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일을 하길 잘했다(1)
“이건 제 프로젝트입니다.”
한록의 말.
‘구과장이 이 말을 들으면 뭐라고 할까?’
아마 너 미쳤냐거나, 회사 그만두고 싶냐는 말을 하겠지.
‘정부장님이라면 자기보다 잘 할 자신 있냐고 실력으로 찍어누를거고. 현과장
님이라면...애초에 이런 일이 안 일어나겠지.’
셋의 공통점이 있다면 어쨌든 한록이 예상 가능한 범위라는 것이다.
하지만 오차장은 다르다.
“현과장이 널 얼마나 데려갈까?”
이게 바로 오차장의 방식.
오차장에게는 지금 얘기하는 화제가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상대를
제압하는 것 뿐이다.
인간관계에 익숙하지 않고, 지금 당장의 일이 잘 끝나냐 아니냐만 생각하는
한록. 그런 한록은 오차장의 수법 앞에선 늘 무너지곤 했다.
“gv가 잘 끝났나 봐. 현과장이 괜찮은 사람이니까 별 문제도 없었을거고. 이
대로만 진행하면 된다고 생각했겠지. 부장님이 최근 좋게 보고 계시니 현과장
팀으로 옮길 생각도 했겠군.”
오차장은 정부장이 그랬던 것처럼 한록의 속마음을 모두 읽고 있었다.
‘정말로 쉽지 않은 상대다.’
거칠고, 상식 따위는 통하지 않는 영화 업계. 거기에 한국에서 손꼽히는 대기업.
거기서 살아남아서 부장까지 간 사람이다.
지금 한록의 전략들 따위는 아마 애들 장난으로 느껴질게 분명했다.
“길어봐야 3년이야. 그쯤이면 네 과장 승진 얘기가 나오겠지. 그때 현과장은
어떨까. 차장 정도 달았을거라 생각하나? 착각하지 마. 현과장은 뛰어난 사람
이 아니야. 지금도 몇 년동안 성과는 못 내면서 자식 때문에 자리나 지키고
있는 사람이 차장이라니, 웃기지도 않군. 3년이 지나면 책상을 빼야하는 상황
일거야.”
현과장을 거의 난도질하는 오차장.
하지만 안타깝게도 미래는 오차장의 말대로 흘러갔다.
‘정확히는 오차장이 그렇게 만들었던 거지.’
곧 있을 부산영화제.
거기서 현과장이 조금 두각을 나타내려고 하자, 오차장은 현과장의 싹을 잘라
버렸다.
부산영화제 이후로 오차장은 정부장의 오른팔이 됐고, 마케팅부서의 분위기는
엉망이 됐다.
“그런 상황에서 과장으로 승진한 부하라...현과장이 잘도 널 끌어주겠군.”
본인이 생각한, 아니 본인이 만들어갈 미래를 말하던 오차장이 한록을 바라보
았다. 그리고 물었다.
“이한록. 사람을 믿나?”
한록은 답이 없었다.
괜한 망상일수도 있다. 하지만 이 질문이 앞으로의 삶을 결정할거란 생각이
들었다.
한록은 자신의 손목에 엮인 실들을 바라보았다.
사람과의 믿음, 관계 같은 것들.
오차장은 절대 믿지 않는 것. 그리고 과거의 한록도 믿지 않던 것.
그리고 이제는...
“네. 믿을 수 있는 사람만 믿습니다.”
<능력>을 통해 오로지 한록만이 알 수 있는 것.
“못 본 사이에 더 순진해졌군. 그래서 네가 매번 속는 거야.”
“절 속일 사람과 속이지 않을 사람 정도는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경험과 이 실을 통해 이제는 알 수 있다. 누굴 믿을 수 있는지, 어느
정도의 호의를 바랄 수 있는지. 앞으로 누구와 함께 해야할지 같은 것들.
“퍽이나 그렇겠군.”
아마 오차장은 영원히 알 수 없는 것들이 분명했다.
“이한록. 네가 달라졌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알아. 꽤 마음에 드는 변화군."
오차장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더 이상 자신의 수법이 한록에게 통하지
않는 다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한 번 경험해봐야 아는 것들도 있지. gv와 재개봉 정도는 혼자 해 봐.”
“혼자가 아니라 현과장님과 같이 할 프로젝트들입니다.”
"아, 그래."
한록의 말에 오차장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은 그렇겠지.”
*
드디어 오차장에게서 풀려난 한록.
한록은 자신의 자리에서 생각에 잠겨있었다.
‘gv와 재개봉은 지켰다.’
오차장은 gv와 재개봉을 포기했다. 이제 한록이 자신의 통제를 벗어났다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하지만 개운한 기분만은 아니었다.
[현과장이 얼마나 널 데려갈까?]
‘오차장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실제로 한록이 과장이 되었을 때 그때 부서의 모든 차장, 과장이 한록을 부담
스러워했다.
당연한 얘기다. 부하직원이 성과를 내면 기쁜 것도 어느 정도가 있다.
그 성과가 ‘나한테 도움이 될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는다면. 어느새 부하가
자신의 옆에 서기 시작하면 얘기는 달라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걸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오차장 뿐이었다.
한록은 손목의 실을 바라보았다.
매듭이 지어진 유선의 실. 이 매듭을 보는 순간 확신했다. 유선은 절대 자신
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가장 두꺼운 영도의 실. 아마 오랜 인연을 나타내는 것 같았다.
반은 검은색으로, 반은 노란색으로 물든 정부장의 실. 정부장의 믿음은 어디
까지나 한록의 능력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가장 가는 현과장의 실.
‘내 편이 필요하다.’
오차장은 언제고 다시 더러운 수법을 쓸 것이고, 그때를 대비해서는 한록의
편이 필요했다.
하지만 아직 유선씨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편이라는 확신은 들지 않
았다.
‘대체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상대의 약점을 틀어잡고 절대 벗어날 수 없도록 만드는 오차장.
그런 오차장이 현과장에게, 영도에게 손을 내민다면?
현과장에게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자리가 위험하게 될 거라고 한다면.
영도에게 한록을 뛰어넘을 수 있는 성과를 달성할 수 있게 될 거라고 한다면.
그때도 그들이 자신의 편을 들까?
지금까지 해온 걸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계속 든다.
‘나는 어떻게 해야하는 거지?’
점점 머리가 아파왔다.
[이대리님. 오늘 7시에 뵙겠습니다.]
그리고 그 때 도착한 문자.
<삼일의 삶>의 윤감독이었다.
몇 주 전 윤감독과 첫 미팅을 가졌고, 결과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윤감독은 한록의 마케팅을 신뢰하지 않았고, 한록은 윤감독을 설득하지 못했다.
‘마케팅이 잘못된 건 아니야. 이대로 가면 반드시 성공하겠지.’
마케팅 방안은 완벽했다. 정부장 역시 ‘손 댈 곳이 없다’며 통과시켰으니까.
다만...그 방법이 조금 특별했을 뿐이다.
‘마케팅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윤감독은 납득하기 어려웠겠지. 예상은 했지
만...반응이 너무 안 좋았다.’
완벽한 마케팅 계획. 그러나 클라이언트를 설득할 수 없는 상황.
마케팅을 하다보면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이걸 대체 어떻게 해결해야하지?’
한록은 의자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
6시. 오늘도 어김없이 칼퇴를 하려던 현과장의 눈에 한록이 들어왔다.
gv가 성공적으로 끝나고 본부장의 눈에 든 한록.
회사에서는 하루종일 한록에 대한 얘기가 오갔다. 그러나 정작 소문의 주인공
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현과장이 한록에게 말을 걸었다.
“이대리. 안 가고 뭐해?”
“오늘 윤감독님과 미팅이 있습니다.”
“아, <삼일의 삶>. 잘 되고 있어?”
“네. 잘-”
거기까지 말하던 한록을 말을 멈췄다.
‘그냥 솔직히 말해볼까?’
평소의 한록이라면 ‘아무 일도 아닙니다’라고 하며 혼자 책임졌을 일이다. 아
무도 한록을 도와주지 않으려다 보니 습관이 된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말을 하고 싶었다.
거기에 현과장은 지금 가장 필요한 사람이기도 했다.
오차장은 현과장이 아무 능력도 없는 사람이라 말한다.
하지만 한록은 안다. 현과장에게는 오차장이 알아보지 못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바로 장감독을 설득하고 한록을 매료시킨 능력. 사람을 설득할 줄 아는 기술
말이다.
‘그래. 한 번 물어보자.’
결정을 내린 한록이 말했다.
“아뇨. 막혔습니다.”
한록의 말에 현과장이 놀란 표정을 짓는다.
소문난 천재 이한록. 늘 ‘제가 알아서 합니다’를 달고 살고, 실제로도 알아서
하던 이한록.
그런 한록이 처음으로 피곤한 얼굴을 보여준 것이다.
그저 인사나 하고 지나치려던 현과장이 한 번 더 질문을 던졌다.
“왜? 재개봉도 잡히고, 부장님이랑 얘기도 잘 됐잖아. 마케팅 좋다고 하시지
않았어?”
“윤감독님이랑 의견차이가 있습니다.”
이제 현과장은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오늘 유진이랑 마법공주 레미 보기로 했는데...그럼 지금 당장 뛰어가야지
차 안막히는데. 여기서 무슨 차이냐고 물어보면 절대 안 돼.’
‘근데 무슨 일이지? gv 때문에 신경을 못 써서 그런가?’
칼퇴를 향한 욕구와 동료를 향한 걱정중에서 흔들리는 현과장의 마음.
그런 현과장의 마음을 알아챈 한록이 옅게 웃었다.
아마 약속이 있는 모양이다. 이렇게 된 이상 현과장을 붙잡아 둘 순 없었다.
“과장님. 들어가보세요. 유진이가 기다리잖아요.”
그리고 한록이 딸의 이름을 입에 올린 순간 현과장과 이어진 한록의 실이 반
짝였다.
‘그래도...평소엔 아무 티도 안 내던 녀석이 이러고 있는데. 그냥 넘어가긴
좀 그렇지?’
술자리에서 죄송하다고 말하던 모습이나, 웃던 얼굴들. 그리고 오늘 답지 않
게 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한록의 모습들이 마음에 밟힌 것이다.
결국 현과장은 한록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이, 일단 말해봐. 무슨 일인데?”
“괜찮습니다. 내일 말씀드릴테니 퇴근하세요.”
“미팅은 오늘이잖아. 이러다 더 늦어진다. 유진이한테 이대리 때문에 늦어졌
다고 하기 전에 빨리 말해봐.”
현과장의 넉살 좋은 말에 한록은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얘기를 시작했다.
*
한 평론가가 영화 ‘그래비티’를 두고 한 말이 있다.
*‘어떤 영화는 관람이 아니라 체험 된다.’
이 말은 <삼일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얘기였다.
50대의 중년, 그리고 20대의 청년. 그들의 3일간의 삶을 따라가는 영화 <삼일
의 삶>. 관객은 그들의 삶을 직접 살아보는 것 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건 침대에 누워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는 것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경험이다.
영화 중에는 반드시 극장에 가서 봐야 제대로 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영화들
이 있다. 그런 영화를 집에서 본다는 건 거의 미완성 영화를 보는거나 마찬가
지. 그리고 <삼일의 삶>이 바로 대표적인 ‘영화관에서 봐야하는’ 영화였다.
그래서 <삼일의 삶>은 웹개봉 당시 어마어마한 혹평을 받았다.
‘ㅈㄹ지루함.’
‘걍 다큐임..다큐 좋아하는 분은 보셈 아니 다큐 좋아하는 분도 다른거 보셈
ㅎㅎ 내용이 없음.’
‘남의 일기를 왜 영화화 하나요?’
과거 <삼일의 삶>이 웹개봉 했을 때 <삼일의 삶>을 본 사람들의 감상평이었다.
웹개봉인 <삼일의 삶>을 홍보해봤자 아무런 실속이 없다. 오히려 <삼일의 삶>
에 안 좋은 이미지만 더해져서 재개봉에 방해만 될 뿐이다.
‘내가 해야할 일은 사람들이 웹개봉을 보게 하는 게 아니다. 극장에서 열리는
재개봉을 보러 오게 하는거야.’
그런 목표를 잡고 전략을 짜기 시작한다.
처음 해보는 시도였지만, 전략을 짜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관객이 적을수도 있다는 걸...각오하라구요?”
윤감독을 설득하는 것.
“네. 대신 그 관객을 전부 재개봉으로 유도할 예정입니다. 웹에서의 노출은
최대한 적게. 대신 ‘극장에서 봐야하는 영화’를 어필할 거예요.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웹개봉은 <삼일의 삶>에게 기회가 아니라 독입니다.”
실제 제품이 나오기 전까지 홍보를 최대한으로 줄이는 것. 일명 신비주의 마
케팅.
애플에서 자주 활용하는 마케팅이다.
“무작정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게 꼭 좋은 결과를 가져오진 않습니다.”
보통 클라이언트는 ‘최대한 많은 사람한테 많이 알리는게 좋은거 아닌가?’라
고 생각한다.
영화도, 홍보 창구도 제한적인 예전에는 그랬다.
하지만 요즘의 소비자들은 수많은 광고와 마케팅에 노출된다. 그러다보니 마
케팅의 효과는 작아지고, ‘대놓고 하는 마케팅’은 오히려 피곤해하기 마련.
드라마나 유튜브에서의 ppl을 사람들이 싫어하는 이유이다.
‘최대한 타겟팅 소비자에게 맞춰서. 꼭 그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마케팅을 해
야한다. 그렇게 파급효과를 노린다.’
한록이 열심히 설명했지만 윤감독의 얼굴은 그럴수록 딱딱하게 굳어갔다. 한
록은 윤감독의 얼굴에서 정확한 감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대리님. 그래도 이건...”
분노.
“아무리 사내 평가가 안 좋았다해도 홍보는 해주실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부끄러움.
“비록 웹개봉이고, 대리님이 볼땐 망할 영화 같겠지만, 그래도...”
“그래도 제 모든걸 담아 만든 영화란 말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평생의 꿈이 무너질 수 있다는 공포였다.
“...대리님. 저는...웹개봉때도 본격적인 홍보가 있었으면 합니다.”
그럼에도 윤감독이 말할 수 있는 건 겨우 이 정도 뿐이다.
웹개봉으로 밀린 영화감독. 대기업에 속한 그 영화의 마케팅 담당자. 어쩔 수
없는 갑을 관계.
‘이건...오차장의 방식이다.’
오차장과 똑같은 인간이 될 순 없다.
한록은 이런 방식으로 윤감독을 설득하고 싶진 않았다.
“알겠습니다, 감독님. 저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래서 저번 미팅에선 한록도 한발 물러났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마케팅 방안을 바꿀 순 없었다. 한록은 이미 결과를
알고 있으니까.
‘과연 사람들이 안목이 없어서 삼일의 삶을 욕한걸까?’
한록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한국관객의 수준은 정말로 높으니까.
다만 집에서 핸드폰으로 봐도 되는 영화가 있고, 아닌 영화가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두시간동안 오로지 눈앞에는 영화밖에 없는 환경. 그 영화 외에는 다른 아무
것에도 방해받지 않는 환경. 그래서 영화의 삶에 흠뻑 빠져들 수 있는 환경.
삼일의 삶은 그 환경을 만들어줘야 즐길 수 있는 영화다.
그걸 안 상황에서 삼일의 삶이 똑같은 평가를 듣게 하고 싶진 않았다.
*
한록의 얘기를 들은 현과장이 말했다.
“아, 역시 마케팅 문제는 아니네. 내가 들어도 괜찮아보이는데.”
문제는커녕 <삼일의 삶>을 정확히 이해한 마케팅이다.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 것인가’ 를 파악하고, 그를 위한 환경까지 조성해주는 마
케팅.
윤감독의 반대에 이대로 사라지기는 아깝단 생각이 든다.
“윤감독님이 받아들이지 못하시는 것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재개봉이 잘 되리
란 보장이 없으니까요.”
“아무래도 그렇지. 우리야 이대리 능력을 다 알지만, 윤감독님은 처음 보는
사람이니까. 웹개봉은 망할거지만 재개봉을 기다려라-라는 말을 어떻게 믿겠어.”
현과장이 진지한 목소리로 답했다. 어느새 현과장은 한록의 고민에 깊이 공감
하고 있었다.
어쨌든 마케팅 담당자는 한록이다. 그냥 밀어붙이면 윤감독이 반대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한록은 윤감독도 설득하고 싶고, 마케팅도 제대로 해보고 싶었다.
사람 마음을 잘 다루지 못하는 자신에게는 어려운 일이란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어찌보면 제 욕심일수도 있습니다.”
“그런가? 그래도 한번 더 설득해볼만 한 것 같은데.”
그러나 현과장의 생각은 좀 다른 것 같았다.
사람 다루는 것에 뛰어난 현과장. 그의 눈이 반짝인다.
“이대리, 내가 만약에 감독이면 말이야. 상대가 아무리 논리적인 얘기를 해도
‘그러니까 이 영화 지금은 홍보 적당히 하려고 합니다.’ 하면 끝이야. 그러면
은, 사람이 삔또가 상해서 정상적인 판단이 안돼.”
현과장의 지적은 정확했다. ‘홍보를 줄이려고 한다’는 말을 하자마자 윤감독
의 표정이 굳었던 기억이 난다. 그 뒤로 윤감독에게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
을게 분명했다.
“마케팅할 때를 생각해봐. 이 영화가 얼마나 작품성이 있다, 이 영화가 어떤
기법으로 만들어졌다, 그런거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잖아. 사람들이 딱 보고.
딱 마음에 꽂히게. 그렇게 하는거잖아.”
그리고 한숨 고르더니 아주 중요한 말을 하는 현과장.
“우리는 그 사람의 생각을 설득하는게 아니라 마음을 설득하는거잖아.”
그 말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네, 맞습니다.”
“이것도 똑같아. 윤감독을 논리적으로 설득하는게 아니라 마음을 얻는다고 생
각해 봐. 그러면 방법을 알 수 있지. 이제 됐지?”
‘마음을 얻는다라...’
인간관계와 마케팅이 결국 같은거라면.
단 한사람. 눈앞에 있는 단 한 사람을 마음을 얻으려면, 대체 어떻게 해야하
는걸까?
‘.....’
‘..........’
‘..................’
그래!
는 무슨. 하나도 모르겠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는 그 방법을 아는 사람이 있다.
‘이런것까지 물어봐도 되나?’
너무 약점을 보이는 건 아닐까. 귀찮아하지 않으려나.
회사란게 그렇다. 약점을 보이는 순간 이용당하고, 귀찮게 구는 순간 내쳐진다.
하지만 망설임은 잠깐이었다.
현과장의 손목에 반짝거리는 저 실. 한록에 대한 현과장의 호의.
그걸 보니 자신감이 생긴다.
‘된다.’
오차장은 절대 모르는, 이 손목의 실이 의미하는 사실. 바로 ‘이 사람이면 괜
찮다’는 것.
한록이 확신을 가지고 현과장에게 물었다.
“저는 그걸 어떻게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게 항상 어려웠습니다. 어떤
방법이 좋을까요?”
“모르겠어?”
“네.”
“오늘 이대리가 신기한 모습들을 보여주네. 이대리가 못하는 것도 있고, 도와
달랄 때도 있어.”
“네, 저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남들한텐 비밀입니다.”
한록이 피식 웃자 현과장이 의아한 듯 물었다.
“왜? 이대리가 뭐 초능력자도 아니고. 막히는게 뭐 어때서.”
“다들 제가 일을 잘해서 참아주는 거니까요. 그래서 그냥 혼자 해결하고 싶습
니다. 제가 기대려하면 다들 싫어할 겁니다.”
한록의 솔직한 마음. 영도에게나 해왔던 얘기들이다.
“그럼 나는 괜찮고?”
“네. 현과장님은 괜찮습니다.”
“허, 참...”
한록의 말을 듣자 현과장의 실이 다시 한번 반짝였다. 그러더니 현과장은 아
주 깊은 생각에 빠진 듯한 표정이 되었다.
“방법이야 많은데. 지금 이대리가 할 만한게 있다면...음....”
한참을 생각에 잠긴 현과장.
한록을 빤히 바라보며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본다.
“아.”
그리고 마침내 무언가 생각난 듯 말했다.
“좀 솔직해지는 거?”
“...솔직해지는 거요?”
“응. 재개봉이 솔직히 잘 안 될 수도 있다. 근데 내가 본부장도 지켜보는 인
재다. 내가 이만큼 능력 있으니까 쫄딱 망할 것 같진 않다. 나도 뭐 영화 망
하라고 이런 계획 짜겠냐. 나 진짜 이 영화 좋아하고, 그래서 열심히 해보고
싶다. 그러니까 좀 도와달라고. 한번만 믿어달라고. 그렇게 다 말해보는 거.”
“...윤감독님한테 그걸 전부 말한다구요? 두 번째 보는 사이에요?”
“마케팅이랑 똑같아. 어차피 우리는 남을 설득할 수 없어. 결정은 그 사람들
이 하는 거지. 그러면 그 사람들한테 정보를 줘야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
슨 생각을 하는지, 날 믿어도 되는지 아닌지 말이야.”
“속마음을 다 말해버린다라...”
“이대리는 그걸 너무 감추잖아. 혼자 고민하고, 혼자 해결하고. 근데 사람들
은 말이야, 너무 완벽한 사람은 안 좋아해. 오히려 자기랑 비슷하거나 못한
사람을 좋아하지. 자기랑 비슷하게 힘들어하고, 자기랑 비슷하게 도움을 바라
는 사람. 동질감이 느껴지거든.”
남한테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
한록이 단 한번도 생각해본적 없는 부분이다. 한록은 주위에서 언제나 ‘감정
표현에 서투른 사람’으로 통하곤 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한록이 현과장을 좋아하는 이유 역시 이런 솔직함 때문이
었다.
그리고 한록이 주위를 둘러보고 자기 마음을 얘기하기 시작했을 때. 영도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유선에게 ‘잘하고 있다’고 말했을 때. 그때 모든 관계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정말 그걸로 괜찮을까요?”
한록이 머뭇거리자 현과장이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말했다.
“응. 난 잘할거 같은데? 오늘도 잘했잖아.”
“예?”
“나한테 힘들다고 했고. 도와달라 했고. 그래서 내가 퇴근도 안하고 이러고
있잖아.”
“그건 현과장님이 좋은 분이라 그러신 것 아닙니까.”
“아니지! 반대야. 우리 천재 대리님이 진짜 인간관계는 모르는구만.”
현과장이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차며 말한다.
“내가 좋은 사람이라 이대리를 도와주는게 아니야. 이대리가 일 열심히하고,
진짜로 삼일의 삶이 잘 되길 바라는거 같아서 도와주는거지. 무슨 말인지 알
겠어?”
“네. 알겠습니다.”
“아니, 모르고 있는데?”
그리고는 아주 애정 어린 눈빛으로 한록을 보더니-
“내 말은 말이야-”
*
“난 가본다, 이대리. 안 되면 다음에 밥이나 한번 사줄게.”
“네, 감사합니다.”
현과장이 손을 흔들며 사라졌고 이제 사무실엔 한록만이 남았다.
시간은 6시 40분. 이제 곧 윤감독이 도착할 시점이었다.
‘나를 보여주고 마음을 얻는다라...’
한록의 인정을 받고 싶어하던 영도와 유선.
한록이 그리던 계획을 정확히 파악하던 정부장.
그들과 달리, 지금은 오로지 말 하나로 윤감독을 설득해야 한다.
‘현과장님 말이 맞을까?’
솔직한 마음을 보여주고, 선택을 맡긴다.
그게 가능한 일일까.
한참 생각하던 한록은 손목의 실을 바라보았다.
아주 가는 연분홍색의 실. 현과장과 엮인 실이었다.
이 실이 생긴 순간은...
‘그냥 유선씨와 계속 일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한록이 솔직한 마음을 드러냈을 때.
그리고 한록의 진심에 현과장이 감동했을 때다.
‘내가 윤감독을 설득 할 수 있을까. 윤감독님이 날 믿어줄까.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확신을 내릴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내 말은 말이야-’
‘이대리가 좋은 사람이라 내가 돕는다는 거야.’
‘그러니까 사람들도 알아봐 줄거야.’
현과장의 그 말을 한번 믿어보고 싶었다.
[이대리님. 로비에 도착했습니다.]
윤감독의 문자에 한록은 로비로 향했다.
*
로비를 빠져나오던 현과장은 건물로 향하는 윤감독을 발견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과 떨리는 손을 보니 한록의 말처럼 상황이 잘 풀리지 않
는 모양이었다.
‘아뇨, 막혔습니다.’
처음으로 보는 한록의 걱정스러운 얼굴. 그리고 도움 요청.
‘좀 인간적이었지.’
한록은 입사 3년만에 웬만한 대리급들과 동등한 자리에 섰다.
모두가 그런 한록을 존경하거나, 질투하거나, 두려워했다.
‘그러다가 사수까지 나가버리고. 아마 기댈 사람이 하나도 없을거야.’
그렇게 고립되어가던 한록.
하지만 오늘 한록은 자신에게 도움을 청했다.
[네. 현과장님은 괜찮습니다.]
‘내가 뭐가 괜찮아. 승진은 밀렸고, 만년과장에, 맨날 칼퇴만 하는데.’
회사에서 점점 작아지는 입지. 가끔 느껴지는 후배들의 무시어린 시선.
그럼에도 자신을 따르며 마음을 연 한록.
그런 한록이, 참...
‘고맙네.’
참 고마웠다.
시간은 벌써 7시. 이제 한참 길이 막히고, 집에 가면 딸에게 혼이 나겠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현과장, 아직 완전히 죽지는 않았나 보다. 그치?’
어깨가 약간 으쓱해진 현과장은 다시 한번 회사 건물을 바라보았다. 이제 곧
저 빌딩 15층에선 한록과 윤감독의 한판 승부가 벌어질게 분명했다.
그리고 아마 한록은 잘 해낼 것이다.
‘나도 믿는다, 이한록!’
현과장은 버스를 타기 위해 달리기 시작했다.
작가의말
[*어떤 영화는 관람이 아니라 체험된다.
이동진 평론가님의 <그래비티> 평론입니다.]
오늘은 만자입니다.
최경준이 생색을 많이 내라고 해서 저도 한 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