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25화 (25/263)

이게 본부장의 '라인'이란 거구나(1)

“이한록 한 번 믿어보시겠습니까?”

정부장의 말을 바로 알아들은 최경준. 그가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이한록이 또 한 건 했나 보지?”

“브랜드 로열티를 만들 방법을 가져왔습니다.”

“말해 봐.”

“ck enm의 직원에게 gv의 사회를 맡긴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회자는 자기가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하하...”

한록의 당돌한 마케팅에 최경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친구답군. 효율적이고, 파격적이고. 연예인은 최대한 배제하고.”

최경준의 말에 정부장이 오래 생각해오던 질문을 던졌다.

“이한록을 지켜보고 계셨던 겁니까?”

“당연하지. 사원이 천만 영화를 두 번이나 만들었는데 지켜봐야지.”

최경준은 한록을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입사 1년차. 한록이 맡은 영화가 처음 천만을 달성했던 때였다.

성과를 축하하기 위해 최경준이 부서 사무실을 찾은 상황.

3팀의 오차장과 구과장 사이에서 굳은 표정으로 서 있던 이한록.

고작 신입사원을 축하해주러 본부장이 출동한 것인데도 한록에게선 설렘이나

기대가 느껴지지 않았다.

회사원답게 티를 내진 않았으나, 한록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이 있었다.

“나를 불편해하더군. 빨리 끝내고 일이나 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어.”

“원래 그런 놈입니다.”

“하하. 이제 알지.”

두 번째 만남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록은 본부장이 눈앞에 있음에도, 잘 보여

야한다거나 줄을 대야한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일은 잘하는 것 같더군. 그런데 이한록에 대한 얘기가 자주 들려오지 않았어.”

“하루가 멀다하고 일을 터뜨리는 놈 아닙니까.”

“그런 얘기 말고. 자네 전의 박부장이나, 오차장 말이야. 상사들과 사이가 안

좋은 것 같더군.”

“네, 맞습니다.”

“그런데 자네가 온 뒤는 달라졌어. 자네하고 잘 맞는 타입인가?”

최경준의 말에 정부장이 생각에 잠긴다.

시건방지고, 위아래가 없는 이한록. 자신을 상대로 몇 번이나 <동화 속 미로>

를 언급하던 이한록. 이한록과 정부장이 잘 맞는다고 묻는다면.

“네. 잘 맞습니다.”

그렇게 답할 수 밖에 없다.

이한록을 보면 항상 드는 생각이 있다.

'이 녀석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그런 기대감. 그리고...믿음.

“역시 그렇군.”

최경준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정부장을 바라보았다.

“난 능력있는 사람을 좋아하네. 이한록이 그런 사람이지.”

한록은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최경준은 한록을 꽤 오래 지켜보고 있었다. 한

록이 구과장을 때렸을 때 1년간의 좌천으로 상황을 마무리 할 수 있었던 이

유. 바로 최경준이 힘을 썼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네 역시 마찬가지라네.”

정부장을 향하는 최경준의 시선.

“자네도 알겠지만, 이제 상황이 달라졌어. 이전 프레젠테이션은 그저 내 심사

를 통과하는 게 목적이었지만 지금은 아냐. 지금은 자네와 내가 함께 사장님

앞에서 평가 받는 자리네.”

“이한록은 잘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말이야, 정부장.”

“예.”

“이 기회를 이한록에게 뺏겨도 되겠나?”

최경준이 다시 한 번 물었다.

“사장님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할 수 있는 기회야. 그걸 이한록에게 양보해

도 괜찮겠나?”

사장 앞에서의 신사업 발표.

사실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영화사업본부의 실세 최경준과 한 배를 탈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이다.

그런데 발표를 한록에게 시키겠다는 것. 그건 사실 정부장이 큰 결단을 했음

을 의미했다.

그러나 정부장의 대답은 단호했다.

“기회를 뺏기는게 아닙니다.”

“말해보게.”

웃으며 정부장의 답을 기다리는 최경준.

“이한록은 아마 계속 일을 만들어낼 겁니다. 제가 부장으로 있는 몇 년간은

계속 그럴겁니다.”

“그렇겠지.”

“그 놈을 지금 사장님께 인사시켜드리고 좋은 평가를 받는다면, 앞으로 그녀

석이 벌일 일들이 좀 수월해질 겁니다.”

“정부장이 그렇게 부하를 아끼는 사람이었나? 몰랐던 사실이군.”

“아뇨, 제 생각을 한 겁니다.”

“자네 생각이라니?”

정부장이 허리를 펴고, 최경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앞으로 그 녀석이 벌일 일들은 저나 본부장님 선에서 끝날 일들이 아닐겁니다.

어찌보면 최경준의 권위를 넘보는 말이다. 그러나 최경준은 진지하게 정부장

의 말을 들었다.

“그 녀석은 곧 제 손을 벗어날 겁니다. 그리고 그 녀석이 좋은 활약을 펼칠수

록 저에게도 같이 기회가 주어지겠죠.”

마케팅부 부장으로서 사장에게 한 번 눈도장을 찍는 것.

혹은, 앞으로 한록과 함께 일하며 계속 사장의 눈에 드는 것.

“저는 그때를 위해 그 녀석에게 미리 길을 닦아줄 뿐입니다.”

그 중 정부장은 후자를 택한 것이었다.

“...”

정부장의 계획을 들은 최경준은 한동안 답이 없었다. 그러더니 정부장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자네도 많이 성장했군.”

<동화 속 미로>에 실패하고 지방으로 좌천을 받은 정부장. 그때의 정부장이라

고는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이다.

“예전에는 그저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는 것, 자신이 돋보이는 것에 급급했는데

말이야. 이제 부하를 다루는 방식도 아는군.”

“수원에서 보낸 시간들이 있습니다.”

지방으로 좌천받았으나, 거기서 끝이라는 생각이 아니라 칼을 갈아온 정부장.

최경준은 그런 정부장의 생각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시간이 많이 지나긴 했나 봐. 자네가 물러날 줄도 알고.”

뛰어난 능력과 무자비함. 그리고 상황을 장악하는 카리스마까지.

정부장은 강한 리더였다.

그러나 단점이 있다면 자기 능력이 너무 뛰어나다보니 맘에 차는 부하를 찾지

못한다는 것.

그래서 정부장의 강점은 동시에 약점이 되었다.

‘충성스러운 부하 하나 만들지 못하는 상사는 제대로 된 상사가 아니니까.’

그런데 정부장이 변화했다.

“솔직히 말하지. 자네를 서울로 데려왔을 때도 큰 기대는 없었어. 그저 일을

제대로 할 사람이 필요했는데, 생각 이상으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군. 이유

를 찾자면...”

미소를 지은 최경준이 정부장을 바라본다.

“이한록이군.”

“인정하기 싫지만, 맞습니다. 그 녀석 전에는 저만큼 일을 하는 사람이 없다

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녀석은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 회사에 훌륭한 인재가 많다니 좋은 일이네. 자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한번 그 녀석 솜씨를 확인해볼까.”

최경준이 말하자 정부장이 고개를 숙였다.

“내일 당장 이한록에게 프레젠테이션 준비시키겠습니다.”

“너무 가혹해. 삼일 정도는 시간을 줘도 괜찮아.”

“그럼 금요일에 뵙겠습니다.”

“그래.”

짧게 대답한 최경준. 그러더니 정부장을 보고 미소를 짓는다.

마치 신사처럼 부드러운 미소.

그러나 정부장은 알고 있다.

‘오너 일가는 영화사업본부의 전권을 최경준에게 쥐어주었다.’

자신이 서울로 올라오기 위해 회사를 나가야했던 박부장.

그처럼, 지금 눈앞에서 웃고 있는 저 사람의 말 한마디에 자신의 앞날이 달려

있을 것이다.

눈앞의 남자가 적고 있을 살생부.

거기서 자신은 어느 위치에 적혀 있을까.

“이번에는 정부장의 안목을 믿어보지.”

그건 아마 한록에게 달려있을 것이다.

*

며칠 후 아침.

정부장이 ‘프레젠테이션 리허설을 하자’고 해서 찾아간 회의실에서 최경준을

마주친 한록.

한록은 거기서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뭔가 있다.’

프레젠테이션의 심사를 맡아야 할 최경준이 리허설에 참여한다.

이건 상황이 다르게 흘러가고 있음을 뜻했다.

그리고 리허설이 끝나자 한록은 예상이 적중했음을 알게 됐다.

“gv 프레젠테이션에 다른 사업부 임원들이 올 거다. 사장님도 오실 수 있고.”

“...사장님 앞에서 말입니까?”

당황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본부장도 아니고, 사장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이라니.

거기에 직접 프레젠테이션 리허설을 찾아온 최경준까지.

프레젠테이션의 규모가 생각 이상으로 커진 상황이었다.

“제가 발표를 해도 되는 자리 맞습니까?”

“그래. 본부장님께도 말씀드린 일이다.”

정부장의 말에 최경준을 바라보자, 최경준이 여유로운 미소로 한록에게 묻는다.

“못하겠나?”

리허설 동안 아무 말도 없던 최경준이 처음으로 던진 질문.

말투는 부드러웠으나 최경준의 눈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볼 것처럼 날카로웠다.

한록은 짐작했다.

‘여기서 어떤 대답을 하든 최경준은 내 속내를 간파할 거다.’

한록이 부담감에 떨면서 억지로 알겠다고 대답해도.

사장의 눈에 들 수 있다는 유혹에 섣불리 경거망동해도.

최경준은 모든 것을 알아차릴게 분명했다.

“아뇨. 하겠습니다.”

그러나 한록은 차분히 대답했다.

‘이 일은 내가 가장 잘 안다. 누구도 나보다 잘 할 순 없다.’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 그리고 확신.

과거 차장까지 달아본 경험으로 알 수 있다. 사장이 온다니 신경은 써야겠지

만, 사업설명회 하나 때문에 두려워 할 상황은 아니었다.

“너무 자신감에 차있군. 대리가 할 말은 아니야.”

그러나 한록의 대답을 들은 최경준이 날카롭게 답했다. 아마 한록의 자신만만

한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미소를 거둔 최경준이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고 묻는다.

“이한록. 자네가 꼭 발표를 맡아야 할 이유를 말해봐.”

무겁게 가라앉은 회의실의 분위기.

그럼에도 한록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제가 기획한 프로젝트고, 제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걸 사장님 앞에서 잘 말할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야.”

“할 수 있습니다.”

“그걸 어떻게 믿지?”

평범한 질문일 뿐인데도 오차장, 정부장과는 차원이 다른 압박감이 느껴진다.

‘조심해라, 이한록.’

정부장의 시선을 느끼며 한록은 입을 열었다.

“방금 보셨으니까요.”

그 대답에 최경준이 싸늘한 눈으로 한록을 노려보았다.

말 한 마디에 한국 영화 업계에 피바람이 불고 폭풍이 몰아치는 남자 최경준.

그가 한록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뜯어보기 시작한다.

그러더니 한참 후...

“그래. 잘하더군.”

한록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꽤 배짱이 있네. 사장님 앞에서도 잘 하겠어.”

언제 한록을 압박했냐는 듯 또다시 표정을 바꾼 최경준.

아까의 질문들은 아마 최경준의 ‘시험’이었음이 분명했다.

그 시험을 통과한 한록. 그리고 그런 한록을 데려온 정부장.

최경준이 정부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좋은 부하를 뒀군. 사람보는 눈이 꽤 있어.”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은 명백했다.

ck enm의 영화사업본부. 그 곳의 수많은 부장, 차장들.

최경준의 말 한마디에 임원이 될 수도 있고, 회사를 나가야할 수도 있는 사람들.

"나도 자네를 눈여겨 보지."

그들 사이에서 ‘정부장’이라는 존재가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

하루 뒤.

“사장님이 프레젠테이션을 보러오신다고?!”

현과장이 겁먹은 얼굴로 한록에게 외쳤다.

이틀 뒤.

“구철범. 이한록 건드리지 마.”

평소처럼 한록에게 트집을 잡으려던 구과장에게 정부장이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

삼일 뒤.

“대리님! 이거 부탁하신 자료랑 대본이에요.”

김유선이 프레젠테이션을 위한 자료를 준비해주었다.

나흘 뒤.

“마케팅 부서에 사장님 오신다는 거 정말이에요? 이대리님 보러 오는거죠?”

회사 전체가 한록에 대한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닷새 뒤.

“형. 나 긴장돼서 토할 것 같아...”

한록 대신 영도가 긴장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기 시작했다.

육일 뒤.

“내일 25층 전체 비워주세요. 사장님 오십니다.”

회의실이 있는 25층이 싹 비워졌다.

그리고 일주일 뒤, 프레젠테이션 당일.

“가자.”

정부장과 함께 사무실을 나서는 한록.

“이대리. 파이팅.”

현과장이 굳은 얼굴로 한록의 어깨를 두드린다.

그 뒤에 약간의 설렘과, 다수의 두려움으로 손을 꼭 잡고 있는 유선.

차가운 눈빛으로 한록을 바라보는 오차장.

선망과 동경, 질투가 담긴 눈으로 한록을 바라보는 마케팅 부 사람들.

그들의 시선을 뒤로 하고 한록은 사무실을 나섰다.

*

엘리베이터가 25층에 도착했다.

평소에는 쓸 수 없는 임원급 회의실이다보니, 층 자체가 낯설다.

번쩍이는 로비에는 코너마다 사람이 있었다. 그들이 정중하게 인사를 하더니

정부장과 한록을 회의실로 안내했다.

코너를 돌고 돌아 마침내 도착한 회의실.

문을 열자 누구보다 먼저 자리에 앉아있는 최경준이 보였다.

“본부장님.”

정부장과 한록이 인사했지만 최경준은 짧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집중해라.’

최경준의 뜻을 이해한 한록은 바로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했다.

짧은 리허설을 마치자 사람들이 하나 둘 회의실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오른쪽 세 번째 자리에 앉은 남자. 매출 신화를 일으킨 음악사업본부 본부장

문오석이다.

그 옆에 앉은 남자. 오너 일가와 동문이라는 경영전략실 실장 김태준이다.

비어있는 사장 자리의 바로 곁에 앉은 남자. ck enm 최고의 매출을 자랑하는

홈쇼핑 본부 본부장 유성혁이다.

“사장님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모두 일어나 인사를 하는-

“앉으세요.”

사장 하정엽.

“안녕하십니까. 영화사업본부 마케팅부서 대리 이한록이라고 합니다.”

“그럼...”

“프레젠테이션 시작하겠습니다.”

그들의 앞에서 한록이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다.

작가의말

팝콘 팝니다. 이제 영화관에서 취식 가능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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