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건 잘했어.(1)
한록과 구과장이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안녕하세요!”
그러자 유선이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인사를 한다.
멀리 있어서 몰랐는데 유선도 아직 퇴근을 하지 않은 모양이다.
“유선씨 왜 퇴근 안 했는데?”
“<오셀로>시안 오늘까지 보내줘야 하니까 그러지. 유선씨가 지금 이대리랑 같
이 하고 있잖아? 빨리 결재하고 유선씨 보내줘라. 이러다 구과장 아동학대로
신고당한다!”
“과장님 저 스물 일곱인데...”
“아,몰라 몰라. 암튼 빨리 해줘, 구과장. 빨리이.”
“으, 알았어. 알았다고.”
현과장이 떼를 쓰자 구과장이 징그럽다는 듯 진저리를 쳤다. 그리고 얼른 결
재 버튼을 눌렀다.
[띠롱!]
한록의 메신저에 뜨는 알림. 결재가 완료되었다는 뜻이었다.
“자, 다들 집에 가. 빨리 빨리.”
결재가 완료되기 무섭게 현과장이 한록과 유선을 쫓아냈다.
[띵!]
엘리베이터가 금방 도착했으나, 한록은 잠시 버튼을 누르고 기다렸다.
그러자 사무실에서 유선이 가방을 챙겨 나왔다.
“같이 가요. 기다렸어요.”
“감사합니다!”
유선과 한록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유선씨 퇴근 안 한 줄도 몰랐네. 미안해요. 알았으면 진작 가라고 했을텐데.”
“아니에요. <오셀로> 저도 같이 하는거니까 결재 기다려야죠.”
“그럴 필요 없어요. 책임자는 난데. 내가 미안하니까 다음에는 그냥 가요.”
“어...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유선.
그렇게 대화가 끝났지만 아직 1층에 도착하려면 한참 멀었다.
'..어색하다.'
한록은 할 말이 없어 손목의 시계를 바라보았다. 손목에는 여전히 하늘색 실
이 유선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 실을 보자 갑자기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이게 생긴 뒤로 유선씨가 꽤 잘해줬지.'
한록이 유선에게 말을 걸었다.
“유선씨. 혹시 현과장님한테 <오셀로> 결재 때문에 퇴근 못하는거 말했어요?”
“아...네. 대화하다보니 어쩌다가....그리고 이대리님 병원 가셔야 할 것 같
아서...말하면 안 됐나요?”
“아니에요. 잘했어요.”
'어쩐지. 유선씨가 결재가 안 떨어져서 퇴근하고 있다고 말할 사람이 아닌데.
내가 못 가고 있으니까 대신 현과장님한테 말해줬군.'
병원에 가야하는 한록이 퇴근을 못하고 있자, 유선이 현과장한테 은근슬쩍 정
보를 흘려준 것이다.
'나 때문에 7시 반까지 기다기도 했고.'
자신을 기다려주고, 현과장한테 말을 흘려준 유선. 그리고 유선씨 때문이라
해도 구과장에게 핀잔을 준 현과장.
모두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3팀은 참 좋은 사람이 많아.'
만약 팀을 옮긴다면 이 곳으로 옮기고 싶을 정도였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로비를 나서 서로 반대방향으로 갈라지기 전, 한록이 유선에게 말했다.
“오늘 고마웠어요, 유선씨.”
“뭐가요?”
“오늘 내 편 여러번 들어줬잖아요.”
“아...아니에요.”
“다음에는 저도 유선씨 편 들어드릴게요.”
한록이 말하자 유선이 놀랍다는 듯 말한다.
“이대리님이 내 편, 네 편 하시는 거 처음 봐요.”
“가끔은 이럴 때도 있는거죠.”
한록이 별 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그러자 유선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대리님 편이라서 좋네요.”
그러더니 밝게 웃는 유선.
존경하는 사람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뿌듯한 표정이었다.
'역시. 진작 잘 해줄걸 그랬네.'
유선의 미소를 보고 한록은 뒤늦게 생각했다.
*
유선과 헤어지고 반대방향으로 걷던 한록. 한록은 문득 손목의 실이 조금 달
라졌음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실이 굵어졌다.'
유선과 이어진 연분홍색 실이 조금 굵어져 있었다. 마치 더 깊어진 한록과 유
선의 인연을 나타내듯이.
'내 편이라.'
한록은 유선과 했던 대화를 곱씹었다.
내 편. 회사용어로, ‘라인.’ 무슨 일이 생기면 내 편을 들어줄 사람. 사내정
치란 사실 ‘라인’을 얻는 행위나 마찬가지이다.
‘이게...사실 그 '라인'을 의미하는건가?‘’
한록이 영도와 유선의 마음을 얻었을 때 생긴 실. 그리고 이 실이 생긴 이후,
영도와 유선은 계속 한록의 편을 들어줬다.
‘혹시 이 실은... 내 '편'을 알려주는건가?’
서로 뒤통수를 쳐대는 사내정치.
어제의 적이 오늘의 편이 되고, 오늘의 편이 내일의 적이 된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내 진짜 ‘편’이 누군지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내 '라인'이 둘이나 생겼단건가?‘
한록이 마음먹자 벌써 '라인'이 생겼단 것이었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네.'
오차장이 하는 것처럼 남을 음해하지 않았다.
구과장이 하는 것처럼 정부장에게 아부를 하지도 않았다.
그저 유선과 영도에게 조금 더 친절히, 예전에는 말해주지 못했던 진심을 보
여줬을 뿐이다.
하지만 그런데 ‘내 편’이 두명이나 생겼다.
처음으로 든 생각은 안도였다.
‘...다행히 인간관계에 아주 능력이 없지는 않은 모양이네.’
그리고 두 번째로 든 생각은 깨달음.
‘사내정치나 인간관계라는게...내가 생각하는 나쁜 방향만 있는건 아니겠구
나.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도 그 방법이겠구나.’
그리고 마지막으로 든 생각은...
‘그렇다면 해볼만 하다.’
자신감이었다.
*
다음날 아침.
한록이 속한 마케팅 2팀은 주간회의를 위해 사무실로 향했다.
“보고해.”
구과장이 짧게 말했다.
원래 마케팅 2팀의 팀장은 한록의 원수 오부장, 아니 오차장이다.
그러나 오차장이 장기 출장을 간 상황이어서 지금은 구과장이 팀장대리였다.
“네,네. 이번에 개봉하는 소스코드 스케쥴 잡았습니다...”
회의실 분위기는 숨이 막힐 정도로 날카로웠다. 어제 한록과의 싸움 이후 구
과장은 내내 짜증을 내고 있었다.
“포스터 인쇄가 왜 이리 늦어! 이러면 아이맥스 첫주 상영에 못 맞추잖아! 이
것도 안 하고 뭐했어? 네가 그러고도 월급 받을 자격이 있어? 너 월급 얼마야.”
“그, 그게..”
“얼마냐고!”
“330...”
“그만큼 일하고 있어? 그 반도 못하잖아! 고졸이 와도 이것보단 잘하겠다!”
늘 그렇듯 쏟아지는 구과장의 폭언.
회의에 참석한 모두가 숨을 죽이고 있다. 단, 한록만 빼고.
“이한록.”
구과장이 한록에게 말했다.
‘대놓고 멱살이라도 잡을 줄 알았는데. 정부장 눈치를 어지간히 보는군.’
한록은 구과장의 눈을 똑바로 보고 업무 진행상황을 보고 했다.
“‘오셀로’ 인스타그램 기대평 이벤트 시작했습니다. 반응이 좋아서 2차도 그
대로 진행하면 될 것 같습니다. 어플 퀴즈 이벤트도 잘 되고 있는 편입니다.
실결제 전환율이 매우 높습니다. 목표치는 이미 달성했습니다.”
“........”
구과장이 이를 악물었다.
한록의 일처리는 워낙 완벽하다. 본인이 생각해도 흠잡을 구석이 없는 것이다.
“목표치 달성하면 끝이야? 그 이상을 해야지.”
..역시, 그 정도로 끝나면 구과장이 아니다. 흠잡을 구석을 기어코 만들어낸다.
그러나 한록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예상했으니까.
“그리고 ‘지구 특공대’ 말인데.”
...그러나 ‘지구 특공대’ 얘기가 나온 순간, 한록은 펜을 떨어뜨렸다.
*
‘지구 특공대.’
얼마 전 퇴사한 1팀 권대리가 맡던 영화다.
1팀에서 일이 너무 많다고 울어대서 2팀 한록에게로 넘어왔다.
5년 전 과거. 남의 일을 이어받은 한록의 소감은..
‘개판인데?’
개판이다.
'영화 망하기 딱 좋겠다.'
그런 생각도 했다.
‘지구 특공대’는 신나균 주연의 블랙 코미디.
노동자 ‘건우’가 자신의 회사 사장을 지구를 멸망시키러 온 외계인이라고 생
각해서 고문을 하는 내용이다.
초반에는 조금 웃음 요소가 있으나, 뒤로 갈수록 사회비판이 강해진다. 거기
에 기괴한 고문씬에 충격적 결말까지.
그런데 권대리는 스릴러 사회비판극인 이 영화를 코미디처럼 마케팅했다.
‘절대 안 됩니다. 싹 바꿔야 해요.’
한록은 아주 강하게 주장했다.
그리고 이 영화는 5년 후..
‘내 커리어 최고의 흑역사가 됐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구과장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지구 특공대는 원래 권대리가 하던대로 가자고.”
이게 문제였다.
한록이 마케팅 방안을 싹 갈아갔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미 1차 홍보 진행됐어. 1차 예고편 올라갔고, 바이럴도 돌렸어. 포스터도
나왔고. 예산까지 다 짰어. 부장님이 굳이 바꾸지 말자고 하신다.”
기억난다. 5년 전의 어이없음이.
정부장이 아무리 실적에 미친 사람이라고 해도 부장이 된지 3개월밖에 안 된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프로젝트 하나의 예산을 뒤엎기는 부담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지구특공대는 ‘홍보가 잘못한 영화’ 하면 1순위로 불리게 되
었다.
“안 됩니다.”
한록이 딱 잘라 말했다. 그런 미래를 빤히 알고 있으면서 ‘부장님 지시’란 말
에 넘어갈 순 없다.
“부장님 말씀이 우습나봐?”
구과장이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한록을 바라보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이 일을 부장에게 말하겠다는 뉘앙스.
‘지금 나는 구과장이랑 대립중이다. 그런 상황에서 정부장의 결정에 반박할
생각은 없다.’
사실은 있다.
한록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일.
정부장 마음에 드는 것보다 그게 더 중요했다.
문제는 이거다.
‘부장님, 꼭 바꿔야 합니다!’
과거에도 한록은 정부장을 직접 찾아가 말했으나 정부장은 마음을 바꾸지 않
았다.
어차피 정부장에게 반박해봤자, 마케팅이 바뀔 리가 없다는 거다.
“..알겠습니다. 권대리 마케팅 방안으로 진행하겠습니다.”
그래서 한록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생은 멍청하게 살지 않기로 다짐했으니까.
현명하게 사내정치를 할거니까.
그걸 위해서 영화 하나쯤은, 포기를...
...할거 같냐?
‘이제야 회사 다니는 법을 알거 같은데, 얌전히 포기할 수는 없지.’
한록이 속으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
다음주 월요일, 8시 40분.
오늘은 한달에 한 번 있는 부서 전체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안녕하십니까.”
“..그래. 일 해.”
한록이 구과장에게 인사를 했다.
그러자 구과장이 정부장의 눈치를 보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다.
평소라면 대놓고 한록을 무시했을 구과장.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속으로
생각했다.
‘구과장이 숙이고 들어가네. 무슨 일이래?’
‘부장님이 구과장을 크게 혼내시긴 했지...’
‘이대리 좀 달라진 것 같아.’
‘이대리가 쎄긴 하다. 나는 언제 구과장한테 저렇게 눈 똑바로 뜨고 대들어보
나.’
‘이놈의 회사 때려쳐야지 진짜 숨 막혀서 못 살겠네 엑셀 만지는 척 사람인
들어가봐야겠다 어휴 2개국어 능통자 구하면서 연봉이 이 정도라고? 미쳤나?’
구과장이 사람들의 생각을 알기라도 하는 듯, 괜히 씩씩거리며 키보드를 부술
듯이 누른다.
한록에게 숙이고 들어가는 게 자존심이 상한 것이었다.
모두가, 심지어 구과장마저 한록과 구과장의 일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단 한명. 한록만 빼고.
한록은 오히려 칼을 갈고 있었다.
‘이제 시작이다.’
한록은 자신이 준비한 <지구특공대> 보고서를 만지작거렸다.
9시가 되자 정부장이 입을 열었다.
“다들 회의실로 이동해.”
정부장의 말에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한록은 생각했다.
‘지금이 기회다.’
구과장은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한록이 설득할 것은, 구과장이 아니라 정부장이다.
그리고 한록은 정부장을 설득하기 위한 ‘무기’를 가져왔다.
바로 정부장과 함께한 5년의 시간이다. 정부장의 성격, 업무 스타일, 과거에
진행했던 프로젝트. 한록은 그 모든 것을 가져왔다.
회귀 전, 정부장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마케팅을 바꿔달라’고 설득 하고,
화를 내고, 부탁을 하던 자신의 모습...
‘이번엔 다르다.’
그러나 이번엔 다르다.
‘자.’
‘이번엔...’
‘제대로 선을 넘어보자.’
한록은 보고서를 들고 회의실로 향했다.
작가의말
신나균 주연의 sf영화?
지구를 x켜라?
아니면 지구를 지켜x?
그것도 아니면 x구를 지켜라?
저는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