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26화 (26/263)

이게 본부장의 '라인'이란 거구나(2)

“프레젠테이션 시작하겠습니다.”

정부장. 최경준. 각 본부의 본부장들과 임원. 그리고 그들 가운데의 하정엽.

모두가 싸늘한 눈으로 한록을 바라본다.

그들 뒤에서 천천히 올라오는 실, 아니 선들.

오차장처럼 가시가 돋힌 선. 혹은 채찍처럼 두꺼운 선들. 그 선이 한록의 코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여기서 밀리면 프레젠테이션은 실패다.’

수년간의 경험으로 한록은 알고 있었다. 여기 모인 모두는 어떻게든 한록의

발표를 비판하기 위한 사람들.

이 기선제압에서 밀리는 순간 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프레젠테이션은 실패할

것이다.

‘시작이다.’

“나눠드린 자료에서 1페이지 봐주시기 바랍니다. ck enm의 역사와, 현재 영화

계에서의 입지에 대해 작성한 부분입니다.”

발표를 시작한 한록은 숨을 한번 내쉬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모든

선들이 한록을 향해 달려들었다.

“다 아는 얘기를-”

그 중 대표로 문오석의 선이 한록의 목을 조르려는 순간-

“이부분, 생략하겠습니다.”

한록이 모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

수십번쯤 프레젠테이션을 해본 사람이라면 안다.

‘프레젠테이션은 스피치가 아니라 연기다.’

최고의 대본과, 최고의 배경 아래서 최고의 연출로 연기를 선보여야 하는 것.

그게 프레젠테이션의 진짜 모습이다.

“서론 생략하고 바로 본론 말씀드리겠습니다. gv는 ck enm이 한국 영화를 장

악할 수 있게 만들 수단입니다.”

한록이 서론을 시작했다면 ‘쓸데 없는 부분 치워라’라고 제압하려던 임원들.

한록이 서론을 준비해오지 않았다면 ‘시장 조사가 없다’라고 비판하려던 임원들.

그들 모두가 한록의 극적인 연출에 입을 다문다.

“현재 ck enm은 한국 영화계의 선두 기업입니다. 그러나 실제 브랜드 이미지

는 ‘설탕 공장 영화’라는 오명을 쓰고 있습니다. 작품성보다는 대중성과 흥행

에 집중한 신파 영화를 만드는 곳. 제작비만 많이 들인 대규모 영화를 질리도

록 영화관에 걸어대는 곳이란 비판입니다.”

“ck enm이 이미 업계의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매출 증대

나, 인지도 확장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건 오히려 기존의 ‘설탕공장 영화’

‘물량공세’라는 이미지를 악화시킬 뿐입니다.”

“지금 ck enm에게 필요한 것은 ‘작품성 있는 영화를 만드는 기업’이란 이미지

입니다.”

“이게 바로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고품격 gv’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단 세 번의 말로 gv가 필요한 이유를 끝내버린 한록.

한록의 단호함에 홈쇼핑 본부장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여버리고 만다.

“사람들에게 ‘영화의 작품성’하면 생각나는 단어를 묻고 답변을 조사한 빅데

이터입니다. 가장 많이 나온 연관단어는 다음 세가지입니다. ‘스토리’ ‘주제

의식’ 그리고 ‘감독’입니다.”

ppt 화면에는 ‘스토리’ ‘주제의식’ ‘감독’이라는 커다란 글자가 가운데에 쓰

여있는 그림이 그려져있었다. 단어구름 기법. 가장 중요한 정보를 커다란 글

자로 나타내는 기법이다.

시각은 우리 몸이 정보를 습득하는 감각중 가장 기초적인 감각.

시각적인 효과에 압도당한 사람들 앞에서 한록이 ppt를 넘긴다.

“그리고 시대가 원하는 것이 바로 ‘감독의 gv’입니다.”

모든 글자가 사라지고, 화면에 남은 두글자. ‘감독’.

한록은 천천히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끄덕이는 누군가.

-꼼짝도 하지 않는 누군가.

-한록을 노려보고 있는 누군가.

그들의 공통점.

하나같이 의자에서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있다.

모두 한록의 프레젠테이션에 엄청나게 집중했다는 뜻이었다.

“다음으로 예산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산은 기존 gv의 예산과 동일합니다.

연예인을 섭외하거나, 장소를 대관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기존 gv와 동

일한 출연료와 대관처로 gv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잠깐. 연예인을 섭외하지 않으면 초기 홍보는 어떻게 할거지? 초반에는 무조

건 인지도가 필요할텐데.”

이때 기획실장이 질문을 던졌다.

“초창기 gv는 웬만한 연예인보다 파급 효과가 큰 감독들로 구성할 예정입니

다. 설문조사 결과, 박천혁 감독의 gv에 참여하고 싶다는 인원이 최소 3천명

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중 10%가 참여한다고 가정했을 경우 예전 오규현 배우

가 참석한 gv보다 3배 많은 인원수입니다.”

준비했다는 듯 ppt를 넘겨 자료를 보여주는 한록. 기획실장이 입술을 깨물더

니 마이크를 내려놓았다.

그러나 한번 질문이 들어오자 숨 쉴틈 없이 임원들이 마이크를 잡기 시작한다.

“그럼 아예 감독 외엔 아무도 없이 gv를 진행하겠다는 건가?”

공연사업본부 본부장의 질문.

“아뇨, 저희 ck enm 내부직원이 사회를 볼 예정입니다. 기존 연예인의 역할을

임플로이언서가 대체합니다.”

“브랜드 로열티를 부여하겠다는 거군. 그러면 ‘오직 감독이 진행하는’ 프로그

램의 취지에 어긋날텐데?”

홈쇼핑 본부장의 질문.

“그래서 사회자의 역할은 사회자인 동시에 관객이 될 예정입니다. gv의 또다

른 게스트가 아니라 관객이 이입할 수 있는 사회자. 그게 사회자의 목적입니다.”

“그걸 누가하지?”

최경준의 질문.

“당분간은 제가 진행할 예정입니다.”

“당신이 진행한다고? 고작 대리가?”

컨텐츠 본부장의 질문.

“익스트림 씨네에 올라온 제 사진입니다. 조회수 2천입니다.”

ppt를 넘기는 한록.

“제 인터뷰의 인스타그램 좋아요 수입니다. 평균 좋아요 수의 10배입니다.”

그 다음 장.

“설문조사 결과 제 인터뷰가 보고싶다는 사람들의 수입니다. 전체 응답의 80%

입니다.”

그 다음 장.

“제가 임의로 개설한 인스타그램, 블로그, 유튜브, 페이스북 계정입니다. 하

루만에 모든 계정이 구독자수 500을 달성하였습니다. 저는 현재 ck enm에서

대중 인지도가 가장 높은 사람입니다.”

자료로 모든 것을 증명하는 한록. 그 모습에 임원들 사이의 분위기는 약간 바

뀌어 있었다.

그들이 느끼는 것은...

‘모든 질문에 답을 준비해왔다.’

한록의 완벽한 대본에 대한 감탄이었다.

경영실장, 홈쇼핑 본부장, 공연사업 본부장, 그리고 그 외의 임원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준비가 완벽하다. 이 녀석은 어떤 부분에서도 흠이 잡히지 않을 거다.’

그리고 그 때 내내 말이 없던 문오석이 마이크를 잡았다.

최경준이 섬뜩할 정도의 무표정으로 문오석을 바라본다.

“대단한 발표입니다. 얼마나 많이 준비를 해왔고, 훌륭한 프로젝트인지 알겠

습니다.”

그 말에 몇몇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문오석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다만 제가 궁금한 것은 발표자에 대한 의문입니다. 발표자는 사회자의 비중

이 크지 않을거라 말했고 저 역시 비슷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럼

에도 사회자는 ck enm의 이름을 걸고 활동한다는 사실이죠.”

그러더니 나눠준 자료의 맨 앞을 들춰 한록의 이름을 확인한 문오석.

대리가 스스로 회사의 이미지를 대표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말하는 상황. 그리

고, 자신의 옆자리에는 사장이 앉아있다.

‘배경’ 속에서 문오석의 연출이 시작된다.

“이한록 대리.”

“당신이 ck enm을 대표할 사람이란걸 우리가 어떻게 믿습니까?”

그 말에 하정엽이 한록을 바라본다. 그리고 한록은...

미소를 지었다.

*

사장 앞에 선 직원.

임원들 앞에서 신사업을 설득시켜야 하는 프로젝트 책임자.

그 심정이 어떻냐고 묻는다면.

‘처음엔 내가 이 자리에 서있을 수 있나 잠도 자지 못했다.’

회귀 전, 과장을 막 달았을 때의 마음이었다. 3일 정도 잠을 자지 못하고 프

레젠테이션 연습을 했었다.

‘그 다음엔 아무리 임원이라도 내 프로젝트에 대해선 다들 나보다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과장 2년차가 됐을 땐 지나친 자신감이 생기기도 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

서 질문을 던지는 임원들이 우습기도 했다.

‘차장이 됐을 땐 임원들을 설득하는 방법을 알게 됐지.’

회귀 직전에는 적당한 자신감과 겸손, 그리고 연출에 대해 알게되었다.

그리고 지금.

사장 앞에서 ‘네가 회사를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어떻게 믿냐?’는 질

문에 도달한 지금의 심정이 어떻냐고 묻는다면...

‘기대된다.’

내가 준비한 모든 것을 보여줄 수 있어 기쁠 뿐이다.

*

사람들은 흔히 마케팅이 빛나는 아이디어와 천재적인 발상으로 시작된다고 생

각한다.

하지만 한록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언제나 데이터. 그리고 시장조사. 그

리고 인간에 대한 관심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모든 것을 보여줄 때였다.

“답변 드리겠습니다, 문오석 본부장님.”

한록의 말에 오석이 마이크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한록을 지켜보았다.

한록이 포인터를 아예 내려놓고, ppt를 등졌다. 한록은 회의장 한 가운데로

나와서 말을 시작했다.

“ck enm 음악사업본부의 매출액은 현재 업계 2위입니다. 몇 년 전까지는 업계

4위의 수준이었으나, 5년 전 ‘뮤직 ck’ 프로젝트를 시작하며 매출이 두배로

성장하고 2위의 위치가 되었습니다.”

“뮤직 ck프로젝트를 통해 ck는 알앤비, 재즈, 힙합 등 다양한 제작사와 소속

사를 인수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업계에 두각을 드러낼 수 있었습니

다. 그러나 작년부터 뮤직 ck와 관련된 매출이 감소되기 시작하였죠.”

음악사업본부의 치부가 나오자 얼굴을 찌푸리는 문오석.

한록은 문오석이 마이크를 들기 전 먼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어제 문오석 본부장님이 제작사와 소속사 인수를 중단하시겠다고 발

표하셨습니다.”

그 말에 마이크를 들려던 문오석이 눈을 크게 뜬다.

ck enm이 투자를 줄이기로 한 것은 바로 어제 발표난 상황.

한록은 그 발표시기와 내용까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리고 공연사업 본부.”

한록은 이제 공연사업 본부장을 바라보았다.

“최근 락 페스티벌의 *라인업 변경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거의 모든 *

헤드라이너가 일본을 거쳐 겸사겸사 한국에 오는 상황이죠. 이 상황에서 일본

의 락페스티벌을 이기는 게 현재 공연사업본부가 가진 숙제입니다.”

*라인업-출연진

*헤드라이너-해당 콘서트의 대표 출연진

공연사업 본부장이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다음은 홈쇼핑 본부입니다. ck enm은 업계 최초의 홈쇼핑이자, 매출 1위

를 기록하고 있지만 인터넷 쇼핑과의 연계가 부족합니다. 일찍 형성된 *오픈

마켓들을 이기고 있지 못하는 상황이죠.”

*오픈마켓-판매, 구매등록이 자유로운 인터넷 쇼핑몰 사이트의 통칭.

한록의 발언에 본부장들은 기침을 하거나, 한록의 시선을 피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정부장은 눈을 감고 생각했다.

‘순식간에 입장이 바뀌었다.’

영화사업본부와 한록을 평가하는 위치에 있던 임원들.

그들이 어느새 한록에 의해 사장 앞에서 평가받는 위치가 되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ck 뮤직의 매출이 감소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ck 뮤직 프로젝트 그 자

체가 문제입니다. 음악 제작사들이 ck enm에 인수되면서 기존 매니아층의 감

성이 사라지고, 대중음악에 가까워졌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장르의 시너지 효

과를 노린 ck 뮤직의 파워가 사라진 겁니다.”

한록이 모든 사업본부의 모든 현황을 꿰뚫고 있기 때문이었다.

홈쇼핑 본부장. 음악사업 본부장. 공연사업 본부장. 기획실장. 모두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모두 느끼고 있던 것이다.

ck의 모든 사업에 대한 완벽한 이해. 그리고 냉철한 분석. 임원들을 압도하는

스피치.

더 이상 아무도 반박할 수 없다.

‘이 녀석이 아니면 누가 gv를 진행한단 말인가.’

‘이 녀석이 아니면...’

‘누가 ck를 대표한단 말인가.’

그리고 문오석은 마침내 모든 상황을 이해했다.

최경준이 왜 그리 자신만만 했는지, 왜 저렇게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지.

바로 눈앞의 발표자, 이한록 때문이다.

‘이한록.’

문오석이 한록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 녀석은 대체 뭐지?’

자신이 상대를 잘못 골랐다고.

*

회의장 가장 상석에 앉은 하정엽.

그는 잠자코 질문과 답변을 듣고 있었다.

임원들이 아무런 말이 없어지자 하정엽이 드디어 입을 연다.

“우리 회사에 이런 사원이 있었습니까.”

그때 내내 말이 없던 최경준이 답했다.

“사원일 때 천만영화를 두 번 만든 직원입니다. 영화사업본부에서 가장 빨리

대리가 되었죠.”

“뛰어난 사람이군요.”

한록을 앞에두고 한록에 대한 얘기를 하던 둘. 그때 하정엽이 갑자기 한록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질문을 던졌다.

“본인이 뛰어난 직원이란 건 알겠습니다. 그런데 프로젝트 자체에 문제가 있

습니다.”

정부장의 몸이 바짝 굳고, 최경준이 조용히 하정엽을 바라보았다.

하정엽이 날카로운 눈으로 한록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 프로젝트는 당신이 없으면 진행되지 않습니다.”

프로젝트에 깔린 한록의 무게감에 대한 지적이다.

“당신이 실무에서 손을 떼고 부장, 임원이 됐을 때도 이 프로젝트가 진행될

것 같습니까?”

그 말에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였고, 누군가는 오싹함을 느꼈다.

‘당신이 임원이 됐을 때.’

하정엽이 흘린 그 말의 무게를 알아차린 것이다.

“네. 가능합니다.”

그러나 한록은 차분하게 답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군.”

“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진행할 겁니다.”

그리고 다시 포인터를 들고 ppt를 가리키는 한록.

그곳엔 현과장과 유선의 사진이 있었다.

“마케팅 부서의 현주훈 과장, 김유선 사원입니다. 지금은 저만큼의 파급력은

없습니다. 다만 저와 함께 gv에 출연하다보면 점점 인지도와 브랜드가 생길

겁니다.”

“본인이 후계자를 길러보겠다는 건가?”

“네. 그리고 이 방식으로 ck enm은 영화계의 중역들을 길러갈 수 있을 겁니다.”

하정엽이 한록의 얼굴을 바라본다.

성장하는 직원. 그로 인해 커져가는 회사의 입지.

사장이라면 누구나 매혹될 수 밖에 없는 제안이다.

한록의 답이 끝났으나, 하정엽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하정엽이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톡.

그리고 다시 한 번.

톡.

그리도 눈을 감고 한 번 더.

톡.

하정엽은 지금 한록이 제시한 미래를 그려보는 것이었다.

길게 이어지는 침묵.

“질문이 하나 더-”

공연사업본부장이 그걸 깨려고 할 때-

“질문 그만.”

하정엽이 눈을 뜨고 말했다.

정부장이 이를 악문다.

최경준과 한록의 눈이 마주친다.

그 모든 침묵 속에서 하정엽이 입을 열었다.

아주 단호하고, 냉정한 목소리로

“회의 끝냅니다. 이대로 프로젝트 진행합니다.”

gv의 승인을 알리는 하정엽.

그 순간, 최경준의 실이 한록의 몸을 휘감았다.

작가의말

이번 화 재밌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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