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22화 (22/263)

이한록 한 번 믿어보시겠습니까?(1)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오차장은 빠르게 눈치챘다.

윤감독의 떨리는 목소리. 눈치를 보는 듯한 표정. 그러나 흔들림 없는 눈빛...

“저는 이대리님을 믿습니다.”

‘이한록. 벌써 손을 썼구나.’

한록이 윤감독을 이미 완전히 설득했다. 뒷말은 듣지 않아도 뻔했다.

‘<지구특공대>처럼 흥행을 약속했겠지. 그게 잘 먹힌 모양-’

“이대리님이 <삼일의 삶>에 대한 얘기를 하셨습니다. 몇 번이나 영화를 본 사

람만 할 수 있는 감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윤감독의 얘기는 오차장의 예상과는 다른 것이었다.

“이렇게 영화를 봐주는 사람이 있다면 성공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록의 능력이 아니라, 다른 점에 설득 됐다는 윤감독.

오차장이 싸늘한 눈으로 윤감독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감독님. 자녀분들을 생각하십시오. 감정에 휘둘리실 때가 아닙니다.”

그 말에 움찔하는 윤감독. 그러나 다시 단호하게 말한다.

“감정에 휘둘린게 아닙니다. 그 분처럼 제 영화를 잘 이해해주시는 분이 맡아

주시는게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 사람이 지금 감독님 영화의 마케팅을 안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아뇨, 재개봉 때를 위해 지금은 기다리자고 말씀하신 겁니다.”

“감독님.”

오차장이 윤감독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말했다.

“상황 파악이 안 되십니까?”

오차장과 윤감독의 시선이 마주친다. 오차장의 찍어 누르는 듯한 눈빛에 윤감

독이 잠깐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오차장과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윤감독의

발언.

“차장님. 저는 이대리님도 믿고, 이대리님의 능력도 믿습니다.”

오차장은 직감했다.

‘윤감독은 절대 마음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한마디로-

‘당했다.’

한록에게 패배했다는 것을.

*

“들어가보시죠, 윤감독님.”

오차장이 별다른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그러자 윤감독이 어

정쩡한 자세로 오차장을 바라보았다.

“오늘 일은...”

“이대리한테 말씀 하십시오. 제가 이대리 마케팅 방안을 수정하자고 말했다고.”

오차장이 여유롭게 말했다. 오차장의 아무렇지 않은 듯한 반응에 오히려 당황

한 것은 윤감독이었다.

“저는 이대리가 신인감독에게 강압적으로 마케팅 방안을 제안한게 아닌가 확

인했습니다. 충분히 물어볼만한 질문입니다.”

“...”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하는 오차장.

“나가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알겠습니다.”

윤감독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오차장의 곁을 지나치자 느껴지는

시선. 자신을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삼키는 듯한 압박감.

등에는 절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윤감독님.”

윤감독이 문을 벗어나자, 오차장이 윤감독의 이름을 부른다. 안도하려던 윤감

독이 다시 화들짝 놀라 오차장을 바라보았다.

오차장은 역광을 받으며 윤감독의 앞에 서 있었다.

마치 한록을 잘라내던 그때처럼 높은 빌딩을 배경으로 선 오차장. 뒷짐을 지

고 윤감독을 내려보는 눈빛은 거래처 사람을 보는 눈빛이 아니었다.

완전히 자신의 아랫사람을 보는 듯한 눈빛. 오차장이 천천히 말했다.

“현명한 선택을 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문을 닫아버린 오차장.

어두운 복도에 남겨진 윤감독은 숨을 몰아쉬었다.

사회 생활을 한지 30년이 넘었다. 결혼도 했고, 자식들도 이제 성인이 됐다.

부하, 동료, 상사. 그간 마주친 사람만 수백명이다.

그 사람들과 다툼도 있었고, 불화도 있었다. 다툼을 잘 해결해서 한 편이 된

적도 있었고 끝끝내 화해하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사람은 처음이었다.

마치 자신의 모든 것을 파악한 듯한 눈빛. 그리고 완전히 우위를 점했다는 듯

한 태도.

‘위험하다.’

본능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50년의 인생. 그리고 30년의 사회경험이 말해준다.

저 사람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뭐든지 할 사람이다.

*

ck enm을 벗어난 윤감독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흩어지는 연기처럼 고민이 피어오른다.

웹개봉.

이미 정해진 일이다. 그래도 재개봉이 잡혔으니 괜찮다.

재개봉.

상영기회가 너무 적다. 하지만, 한록의 말처럼 삼일의 삶이 극장용 영화라는

것은 맞는 말이다.

이한록 대리.

...믿을 수 있다.

믿고 싶은 사람이다.

이 사람과 함께라면 괜찮을 것 같다.

그리고...오차장.

심경이 복잡하다.

‘저를 믿어주시겠습니까?’

그렇게 얘기하던 한록은 진중해보였고,

‘저는 <삼일의 삶> 같은 영화를 알리려고 마케터가 됐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한록은 무척 순수해보였다.

순수하고, 열정으로 넘치는 청년. 누구보다 믿음직한 청년.

자신과 함께 영화를 만들어가는 동반자.

괜한 오지랖일수도 있지만, 그 청년이 잘 됐으면 하는 마음이 계속 든다.

“하...”

한참을 생각하던 윤감독은 한록에게 전화를 걸었다.

*

“네, 감독님.”

영도와 술 한잔을 하던 중 걸려온 윤감독의 전화.

‘이 시간에 전화를 해? 끊어!’

영도가 입모양으로 소리쳤지만 한록은 그저 조용히 하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지금 시간은 10시. 늦은 시간이긴 했지만, 감독들은 원래 자유로운 영혼. 늦

은 밤에 전화가 걸려오는 것도 흔한 일이었다.

“...대리님.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윤감독의 목소리가 좀 이상했다.

한록이 바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무슨 일이신가요?”

“오늘 오차장님과 미팅이 있었습니다.”

“오차장님과요?”

오차장과 윤감독이 미팅이라니. 한록은 전혀 들어본 적 없는 일이었다.

“네. <삼일의 삶> 웹개봉에 대한 얘기를 하셨습니다. 이대리님이 일이 많으셔

서 웹개봉 때 신경을 못 쓰실수도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윤감독의 말을 들은 한록이 눈썹을 찡그렸다.

‘오차장. 벌써 수를 쓰고 있나.’

한록에게 자신의 수작이 통하지 않자 윤감독에게까지 손을 뻗었다.

‘이건 우리 둘 사이 일인데. 왜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던 한록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는 것. 그

래, 이게 오차장의 방식이었다.

구과장, 영도, 마케팅부서 사람들. 그리고 지금은 그게 윤감독이 되었을 뿐이다.

‘형, 표정이 왜 그래?’

술잔을 든 영도가 다시 한 번 걱정스러운 얼굴로 속닥거린다.

영도는 한서가 퇴원을 할 때까지 매일 병원에 와줬다. 그 정도로 한록과 영도

는 가족같은 사이였다.

그러나 회귀 전 영도는 오차장의 편을 들며 한록을 배신했다.

오차장이 어떤 제안을 하고, 협박을 했든, 한록을 배신한 것은 영도의 선택.

모두 영도의 잘못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늘 도달하는 결론이 있었다.

‘그럼, 지금 영도의 마음은 거짓인가?’

매일 한서의 병문안을 가고, 한록을 걱정하는 마음.

그 마음 역시 영도의 진심일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동시에 싫어하고, 어떤 사람의 편인 동시에 다른 사람의

편이기도 하다.

완벽한 내 편이란 없다. 저마다의 ‘선’에서 줄타기를 하는 게 인간관계.

영도의 한록에 대한 열등감과 호의. 그 사이에서 오차장이 영도의 ‘선’을 조

종했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 오차장은 윤감독에게 똑같은 짓을 하고 있었다.

“감독님 불안하신 것, 잘 알겠습니다. 이 부분은 내일 만나서 말씀드려도 될

까요?”

한록이 신중하게 답하자 영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한록을 바라본다.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짐작한 것이다.

“아닙니다. 이대리님. 저 안 불안합니다.”

그러나 윤감독은 예상외의 답을 했다.

“저는 그냥...이런 일이 있었다고 말씀드리려 한 겁니다. 담당자는 이대리님

이니까요.”

윤감독의 말에서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

‘이런 일이 있었고, 오차장이 수상하다.’

윤감독도 사회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다. 아직 아무런 물증도 없는 상황에서

대뜸 오차장에 대해 안 좋은 얘기를 할 수 없는 상황.

그걸 직접 말 할 수는 없으니, 한록에게 간접적으로 전달해준 것이다.

한록의 상사인 오차장. 그리고 오차장과 한록의 사이가 심상치 않은 상황. 그

런 상황에서 오차장의 수상한 행동을 알려주는 윤감독.

이건 ‘오차장을 조심하라’는 윤감독의 순수한 호의였다.

“...네. 알겠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감독님.”

그걸 알기에 한록은 윤감독에게 감사를 전했다. 한록의 마음이 전해진 것일

까. 핸드폰 너머에서 한동안 답이 없던 윤감독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대리님. 불안하지 않다고 한 거 사실 거짓말입니다. 사실 불안합니다.”

“네, 이해합니다.”

“그래도...대리님이 있으셔서 괜찮습니다. 대리님이 삼일의 삶을 좋아하시는

거 알고 있으니까요.”

그 말에 한록은 말문이 덜컥 막히는 것 같았다.

누군가가 능력 외에 다른 부분 때문에 한록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

그게 너무 오랜만이었다.

“대리님.”

“네, 감독님.”

“지금 하긴 좀 안 맞는 말일수도 있지만...”

“말씀 하세요.”

“저는 <삼일의 삶>이 잘 됐으면 좋겠습니다.”

“네. 저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만큼 대리님이 잘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윤감독의 말.

“대리님 좋은 사람이니까요.:

‘이대리 좋은 사람이니까. 사람들도 알아 봐 줄거야.’

현과장의 말...

“아, 참...나이가 드니까 이게, 제가 괜한 소리를...죄송합니다, 대리님.”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감독님. 저도 더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한록은 진심을 다해 말했다. 그러자 윤감독이 머뭇거리며 말한다.

“그러니까 대리님. 혹시 제 도움이 필요한 일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그 뒤로 몇 번 더 인사를 건네다 전화를 끊은 윤감독.

“형, 뭐야?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해?”

걱정스러운 얼굴의 영도와, 윤감독과의 통화기록을 보던 한록은 생각했다.

-제 도움이 필요한 일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오차장과 무슨 일이 있을 경우, 한록을 돕겠다는 의사표시.

‘윤감독은 선을 넘었다.’

한록의 편, 오차장의 편. 그 중 윤감독은 한록의 편을 선택했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

윤감독. 영도. 마케팅 부서 사람들.

한록과 오차장의 선 사이에 서 있는 사람들.

“영도야.”

“응?”

“너, 이번엔 잘 선택해라.”

그들이 움직일 시간이 왔다.

그리고...

“두 번은 없어.”

이전과는 다른 결말이 나올 것이다.

*

한록과 영도가 술을 마시는 시각.

오차장 역시 회사 근처의 방이 있는 일식집에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엔 구과장

이 있었다.

“이한록한테 일이 많았다지?”

“네, 요새 아주 기고만장합니다.”

오차장이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구과장이 즉답했다.

“저한테는 연차 때문에 소리를 지르지 않나, 부장님이 이미 결재한 내용을 바

꿔달라고 하지 않나...한층 더 건방져졌습니다.”

마치 지금만을 기다려왔다는 듯 한록에 대해 말하는 구과장.

그러나 오차장의 반응은 냉정했다.

“이한록 하나 통제하지 못하는 걸 자랑스러워 하는군.”

“...죄, 죄송합니다.”

오차장의 표정은 변화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그 말투에서 느껴지는 압박감.

구과장은 숨이 가빠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한록이 달라졌어.”

오차장이 말했다.

‘그간 이한록을 붙잡아 두는 건 구과장이면 충분했는데.’

오차장의 전략은 한록을 고립시키는 것.

지금까지는 그게 잘 통해왔다.

한록도 구과장 때문에 힘들어 했지만, 다른 팀으로 옮길 엄두를 내지 못했다.

어차피 모두가 자신을 부담스러워 하는 걸 아니까.

여태까지 마케팅부서는 오차장의 계획대로 잘 움직이고 있었다.

다른 부서에서 ‘무섭다’ ‘사람들이 독하다’라고 손가락질 받는 마케팅부. 그

건 전부 오차장의 작품이었다.

그런데...오차장이 없는 사이에 부서 전체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것도 한록

때문에.

재개봉 프로젝트를 뺏기지 않는 한록.

사람들 사이에서 어울리던 한록.

한록을 좋게 말해주던 현과장과 박과장.

그리고 한록을 믿는다는 윤감독까지.

무슨 일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상황이 많이 달라져있었다.

“당분간은 이한록이랑 일 만들지 말고 지내.”

“차장님! 그 놈이 회사 사람들 앞에서 저한테 소리를 질렀습니다!”

“구철범.”

오차장이 구과장의 이름을 부른다.

그 세글자로, 방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내려앉았다.

“jk 프로덕션과 계속 일하고 싶으면 입 다물어.”

jk프로덕션. ck가 함께하는 영화 예고편 제작사 중 하나이자-

“싫으면 회사에 뇌물을 받았다고 보고하고.”

구과장이 뇌물을 받고 있는 곳이었다.

애초에 구과장에게 jk프로덕션을 엮어준 것 역시 오차장.

오차장은 그저 구과장의 약점을 노린 것이 아니다. 약점 자체를 만들어서 수

족처럼 부리고 있는 것이었다.

“아,아닙니다, 차장님. 지시 따르겠습니다.”

구과장은 얼른 자세를 바꿔, 오차장 앞에 두 손을 모으고 앉았다. 비굴하기

그지 없는 자세였다.

그러나 오차장은 구차장이 어떻게 나오든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버러지 같은 놈.’

현과장도, 구과장도, 오차장의 눈에는 그저 쓸모없는 인간들일뿐.

그런데 한록은 조금 달랐다. 조금 더 ‘쓸모’가 있었다.

거기에 이제는 사람을 다루는 법도 조금 알고 있는 듯 했다.

‘현과장의 방식이다.’

한록의 능력이 아닌 한록 자체를 신뢰하던 윤감독. 이건 분명 현과장이 사람

을 대하는 방식이었다.

자신에게 밀려서 차장승진에 실패한 이후 조용히 지낸다 했는데, 다시금 현과

장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둘이 재밌게 놀고 있군. 그래도 이한록을 놓아줄 생각은 없다. 그 녀석을 데

리고 있으면 윗놈들 눈에 들 일이 많을테니까.’

회사생활에서 사람들이 흔히 간과하는 사실이 있다.

바로 부하들이 상사의 ‘라인’을 잡기 위해 힘쓰는 만큼, 상사들도 자신을 밀

어줄 부하를 잡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

그리고 지금 한록은 회사의 모두가 탐내는 부하였다.

‘현과장.’

오차장이 사케잔을 매만지다가, 마치 체스말을 쓰러뜨리듯 사케잔을 넘어뜨렸다.

현과장이 현과장의 방식으로 나온다면 자신은 자신의 방식대로 나가면 그만이다.

식탁 위의 사케가 한방울씩 흘러내려 바닥을 적시는 모습. 그모습을 지켜보던

오차장은 생각했다.

‘남의 걸 탐낸 대가를 치루게 해주지.’

*

식탁 위에서 구르는 잔과, 바닥으로 흐르는 사케.

그걸 무심히 바라보던 오차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차장이 일어나는 움직임에 사케잔이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 났지만, 오

차장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밖으로 향했다.

“차, 차장님!”

황급히 오차장을 따라나가던 구과장. 구과장의 시선이 바닥에서 나뒹구는 잔

을 향했다.

산산조각이 나버린 잔.

그리고 한층 더 싸늘해진 오차장의 눈빛.

‘...파란이 불거다.’

오차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된 이상, 누구 한 명은 피를 보

게 될 것이다.

오차장의 손바닥 위의 사람들. 이한록. 현과장. 그리고...자신.

‘...절대 나는 아냐.’

애써 다짐하며, 구과장은 오차장의 뒤를 따랐다.

*

다음날 마케팅 부서.

한록과 유선이 대화를 하고 있었다.

“대리님, 바이럴 돌릴만한 인플루언서들 목록입니다.”

한록의 <삼일의 삶> 마케팅 방안. 웹개봉을 최소한으로 하는 것.

하지만 재개봉 때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정보를 줘야 하니, 질 좋은 리뷰 몇

개는 꼭 필요하다.

한록이 목표로 한 리뷰는 딱 세 개였다.

“평론가 빨간 목도리님. 유튜버 씨네마토크. 이 둘이 좋네요.”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영화 평론가와 작품성 높은 영화를 다루는 유튜버 한

명. 그렇게 두명이 정해졌다.

“그리고 남은 한명은...되도록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는데.”

“평범한 사람이요?”

“네. 인플루언서 말고, 그냥 취미로 블로그를 운영하는 것 같은 사람이요. 하

루 방문자 수도 한 50명 정도.”

“그럼 바이럴 효과가 없지 않나요?”

“어차피 검색을 해서 들어오는거니까 상관없어요. 삼일에 삶에 대한 글이 많

지 않을 때. 그 초반에 딱 분위기를 잡아주는 거니까. 시네필들이 ‘이 사람

나랑 비슷한데?’라고 생각할만한 사람이 필요해요.”

“음...그럼 유명한 인플루언서는 안 되겠네요.”

“네. 목록을 다시 짜야할 것 같네요.”

한록의 말에 유선이 머뭇거린다. 그러더니 한록의 컴퓨터에 블로그 하나를 띄

운다.

“대리님, 혹시 이 사람은 어떠세요?”

“유선씨가 아는 사람이에요?”

“네. 영화 평론을 가끔 올리는 블로그예요. 방문자도 많지않고, 대리님이 말

하신 사람이랑 딱 적합해서요.”

한록은 유선이 알려준 블로그를 빠르게 훑기 시작했다.

<동화 속 미로> <지구 특공대>.

올라온 영화들은 대부분 작품성 있는 영화. 게다가 평론도 수준급이고, 글이

아주 깔끔했다.

“좋네요. 딱 제가 원하던 사람이에요. 글을 상당히 잘 쓰고, 관객들의 마음도

잘 아는 편이네요. 혹시 연락처 알아요?”

“네.”

“그럼 연락 좀 해줄래요?”

한록의 질문에 유선이 한번 더 머뭇거렸다. 그리고 부끄러운 듯 말했다.

“그...”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이게 사실...”

“네.”

“제 블로그거든요.”

“유선씨 블로그라구요?”

한록이 깜짝 놀라 유선을 바라보았다.

“네. 영화보면서 든 생각들 정리하는 곳이에요.”

“유선씨 정말 글 잘쓴다. 부럽네.”

한록이 감탄하자 유선이 두 손을 꼭 쥐고 씩 미소를 짓는다. 한록에게 칭찬을

받은게 기쁜 것이었다.

“유선씨가 딱이네요. 아주 좋아요.”

“그래도, 제 블로그에 리뷰를 올리기는 좀...그런가요?”

“아뇨. 오히려 좋죠.”

“왜요?”

“홍보비가 덜 들잖아요.”

한록이 즉답했다.

블로그, 유튜브, 인스타에 올라가는 인플루언서의 글들.

그 모든게 사실은 돈을 주고 쓰는 글들이다.

심지어는 ‘이런 내용으로, 이런 장점과 이런 단점이 있다고 써주세요-’라고

부탁하는 경우도 아주 많다.

그런데 회사 내부 직원으로 메꿀 수 있다니. 어느 회사가 싫어할까.

“그런 사람들한테 우리가 리뷰 써서 돌리고, 페이도 지급하는 것보단 유선씨

블로그로 하는게 훨씬 낫죠. 원래는 회사 내부에서 해결하면 페이 지급 안하

는데...부장님한테 한번 말씀드려 볼게요.”

“네!”

한록에게 도움이 되는게 기쁜지, 싱글싱글 웃는 유선.

하지만 한록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유선씨. 혹시 블로그 키워볼 생각 없어요?”

“어...네. 이건 진짜 감상용이고, 포트폴리오 용은 인스타그램이 따로 있거든

요.”

대부분 마케팅을 하는 사람들은 개인 SNS를 가지고 있다. 그 SNS의 팔로워수

가 곧 마케터의 능력을 증명하기 때문.

유선 역시 팔로워가 5천이 넘는 인스타그램을 가지고 있었다.

“왜요? 글을 이렇게 잘 쓰는데.”

“그치만 사람들은 가벼운 얘기를 좋아하니까요. 포트폴리오용 인스타그램에는

가벼운 영화 얘기만 올려요.”

“유선씨. GV 만족도 조사 기억하죠? 그때 사람들이 GV를 어떻게 알고 보러왔

는지 기억해요?”

“네. SNS가 아니라 영화 사이트를 보고 왔다고...아!”

한록의 말을 알아차린 유선이 손뼉을 쳤다.

“대리님, 시네필들을 위한 SNS가 없다고 말씀하셨죠?”

“네. 가벼운 채널들 말고, 진짜 깊은 얘기를 보고 싶어하는 사람을 위한 SNS

가 없어요. 이 블로그 그렇게 키워보면 어때요? 블로그는 긴 얘기를 하기도

좋고, 딱일거 같은데.”

“좋아요! 대리님,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셨어요?”

“유선씨가 글을 잘 쓰니까요.”

SNS마케팅을 하면서, 정작 자신의 진짜 가능성은 알아보지 못한 유선.

한록은 그저 유선의 가능성을 발견해준 것 뿐이었다.

“어떤 방식으로 블로그 키워볼지 생각해봐요. 요즘은 회사 소속인 걸 드러내

서 유명해지는 경우도 많으니까 그것도 고려해보고. 아니면, 그냥 유선씨 개

인 블로그도 좋아요. 가지고 있으면 뭐든 도움이 되겠죠.”

“네!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래요. <삼일의 삶>은 봤죠? 한번 리뷰 써서 보내줄래요?”

“네!”

유선이 한록을 향해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한다.

그리고 고개를 든 유선의 눈빛이 반짝반짝하다. 새로운 아이템, 프로젝트를

발견했을 때. 그리고 그 과정에 흥미가 생겼을 때. 그때 나타나곤 하는 마케

터들의 본능이 꿈틀거리는 것이다.

자기 자리로 돌아간 유선이 열심히 타자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대리! 유선씨한테 또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리고 현과장의 비명소리도.

하지만 한록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회사 내부 사람으로 인플루언서를 대체한다라. *임플로이언서지. 꽤 괜찮은데?’

*임플로이언서-회사 직원이면서 동시에 유명인으로 회사를 홍보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

최근 마케팅 업계에는 회사 직원이 직접 나서서 유명인이 되는 임플로이언서

가 유행이다. 우선 가장 큰 이유는 돈.

유명인을 쓰면 최소 몇억씩 드는 비용을 임플로이언서는 적은 비용으로 대체

할 수 있다.

거기에 오로지 그 회사만을 홍보하는 유명인이란 것 역시 큰 강점. 이 때문에

많은 대기업들이 사내 유튜버를 두곤 한다.

‘따지자면 빨간목도리 이동인 기자님도 신문사의 기자셨지. 그러다가 유명해

지신거고.’

그런 사람을 ck enm에서 발굴해낼 수 있다면. 그리고 재개봉과 관련된 일을

줄 수 있다면.

‘브랜드 로열티를 부여하기엔 딱인데. 재개봉에 접목할 수 있으면 좋겠네.’

하지만 문제는 ck enm에서 누가 임플로이언서를 담당하느냐는 것이었다.

‘마케팅을 잘 알고 있는 사람. 그리고 이 일을 할만한 사람. 무엇보다, 영화

를 아주 잘 아는 사람.’

보통 ck enm에 입사할때는 다들 영화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들어온다.

하지만 모든 회사가 그렇듯, 3년만 근무하면 애사심과 일에 대한 애정이 싹

사라지기 마련.

ck enm의 영화광들 역시 이제는 의무적으로 영화를 보는 직장인이 되어버렸다.

‘대체 누가 있을까. 영도?’

한록이 생각에 잠겨있을 때, 유선이 한록에게 다가왔다.

“대리님!”

“삼일의 삶 리뷰 벌써 끝났어요?”

“아뇨, 그게 아니고, 보셔야 할 게 있어서요.”

유선은 생글생글 웃으며 핸드폰을 내밀었고, 주위 사람들은 어쩐지 다들 웃는

얼굴이었다.

한록은 어리둥절한 채로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유선의 핸드폰 화면에는 영화

사이트의 게시글 하나가 떠 있었다.

그리고 그 게시글에 올라와 있는 것은...

“...나잖아?”

한록의 얼굴.

[회사에 이런 상사 있었으면 싶은 <지구 특공대> 담당 직원. 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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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뜨거운 반응이었다.

작가의말

한록: 부장님, 마케팅 방안입니다.

정부장: 너무 실험적인데?

한록: 예산이 줄어듭니다.

정부장: 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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