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5화 (5/263)

저한테 사과하시죠.(5)

“...이대리 지금 뭐라고 했어?”

구과장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저한테 사과하시라고 했습니다.”

“아니, 내가 왜 사과를 해?”

“과장님 때문에 병원에 못 갈 뻔 했습니다. 조금만 늦었으면 죽었을 수도 있

어요.”

“아니, 안 늦었잖아. 결국 갔잖아.”

구과장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벌써 너, 너 거려야 하는데 구과장도 아직 참고 있다.

이게 어지간히 큰일 이란걸, 그리고 한록도 굉장히 화가 난 걸 알고 있는 것

이다.

"못 갔으면 어쩔 뻔 했습니까?"

"이대리, 말버릇이 그게 뭐야? 동생 아픈게 내 탓이야?"

"제가 가겠다고 안 했으면 안 보내셨을거 아닙니까? 병원에 못 갈 뻔 한건 과

장님 탓입니다."

"헉.."

뒤에서 누군가 조용히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구과장이 폭언을 일삼아서 무섭게 만드는 스타일이라면, 한록은 냉정해서 더

무서운 타입이다.

그게 구과장이 한록을 싫어하는 이유였다.

남들처럼 설설기지 않고, 구과장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부하 세 명을 퇴사시켰다. 그만큼 나는 무서운 사람이다.’

구과장 밑으로 들어간 여직원은 화장실에서 우는게 일과중 하나다.

워낙 성격이 강한 한록이라 그나마 구과장의 괴롭힘을 견디는 것.

그런 한록마저 과거에 몇 번 스트레스로 쓰러진 적이 있다.

그리고 그때 구과장이 한 말.

‘아프면 쉬고, 동생 아프면 또 쉬고. 회사가 장난인가? 그런 마인드로 다닐거

면 때려쳐야지.’

부하들을 쥐잡듯이 잡는 것. 그래서 못 견디는 사람은 ‘나약하다’며 압박하는

것.

구과장은 그게 자랑인 사람이었다.

그걸 알기 때문에 오늘 한록은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한록과 반대로 구과장은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 녀석 오늘 도대체 왜 이러지? 나랑 끝장낼 생각인가? 앞으로 회사를 어떻

게 다니려고?’

사실 그렇게 되면 구과장도 곤란해진다. 한록은 일을 정말 잘하니까.

다행히도 지금까지는 구과장이 상사기 때문에, 한록이 말을 듣는 시늉이라도

했다.

그런데 어제부터 한록이 좀 달라졌다.

마치 구과장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한 태도.

심지어 자포자기한 것도 아니고 행동 하나하나가 계획적으로 느껴진다.

‘아, 미치겠네 진짜.’

구과장은 슬쩍 회의실 안의 정부장을 살폈다.

‘분명 안에서 듣고 있을텐데. 나올 생각이 전혀 없나보군.’

과장이랑 부하가 싸운다. 심지어 팀장인 오차장은 해외 출장으로 부재중.

정부장이 중재를 해야하나, 사건이 워낙 심각하다. 사람 목숨이 달렸으니까.

정부장은 아직 상황에 개입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아마...내가 대충 사과하고 끝나길 바라겠군.’

자존심이 상한다.

이 대가리 빳빳하게 드는 대리새끼한테.

그것도 회사에서 능력이 제일 좋은 놈한테.

후배한테.

나 구과장이 고개를 숙여야 하다니.

하지만 어쩔수 없다.

“...알았어. 미안해. 안 그래도 자네 없는 동안 일은 유대리 시켜놨어.”

구과장이 드디어 꼬리를 내렸다.

“...동생이 매일 아프다는데 내가 알 수가 있나...”

하지만 구과장은 마지막 자존심을 죽이지 못했다.

“구과장님. 말 똑바로 하십시오.”

그리고 그게 한록의 성격에 불을 질러 버렸다.

‘가족을 건드렸다. 절대 가만 안 놔둔다.’

한록이 눈을 똑바로 뜨고 말했다.

“저는 회사 절차대로 휴가를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구과장님은 멋대로 스케쥴

을 바꾸려고 하셨습니다.”

“뭐, 뭐?”

“제 동생이 자주 아픈게 문제가 아니라 과장님이 강압적으로 휴가를 사용하려

하신게 문제입니다.”

“야 이한록, 말 다했어?!”

드디어 구과장이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사람들이 몇 명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구경을 할 상황이 아니란걸 안 것이다.

휘말리기 싫은 몇은 자리를 피했고, 몇은 ‘이걸 말려야 하나’란 표정으로 둘

을 바라보았다.

“이대리. 이제 그만...”

현과장이 다가왔으나 한록은 말을 이었다.

“아뇨. 아직 안 끝났습니다.”

그리고 한록은 담아둔 말을 모두했다.

“앞으로 절차 무시하고 휴가 사용하지 마십시오. 부하라고 강압적인 지시하

고, 뻔뻔하게 굴지도 마시고요.”

“야!!”

구과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눈앞에 나타난 누군가에 의해 입을

다물었다.

“그만.”

정부장이었다.

*

“지금 회사에서 뭐하는 거야.”

부하 직원 둘이 사내에서 소리를 지르며 싸운다.

더 이상 두고볼 수 없다고 판단한 정부장이 밖으로 나온 것이다.

“정부장님! 죄송합니다. 이대리가 감정주체를 못해서 교육중이었습니다.”

구과장이 언제 소리를 질렀냐는 듯 자기 잘못은 쏙 빼고 말했다.

화를 버럭 낼 때는 언제고, 부장이 앞에 나타나니 바로 ‘교육’이라고 둘러댄다.

상사 앞이라고 손바닥 바꾸듯 태도를 바꾸는 모습, 구과장의 진짜 무서운 모

습은 폭언도, 괴롭힘도 아니라 이런 냉정함이었다.

“제 목소리가 너무 컸습니다. 주의하겠습니다.”

구과장이 바로 태도를 바꾼다. 이쯤되면 정부장도 신경을 끌 때다.

“교육이라기엔 소리가 너무 크군.”

...하지만 오늘 정부장의 태도는 조금 달랐다.

‘...뭐지?’

한록이 의아함에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구

과장 또한 마찬가지인 듯 했다.

“이대리. 동생 일은 괜찮은 거야?”

그리고 정부장이 한록에게 묻자 모두가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판이 달라졌다.’

정부장은 단순히 싸움을 중재하는게 아니다. 한록의 편을 들고 있는 것이다.

‘부장님이...누구 한 사람 편을 들어주실 분이 아닌데?’

이건 평소 정부장의 스타일이 아니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며 상황을 지켜

보았다.

정부장의 성격대로라면 구과장은 물론, 한록마저 회사에서 큰소리를 낸다고

질책을 받아야 했다.

한록이 정부장에게 차분히 답했다.

“예. 다행히 병원에 늦지 않게 갔습니다.”

“다행이군.”

“감사합니다, 부장님.”

그렇게 말하면서도, 한록은 사람들과 똑같은 의문을 느꼈다.

‘정부장이 갑자기 왜..?’

그리고 그 의문운 한록을 빤히 바라보는 유선의 의문에서 해결 될 수 있었다.

-별 거 아닌 실수에 유선을 호출한 정부장.

-몇번이나 한록에게 ‘고맙다’고 말하던 유선.

-지금 자신을 위로하는 정부장.

그리고 아까 유선이 정부장과 얘기할 때 순간 반짝 빛나던 손목의 실.

‘김유선한테 연차 건에 대해 물어봤군. 그리고 김유선이 나에 대해 좋게 말해

줬어.’

-신입 계약직이 안 좋게 볼 정도로 구과장이 꼴불견이었다. 구과장은 부하를

단도리하지도, 기선제압을 하지도 못했다.

그 정보를 접한 정부장이 구과장을 깔끔하게 제압한 것이다.

“구경났어? 다들 앉아.”

정부장의 말에 사람들이 후다닥 자리에 앉았다. 화장실로 도망간 사람들도 얼

른 다시 달려온다.

정부장이 자리로 돌아가자, 다시 사무실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팀장님, 방금 메신저로 보고서 보냈습니다.”

“양대리. 디자인 팀에 전화해봤어?”

“어, 유선씨. 임감독 전화왔다.”

방금 전의 싸움은 잊은 것처럼 다시 움직이는 사무실.

“...하...”

그리고 회사 사람들 앞에서 모양새가 이상해진 구과장 혼자 일어서 있는 상황.

‘이대리 이놈, 정부장을 어떻게 구워 삶은거지?’

뭔가 달라졌다. 정부장은 일 외적인 사안에 간섭하는 타입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 이한록의 편을 들고 있다.

'분명 이한록이 무슨 수를 쓴 것 같다.'

이한록이 잔머리를 굴리는 놈이 아닌 건 안다. 하지만 오늘은 뭔가 달랐다.

원래도 할 말은 다하는 놈이지만, 오늘은 꿍꿍이가 있어보였다.

그런데 그게 뭔지 도무지 모르겠다...

“에이,씨!”

머리를 벅벅 긁던 구과장이 땅을 한번 걷어찼다.

“야, 유대리! 메일에 오타났잖아!”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

“지나가겠습니다.”

“아, 네!”

한록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며 유선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지만, 유선은 알 정도의 ‘고마움의 표시’.

그 표시에 유선의 얼굴에 또 한번 미소가 어렸다.

‘...고작 칭찬 하나가...내 상황을 바꿔주다니.’

이전 생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던 변화.

그 변화에 한록은 조금 어색한 기분이었다.

별로 어렵지 않은 칭찬. 큰 변화.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분이...좋네.’

누군가에게 내민 작은 호의가, 다시 호의로 돌아오는 것.

그게 꽤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

“하...”

대부분이 퇴근한 7시 반.

그러나 한록은 아직도 퇴근을 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대리. 왜 아직 있어?”

누군가 한록을 불렀다. 3팀의 현과장이었다.

“오늘까지 <오셀로> 오리지널 티켓 시안 보내줘야 해서요.”

“아이고, 이놈의 회사. 사람을 죽여라 죽여.”

마찬가지로 마감에 시달리고 있는 현과장이 한껏 앓는 소리를 했다.

“적당히 하고 집에 들어가. 동생도 아픈데.”

“네, 알겠습니다.”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그게 한록의 맘처럼 되는 일이 아니다.

‘사실 시안은 다 끝났다. 결재가 문제지.’

시안은 한록이 병원에 있는 사이 유선이 처리해주었다.

다만 아직까지 결재가 떨어지지 않아 인쇄소에 파일을 넘기고 집에 가지 못하

는 것이다.

시안에 문제가 있어서 결재가 떨어지지 않은 건 아니다.

현재 한록의 팀장인 오차장은 출장중.

그래서 대리인 구과장이 결재를 해주어야 하는데, 오늘 일의 심술로 결재를

해주지 않는 것일 뿐이다.

‘본인이 집에 돌아갈때까진 안해주겠다 이거지.’

구과장은 하는 일도 없으면서 회사에 10시고, 11시고 남아있는 유형의 타입이

었다.

아마 한록도 그때가 되어서야 집에 갈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병원에 못가겠군...’

구과장 때문에 어머니가 혼자 한서를 돌봐야한다니.

‘정말 치졸하게 구는군. 아마 내가 자기 팀이면 앞으로도 계속 이러겠지.”

하루빨리 팀을 바꾸고 싶은 마음뿐이다.

딱히 할 일도 없고, 집에도 갈 수 없는 상황.

한록은 그저 멍하니 손목의 실을 바라보았다.

영도와 유선으로부터 이어져서, 한록의 손에 묶인 실. 그러나 영도와 유선은

보이지 않는다는 실.

이 실은 유선이 ‘고맙다’고 말할 때 빛났고, 유선이 한록에게 은혜를 갚을 때

반짝였다.

‘인연이나, 고마움..그런게 형상화돼서 보이는건가?’

‘연이 닿았다’는 표현들.

운명의 상대와는 새끼손가락에 실을 감고 태어난다는 전래동화.

사내정치를 할 때 ‘라인을 탄다’는 표현들..

정확히 정의할 수는 없지만, 그런 ‘관계’가 눈에 보이게 나타난게 바로 이 실

이 아닐까.

그렇게 한록이 짜증을 가라앉히고 있을 때, 의외의 곳에서 구세주가 나타났다.

"아, 구과장! 빨리 결재 좀 해주라!"

현과장이었다.

"뭐? 무슨 결재?"

구과장이 무슨 소리냐는 듯 인상을 쓰고 현과장을 바라보았다.

"<오셀로>결재. 이러다 날 새겠다!"

"그걸 왜 현과장이 난리야? 손볼 게 있어서 안 한거야!"

“있긴 뭐가 있어! 없구만! 빨리 결재 끝내고 구과장도 집에 좀 가라!”

“아니 왜 현과장이 난리냐니까?”

그건 한록 역시 생각하고 있는 질문이었다. 그러자 현과장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지금 구과장이 결재 안 해줘서 유선씨가 집에 못 가잖아!”

‘김유선?’

“유선씨?”

한록과 구과장이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작가의말

유선씨는 선한 마음이 있어서 유선씨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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