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7화 (7/263)

이번 건 잘했어.(2)

회의실로 이동한 정부장이 입을 열었다.

“본부장님 전체 전달사항부터 얘기하지.”

본부장 최경준.

ck enm에 있는 마흔명의 상무중 한명이자, 차후 전무로 승진해 ck그룹의 ‘실

세’ 중 한명이 되는 사람이었다.

동시에 ck enm ‘영화 사업본부’의 본부장이기도 한 최경준.

그리고 정부장을 서울로 불러온 장본인이었다.

한국 영화를 움직이는 ck enm의 영화 사업 최고 권력자.

그의 말 한마디에 누군가는 회사에서 나가고, 누군가는 지방을 전전하다가 서

울로 돌아온다.

과거 모두가 그에게 잘보이고자 했고, 한록은 그런 사람들을 경멸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내 목표는 구과장도, 정부장도 아니다.’

기왕 사내정치를 하기로 마음 먹었다면.

기왕 라인을 잡을거면.

조금 더 확실하게 한다.

‘내 목표는 최경준이다.’

그게 한록의 1차 목표였다.

부서에서, 혹은 타부서에서 어떤 음해가 있든 한록의 뒤를 봐줄 수 있는 권력

자는 최경준뿐이다.

‘그러려면...<부산영화제>가 중요하다.’

<부산 영화제>. 최경준이 영화사업부 본부장으로서 이름을 걸고 추진한 사업.

자그마치 5년동안 준비한 사업이다. 목표는 ck가 주최하는 세계적인 영화제를

만드는 것.

그리고 올해는 그 영화제의 첫 시작이었다.

영화사업부 최고의 권력자 최경준 본부장.

그가 5년을 준비한 사업.

그 첫 시작에, 한록이 뛰어난 성과를 보인다면....

분명 최경준은 한록을 눈 여겨 볼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할 때 정부장이 말을 이었다.

“재작년이랑 작년, 우리 영화사업본부가 급성장을 했어. 다 너희들 덕분이라

고, 격려 부탁한다고 하셨다. 그리고..”

최경준의 말을 전달한 정부장이 서류를 들었다. 이제 본론이다.

“우선 이번에 워너 스튜디오랑 장기 계약 체결한거 다들 알지? 앞으로 워너쪽

물량도 추가된다.”

정부장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해외 3대 영화 스튜디오중 하나인 워너 스튜디오. ck enm에서 그곳의 영화를

매년 5편 이상 수업하기로 한 것.

“그리고 영화관사업부에서 담당하던 *gv도 우리쪽으로 넘어온다. 다들 내가

이거 어떻게 가져온지 알고 있겠지. 앞으로 최대한 신경쓰도록.”

*gv:영화관에 감독 배우 등이 방문하여 영화에 대해 얘기하는 행사

그 말에 직원들이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까 오늘의 회의는 결국 이말이다.

‘영화관사업부랑 치고박고 싸워서 사업 가져오셨단 말이구만...’

영화관사업부와 마케팅부는 gv를 두고 대대적으로 라이벌이었다. 그런데 정부

장이 들어온지 3개월만에 gv를 쟁취해 온 것이다.

‘정부장이 최경준 본부장을 설득한거다.’

말 한마디에 사업 하나가 통째로 움직이는 최경준 본부장의 파워.

그리고 그런 최경준을 설득한 정부장.

진짜 ‘사내정치’란 이런 것이라고 보여주는 듯한 모습이었다.

“gv 사업은 앞으로 현과장이 담당하는 걸로 해.”

“..예...”

현과장이 죽을 상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 6시 퇴근. 야근은 죽어도 거부. 회사는 그저 주식 ‘시드’ 뽑아가는 곳

이라 생각하는 추과장. 그의 눈이 한번 더 생기를 잃었다.

“자, 전달사항은 여기까지.”

한참을 얘기하던 정부장이 말을 멈췄다.

“시간이 좀 남으니, 업무 보고도 같이하지. 현과장.”

“예...저희 3팀이 맡은 애니메이션이요....”

현과장이 영혼없는 목소리로 보고를 시작했다.

“저희 팀은..”

“5팀은 개봉이 밀렸습니다.”

각 팀장들의 업무보고가 이뤄졌다. 그리고 구과장의 차례. 한록은 구과장을

바라보았다.

“소스코드 뱃지 제작, 인스타그램 이벤트 진행되고 있습니다.”

“뱃지 제작이 지금 된다고? 아이맥스 개봉에 맞출 수 있나?”

정부장이 물었다. 그러자 구과장이 뜨끔해서 말했다.

“네, 아무 문제 없이 잘 되고 있습니다. 뱃지가 3일이면 나와서요. 배급까지

해도 무리없이 맞출 수 있습니다.”

거짓말이다. 뱃지 제작은 판형을 떠야하기 때문에 최소 일주일은 걸린다.

분명 회의가 끝나면 유대리를 시켜서 하청업체를 달달 볶겠지.

“구과장.”

그러자 정부장이 구과장의 말을 잘랐다. 그 어느때보다 서늘한 목소리였다.

“그렇게 말한 이상 못 맞추면 전부 자네 탓이겠군.”

긴 말 할 것없이, 충분한 압박.

구차장은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부장이 다시 말했다.

“그리고?”

“아, 네, 네. ‘지구 특공대’는 권대리 기획안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이한록

대리가 이어받아서 검토해봤는데, 문제 없을 것 같다고 합니다.”

“알겠어.”

정부장이 ‘지구특공대’에는 별 말이 없자 구차장이 겨우 한숨을 쉬었다.

정부장이 언제 구과장을 압박했냐는 듯 마케팅부를 둘러보았다.

“업무보고는 이 정도로 끝내지. 그 외 얘기할 사람?”

아무도 말이 없었다.

“그럼 이대로 회의 끝..”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손을 들었다.

“‘지구특공대’와 관련된 일입니다.”

바로 한록이었다.

“이대리, 그걸 왜 여기서 얘기해? 끝나고 나랑 얘기해.”

“부서회의는 직원들이 부장한테 얘기하라고 있는 자리야. 얘기해, 이대리.”

정부장이 구과장의 말을 잘랐다.

예상대로다. 한록이 5년 동안 살펴본 결과, 정부장은 회의 중 이 정도의 질문

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지구 특공대’ 홍보 방안에 검토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화면 봐주시기 바랍

니다.”

한록이 정부장에게 보고서를 내밀고 단상으로 걸어나가며 말했다. 그리고 미

리 준비해둔 자료를 스크린에 띄웠다.

‘구과장은 어차피 나와 틀어진 사람.’

더 이상 그 사람의 비위를 맞출 생각은 없다.

중요한 건 정부장. 그리고 다른 사람들.

그 사람들이 권대리의 마케팅 방안이 망했다는 걸 알아차리는 거다.

“화면 보시죠. 이게 1차 마케팅 방안입니다. 밝은 분위기의 코메디 영화 같습

니다. 2차도 그대로 진행될 예정입니다.”

화면 속에서는 안전모를 쓴 남자가 물파스를 들고 웃고 있다.

“그런데, ‘지구 특공대’는 사실 이런 영화입니다.”

한록이 화면에 ‘지구 특공대’의 화면을 띄웠다. 주인공이 빌런의 눈을 송곳으

로 찌르고, 팔을 자르는 고문 장면이다.

“고문 장면을 마네킹으로 대체해서 12세 관람가를 받았지만 상당히 잔인합니다.”

“..그래. 텍스트로 보는거랑 다르게 잔인하군.”

‘아직은 잘 통하고 있다.’

정부장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정부장도 틀림없이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있을 것이다.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며, 한록은 계속 말을 이었다. 어느새 회의는 프레젠테

이션장이 되고 있었다.

“그리고 후반부 내용입니다. 마지막 30분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사회적 소

외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자.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다.

화면을 끈 한록이 정부장에게 말했다.

“애초에 이 영화는 코미디 영화가 아닙니다. 코메디를 소재로 한 고발물이죠.

그런데 지금 마케팅방안은 코미디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아마 영화를 보러 온

사람들이 ‘포스터 사기’라면서 욕할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한록이 들었던 말들이었다. 정부장이 턱을 괴고 물었다.

“권대리는 왜 이런식으로 진행한거지?”

“아마 사회 고발물은 인기가 없으니 코미디로 홍보를 해야 관객을 많이 모을

수 있을거라 생각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역효과만 나올겁니다.”

“그래서 하고싶은 말이 뭐야?”

“마케팅 방안을 바꿔야 합니다.”

“예산이 이미 짜여져있어. 1차 홍보도 나왔고.”

정부장이 구과장이 한 것과 같은 말을 했다.

-예산을 최소한으로 줄여서 홍보를 수정할 방안이 있습니다.

이전 생의 한록은 정부장을 찾아가서 이런 말을 했다.

그리고 정부장으로부터 ‘어쨌든 예산은 초과한다는게 아니냐’란 말을 들었다.

‘사실 지금하려는 말도 다르진 않지.’

하지만, 다른게 있다면..

‘그 말을 어떻게 전하느냐.’

그리고 이를 경제 용어로 ‘마케팅’이라 한다.

‘정치.’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

그건 사실, 영화를 마케팅하는 일과 다를 바 없다.

눈길을 끌고, 마음을 끌어 소비를 유도하고, 소비의 경험을 좋은 기억으로 남

긴다. 그래서 고객 ‘충성도’를 만든다. 그것이 재구매를 부른다.

이게 마케팅의 5단계.

혹은, 정치의 5단계일지도 모른다.

‘1번은 완성했다.’

이전 생에선 합리적인 데이터로 눈길을 끌면 사람을 설득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마케팅 경험 9년차, ck enm 최고의 사원 이한록은 이제 그것이 전부가

아니란 걸 안다.

‘소비를 유도하는 것은 결국 ’마음‘이다.’

‘마음’을 얻어야 한다. 아들의 교통사고 다음 날 회사에 출근했다던 냉혈한.

그 정부장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대체 어떻게?’

그리고 한록은 그 답까지도 알고 있다.

“부장님, 이대로 진행하면 ‘지구 특공대’는 ‘동화 속 미로’처럼 될 겁니다.”

-마케팅 법칙 1. 개인의 ‘경험’을 상기시켜라.

한록은 지금 그 법칙을 적용하고 있었다.

동화 속 미로는 과거 정부장이 참여했던 영화.

“동화 속 미로면, 내가 맡았던 영화 말이군.”

전략이 잘 통한 모양인지, 의자에 기대있던 정부장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내 말에 집중하고 있단 뜻이다.’

흐름이 잘 돌아가고 있는 것을 확인한 한록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화 속 미로’처럼 된다는게 무슨 말이지?”

그리고 정부장의 질문에 미리 준비한 두 번째 승부수를 던졌다.

“망한다는 뜻입니다.”

한록의 그 말에 조용해진 회의실.

“..히익.”

선을 넘은 발언에 누군가가 숨죽여 비명을 질렀다.

작가의말

제목의 의미가 드러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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