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게 봐라. 그리고 높이 봐.(2)
*
<삼일의 삶>.
어찌보면 <지구 특공대>와 비슷하다.
개봉 당시 ‘폭망’하고, 5년 뒤에나 유명해진 영화니까.
그러나 지구 특공대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 과정과 결과랄까.
‘지구 특공대는 마케팅의 문제였지. 그래서 <지구특공대>를 좋아한 관객들도
안타까워했어.’
‘그치만 <삼일의 삶>은...’
<삼일의 삶>은 마케팅의 문제가 아니다. ck enm의 내부 시사회 분위기가 너무
안 좋았다.
그래서 애초에 극장개봉도 하지 못했으니, 관객한테 평가받을 기회도 얻지 못
한 것이다.
<삼일의 삶>은 그렇게 잊혀졌다.
그리고 <삼일의 삶>은 5년 뒤 다시 세상의 주목을 받게된다. 바로..
[최근 한국영화는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죠. 뭐, 대단하진 않지만 나쁘지 않
습니다.]
[그래도 한국 영화는 아직 멀었어요. 괜찮은 건 ‘식물’ 이나 그 외 몇 개 정
도죠.]
[아, 하나 더 있다. 제 한국친구가 직접 번역을 해서 보여준 영화가 있어요.]
할리웃에서 가장 유명한 b급 거장. 알렉산드로 로게즈. 그의 한국영화에 대한
언급.
[한국 영화 중 최고는 <삼일의 삶>이죠.]
그 한마디로 모두가 <삼일의 삶>을 주목했다.
<삼일의 삶>의 배우는 스타배우가 됐고, 영화는 재개봉과 역주행으로 오백만
을 달성했다.
그러나 단 한명. 감독만이 사라졌다.
감독은 자신을 찾는 목소리에 짧은 편지를 보낼 뿐이었다.
‘나는 영화가 꿈이었다.’
‘그리고 나는 영화 때문에 가족에게 상처를 주었다.’
‘이제 나는 영화가 싫다.’
‘다시는 내 영화에 대해 얘기하지 말길 바란다.’
그리고 이어진 우울증을 앓고 있으니 연락하지 말아달라는 요청.
그렇게 <삼일의 삶>과 감독은 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
하지만 그건 2027년. 지금은 22년이다.
아직은 아무도 <삼일의 삶>에 관심이 없는 상황. 아니, 관심이 없다 못해 영
화가 쫄딱 망하는 상황.
‘나만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해질 영화의 미래를 알고 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영화. 하지만 곧 수억명의 사람들이 얘기하게 될 영화.
그런 영화가 한록의 눈에만 보인다.
그렇게 생각하니 시네필과 마케터의 피가 끓어올랐다.
‘이걸 어떻게 사람들에게 알릴까. 어떻게 퍼뜨릴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보
러 올까.’
한록은 자리에 도착하자마자 <삼일의 삶>의 감독 윤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윤감독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리고 30분 후 문자가 한통 도착했다.
‘폭망’한 영화 <삼일의 삶>
그리고 5년 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영화 <삼일의 삶>.
그 뒤로 자취를 감춘 감독.
‘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리고 이제...
[죄송합니다. 제가 내일 2시에 전화 드리겠습니다.
-윤감독]
그 비밀이 밝혀진다.
*
다음날.
한록은 윤감독의 전화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으나, 그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오늘은 <지구 특공대>의 2차 예고편이 공개되는 날이었다.
[대리님, 커뮤니티에 업로드 할 게시글들 작성해뒀습니다!]
유선이 메신저와 함께 파일들을 보냈다.
‘신나균 주연 영화 개봉했네요. 예고편 보신 분?’
‘물파스로 고문하면 얼마나 아플까요?’
‘헐 이거 봐봐 갑자기 지구특공대 겁나 보고싶어짐.’
‘뭐야 이거 공포영화야?’
‘마케팅 갑자기 변한 영화 갑.txt’
유선이 보낸 파일들은 커뮤니티에 올릴 글들이다.
보통 진짜 회원들이 쓰는 글이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대부분 회사의 바이럴
마케팅이다.
사람들을 속이는 것 같아 한록은 그다지 자주 쓰지 않는 방법이다. 그러나 업
계에서는 필수요소나 마찬가지다.
[네, 유선씨. 예고편 업로드하고 좀 지켜보죠.]
하지만 오늘은 왠지 바이럴을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리고 10시. <지구 특공대>의 2차 예고편이 유튜브에 공개 되었다.
한록은 가장 먼저 반응이 오는 영화 커뮤니티의 자유게시판에 들어갔다.
3분 정도는 아무런 글도 올라오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지구 특공대>이거 뭐죠?]
[마지막에 무서워서 소리지름 ㅠ]
[와이씨 겁나 재밌겠다 이번 달은 이거다 ㅋ]
[저 이 감독 데뷔작도 봤습니다.]
ㄴ오 그걸 보신 분이 계시군요
ㄴ전 졸업작품도 봄
[재밌어 보이는 예고편 가져옵니다. <지구 특공대> 2차 예고편.]
ㄴ마지막에 소름 돋음
ㄴ이거 코미디 영화인 줄 알았는데 아닌가봄?
ㄴ연기 대박..
ㄴ개봉이 언제죠?
ㄴ2주 뒤요~
ㄴ빨리 보고싶음!!
한록의 예상은 현실이 되었다.
*
영화 커뮤니티는 온통 지구특공대에 대한 얘기로 뒤덮였다.
[보낸이: 블로거 힐링 인 더 필름:<지구특공대> 2차 예고편을 블로그에 게시
하였습니다. 반응이 참 좋네요.]
[보낸이: 유튜버-‘꿈속 영화관’ <지구 특공대> 와 협업을 진행하고 싶어 메일
드립니다.]
그리고 그걸 본 인플루언서들의 반응.
[신나균 소속사 ok엔터 최실장: 대리님, <지구 특공대> 2차 예고편 확인하였
습니다. 신나균씨가 예고편 아주 흥미롭다고, 감사하다고 전해달라고 하십니
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개봉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신나균 소속사측의 반응까지.
반응은 말 그대로 폭발적이었다.
“대리님! 대리님!”
그리고 갑자기 한록에게 뛰어오는 유선.
“대리님, 이거보세요!”
유선이 가리킨 것은 핸드폰이었다.
[‘지금 영화 커뮤니티에서 반응 역대급인 영화 예고편txt’]
<지구 특공대>를 게시글 하나가, 포털사이트 인기글에 올라온 것이었다.
“생각보다..반응이 좋네요?”
“네!”
한록이 조금 놀란 얼굴로 말했다.
영화 커뮤니티에서 반응이 좋을 것은 예상했다. 그걸 노리고 만든거니까.
그런데 예고편을 올린지 1시간도 안 돼서, 일반 커뮤니티까지 퍼져나갔다고?
이건 ‘시네필’뿐만 아니라 일반 관객까지 <지구 특공대>에 흥미를 가진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게 의미하는 것은 명백했다.
“김유선. <빅토리> 바이럴도 네가 했지?”
어느새 한록과 유선에게 다가온 정부장이 묻는다.
정부장 역시 <지구 특공대>의 예고편을 지켜보고 있던 것이다.
“네,네..!”
한국 sf 영화 중 가장 제작비를 많이 쓴<빅토리>. 그 흥행기록은 200만이었
고, sf 불모지인 한국에서는 기록적인 숫자였다.
“그때 유튜브 예고편 1시간 조회수가 몇이었어?”
“1만이요.”
“이게 지금 20분만에 5천이니까...”
정부장이 턱을 매만지다가 한록을 바라보았다.
“이한록. 이거 기록 세우겠는데?”
지금 <지구 특공대>는 한국 sf영화의 신기록을 세우고 있었다.
*
“개봉 2주 남았지?”
“네.”
“손익분기점이?”
“80만입니다.”
“이 정도면 최소 200만은 들어오겠네.”
80만이 손익분기점인 영화에 200만 관객이라.
소위 ‘대박’이 아닐 수 없었다.
“이한록. 실망시키진 않네.”
잠시 생각하던 정부장이 태연한 얼굴로 말한다. 얼핏보면 이게 칭찬인가, 아
닌가 싶은 반응.
하지만 저번 브리핑 때 얻은, 아주 얇은 정부장과의 실.
그게 조금이지만 굵어져 있었다.
‘실의 굵기는 아마...신뢰의 정도를 나타내는 것 같군.’
김유선, 영도의 실을 몇 번 보다보니 이제 알겠다.
가장 굵은 영도의 실. 한록과 대화를 할때마다 굵어지던 유선의 실.
실의 굵기는 곧 신뢰의 정도나 서로의 인연을 나타내는 것 같았다.
그건 정부장이 지금 한록의 ‘능력’만큼은 아주 신뢰하고 있단 뜻이었다.
“아닙니다, 허락해주신 부장님 덕분-”
그리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려던 한록은 말을 멈췄다.
정부장의 손목에 감겨있는 한록의 실. 그걸 보니 잠깐 ‘실험’을 해보고 싶은
게 있었다.
‘실의 색은 아마 마음의 종류인 것 같다.’
영도와 유선. 상큼한 둘과는 다르게, 어두컴컴한 검은색인 정부장.
그 ‘마음’이 뭔진 몰라도 영도와 유선만큼 좋은 마음이 아닌건 분명하다.
정부장에게 한록은 ‘써먹을 만한 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한록이 정부장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gv가 진행되면 반응은 더 좋아질 겁니다.”
“자신만만한데? 기대만큼 안 나오면 어쩌려고.”
"제가 기획한 이상 그럴 일은 없습니다."
"건방이 이루 말할 데가 없군."
한록의 솔직한 대답에 정부장의 얼굴이 찌푸려진다.
그러나 표정과는 다르게 정부장의 검은색 실이 아주 진한 회색으로 바뀐다.
그리고 실의 끝부분에 어두운 노란색이 살짝 스며들기 시작한다.
‘아하.’
비록 영도와 유선만큼 상큼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조금 ‘감정’이란게 도는 듯
한 정부장의 실.
이제 좀 정부장이란 사람을 알 것 같다.
‘아부를 싫어하는군. 솔직하고, 자신만만한 건 좋아하고. 능력있는 사람이 건
방진 건 오히려 좋아해.’
정부장의 노란 선이 의미하는건 아마 ‘기대’인 듯 했다.
‘좋아.’
정부장의 ‘선’을 알게 된 한록이 씩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하여간. 개봉하고 그만큼 성적 안 나오면 각오해.”
정부장의 얼굴이 더 찌푸려지고-
반대로 노란 색 부분은 더욱 짙어진다.
그걸 본 한록은 직감했다.
‘정부장님...*츤데레였군.’
*츤데레: 속으로는 좋아하면서 겉으로는 아닌 척 하는 것.
정부장은 아마 생각보다 자신을 좋아할지도 모른다.
*
오후의 한록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이대리, 또 한 건 했다며?”
“이대리님, 극장에서 <지구 특공대> 포스터 추가로 보내달라고 하십니다.”
“한록씨. 지구 특공대 너무 재밌겠더라. 한록씨가 우리팀이면 얼마나 좋을까.”
“이대리님, 영화관 사업부 김현수입니다. 예고편 잘 봤습니다. 반응이 아주
좋아서 <지구 특공대>를 *프라임 타임으로 배치하려고 합니다.”
*프라임 타임: 영화관에서 가장 관객이 많은 시간대
“셋째주 프라임 타임 우리 거였는데? 이래서 이대리님이랑 개봉 붙으면 안 된
다니까..에휴, 어떡하냐 우리.”
“이대리님, kbc ‘영화를 보자’ 오은아 작가입니다. 지금 <지구 특공대>반응이
너무 좋아요. 셋째주 영화 소개 메인을 <지구 특공대>로 배치하려구요.”
끊임없이 올라오는 <지구 특공대>의 반응을 살피고, 소속사, 방송국, 다른 부
서와 연락을 하다보니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이대리, 밥먹고 해.”
현과장이 말해주지 않았으면 점심시간마저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아, 네. 감사합니다.”
“이대리, 우리 4팀이랑 옥루각 가는데 같이 갈래?”
옥루각. 회사 근처에 있는 평양냉면 맛집이다. 다만 맛집인만큼 인기가 많아
점심시간에 가는건 거의 불가능이었다.
“4팀이 오늘 방송국 외근이라 빨리 가서 잡았대. 가자.”
현과장의 제안에 한록은 잠시 망설였다. 한록은 원래 밥을 혼자 먹었다. 바쁘
기도 했고, 한록도, 회사 사람들도 서로가 불편했던 것이다.
“이대리, 이런 날 아니면 옥루각 못 간다.”
“네, 같이 가요, 대리님.”
그러나 현과장과 유선이 저렇게 말하는걸 보니 시간을 내도 나쁘지 않겠단 생
각이 든다.
“네, 가겠습니다.”
한록이 지갑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
“어머? 이대리?”
옥루각에 도착하자, 4팀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한록을 바라본다.
“내가 귀한 분 모셔왔다.”
“그러게. 오늘 우리 회사에서 제일 잘나가는 분 모셔왔네.”
다행히 4팀은 한록을 불편해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지구 특공대>
에 대한 얘기가 듣고 싶은 것 같았다.
“이대리님, 지구특공대 개봉이 언제예요? 그거 예고편 보니까 나도 보고싶더라.”
“2주 남았습니다.”
“그때 되면 회사 또 난리나겠네. 부장님이 200만은 들어올 거 같다 했다며?
부장님이 그 정도로 말하신거면 아마 더 들어오겠지.”
“gv도 기획돼 있잖아요. 그거 공개되면 반응 더 대박이겠다.”
“진짜 관객 몇만 들어오려나? 이대리님은 어떻게 예상해요? 이번 분기는 또
이대리님이 가져가겠네.”
분명 부장과 둘이 한 대화인데, 부서 사람 모두가 알고 있다.
<지구 특공대>의 개봉에 회사 모두가 엄청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아마 개봉하고, 성적이 나올 때까지는 계속 이럴 것이 분명했다.
“이대리, 그때 부서 회의 때 부장님한테 프레젠테이션 한 거. 그거 때문에
<지구 특공대> 마케팅 바뀐거지?”
“아, 대리님 그때 진짜 멋있으셨죠.”
“근데 난 그거 부장님이 커트하신줄 알았어.”
한록에게 쏟아지는 질문들.
“다시 한번 가서 설명을 드렸습니다.”
“부장님을 어떻게 설득한거야?”
“기존 예고편을 활용해서, 컷만 추가하는 방식으로 수정할 수 있다고 말씀드
렸습니다.”
“아, 이번 예고편이 기존꺼에 추가만 한거야? 그걸 이대리가 기획한거고?”
“네.”
“와...대단하네. 이대리 나중에 그냥 예고편 제작사 하나 차려도 되겠다.”
냉면이 나오기전까지 쏟아지는 칭찬들. 다행히 냉면이 빨리 나왔고, 한록은
얼른 주제를 돌렸다.
“현과장님. gv 장소 섭외 완료했습니다.”
“아이, 무슨 밥 먹는데 일 얘기야. 그래서 어디?”
“용산 하이맥스입니다.”
“거길 줬어?”
“네, <지구 특공대> 반응 보더니 구리에서 변경해줬습니다.”
“진짜 이대리는 못 당하겠다니까.”
현과장이 대단하다는 듯 엄지를 세웠다. 한국에서 제일 큰 관인 용산 하이맥
스가 지구 특공대의 gv관으로 배정된 것이다.
“근데 이대리. 이번에 영화 하나 더 배정받았잖아. <지구 특공대>랑 gv랑 그
거까지 동시 진행가능하겠어?”
“네, 할 수 있습니다.”
현과장이 <삼일의 삶> 얘기를 꺼내자 한록이 단호하게 답했다.
아무리 바빠도 <삼일의 삶>을 놓칠수는 없다. 병원에서 일을 하는 한이 있더
라도 <삼일의 삶>은 한록이 꼭 맡고 싶은 영화였다.
“이대리님 새로 영화 맡으세요? 어떤거요?”
“<삼일의 삶>입니다.”
오늘 ck enm최고의 핫이슈 한록과 <지구 특공대>. 그런 한록이 새 영화를 맡
는다니 모두 궁금한 표정이었다.
영화 제목을 듣자 현과장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 <삼일의 삶>. 그 감독 괜찮아. 일하기 편할걸?”
“윤감독님을 아세요?”
“응. 저번에 회사 오셨을 때 길 헤매시길래 알려드렸지. 그리고 유선씨랑 계
약 얘기도 하셨고.”
‘현과장님이 윤감독님을 아시는구나. 윤감독님에 대해 좀 물어보자.’
영화의 실패 후 세상과 단절한 감독.
안 그래도 그런 감독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걱정이 태산이었다. 한록에겐
현과장만큼의 넉살이 없으니까.
“윤감독님은 어떤 분이세요?”
“나이가 좀 있으셔. 50대라 하셨나? 은퇴하시고 이번이 첫 영화시래.”
‘이런..’
50대의 가장이 은퇴후에 만든 영화.
그게 극장개봉도 못하고 사라졌다니.
그런 생각을 하니 마음이 좋지 않다.
“나보단 유선씨가 잘 알 걸?”
“아,네, 좋은 분이신데...”
유선이 말꼬리를 흐린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하는지 망설이는 것 같았다.
“요즘 조금...불안해하세요.”
“불안해한다고? 왜?”
“극장개봉도 취소되고 웹개봉으로 하니까..*러닝개런티가 거의 안 들어오잖아
요. 그게 음..제작비 때문에 좀 곤란하신 모양이에요.”
*러닝개런티: 영화 제작시 수익에 따라 이윤을 분배하는 방식
‘아...’
문득 한록이 느꼈던 모든 궁금증들이 해결되는 것 같았다.
‘영화는 내 꿈이었다.’
‘그리고 나는 영화 때문에 가족에게 상처를 주었다.’
‘이제 나는 영화가 싫다.’
‘다시는 내 영화에 대해 얘기하지 말길 바란다.’
오랜 꿈인 영화감독이 되겠다고 빚을 진 가장.
그리고 수익은커녕 적자로 남은 영화...
윤감독이 심각한 우울증을 얻기까지의 과정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에휴, 참...막내가 이번에 대학 들어간다 한거 같은데...”
“그런 상황이면 빚을 지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사실 영화관 개봉하면 수익은 있잖아. 그걸 생각하셨겠지. 제작부서에서 영
화관 상영하겠다고 약속했는데, 다 만들고나서는 커트해버렸대. 이건 개봉할
만한 게 아니라고...”
“아...”
자식이 있는 현과장이 착잡한 표정으로 말한다.
결국 ck enm이 멋대로 계약을 바꿔서 윤감독과 가족들만 피해를 보게 된 것이다.
“<삼일의 삶> 잘 됐으면 좋겠네.”
송과장이 말했고,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이 판에서 일하면서 망한 영화감독
의 최후를 너무 많이 봤으니까.
그런데 그게 어느 집의 가장이고, 누군가의 아버지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픈
것이다.
“잘 되겠죠? 그쵸 이대리님?”
유선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마치 부탁하듯 한록을 본다.
그리고 한록은 고개를 끄덕이며 단호하게 답했다.
“당연하죠.”
*
동료들과 점심을 마치고 돌아온 한록. 다들 커피를 마시자고 제안했지만, 윤
감독과 통화 전 끝내야 하는 일들이 있어 한록은 자리로 돌아왔다.
“네, 네. 새벽 타임 배치 가능하다구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일정을 몇 번 확인하고나니 어느새 두시.
잠시 기다리니, 핸드폰이 울리며 윤감독의 전화가 도착한다.
한록은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
“이한록 대리님? 맞으신가요?”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윤감독의 목소리는, 정말.. 평범했다.
고집쎈 예술가도, 무능한 가장도 아니다. 그저 정말 평범한, 우리 주위의 아
버지 같은 목소리.
그리고 뒤에서 들리는 배달어플의 결제소리.
‘은퇴하고 식당을 하고 계시군.’
상황이 뻔했다.
보통 사람들은 영화감독하면 예민한 예술가를 생각한다.
담배를 물고, 세련된 카페 혹은 작업실에서 영감을 떠올리는 이미지.
그러나 그건 일반인들이 이름을 아는 상위 1%의 감독만 가능한 일이다.
아니, 일반인들이 이름을 아는 감독도 불가능할 수 있다.
대부분의 감독은 영화로 생활비조차 벌지 못한다.
그들은 투잡을 하거나, 알바를 하며 영화를 만들 돈을 한푼 한 푼 모아나간다.
그나마 감독이 이 정도지, 시나리오 작가나 조연출들은 더욱 열악하다.
다들 그렇게 영화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일단 한록은 아무렇지 않은 척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ck enm의 영화 마케팅부 이한록입니다. 윤우진 감독님 맞으신가
요?”
“네, 제가 윤우진입니다. 대리님 바쁘신데 귀찮게 해서 죄송합니다.”
매너가 깍듯이 배어있는 태도. 사회생활을 아주 오래 해본듯한 느낌이 난다.
“어떤 일 때문에 그러시나요?”
“다름이 아니라 ‘삼일의 삶’ 마케팅 때문에 연락드렸습니다. 이번에 ‘삼일의
삶’이 웹개봉으로 전환되었습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웹개봉 얘기가 나오자마자 급격히 어두워진 목소리...
“그에 맞게 마케팅 방안을 기획해야 해서요. 혹시 미팅이 가능하실지 여쭤보
려고 전화드렸습니다.”
“네,네. 언제든 가능합니다.”
“감독님 편하신 시간으로 말씀해주시면 제가 맞추겠습니다. 감독님이 계신 곳
으로 갈까요?”
“아뇨! 제가 회사로 가겠습니다. 시간은 음..혹시 월요일 오전 괜찮으신가요?
제가 가게를 해서, 오후에는 시간이...정말 죄송합니다.”
“당연히 가능합니다. 언제든지 편할 때 오시면 됩니다.”
지나치게 저자세로 나오는 윤감독. 그는 한록이 무슨 말을 하든 알겠다고 대
답했다.
그리고 전화를 끊기 직전, 윤감독이 용기를 내서 말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한록 대리님. 웹개봉이지만, 그래도...”
50대의 은퇴한 가장.
그가 겨우 낸 용기가 사그러든다.
그 모습에, 한록은 다시 한번 영화관 사업부의 메시지를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감독님. 걱정마세요. 최선을 다해서 마케팅하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아마, 이 영화는...”
그리고 한록은 말을 멈췄다. 아무것도 모르는 윤감독에게 ‘이 영화는 아마 역
사에 남을 영화가 될 것이다’라는 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대신 한록은 이렇게 말했다.
“감독님. 감독님은 아마...”
“영화를 더 좋아하시게 될 겁니다.”
*
전화를 끊은 한록은 생각에 잠겼다.
지난 5년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해진 영화, 그리고 그 영화의 감독.
한록은 지금 그 영화의 마케팅을 담당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건 극장 상영이다.’
물론, 인터넷에서 개봉해서 큰 인기를 끄는 영화도 있다. 하지만 영상미와 사
운드가 중요한 <삼일의 삶>은 아니다.
‘웹개봉이 결정된 영화를 극장개봉으로 바꿀 순 없어.’
아니, 사실은 가능하다.
그것도 오로지 마케팅부서에서만.
‘아직 있군.’
한록은 자신과 정부장을 이어준 검은 실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감.’ ‘내 편.’ 아마도 그런 감정을 의미하는 손목의 실.
그리고 한록이 자신감있는 말을 할 때마다 짙어지던 정부장의 실.
“부장님.”
“뭔데?”
정부장과 이어진 실을 보며 한록은 진지하게 말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작가의말
이번 편은 9500자입니다.
따..딱히 독자분들 좋으시라고 그런 건 아니니까! 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