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17화 (17/263)

법인카드다!(2)

입구의 줄 옆에 서 있는 키 큰 중년 남자.

ck enm의 영화사업부 본부장 최경준이었다.

“본부장님!”

영화관 맨 윗줄에 있던 정부장이 내려가려 했으나, 최경준이 짧게 손을 들었다.

괜히 소란을 만들지 말란 뜻이다.

정부장은 자리에 멈췄고, 이제 최경준을 응대하는 건 입구 옆에 서 있던 한록

과 현과장의 몫이 되었다.

“본부장님, 안녕하십니까. 영화마케팅부 현주훈 과장 입니다.”

현과장과 한록이 최경준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다들 퇴근도 못하고 고생이 많네.”

그러자 간략히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최경준.

ck enm의 최연소 기획부 부장. 2000년대 당시 올드맨, 불친절한 은주씨, 몬스

터 등을 제작하며 한국 영화의 품격을 올린 사람.

이후로는 한국 영화를 해외에 알리면서 ‘한국 영화붐’을 일으킨 장본인.

그가 지금 한록의 gv를 보러 온 것이었다.

“현과장, 오랜만이군. <늦가을> 잘 봤네. 요즘은 통 소식이 안 들린다더니 이

런 일을 하고 있었군. 앞으로 gv 기대하겠네.”

“아, 네, 네! 좋은 모습 보여드리겠습니다!”

최경준의 말에 현과장이 깜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최경준이 자신을 기억하고

있단 사실에 놀란 것이었다.

“아니, 재밌는 프로젝트를 한다기에 구경 온 거야. 나는 신경쓰지 말고 진행

하게.”

부드럽게 답한 최경준은 이번엔 한록을 바라보았다.

지금 한록의 목표. 최경준. 그와의 첫 마주침이다.

‘어떻게 해야할까?’

짧은 시간 사이에 여러 생각이 오간다.

그러나 한록은 사탕발린 말을 하는 대신 고개를 숙이며 짧게 인사를 건넸다.

“본부장님, 안녕하십니까. 영화마케팅부 이한록대리라고 합니다. gv 잘 끝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한록이 최경준을 잘 아는 것은 아니나 예전의 9년간 보아온 것들이 있다.

허례허식이나 아부는 통하지 않는, 철저한 능력주의인 사람.

거기에 자신에게 오려던 정부장을 저지하는 모습까지.

‘지금 내가 보일 모습은...본부장 앞이라고 신경을 쓰는게 아니라, 맡은 gv를

잘 끝내는 것이다.’

“그래, 이한록.”

최경준이 한록의 짧고 간결한 인사에 미소를 짓는다. 아마 한록의 예상이 적

중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미처 한록이 예상하지 못한 일도 있었다.

“당연히 알고 있지. 작년에 <탈출>을 맡았었지. 잘 봤네.”

최경준이 한록을 알고 있던 것이다.

“이번 gv도 자네 아이디어라지. 영화 마케팅부는 좋은 인재를 뒀군. 덕분에

나도 재밌는 구경을 하겠어.”

최경준은 현과장에 이어 한록을 기억하고 있었다. 심지어 한록이 맡았던 영화

와 gv기획마저 알고 있었다.

한록이 아무리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지만, 일개 대리까지 알고 있다니. 거기

에 현과장과, 현과장이 요즘 부진하다는 것 까지 알고 있다. 회사 전체를 꿰

뚫고 있지 않다면 불가능한 사실이었다.

한록은 본부장이 자신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기쁨보다는 놀라움이 먼저

들었다.

‘역시...대단한 사람이다.’

그러나 한록은 최대한 감정을 절제하고 답했다.

“말씀 감사합니다. 이번 gv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하하, 나는 신경쓰지 말라니까. 그럼 들어가보겠네.”

이번에도 한록의 대답이 틀리진 않았는지 최경준이 다시 한번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뒤따라오려는 현과장을 만류하고 객석으로 올라갔다.

“어우...본부장님이 지켜보고 계시다니...”

최경준이 객석으로 올라가자 현과장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ck enm의 본부장

이면 거의 사장급의 위치.

오너 일가를 볼 일이 없는 일개 회사원들에겐 최고 권력자나 마찬가지였다.

현과장이 긴장하는 것도 당연했다.

“어우, 어우. 이대리. 우리 어떡하냐. 이거 진짜 잘 끝나야 하는데...”

혹시나 무슨 실수라도 해서 최경준의 눈밖에 날까 걱정하는 현과장.

그러나 한록은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유선씨, 잠시만요.”

“네!”

“이거 받으세요.”

한록이 유선에게 내민 것은 gv의 반응을 체크하기 위한 설문지와 볼펜이었다.

입장시에 종이와 펜을 나눠주는데, 최경준은 한록과 현과장과 대화를 하느라

받아가지 않은 것이다.

유선이 설문지를 받아들자 한록이 말했다.

“본부장님이 이걸 안 가져가셨어요. 본부장님한테 드리고 오세요.”

“네? 아, 네, 네!”

본부장이란 말에 바짝 긴장하는 유선. 그러나 한록의 지시는 끝이 아니었다.

“드리기 전에 인사 드리세요. 그리고, 유선씨 이름 꼭 말하세요. 영화마케팅

부 김유선이라고.”

“네...?”

“본부장님한테 유선씨 이름 알려드리라구요. 알았죠?”

계약직 사원인 유선. 유선에게는 지금이 아주 좋은 기회란 것을 한록이 알아

차린 것이다.

“네! 알겠습니다!”

유선도 곧 한록의 말뜻을 눈치채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종이를 들고 최

경준에게 다가갔다.

한록은 멀리서 유선과 최경준을 지켜보았다.

최경준에게 종이를 내미는 유선.

유선을 바라보는 최경준.

무어라 말하는 유선.

그러자 종이를 받아드는 최경준.

그리고...미소를 짓는 최경준.

잠시 후, 유선이 계단을 내려왔다. 한록은 객석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출입구

바로 앞에 섰다. 한록의 옆에 선 유선이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대리님. 드리고 왔어요.”

“뭐라고 하셨나요?”

“고맙다고 하셨어요.”

“네. 수고했어요.”

“그리고, 또...”

“또?”

“이대리님이랑 현과장님이랑 같이 gv 진행하는거냐고, 기억하겠다고 하셨어요.”

‘됐다.’

최경준에게 눈도장을 찍은것만으로 유선이 갑자기 계약이 연장된다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의 도움은 될 수도 있다.

그걸 안 유선이 한록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대리님...”

“아니에요. 유선씨도 같이 일하는데 인사는 드려야죠.”

한록이 괜찮다고 말했지만, 유선은 몇 번이나 고개를 숙였다. 결국 유선은 한

록이 gv가 시작되겠다고 말을 하고 나서야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이대리, 고마워.”

그리고 유선이 돌아가자 현과장이 한록에게 말했다. 현과장은 조금 반성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나는 본부장님 오신거 때문에 유선씨는 생각도 못했다. 내가 생각이 짧았어.”

“아닙니다. 많이 바쁘셨잖아요.”

“그건 이대리도 똑같지. 이대리가 참...세심하다고 해야하나, 처세가 좋다고

해야하나. 이런 상황에서 본부장님한테 유선씨 소개할 생각은 어떻게 했어?”

현과장이 진심으로 대단하다는 듯 말했다.

세심하다. 처세가 좋다.

회귀 전에는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들을 듣자니, 스스로도 어색한 기분

이었다.

‘거기서 갑자기 왜 유선씨를 소개시켜야한단 생각이 들었을까?’

그건 본인이 생각해도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이었다. 그래서 한록은 솔직히 답

했다.

“그냥...유선씨와 같이 일을 하고 싶다고 계속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생각

이 난 것 같습니다.”

그 말에 현과장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현과장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이대리. 나 좀 솔직히 말해도 되나?”

“네.”

“나 방금 이대리 좀 무섭다고 생각했거든. 아니, 거기서 어떻게 바로 본부장

님한테 인사드려야겠단 생각이 드냐고. 근데 이대리 말 들어보니까 내가 잘못

생각한 것 같다.”

그리고 한록을 바라보는 현과장.

“이대리 멋있네. 좋은 선배다.”

그 말과 함께 현과장의 손목에서 아주 가느다란 실이 뻗어나와 한록의 손목에

감겼다.

영도, 유선, 정부장에 이은 네 번째 실.

이 실이 의미하는 것은...

“나도 이대리랑 계속 일하고 싶다.”

회귀 전, 모두가 한록과 같이 일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던 그 시절.

이제 그 시절에서 한록이 완전히 벗어났음을 의미했다.

*

“안녕하세요, <지구특공대>감독 장현철입니다.”

“이 gv를 준비하면서, 어떤 얘기를 할까 많이 고민했습니다. 정우에 대한 얘

기를 할까, 박사장에 대한 얘기를 할까 생각을 해봤죠. 그런데 제가 결정한건

주인공이 아닌 조연에 대한 얘기를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최형

사에 대한 얘기를 할까 합니다.”

“우리는 정우처럼 지구를 지키는 사람도, 박사장처럼 외계인도 아니죠. 하지

만 정우의 주변 사람은 될 수 있습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질문은 이겁니다. 여러분이 최형사라면 어떻게 하셨을 것

같나요?”

gv를 진행해 나가는 장감독.

gv는 내용과 스피치 모두 훌륭했고, 준비한 것처럼 잘 진행되고 있었다.

한시름 놓은 한록은 이제 객석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장감독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사람.

수첩에 글을 적고 있는 사람.

그리고 무언가 상상하듯 눈을 감고 있는 사람.

저마다 자신의 방법으로 장감독의 얘기에 빠져들고 있었다. 마치, 영화를 보

듯이.

그리고 그들 사이에 앉아 무언가를 메모하고 있는 남자, 최경준.

경준 역시 장감독의 얘기를 듣는 동시에 객석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천천히 객석을 둘러보는 최경준의 눈에 장감독의 얘기에 흠뻑 몰입한 사람들

의 표정이 비친다.

그렇게 사람들의 반응을 하나하나 살피던 최경준은 마지막으로 한록을 바라보

았다.

최경준과 한록의 눈이 마주친다.

gv가 마음에 드는지, 아닌지. 조금도 짐작할 수 없는 최경준의 얼굴.

최경준은 그렇게 무표정으로 한록을 바라보다가 다시 장감독을 바라보았다.

*

“제 얘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장감독이 말을 마치자 쏟아지는 박수소리.

사람들은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장감독에게 박수를 보냈고, 장감독

은 그런 사람들에게 몇 번이고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극장 밖으

로 사라졌다.

“그럼 지구특공대의 gv를 마치겠습니다.”

장감독의 퇴장 이후에도 한동안 이어진 박수소리. 한록은 사람들의 박수소리

가 사라지길 기다린 후 gv의 종료를 알렸고, 그러자 사람들이 드디어 자리에

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현과장과 유선, 한록은 영화관의 입구에 놓인 설문지 수거함 앞에 섰다. 사람

은 수거함에 gv만족도 설문지를 넣으며 퇴장을 하기 시작했다.

“아, 재밌었다.”

“영화 하나 더 본 것 같아.”

“우리 다른것도 gv보러 갈까?”

“다른 gv들은 이렇게 안 재밌어. 이것만 이런 식인거야.”

“저기요, 혹시 다른 gv는 안 하시나요?”

덜컹거리는 의자 소리 사이로 들리는 사람들의 반응.

심지어 한록을 붙잡고 또 다른 gv는 없냐고 묻는 사람마저 있었다.

“이대리. 우리 한 건 했다.”

현과장의 속삭임에 한록은 조용히 미소지었다. 만족도 설문지를 보지 않아도,

사람들의 반응이 좋은 것쯤은 명백했다.

‘그럼 남은 건..최경준의 반응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한록은 조용히 최경준을 바라보았다. 최경준은 정부장과

함께 영화관 구석에서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귀를 기울이자 둘의 대화소리가

들린다.

“gv 사업화 얘기는 들었어. 회의에 들어가면 지적받을 만한 부분들을 적어놨네.”

그렇게 말하며 정부장에게 종이를 내미는 최경준.

아마 아까 gv를 들으며 적었던 내용들인 듯 했다.

“감사합니다, 본부장님. 반영하겠습니다.”

정부장이 조금 놀란 얼굴로 종이를 받아들었다. 최경준이 이 정도로 신경을

써 준 것에 놀란 것이었다.

정부장에게 인사를 한 최경준이 현과장에게로 다가왔다.

“현과장, 그 동안 얼굴 안 보여준만큼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었네. 재밌게 봤어.”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러더니 최경준이 유선을 바라보았고,

“유선씨.”

유선의 이름을 불렀다.

“네, 네!”

최경준이 이름을 부르자 유선이 깜짝 놀라 대답했다. 본부장이 정말로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리라곤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유선뿐만 아니라 현과장, 한록, 심지어 정부장마저 놀라서 둘을 지켜보았다.

“현과장도, 이대리도 능력있는 사람들이니 배울게 많을 겁니다. 좋은 팀을 만

났네요.”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최경준의 격려에 유선이 몇 번이나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유선의 뒤로 현

과장이 한록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모습이 보였다.

‘이한록.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리고 정부장이 입모양으로 속삭이는 모습도.

“다들 수고했습니다. 이만 가볼테니, 팀끼리 회포를 풀길 바랍니다.”

그렇게 한명 한명을 격려한 최경준이 모두에게 인사를 하고 등을 돌렸다. 그

리고 밖으로 나서려다가 한록을 바라보았다.

“그리고...이한록. 여전히 특출나군. 입사때부터 지켜본 보람이 있네.”

최경준의 말에 현과장과 유선이 눈을 크게 뜬다. 본부장이 한록을 지켜보고

있단 사실에 놀란 것이다.

그러나 최경준의 말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하지만 말이야, 특출난 사람은 그걸 잘 드러내는 것도 중요하다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자네는 좀 더 생색을 낼 필요가 있다는 거야.”

여전히 영문을 알 수 없는 경준의 말.

‘...gv가 마음에 안 들었던 건가?’

결국 한록은 솔직한 질문을 던졌다.

“본부장님, gv는 어떠셨습니까?”

“그건 여기에 적어뒀네.”

그리고 경준은 만족도 설문지를 한록에게 내밀더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본부장님!”

“들어가게. 앞으로 지켜보겠네, 이한록.”

뒤따라가려는 한록도, 정부장도 물리친 최경준은 바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기고, 이내 사라져버린 최경준.

“이한록!”

최경준을 따라가던 정부장이 다시 돌아와 한록의 이름을 부른다. 그리고 다급

하게 외친다.

“빨리 펼쳐봐!”

그리고 최경준이 쓴 설문지의 내용은-

작가의말

사람을 미치게 하는 방법이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말을 하다가 마는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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