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일을 하길 잘했다(2)
로비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
한록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설득’의 무기를 가지게 된다.
정부장의 무기. 압도적인 전략과 카리스마.
오차장의 무기. 상대의 약점을 틀어쥐는 악독함.
한록의 무기. 합리적인 사고방식과 결과에 대한 보장.
그리고 현과장의 무기는 바로 이것.
‘좀 솔직해져 봐.’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타인의 선택을 기다리는 것.
‘이런 방식은 한번도 시도해본 적이 없지.’
솔직히 말하자면, 과연 이걸로 충분할까란 생각이 계속 든다.
하지만 한 번 쯤 시도해보고 싶은 이유가 있다.
‘지금까지 내 방식은 오차장이나, 정부장이랑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남을 공
격하냐 하지 않느냐의 차이뿐이지.’
하지만 현과장의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좀 더 근본적으로...그 사람의 마음을 사는 방식이다.’
자신이 몇 번이나 같은 팀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현과장.
진짜 ‘편’을 만들려면 그런 방법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기 직전. 한록은 다짐했다.
‘한번 해보자.’
문이 열리고, 굳은 얼굴의 윤감독이 보인다.
“오셨습니까, 윤감독님.”
한록이 인사를 건넸다.
*
“대리님. 안녕하세요.”
저번보다 한층 긴장한 얼굴로 한록에게 인사를 하는 윤감독.
한록이 고개를 숙이자, 본인도 깍듯이 고개를 숙인다.
윤감독은 얼핏봐도 50이 넘은 중년의 남자.
은퇴를 하기 전 회사에서는 차장, 부장이거나 혹은 사장일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자영업자거나.
어쨌든 서른살 대리인 한록에게 긴장할 만한 위치는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나 영화감독 같은 위치라면 더욱 그랬다.
하지만 윤감독은 내내 손을 떨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손에 쥐어진건..박카스
한 박스.
“대리님. 고생이 많으십니다.”
“...감사합니다, 감독님.”
거래처의 선물은 일절 받지 않는 성격인 한록.
하지만 이 박카스만은 외면할 수 없었다.
제발 웹개봉도 신경써달라고 어떻게든 부탁하려는 마음. 그 마음이 박카스 한
박스에서 느껴진다.
‘...간절한거다.’
꿈이 걸려있다면 사람이 간절해지기 마련이니까.
“감독님, 들어가시죠.”
한록은 윤감독을 15층의 회의실로 안내했다.
윤감독이 의자에 앉자마자 얘기를 꺼낸다.
“대리님. 웹개봉 마케팅 말입니다. 여전히 같은 생각 이신가요?”
“네, 맞습니다.”
“대리님. 다시 한번 생각해주십시오.”
윤감독이 아주 큰 결심을 한 듯 입을 열었다.
“대충 짐작은 하셨겠지만..저는 영화를 만들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냥 회사원
이었어요. 그런데 은퇴를하고, 처음으로 영화를 만들게 된겁니다. ck enm의
공모전에 당선이 돼서요.”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윤감독.
“정말 잘해보고 싶었습니다. 영화감독은 제 평생의 꿈이었으니까요. 내가 뭘
위해 30년동안 회사를 다녔나. 바로 이것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작비가 부족했어요. 그래서 대출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안 되는데.
가족을 생각했어야 했는데, 제가 눈이 멀었습니다. 대리님. 그런데 제 평생의
꿈이잖습니까. 도저히 돈 때문에 포기하고 싶진 않았습니다.”
“대리님. 저는 이제 삼일의 삶이 잘 될거란 기대는 하지 않습니다.”
윤감독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평생의 꿈’이 좌절되기까지 얼마
나 많은 생각을 했을지 말하지 않아도 짐작이 갔다.
“삼일의 삶이 얼마나 욕을 먹든, 어떤 안 좋은 이미지가 생기든 상관없습니
다. 욕을 먹어도 좋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한테라도 더 알려져서, 조금이라도
더 돈이 들어왔으면 합니다. 죄송합니다, 대리님. 감독이 할 말이 아니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대리님.”
“저는 감독이기 전에 애들 아빠고 가장입니다.”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가장, 부모, 보호자. 책임져야 할 사람이 있는 사람들.
자신이 좋은 것과 싫은 것은 다 포기해도 지켜야 할 것이 있는 사람들.
한록 역시 한서가 아팠던 지난 5년간 똑같은 감정을 겪은 사람이었다.
“감독님. 지금 말씀하시는 것, 당연한 얘기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감독들이
자기 영화가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죠. 부끄러운 얘기가 아닙니다.”
한록은 많은 생각 속에 어렵게 입을 열었다.
“감독님이 웹개봉에서도 적극적인 홍보를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
지만...제가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한층 안도한 듯한 윤감독. 윤감독이 자세를 고치고 한록에게 물었다.
여전히 ‘이게 될까’란 망설임 속에서 한록이 얘기를 시작했다.
“그건 제가 이 영화를 정말로 좋아한다는 사실입니다.”
“...”
“그냥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얼마전에 제 동생이 많이 아팠습니다.”
가족의 얘기에 윤감독의 표정이 조금 바뀐다. 당황한것과 동시에...한록의 말
을 경청하는 듯했다.
“그때는 많이 힘들었습니다. 다 포기하고 싶단 생각도 했어요. 하지만 저도
가장이니까요. 포기하는 대신 삼일의 삶을 봤습니다.”
<삼일의 삶>은 중년의 어부와, 30대 회사원의 삶을 교차로 보여주는 영화.
<삼일의 삶>에서 회사원은 지하철역에서 출근을 하던 중 이런 말을 한다.
‘인생은 지하철이랑 비슷한거 같아요. 지하철을 타고 있을 땐 직진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멀리서 선로를 보면 굽어져 있잖아요.’
‘인생도 그런거죠. 저는 최선을 다해 반듯하게 살았다고 해도 돌아보면 굽어
져 있는거요.’
인생에 대한 회환과 상념이 담긴 말.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감독의 시선은 최대한 배제되어야 하지만, 윤감독은 이
말을 듣고 결국 질문을 던지고 만다.
‘그래서, 인생이 후회되시나요?’
그에 대한 회사원의 대답.
그게 한록이 9년동안의 회사 생활을 버티게 해준 답이었다.
‘아뇨.’
‘왜요?’
‘아무리 굽어져도 지하철은 목적지에 도착하잖아요. 우리도 그렇겠죠.’
그렇게 대답하며 지하철에 오르는 회사원.
그리고 그의 옆에서 각자의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 지하철에 오르고, 내리는
사람들.
그 장면을 보고 있으면 언제나 ‘내일 하루쯤은 더 출근할 수 있겠다’는 마음
이 들곤 했다.
“그 말을 들으면 위로 받는 기분이 듭니다. 뒤를 돌아보면 굽어져 있다고 해
서 내가 잘못살고 있는건 아니구나. 멈추지 않고 계속 걷다보면 나도 어딘가
도착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거든요.”
윤감독의 눈시울이 조금 붉어졌다.
<삼일의 삶>은 사내시사회에서 악평을 받았다. 윤감독이 제대로 된 감상을 듣
는건 이번이 처음인게 분명했다.
50대 중년이 은퇴 후 만든 첫 영화. 시사회에서 혹평을 받고, 웹개봉으로 버
려지기까지 한 영화.
그리고 그 영화를 알아봐주는 누군가.
윤감독의 굽어졌던 길이 드디어 목적지로 도착하는 지금.
아마 윤감독에게는 정말로 특별한 순간이 분명했다.
한록이 오랫동안 생각해오던 말을 꺼냈다.
“감독님. 저는 영화가 존재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내일을 살아갈 힘을 주기위
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코미디 영화를 보고 웃고. 슬픈 영화를 보고 울고. 공감가는 영화를 보고 자
기 얘기라 생각하고. 그렇게 두 시간 동안 영화를 보고 극장 밖을 나와서, 사
람들이 내일을 더 잘 살아갈 수 있게 하는거요.”
이 길을 처음 접했을 때 했던 생각이고,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던 말이다. 심
지어 영도에게조차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한록은 정말 솔직하게 자신의 마
음을 얘기했다.
“그리고 저는 그걸 사람들한테 알리기 위해서 영화마케터가 된겁니다. <삼일
의 삶> 같은 영화를요.”
한록의 말에 윤감독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는...됐다.’
윤감독에게 자신의 말이 다 전달이 됐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 정도면 충
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면 전부 진심이었으니까. 이 이상의 말을 할 수
는 없으니까.
그리고 윤감독이라면, <삼일의 삶> 같은 걸 만드는 사람이라면 이해해줄 것이
란 생각이 든다.
한록이 숨을 한번 뱉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감독님.”
“저한테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저를 믿어주시겠습니까?”
갈등하는 윤감독의 얼굴.
고민,공포,걱정에 쌓인 표정.
그리고 잠시 후...
“네. 믿어보겠습니다.”
믿음.
*
“김영도, 어디냐? 밥 사줄게, 나와.”
미팅이 끝난후, 한록은 회사를 빠져나가며 영도에게 전화를 걸었다.
“회사.....못 나가....”
“퇴근 안해?”
“계약서 검토 이번 주까지 끝내야해...근데 형, 왜 이리 기분이 좋아보이냐?”
죽어가는 영도의 목소리. 반대로 한록의 목소리는 아주 상쾌했다.
“좋은 일이 있었어.”
“뭐? 무슨 일? 또 본부장님한테 칭찬 받았어.”
“아니, 그런거 말고.”
“뭔진 몰라도 좋겠다. 형. 나 좀 퇴근 시켜주라. 응? 이게 사는거냐?”
동생의 우는 소리에 한록은 기분 좋게 웃었다.
“이번주만 참아. 잘 끝내면 같이 영화보러 가자.”
“영화는 무슨 영화야. 회사에서 맨날 보는데.”
“그래도. 이건 너도 좋아할거야.”
“으, 알았어...형! 차장님 오셨다! 끊어!”
그러더니 황급히 전화를 끊는 영도. 한록은 피식 미소를 지으며 영도의 사무
실을 올려다보았다.
17층. 저기서 아직도 일을 하고 있을 영도. 영도도 언젠가 일을 마치고 집으
로 돌아갈 것이다.
지금 한록을 지나치는 윤감독이 탄 버스. 윤감독도 저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
아갈 것이다.
그리고 한록 역시 오늘의 일을 모두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렇게 하루 하루 살아가다가 목적지에 도착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위한 영화 <삼일의 삶>.
하루종일 보고 싶은 영화, 그리고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은 영화를 볼 때면 드
는 생각이 있다.
‘아. 기대 된다.’
나는, 역시...
‘어서 개봉하고 싶다.’
이 일을 하길 잘했다.
*
다음날 아침.
“이한록. 들어와.”
정부장이 한록을 사무실 옆 회의실로 불렀다.
“본부장님이 무슨 얘기 하셨어?”
며칠 전, 한록이 로비에서 최경준을 만난 얘기를 하는 것이었다.
“‘숙제’는 잘하고 있냐고 하셨습니다.”
“무슨 숙제?”
“충분히 생색을 내야한다고 말씀하신거요. 그게 없으면 gv의 사업화는 어려울
거라고 하셨습니다.”
“쓰읍...”
정부장이 한번 숨을 들이쉰다. 뭔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한록이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gv 사업화 프레젠테이션, 한달 뒤로 잡혔다.”
gv를 신사업으로 육성하기 위한 프레젠테이션. 임원진들을 앞에 두고 직접 사
업에 대해 설명해야하는 자리였다.
“그렇게 빨리 말입니까?”
“본부장님이 추진하셨어. 재무부에서도 최대한 빨리 예산 보내준다고 한다.”
항상 느끼지만, 정부장이나 최경준이나 추진력이 대단한 인간들이다.
한록 역시 뭐 하나에 빠지면 뒤도 안 돌아보는 스타일이다.
‘그래도 자기 말 한마디에 회사가 움직이는 위치면 좀 신중할 법도 한데.’
아마 정부장이나 최경준 눈에 그만큼 gv가 좋아보인단 뜻인 듯 했다.
“네. 그 전에 기획안 짜고 디벨롭 해보겠습니다.”
“그건 당연한거고.”
그러나 오늘 정부장이 할 말은 프레젠테이션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이 아닌
것 같았다.
“그 프레젠테이션. 네가 할거다.”
예상은 적중.
“제가 말입니까?”
“왜. 무서워?”
“아뇨. 다만 제가 프레젠테이션을 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닌 것 같습니다.”
신사업 프레젠테이션 정도면, 못해도 팀장은 되어야 할 일이다. 그런데 한록
은 고작 대리.
아무리 한록이라도 이건 전례가 없는 일이다. 회귀 전 몇 번이나 프레젠테이
션을 해봤지만, 대리의 자리에서 해본 적은 없었다.
“그럼 누가해? 현과장이 하나? 현과장이 gv를 너만큼 잘 알고 있을 것 같아?
사업 담당자가 해야지.”
정부장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다.
어차피 본부장이 참여할거라면, 직함 같은 것 보다는 사업을 제대로 소개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래도 현과장님이 팀장이시니..”
“본부장님 지시다.”
정부장의 말.
그 한마디로 모든게 정리됐다.
“본부장님이 네가 하는게 보고싶으시단다.”
“...알겠습니다.”
사실 프레젠테이션을 하란 것에 놀랄 뿐이지, 긴장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최경준의 얘기를 들으니 무게감이 확 달라진다.
정부장이 한숨을 한번 쉬고는 말했다.
“이한록. 난 본부장님 말이라고 따를 생각은 없어. 대리한테 프레젠테이션 맡
겼다가 사업 말아먹을 일 있냐? 현과장한테든, 오차장한테든 넘기면 그만이야.”
아까와는 전혀 다른 얘기. 이제는 최경준의 지시가 아니라 정부장 자신의 얘
기를 하는 것이었다.
정부장도 어지간한 성격의 사람이다. 최경준이 한록을 예쁘게 보든, 말든, 어
쨌든 gv는 성공시켜야겠다는 태도.
그러나 정부장의 얼굴에 걸려있는 것은 짜증이나 답답함 같은게 아니었다. 한
쪽만 올라간 눈썹. 어딘가 불만스러운 얼굴...
‘아.’
한록은 정부장의 마음을 읽었다고 확신했다. 정부장이 저런 표정을 지을땐 항
상 실의 색이 노란색으로 변하곤 했다. 다시 말해-
“그러니까, 지금 제대로 대답해.”
정부장이 기대를 하고 있을 때였다.
“할 수 있겠냐, 이한록?”
정부장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고.
“네, 할 수 있습니다.”
한록은 당당히 말했다.
“하아.”
정부장은 한록을 앞에 세워두고, 혼자 회의실 안을 걷기 시작했다.
실적에 미친 소시오패스 정부장. 본부장의 말도 듣지 않는 정부장.
그런 정부장이, 고작 대리에게 사업하나를 맡길 수 있냐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 것이다.
“이한록.”
10분 정도 바닥을 노려보던 정부장이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말했다.
“가자.”
자신의 믿음을.
작가의말
[삼일의 삶의 대사는 ‘다큐멘터리 3일 구로역’ 편에서 인용하였습니다.]
저는 아주 가끔 이 일을 하길 잘했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럴 때가 있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