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24화 (24/263)

이한록 한 번 믿어보시겠습니까?(3)

“이거 이대리가 해야겠는데?”

현과장이 구글 시트의 응답자 그래프를 가리킨다.

[1.나만 못 갔던 ㅠㅠgv후속작. 정우택 배우와의 QNA 시간!]

배우와의 QNA 시간. 이미 기획해둔 이벤트이고, 투표율은 90%였다.

[3.지구특공대 전 출연진의 댄스타임~!]

투표율 40%. 나쁘지 않지만 중복투표가 가능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크게 관심

을 가지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2.ck enm 직원이 풀어주는 <지구특공대>예고편 이야기! ps.그 잘생긴 분 나

와요!]

그리고 한록의 선택지에 대한 결과는...

“80프로?”

놀라운 수치였다.

“이건 사실상 거의 대부분이 보고싶다는 거잖아. 이대리 인기 많은데?”

“맞아요! 대리님 인터뷰가 ck 인스타그램 중에 좋아요 제일 많이 받았어요.

사람들이 대리님 얘기가 궁금한가봐요.”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가 뭐야! 이 기회에 유명해져서 회사 때려치자!”

현과장의 호들갑 섞인 반응. 현과장과 유선은 의외의 결과에 매우 즐거워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한록은 그저 웃고 있을 수 만은 없었다.

‘영화 마케팅을 한 지 9년이나 됐지만...이렇게 당황스러운 적은 없었어.’

마케팅은 원래 뒤에 서서 다른 누군가를 빛내주는 일이다.

그런데 본인이 앞으로 나서는 방식을 시도해야 한다니.

한록의 입장에서 이건 새로운 도전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어쨌든 gv는 진행해야하는 상황이다.

“그럼 일단 임플로이언서는 저를 후보로 해서 부장님께 보고드리겠습니다.”

“좋아. 이대리 잘할거야!”

현과장이 한록의 등을 세게 치며 웃었다.

*

“부장님. 잠깐 시간 괜찮으십니까? gv 브랜드 로열티 때문에 설명 드릴게 있

습니다.”

“앉아.”

여느때와 같이 짧은 명령조의 대답. 그러나 정부장은 친절하게 옆에 앉은 의

자를 빼주고 있었다.

의자에 앉은 한록이 보고서를 내밀자 정부장이 받아 읽기 시작했다.

“임플로이언서를 통한 브랜드 로열티라. 괜찮네. 아직 프로그램이 제대로 정

착도 안 된 상황에서 유명인을 데려오면 프로그램이 사람한테 먹히기 마련이지.”

한록이 고민하던 부분을 바로 파악하는 정부장.

“다른것보다, 일단 우리 쪽에서 gv 품질을 통제할 수 있다는게 좋아. 감독들

이 갑자기 깜빡이없이 유턴하는걸 막을 사람이 하나는 있다는 거니까.”

정부장의 손목에서 노란색으로 반짝거리는 실. 한록의 마케팅 방안이 상당히

마음에 든다는 뜻이었다.

‘여기까진 괜찮다.’

그리고 이제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사회자만 잘 선정되면 이대로 프레젠테이션 보내도 문제 없을거다. 그래서

사회자로 누굴 생각중인데? ”

보고서를 다 읽은 정부장이 한록에게 물었다.

‘이걸 뭐라고 말해야하지?’

잠시 망설이던 한록은 적당한 답을 찾지 못하고 결국 입을 열었다.

“제가 할 생각입니다.”

현과장과 유선은 한록을 매우 좋게 보는 사람들. 그 사람들 눈에는 한록이 사

람들에게 호감을 살 만한 인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정부장은 상당히 냉정한 사람이다. 현과장이나 유선처럼 ‘동료가 인터

넷에서 인기가 많다’는 분위기에 휩쓸릴만한 사람이 아니다.

‘너 제정신이냐.’ ‘인터넷에 얼굴 한 번 올라가니 니가 연예인인 줄 아냐.’

한록은 그런 말을 기다리며, 정부장을 어떻게 설득해야할지 계획을 짜기 시작

했다.

그리고 정부장의 반응은...

“다행이네.”

“...예?”

“너말고 다른 사람 얘기하면 gv 때려치라고 할 거였다. 네가 해라.”

“부장님도 제가 사회자를 하는게 맞다고 생각하십니까?”

“너 아니면 누가 할 건데? 현과장? 김유선? 사람들이 잘도 보러오겠다.”

“다른 부서에서라도 사람을 데려오면 되지 않습니까.”

“너만큼 마케팅이랑 영화를 잘 아는 사람이 누가 있다고?”

한록이 사회자를 맡는게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한 정부장의 반응.

“이건 생각을 좀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왜. 하기 싫어?”

“아닙니다. 확신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다른 좋은 방안이 나올 수 있으니, 이

건 보류하는게 좋아 보입니다.”

“왜 확신이 없어. 니가 싸가지도 없고 성격 더러워서?”

“...맞습니다.”

정부장이 또 한록의 콤플렉스를 정확히 지적한다.

한록이 여태까지 사회자를 맡는다는 생각조차 안해 본 이유. 바로 자신에 대

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한록의 마케팅은 언제나 성공했고, 한록은 늘 회사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은 언제나 한록

에게 어려운 숙제였다.

그런데 이제 사람들의 앞에 나서서, 자신의 매력으로 사람들을 사로잡아야 하

는 상황이 온 것이다.

‘현과장님은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말해주셨지만...그건 현과장님이 좋게 봐

주셔서 그런거고.’

“저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더 관객들이 좋아할만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현과

장님이나 유선씨,아니면 최대리도 어울릴 것 같습니다. 저보다 잘할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을 끌어들이는 현과장. 글을 잘 쓰는 유선. 연예인 같은 외모에 엘리트인

최대리. 누가 오든 자신보다는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한록.”

한록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정부장이 단호하게 한록의 이름을 불렀다.

“너 싸가지 없고 성격 더러운것도 맞아.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 아무도 없을

거다.”

“그러니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자고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이거 봐라. 가끔 너같은 놈이 회사를 어떻게 다니나 싶다.”

그러나 정부장은 한록을 나무라려는 의도가 아니라는 듯 말을 이었다.

“싸가지 없고, 성격 더러운 놈. 거기거 끝이 었으면 넌 여기 못 앉아있다.”

검지손가락으로 한록을 가리키는 정부장.

“나는 쓸모 없는 놈은 내 옆에 안 둬. 그리고 능력있다고 전부 쓸모있는 놈이

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알고 있습니다.”

한록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5년간의 시간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 과거에도

한록은 회사에서 가장 능력있는 사원이었지만 정부장과는 담을 쌓은 사이나

마찬가지였다.

“근데 내 앞에 있잖아. 그럼 끝난거지.”

“....”

“넌 싸가지도 없고 성격도 더럽지만, 그래도 사람을 끌어 들이는 게 있다. 그

게 뭘 거 같냐?”

“모르겠습니다.”

“일 하나만 제대로 해보려는 태도. 그거야.”

과거 한록의 발목을 붙잡았던 약점들.

정부장은 이제 그게 한록의 강점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인터넷에 니 사진 올라온거. 그거 뭐 니가 대단히 잘생겨서 유명해졌겠냐?

그건 서브야. 니가 유명해진 건 예고편을 제대로 만들어서, 그리고 장감독이

너한테 감사해서야. 사람들은 네 그런 모습을 좋아하는 거야.”

당당하고, 능력있는 모습.

거기에 주변 사람들을 적절히 설득할 수 있는 능력까지.

“주위 평판 같은거 신경 안쓰고, 일단 이 일은 제대로 끝내겠다는 마인드. 옛

날엔 그게 독이었어. 그런데 이제 제대로 일을 하기 위해선 관계도 신경써야

하는 걸 알고 있는 것 같아.”

그간 한록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정부장.

그는 어느새 한록과 주위 사람들이 서서히 변화하고 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이제 대답해봐라, 이한록.”

“네.”

“우리 회사에서 너보다 더 gv 성공시키고 싶어하는 사람있냐? 나는 빼고.”

“...없습니다.”

“더 설명할 필요 없겠네.”

모든게 끝났다는 듯한 정부장의 태도. 그리고 한록 역시 어느 순간부터 이 일

의 답을 알고 있었다.

“니가 해라. 너 아니면 안 된다.”

자신이 결국 gv의 사회자를 맡게 될 것이란 사실을.

“네, 부장님. 제가 진행하겠습니다.”

한록이 답했다.

*

며칠 후, ck enm의 최고층 회의실.

강남의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그곳에 ck enm의 최고 임원 20명이 모여있었다.

ck enm의 임원들은 모두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곳에 앉은 것은 30대

초반의 젊은 남자, 하정엽.

ck enm의 사장이자 ck 그룹 오너 일가였다.

“3개월 후의 부산영화제와 8월의 아시아 콘서트가 끝나면 계열사인 tvm방송국

이 ck 내부로 편입될 겁니다. 각 사업부문마다 큰 파워가 될테니 이 부분에

대한 대비는 부문별로 진행하세요.”

오늘의 안건이자 현재 ck enm이 가장 큰 이슈.

바로 계열사인 방송국이 ck 내부로 편입되는 것이었다.

ck enm은 모든 문화를 다루는 문화기업. 영화, 음악, 공연 등 다양한 사업부

문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방송국이 새로운 부문으로 신설된다.

그건 ck 내부의 ‘파워 구조’에 변화가 있을 거란 걸 의미했다.

“방송국 국장은 기존 임원진 중 한명이 배정될 겁니다. 기존 직위와 함께 동

시 위임의 방식으로 진행합니다.”

비록 지상파는 아니지만, 막강한 인지도를 가진 tv m채널.

지금의 임원 자리에 더불어, tv m의 국장 자리를 맡게 된다.

‘ck enm의 실세가 되는 거다.’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전 까지는 각자의 사업부문에 집중합니다. 영화 사업본부의 gv 신사업화.

방송국에 뉴스 편성. 이에 대해 의견있는 사람 있습니까.”

하정엽은 젊은 나이인만큼 회사 운영에 강박적으로 참여하는 경향이 있었다.

각 부문의 신사업을 뜯어보는 것 역시 하정엽이 하는 일 중 하나.

하정엽의 말에 사람들이 한록의 기획안을 보기 시작한다.

“비용이 적다고 하더라도, 파급효과도 그만큼 적은 사업입니다. 굳이 시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브랜드 로열티가 부재합니다.”

“쓸데없이 프로그램을 늘리는건 오히려 ck enm의 이미지를 훼손하는 겁니다.”

한국 문화를 모래바닥부터 만들어간 사람들. 그리고 지금은 한국 문화를 이끌

어가는 사람들이 한록의 기획안을 낱낱이 난도질하기 시작한다.

“의견 반영하겠습니다.”

그러나 최경준은 여유롭게 임원들의 지적을 수긍할 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누군가 입을 열었다.

“아이디어는 좋습니다. 그런데.”

문오석. ck enm 음악사업부의 본부장이자, 최경준의 라이벌. 그가 부임한 직

후 음악사업부의 매출이 2배 이상 성장한 무용담을 가진 인물이었다.

문오석이 최경준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부산 영화제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지금 이걸 진행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문오석의 말이 의미하는 것은 이거다.

지금은 방송국 본부장의 직위가 누구에게 갈지 결정되기 직전인 상황.

‘이런 상황에서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일부러 새로운 프로젝트를 기획하는게

아니냐’는 질문이었다.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기획안입니다. 부산영화제도 같이 진행해야 하는 상황

에서 이걸 빠른 시일 내에 런칭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2주면 충분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여유롭게 답하는 최경준.

“다른 분들의 지적은 들어보신 겁니까?”

“예상 가능한 부분이었고, 수정 지시도 내린 부분들입니다.”

“과연 2주 안에 얼마나 수정이 될지 모르겠군요.”

칼만 안 들었지, 말로 서로를 찌르고 있는 최경준과 문오석.

“그만.”

하정엽이 짧게 그런 둘의 말을 잘랐다. 아직 새파란 젊은이지만, 오너 일가라

는 직위가 주는 무게감에 최경준과 문오석 모두 말을 멈췄다.

“시기는 상관없습니다. 신사업은 예정대로 진행합니다. 다만 내용이 미흡해보

이면 즉시 취소합니다.”

하정엽의 선언에 문오석이 고개를 끄덕인다. 만족스럽진 않지만, 차마 오너의

결정에 토를 달 순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문오석을 지켜보던 최경준이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문본부장님. gv가 마음에 안 드십니까?”

“빠른 시일 내에 제대로 준비 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럼 한 번 확인해보시죠.”

최경준의 제안.

“2주 뒤에 gv사업화 프레젠테이션이 열립니다. 다들 걱정이 많으신 것 같으

니, 시간이 되시는 분은 한번 보러오셔서 조언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최경준의 말에 싸늘해진 회의실.

아무도 대답이 없는 와중에 하정엽이 고개를 끄덕인다.

“의견이 있는 사람은 직접 프레젠테이션을 보고 얘기합시다. 저도 방문하겠습

니다.”

그 반응에, 문오석은 자신의 선택이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최경준이 판을 키웠다.’

최경준의 그 한마디에, gv가 영화사업본부의 일개 프로젝트에서 갑자기 오너

일가가 관심을 가지는 프로젝트로 변해버렸다.

최경준은 자신의 야망을 저지하려는 말을 오히려 기회로 삼아버린 것이다.

“문본부장님. 오시겠습니까?”

하정엽은 이미 gv에 관심을 가졌다. 이런 상황에서 gv가 진행되면, 최경준은

또 하나의 실적을 가져가게 되는 것이다.

남은 것은 하정엽이 참석한 자리에서, gv를 무너뜨리는 방법뿐.

“네. 참석하겠습니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은 없다.

최경준과 문오석이 서로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

영화사업본부의 본부장실.

이미 퇴근을 한 후였지만, 정부장은 최경준의 호출을 받고 즉시 본부장실에

도착했다.

임원회의 이후의 호출이라면 이슈가 있다는 뜻이다.

아마 큰 기회나, 위기.

“정부장. gv발표는 자네가 하는 걸로 바꾸지.”

최경준의 말에 정부장이 의아한 듯 묻는다.

“이한록이 진행하는 걸 보고 싶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상황이 달라졌어. 사장님이 프레젠테이션을 보러온다고 하셨네. 그리고 아마

다른 본부의 임원들도 올 거야.”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정부장은 바로 상황을 눈치챘다.

“우리 사업본부 전체의 파워가 달려있는 자리야. 그걸 대리한테 맡길 수는 없

지. 현과장도 무리야. 자네가 진행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정부장도 고개를 숙인다.

“그래.”

대화가 끝났지만, 아직 할말이 남아 보이는 최경준. 최경준이 창밖의 야경을

바라보다 말했다.

“그 녀석이 활약하는걸 보고 싶었는데 아쉽군.”

최경준의 말에 정부장은 한참동안 생각에 잠겼다.

정부장도, 최경준도 말이 없는 상황.

그리고 한참 후 정부장이 입을 열었다.

“본부장님.”

“이한록 한 번 믿어보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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