

면 부서를 맡을만한 사람 말이야. 현과장이 이 자리에 낄 수 있을거라고 생각

하냐?”

최경준, 정부장, 오차장.

정부장의 라인은 영화사업본부의 실세들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 라인에 현과장이 낄 수 없다는 것은 한록 역시 안다.

‘하지만 상관없다.’

한록은 단호하게 말했다.

“제 라인은 제가 만듭니다.”

남의 라인에 끼어 올라갈 생각은 없으니까.

*

‘제 라인은 제가 만듭니다.’

한록의 당당한 말에 정부장이 실소를 흘린다.

“너 대리야. 니가 라인을 만든다고?”

“목숨줄은 여럿인 게 낫죠. 부장님이 자꾸 최대리를 끼우려고 하시는 이유도

같은 이유 때문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정부장의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정부장은 한록의 말에 정곡을 찔린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최대리. 이미 차기 임원으로 점찍어진 동시에, 마케팅부의 스타인 인물이다.

그런 최대리를 자꾸 한록의 프로젝트에 넣으려는 정부장.

‘회사에 라인이 하나만 있다고 생각하는거. 상사가 내 뒤를 봐줄거라 생각하

는거. 그게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일이다.’

이미 오차장을 겪은 한록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정부장이 오로지 한록만 바라보고 라인을 만든다는 그 말. 한록은 그 말을 믿

지 않았다.

“...일단 나가봐.”

정부장은 별다른 반박이 없었다.

‘사실이니까.’

한록 역시 정부장의 뜻을 이해한 상황.

한록은 정부장에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향했다.

*

한록이 나간 후 회의실.

정부장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한록. 꽤 괜찮은 놈이라고 생각했다. 최대리만 믿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

니, 이한록도 키워두면 쓸모가 있을거라 생각했어. 다만 정치 감각이 부족하

니 시간이 걸릴 거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지금 한록은 정부장의 속내를 모두 꿰뚫어보고 있었다.

‘정치 감각이 부족한게 아니라, 시도를 하지 않았을 뿐인건가.’

어쩌면 자신이 한록을 잘못 파악했다는 생각마저 드는 지금.

-더 높이 봐라. 그리고 멀리 봐.

자신이 한록에게 했던 그 말을 한록이 벌써 실천하고 있단 생각이 든다.

‘제 라인은 제가 만듭니다.’

그리고 한록이 했던 말...

‘대체 어디까지 보고 있는거냐, 이한록?’

정부장이 만든 라인의 후보. 최경준. 오차장. 최대리. 이한록.

그리고 한록이 만들 ‘라인’의 후보들.

한록이 만들 ‘라인’은 누구일까. 그리고 과연 어디까지일까.

‘그 속에 나는 있을까?’

이제는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

“이대리. 카페 가는 김에 사왔어. 이거 먹어.”

회의실에서 나온 한록이 자리에 도착하자 4팀의 하대리가 커피를 내민다.

얼떨결에 받아든 한록은 이어진 말에 상황을 파악했다.

“gv 잘 된 거 축하해. 나도 gv에 원래 관심이 있었어서...”

‘gv팀에 오고 싶은 거군.’

그런 하대리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빛. ‘벌써 시작이냐’거나, ‘나도 커피 사

올걸.’ 같은 마음이 담겨있는 눈빛이다.

“네, 감사합니다.”

짧게 대답하고 바로 자리에 앉는 한록.

그 모습에 하대리가 머쓱해하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다. 사람들 사이에서 피

식 실소가 흐른다.

‘귀찮아지겠군.’

아마 gv팀이 발표날때까지는 이런 일에 시달려야 할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한록이 자리에 앉자마자 메시지가 여럿 도착한다.

[대리님. 오늘 점심 누구랑 드세요?]

[이대리~잠깐 커피 한 잔?]

한록은 사람들의 메시지를 깔끔하게 무시한 채 유선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

런것에 정신을 팔릴 시간이 없다.

[유선씨. 삼일의 삶 반응 어때요?]

해야할 일이 있으니까.

[대리님 예상대로예요. 반응은 크지 않은 편이고, 대신 수준 높은 리뷰가 많

이 달렸습니다!]

메시지와 함께 리뷰가 담긴 링크를 보내주는 유선.

확인해보니 한록이 홍보를 돌렸던 사람 말고도 몇몇 유명 리뷰어들이 리뷰를

써주었다.

-보기드문 수작이네요. 다만 극장에서 영상미를 즐길 수 없다는 부분이 아쉽

습니다.

-이런 영화가 웹개봉에서 끝나고, 내용없는 시리즈물은 영화관에 걸리는 작금

의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영화관에서 볼 수 있으면 좋겠네요.

리뷰 역시 한록이 원한대로의 반응이다.

‘좋아.’

한록은 리뷰 밑의 댓글을 확인했다.

[저는 보다 졸았습니다.]

[ㄴ주인장: 핸드폰으로 보셨나요? 최소 빔프로젝터로 보시길 추천합니다.]

[이거 검색해도 안 나오는데 내렸나요?]

[ㄴ웹개봉이 끝난 것 같네요. 저도 찾아보니 없습니다.]

[ㄴ헐...]

[홈페이지 보니 웹개봉 기간 끝났다고 나오네요ㅠㅠ 간만에 좋은 평가인데 놓

쳐서 아쉽습니다]

[아까비]

[어떤 개념없는 놈이 영화를 일주일 개봉하고 내리냐 보지도 못했네 ㅡㅡ]

[ㄴ주인장: 제 블로그에선 매너를 지켜주세요 ㅎㅎ]

‘삼일의 삶’ 웹개봉이 끝난걸 아쉬워하는 댓글들.

‘어떤 개념없는 놈이 되긴 했지만, 계획은 성공했다.’

웹개봉은 최대한 짧게. 좋은 리뷰 몇 개와 궁금증만 남기고 영화를 내려버리기.

한록의 전략은 잘 통하고 있었다.

한록은 ckv 홈페이지에서 삼일의 삶 탭에 접속했다.

[정말 개봉 끝인가요? vod구매도 불가능한가요?]

[극장개봉 예정은 없는지 궁금합니다.]

‘삼일의 삶’에 대해 묻는 사람들의 질문.

정작 삼일의 삶이 웹개봉했을 땐 글이 하나도 없었는데, 삼일의 삶을 볼 수

없게 되니 관심이 폭주하고 있었다.

‘다음은 익스트림 씨네.’

이번엔 영화사이트에 접속한 한록.

아니나 다를까 삼일의 삶에 대한 내용이 게시판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혹시 삼일의 삶 보신 분?]

[<#삼일의 삶>: 괜찮은 영화인데 벌써 내려버렸네요. 저는 개봉 첫날 봤습니

다 ㅎㅎ]

[빨간 도깨비님 블로그에 올라온 영화 재밌어 보이네요. #삼일의 삶.]

[아마 여기 보신 분 없으실거 같은데...간만에 명작입니다.]

[이 영화 보신 분 ㅠㅠ 대략적인 내용이라도 설명 가능할까요?]

[그렇게 명작인가요?]

삼일의 삶을 본 사람은 몇 되지도 않을텐데, 익스트림 씨네에선 하루종일 삼

일의 삶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사람 심리란 게 원래 그렇지.’

명품 가방, 명품 시계, 강남아파트...

사람들은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이기에 오히려 더 욕망한다.

회귀 전 삼일의 삶이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것 역시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바로 ‘이제는 볼 수 없는 영화’기 때문에.

한록은 그걸 마케팅에 적용한 것이다.

삼일의 삶의 웹개봉을 중단해버린 것은 사람들에게 삼일의 삶이 ‘이제는 볼

수 없는 명작 영화’라는 인식을 남기게 했다.

[대리님. 삼일의 삶 씨네하우스에서 재개봉한다고 공지 올릴까요?]

[아니요. 조금 더 반응이 올라온 뒤에 올리도록 합시다.]

[넵!]

유선에게 메시지를 보낸 후, 다시 사이트의 반응을 살피기 시작한 한록.

[ckv에 문의 넣고 왔습니다. 웹개봉 연장은 없다고 하네요.]

[혹시 녹화라도 해두신 분 없나요?]

[놓치신 분들 많아서 안타깝네요..저는 봤습니다.]

[자랑 하시나요 ㅎㅎ....]

[미리미리 보셨어야죠~]

‘이제는 없는 영화’에 대한 사람들의 뜨거운 갈망. 그리고 거기에 불을 붙이

는 영화 팬들의 지적 허영심.

[얼마나 대단한 영환지 꼭 한번 봐야겠네요]

‘이제 시작이다.’

지금부터 진짜 ‘삼일의 삶’ 마케팅이 시작된다.

*

영화 사이트를 둘러보던 한록은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이정도 반응이면 관객이 백만은 나오겠군.’

백만. 적어보이는 숫자지만, 삼일의 삶의 *손익분기점은 10만이다.

삼일의 삶이 끝나면 윤감독의 빚을 해결하는 건 물론 꽤 괜찮은 수익까지 안

겨줄 수 있음이 분명했다.

*손익분기점: 제작비용, 마케팅 비용 등 영화제작 과정에서 투입된 금액을 넘

어 흑자로 전환되는 관객수.

‘물론...예전에 삼일의 삶이 세계적으로 알려진 것에 비해선 택도 없이 적은

수치지만.’

하지만 당장 윤감독의 생계가 어려운 상황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어

줄테니 몇 년만 참아라.’라고 말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그렇게 되면 윤감독은 이전 생처럼 영화를 그만둘게 분명했다.

‘삼일의 삶은 언젠가 빛을 볼거야. 지금은 윤감독님이 영화를 포기하지 않는

것에 만족해야지.’

모두가 놀랄만한 성과. 그러나 정작 본인이 만족을 못하는 상황.

아쉽지만 한록은 그렇게 마음을 달랬다.

“이한록.”

그때 누군가 한록의 이름을 불렀다. 오차장이었다.

“네, 차장님.”

“따라와.”

그 말과 함께 오차장은 먼저 회의실로 향했다.

*

한록은 오차장의 뒤를 따라 회의실에 들어왔다.

한록은 오차장의 팀이지만, 현재 오차장은 영화제 tf팀의 준비 때문에 바쁜

상황.

오차장이 한록을 개별적으로 호출한 것은 오랜만이었다.

‘아침에 정부장님이 gv팀 구성을 발표하셨지. 그리고 지금 호출이라...’

오차장의 용건이 대충 짐작이 간다.

의자에 앉은 오차장이 한록에게는 앉으란 말도 없이 얘기를 시작했다.

“GV 팀은 구성했나.”

역시나.

“GV팀은 제가 정하는 게 아닙니다.”

“헛소리 그만해. 부장님이 네게 전권을 넘기셨잖아.”

한록의 말을 단칼에 자르는 오차장. 다 아는 사이에 쓸데없는 얘기는 하지 말

자는 뜻이다. 한록 역시 가식을 접어둔 채 말했다.

“네, 제가 원하는 팀으로 구성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거기서 끝내지 않고, 한번 더.

“그러니 차장님이 신경쓰실 문제가 아닙니다.”

한록의 도발에 오차장이 한록을 바라본다.

“왜 이렇게 기고만장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구과장에게 그랬던것처럼 한록을 압박하지는 않는 오차장.

한록이 이제 쉽게 제압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란 것을 파악한 것이다.

대신 오차장은 한록에게 종이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제안.”

오차장이 내민 것은-

“...지방근무 신청서입니까?”

“그래.”

지방근무 신청서.

“구과장님도 동의하신겁니까?”

그것도 구과장의 것이었다.

“구과장의 동의라. 그래. 구과장도 동의했지.”

‘동의’란 말에 피식 미소를 짓는 오차장.

반응을 보니, 상황은 뻔했다. 구과장의 의견은 아무 쓸모가 없다. 오차장이

아마 구과장에게 협박을 했을 것이다.

“gv팀은 신설할 필요 없어. 그대로 우리 팀으로 이관하도록 해. 그대신, 구과

장을 수원으로 보내주지.”

오차장의 달콤한 ‘제안’. 그건 gv를 자신과 진행하는 대신, 구과장을 제거해

주겠다는 약속이었다.

“gv팀이 신설되면 구과장님과 마주칠 일도 없습니다.”

“모든게 네 바람대로 되지는 않아.”

한록의 말을 자르는 오차장.

“사장님이 영화제와 gv를 최우선으로 다루라고 말씀하셨지. 그리고 마케팅부

서에서 영화제에 대해 제대로 아는 건 나뿐이야. 오늘 본부장님께 말씀드릴

예정이다.”

오차장은 영화제 tf팀의 팀장을 맡은 상황. 거기에 영화사업본부에서 따라올

자가 없는 실적을 가지고 있다.

아무래도 ‘윗선’에서는 gv팀의 팀장으로 오차장을 염두에 두고 있는 모양이었

다. 한록 역시 그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록은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럼 저도 본부장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gv를 진행하는 건 저니까, 쓸데 없

는 사람 붙이지 말라고요.”

아예 대놓고 오차장을 들이받는 말이다. 그 말에 오차장은 화를 내는 대신 한

록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한록. 내가 어떻게 이 회사에 오게 된 지 아나?”

오차장은 원래 외국계 영화사에서 근무했으나, 7년전 ck enm으로 이직했다.

그 이유는...

“본부장님이 나를 데려오셨지.”

정부장이 그랬던 것처럼 최경준의 호출 때문이었다.

“본부장님과 사장님이 지켜보신다고 하니 네가 뭐라도 된 줄 알고 있군. 그런

사람이 너 하나뿐인줄 아나?”

빛나는 실적. 오로지 자신만 생각하는 무자비함. 그리고 본부장의 총애.

과거 오차장이 부장이 될 수 있었던 이유이자, 지금 영화제 tf팀의 팀장인 이

유였다.

“7년. 내가 본부장님과 함께한 시간이다. 너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을 거

쳐왔지. 네가 들으면 진저리를 칠만한 일도 있었어.”

무거운 공기와 함께 오차장의 등으로부터 가시가 돋힌 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 실이 다시 한번 한록의 팔과 목을 휘감았다.

“본부장님이 너와 나 중 누구를 선택하실 것 같나?”

한록이 대답이 없자, 오차장이 손에 들고 있던 볼펜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데굴데굴 굴러 한록의 앞까지 굴러온 볼펜.

오차장이 한록을 바라보고 말했다.

“이한록.”

“주워.”

명백한 기선제압이다. 숨막히는 공기와 싸늘한 눈빛. 목을 조르는 오차장의 실.

그 속에서 한록은...

“저를 고르시겠죠.”

오차장의 볼펜을 발로 밟았다.

작가의말

부장 차장이랑 밀당한 썰 푼다.txt

상사의 너 밀어준다는 말만큼 못 믿을 소리가 없죠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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