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12화 (12/263)

크게 봐라. 그리고 높이 봐.(3)

“뭐야.”

정부장의 눈썹이 꿈틀한다.

‘부하직원이 갑자기 진지하게 말 걸어오면 무섭지.’

한록도 차장까지 달아봐서 안다. 보통 저 뒤에 올 말은 ‘그만두고 싶습니다.’

‘일이 너무 많습니다.’ ‘팀이동을 원합니다.’ 같은 말이니까. 한록이 정부장

을 안심시켰다.

“퇴사 하려는 건 아닙니다.”

“...일단 와서 앉아.”

한록이 자리에 앉아 정부장에게 말했다.

“진행하고 싶은 사업이 있습니다. 영화 몇 개를 모아서, 걸작선 재개봉을 하

고 싶습니다. 3개월쯤 후에요.”

마케팅부만의 특권. ‘재개봉’.

이미 죽은 영화를 살려낼 수 있는, 의사로 치자면 화타나 다름없는 능력이다.

“3개월? 너무 촉박해. 개봉관은 어떻게 잡게?”

“크게 진행하는 건 아닙니다. 필름하우스에서만 재개봉을 진행하려고 합니다.

이미 영화관 사업부에 일정 문의 해놨습니다.”

명작 영화만 상영하는 ckv 영화관 필름하우스. 상영할 영화가 없어서 난리인

곳이니 재개봉 일정을 잡는건 쉽다.

‘상영 기회가 얼마 안 되는게 아쉽지만...웹개봉 영화를 가져올 수 있는 건

이곳뿐이다.’

필름하우스에서만 한달 정도 개봉을 하면 60번 정도 상영이 가능할 거다.

‘사실 관객수로 따지면 개봉을 안 한거나 마찬가지인 수준이지.’

하지만 거기서부터 시작이다.

영화 업계의 모두가 인정하는 말이 있다.

‘한국 사람들이 영화보는 눈이 참 좋다.’

미국은 스타배우로 사람들이 영화를 보러오게 유혹한다.

중국은 엄청난 스케일과 제작비로 관객을 동원한다.

그러나 한국에서 영화 마케팅의 핵심은 개봉관 수도, 스타 배우도 아니다. 관

객이다.

이 영화를 알아봐 줄 관객들에게 영화가 도달하게 하는 것.

그래서 관객이 ‘재밌다’고 소문을 내주는 것.

그게 한국에서 영화 마케팅이 해야할 일이다.

그러니 비록 딱 하나의 극장에서 시작되더라도, 이 영화를 알아봐 줄 사람들

만 모인다면.

그렇다면 <삼일의 삶>의 미래는 달라질거다.

‘그리고 그렇게 만드는게...’

‘바로 마케터의 일이다.’

바로 한록의 손에 의해서.

잠시 생각하던 정부장이 물었다.

“필름하우스 기획으로 가자는거군. 걸작선 컨셉은?”

“‘영화와 인생’입니다.”

“영화와 인생? 너무 포괄적인데?”

“그 점이 핵심입니다. 어린아이의 시선, 청년의 시선, 중년의 시선, 노년의

시선에서 진행되는 영화들을 모아서 재개봉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장르도 다

양하게 넣을거구요.”

“타겟층이 너무 분산되잖아. 감독선이면 감독선, 독립영화 모음이면 독립영화

모음. 그렇게 진행해야 사람들이 보러오지.”

“필름하우스 기획전을 보러오는 사람이면, 어차피 시네필(영화광)입니다. 오

히려 장르를 가리지 않고 장르마다 ‘인생’을 어떻게 다루는지 궁금해 할겁니다.”

“캐치프라이즈는?”

“네 번의 인생, 당신의 삶입니다.”

“이 기획전을 다보면, 당신은 네 번의 인생을 살아 본 게 될 것이다?”

“맞습니다.”

역시나 한록의 전략을 바로 알아채는 정부장.

한록은 다시 한 번 짜릿함을 느꼈다.

이전 생에서 정부장과 일할 때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이었다.

“.....괜찮네.”

정부장이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긴다. 정부장의 손목의 실이 조금 더 노랗게

물들었다.

실의 색에 대해 몇 번 생각해보다 나온 결론이 있다.

‘정부장이 나한테 무언가 기대할 때면 실이 노랗게 물들었다.’

한마디로, 노란색 실이 의미하는 것은 ‘기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정부장의 ‘기대’와 달리 정부장은 흔쾌히 답을 하지 않았다.

‘왜지?’

부하가 돈 될만한 사업을 가져오면 상사는 기쁘기 마련이다. 그런데, 오늘 정

부장의 반응은 이상했다.

결국 잠시 생각하던 정부장이 답했다.

“이한록. 이거 안 돼.”

“예산 때문입니까? 수익이 좋지는 않겠지만, ‘필름 하우스’의 격을 높이는데

도움이 될 겁니다.”

“아니, 좋아. 다 좋은데...문제는 너야.”

그리고 한록이 생각지도 못한 대답.

“...저한테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그래. 너무 잘하고 있어.”

그리고 정부장이 이어서 말했다.

“현과장한테 들었어. gv를 감독만 섭외해서, 강연형식으로 하겠다며?”

“네. 맞습니다.”

“그거 괜찮아보이더라.”

“그런데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그거 사업화하자.”

이어진 정부장의 말은 한록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감독 강연식 gv는 아직 어디에도 없어. 그걸 우리가 새로 런칭하는거야. 사

실 한국에서 배우 말고 감독에 대한 얘길 들을 곳이 거의 없잖아? 참여하고

싶단 감독도 많을거고, 관객도 많을거야.”

아직 보고도 하지않았는데, 정부장은 한록의 마케팅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ck자체의 인지도를 올릴 수 있는 사업이야. 그리고 우리가 제작한 영화중에

작품성있는 영화 위주로 섭외하면 ‘설탕 공장 영화’라는 불명예도 어느정도

희석 되겠지.”

대중성과 신파를 노렸단 비판이 많은 ck의 영화.

그 ck에 ‘이런 영화’도 있다는 걸 알리는 자체 홍보가 되는 것이다.

“이건 관객들도, 우리 회사도 다 얻어가는 사업이야. 그럼 gv는 완전히 우리

가 가지게 되겠지.”

사실 한록은 여기까지 생각하진 못했다. 한록은 어디까지나 영화마케터니까.

하지만 임원을 노리는 부장. 즉 회사의 입장에서 보는 정부장의 눈에는 ‘미

래’가 보인 것이다.

“이게 잘 되면...팀 하나 새로 꾸리게 될 거다.”

그리고 정부장의 말.

“네가 승진한지 1년 됐나? 지금 당장은 아니야. 하지만 gv를 2,3년 정도 끌고

가면...팀 하나 꾸리고 팀장 달게 될 거다.”

몇 년 후면 한록이 최연소 과장이 될 것이란 암시였다.

“그 시작이 <지구 특공대>gv야. 지금은 최대로 gv에 집중해야 하는 상황이야.

재개봉은 좋아. 그치만 너 혼자 <지구 특공대>랑 gv, 재개봉까지 컨트롤 할

순 없을 거다.”

한록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정부장의 말은 맞는 말이다.

“아뇨, 할 수 있습니다.”

한록이 정부장이 생각하는 것처럼, 입사한지 4년째의 대리라면 말이다.

“gv는 제가 아니라 장감독이 준비해야하는 일입니다. <지구 특공대>는 개봉 2

주 남았고, 예정대로 진행하면 됩니다. 지금 제가 맡은 영화는 웹개봉이라 크

게 손이 갈 일이 없습니다. 재개봉은 이미 영화도 다 잡아놨고, 추진만 하면

됩니다. 사람 한 명만 붙여주시면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록은 9년차 차장. 재개봉, gv를 숨쉬듯이 해봤다. 한록에게 이 정도

일은 무리도 아니었다.

“이한록, 진정해. 기획전은 나중에 하면 되잖아.”

“라인업중에 계약 기간이 곧 만료인 가 있습니다. 빨리 진행해야 합

니다.”

la에서 배우를 꿈꾸는 여자와, 뮤지션을 꿈꾸는 남자의 사랑을 다룬 얘기. 엄

청나게 흥행했고, 사람들의 많은 사랑을 받는 작품이었다.

“la랜드를...뺄 수는 없겠군.”

그리고 이번 재개봉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게 하는 ‘미끼’역할이기도 하다.

정부장 역시 그걸 아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라인업이 뭔데?”

이어진 정부장의 질문.

정부장의 실에 퍼진 노란색이 아주 슬금슬금,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살짝 번

지고 있었다.

정부장 역시 어쩔 수 없는 ‘기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청년층의 시선은 la랜드. 중년의 시선은 삼일의 삶으로 표현할 겁니다. 노년

의 시선은 <강을 건넌 님>으로 선정했습니다. 그리고...”

한록은 정부장의 실을 바라보며 말했다. 영화 하나를 말할때마다 정부장의 실

에 섞인 노란색이 점점 퍼져나간다.

‘눈에 그려지는거다.’

이 영화들이 모여서 어떻게 시너지를 낼지. 이 기획전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그리고 실의 반 정도가 노란색으로 변했을 때.

‘이게 맞을까?’

마지막 영화를 말하기 전, 한록은 잠시 고민했다.

한록은 마케터지만 영화가 아닌 것으로 사람을 설득하는것엔 자신이 없었다.

어쩌면 정부장은 한록이 고른 영화에 화를 낼 수도 있었다. 여태까지는 늘 그

래왔다.

하지만...

‘건방지군.’

그렇게 말하며 기대로 물들던 정부장의 실.

이제 한록은 실을 통해 정부장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어떤 것에

기대를 가지는 지 알 수 있었다.

정부장이 좋아하는 것은 도발적이고, 파격적인 것. 그리고 거기서 끝나지 않

고 ‘제대로 된 실적’을 낼 수 있는 것.

그걸 증명하듯 지금도 영화 하나를 말할때마다 실의 색이 노란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걸 보면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그래.’

‘된다.’

‘이건 실패하지 않을거다.’

한록은 확신과 함께 강수를 던졌다.

“그리고 마지막은 <동화 속 미로>입니다.”

정부장이 맡았던, 완전히 실패한 영화.

그 영화를 듣자...

슬금슬금 노란색으로 변하던 정부장의 실.

그 실이 순식간에 노란색으로 뒤덮인다.

*

자신이 맡아서 망했던 영화. 자신을 지방으로 좌천보낸 영화.

다시 한번, 그 영화가 살아날 기회가 생긴다.

참을 수 없는 기대. 정부장의 실은 그걸 보여주고 있었다.

눈앞의 사람이 자신의 말에 설득당했다.

마케팅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간절히 바라는 순간. 그 순간을 목격한 한

록은 저도 모르게 손을 움켜쥐었다.

“이한록. 나한테 장난을 거는군.”

그리고 이어진 정부장의 말.

그 말에 한록은 뒷덜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내가 <동화 속 미로>에 신경을 쓰는 걸 알고 있군. 그래서 계속 그걸로 날

설득하려는 거야. 다른 영화 중 재개봉을 하고 싶은게 있나보지? 아마 상영기

간이 짧았던 <강을 건넌 님>이나 웹개봉인 <삼일의 삶>이겠지.”

정부장은 이미 한록의 모든 걸 간파하고 있었다. 한록은 정부장의 마음을 읽

었다. 그리고 정부장은 그런 한록의 마음을 읽은 것이다.

한록의 숨쉬는 것 하나마저 읽고 있다는 듯 매서운 정부장의 눈길.

그러나 한록은 겁먹지 않았다.

말과는 달리 정부장의 손목의 실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어느때보다

굵어져있었다.

“내가 아는 이한록은 인간관계에 멍청하면 멍청했지, 이렇게 머리를 쓰는 타

입은 아니었는데...끝도 없이 기어오르고 있어. 나한테 이런 식으로 나오는

놈을 내가 어떻게 생각할 거 같나?”

“저는...”

그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

“좋아하실 것 같습니다.”

정부장은 한록의 프로젝트를 기대하고 있다.

“그래, 맞아. 난 머리쓰는 녀석들을 좋아해.”

정부장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한록을 바라보았다.

“크게봐라, 이한록. 그리고 높이 봐. 네가 생각하는 그게 뭐든 간에, 다 저질

러 봐. 그러면...”

“내가 책임질테니까.”

오늘 한록은 정부장의 선에 들어온 것이다.

*

“<동화 속 미로>를 걸고 넘어진다는 건 내가 <동화 속 미로>에 얼마나 신경을

쓰는지 알고 있단 거지? 잘 준비하는게 좋을거야.”

“네,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가 봐. 인력 필요하면 말하고.”

“감사합니다.”

한록은 꾸벅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서는 한록을 보며, 정부장은 생각에 잠겼다.

‘이한록...능력은 있지만 통제가 안 되는 놈이라 생각했는데.’

정부장 역시 한록을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 가장 뛰어난 사원 중 하나. 하지

만 자존심이 세고,

사내정치나 승진에는 관심이 없다. 사람을 다루는 법도 모른다.

상사에게는 가장 통제하기 어려운 부하직원의 유형이다.

‘단물만 먹고 버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무언가 변했다.’

언제부턴가 한록의 편을 들기 시작하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의 ‘선’을 건드는 한록.

한록이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어가고 있는 것이다.

‘능력만 뛰어난 사원은 영원히 사원으로 남을 뿐이지. 하지만 거기에 처세가

더해지면.’

회사에서 가장 뛰어난 사원. 거기에, 남의 마음을 설득할 줄 아는 기술. 그

두가지가 갖춰진다면...

‘아니, 너무 미래의 일이다.’

정부장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자신이 생각하는 것은 너무 뒷날의 얘기였다.

지금 당장 닥친 일들만해도 산더미였다.

<지구 특공대>, gv, 기획전.

아마 ‘윗선’에서 모두 마케팅 부서와 한록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번 해 봐라. 이한록.’

‘네가 나와 같이 갈 수 있는 사람인지 보여 봐라.’

정부장마저도.

작가의말

부장님이랑 현피 뜬 썰 푼다.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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