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한테 사과하시죠.(4)
“그럼 부장님한테 가보겠습니다.”
유선이 부장에게로 향한 후, 한록은 혼자 생각에 잠겨있었다.
‘유선씨가 고맙다고 말하니 실이 생겼어. 그리고 두 번째로 고맙다고 하니까
실의 색이 진해졌고.’
끊어질 듯 가늘고, 영도의 새빨간 실과는 달리 하얀색에 가깝던 유선의 실.
그 실이 ‘고맙다’는 말과 함께 조금 진한 분홍색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이 고마워하는 만큼 실의 색깔이 진해지는건가?’
의문은 한두개가 아니었다.
‘그럼 실의 굵기는 무슨 의미일까?’
‘대체 왜 실이 생기는걸까?’
‘왜 영도일까.’
‘왜 유선씨일까?’
‘......’
10분 정도 고민을 하던 한록은 답을 내렸다.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그리고 지금은 근무 중이다.
‘....일단 일을 하자.’
자신의 직업은 회사원. 지금은 일을 할 시간이었다.
*
‘아, 진짜! 김유선! 멍청이 김유선!’
유선은 정부장에게로 향하며 속으로 자신에게 욕을 했다.
다른것도 아니고 결재를 빠뜨리다니. 그것도 포스터처럼 외부로 나가는 걸.
정부장은 이런 일에 굉장히 꼼꼼해서 아마 크게 한 소리를 들을 게 분명했다.
‘그래도 이대리님한테 혼 안난게 어디야...게다가 잘했다고 말도 해주셨어.’
그나마 위안이 되는게 있다면 오늘 한록의 태도가 좀 친절했다는 것 정도.
다른 팀이지만 유능한 상사. 그런 한록과 일을 한다는게 처음엔 정말 기뻤다.
‘여기서 잘 하면 정규직 전환도 가능할 거라 생각했는데...’
대기업에서 계약직 사원의 정규직 전환.
다들 불가능하다고 말했지만, 유선은 도전했다.
그리고 한록과 일을 할 기회까지 생겼다.
‘처음에는 진짜 기뻤는데...’
그런데 아직 입사 초기인 유선은 실수가 잦았고, 한록은 유능한 만큼 칼 같았다.
폭언을 하거나 불친절하진 않다. 그러나 유선에게는 하늘같고 말 붙이기도 어
려운 사람으로 보였다.
그런 한록 밑에서 기가 죽다보니 실수는 더욱 잦아졌다.
‘오늘도 엄청 혼날거 같았는데...오늘 뭔가 좀 다르셨어.’
유선의 실수를 대신 책임지고 조언해주는 것.
그 정도는 한록도 늘 해주는 일이지만 오늘은 좀 달랐다.
오늘은 무려 그 한록이 ‘칭찬’을 해줬다.
‘오늘 기분이 좋으신건가...뭔지 모르지만, 아무튼 그거면 됐다.’
상사의 한마디에 울음이 터지고, 기분이 날아가기도 하는 신입사원.
그런 유선에게 존경하는 한록의 칭찬은 부장의 혼쭐도 버티게 해줄 응원이었다.
“김유선. 앉아.”
그래서 유선은 정부장의 말에도 심호흡을 하고 차분히 자리에 앉았다.
“결재를 빼먹고 인쇄로 돌렸군.”
“네, 정말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주의하겠습니다.”
“그래. 밖으로 나가는 인쇄물은 꼭 나를 거치게 해.”
정부장은 그렇게 시작해서 유선에게 몇마디 충고와 지적을 했다.
‘생각보다 무섭지 않다. 이대리님이 미리 말해주셔서 그런가?’
엄청나게 혼날거라 생각했는데 정부장은 생각보다 무섭게 굴지 않았다.
그저 주의를 주는 것 정도.
‘이대리님이 말씀이 맞아. 혼자 너무 걱정했다. 주의하되, 너무 기죽지 말기.’
유선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한록의 말을 떠올렸다.
그때 정부장이 지나가는 말투로 말했다.
“혼내는 건 이정도로 하지. 이한록이 인수인계도 제대로 못할 정도로 정신이
없었나 보지?”
정부장은 그 날 부산영화제 출장 때문에 자리에 없었다.
그 생각을 한 유선이 얼른 답했다.
“아, 네...! 엄청 다급하게 나가셨어요.”
“그래도 이 정도는 끝내고 가지. 이건 사실 이한록 탓이군. 구과장이랑도 연
차 때문에 싸웠다며.”
자신의 생각과 다르게 한록을 탓하는 듯한 정부장의 말. 유선은 조금 당황하
기 시작했다.
‘어, 이게 아닌데...나 때문에 이대리님이 곤란해지시면 어떡하지...?’
유선의 착한 마음씨와 부장 앞이라는 압박감.
그 걱정 때문에 유선은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 그게, 싸우신건 아니고...그...구과장님이랑 좀 의사소통이 안 되신 부
분이 있으셔서...그런 부분을 신경쓰기 어려우셨을 거예요. 그래도 병원 간
뒤에 저한테 다 지시해주셨어요.”
“구과장이랑?”
정부장이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네...그, 연차 사용이 합의가 안 되셨나봐요.”
“무슨 합의? 이대리가 나한테까지 결재를 맡았는데.”
“아, 그게...”
유선은 거기까지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구과장이 막무가내로 연차를 쓰려했
다’고 말하기가 어려운 것이었다.
‘그치만, 그게 맞지 않나..? 그리고 이대로 끝나면 이대리님이 좀 이상해보일
거 같은데...’
유선의 안에서 작은 고뇌가 일어났다.
‘말을 하냐.’
‘그냥 모르겠다고 발을 빼냐.’
그리고 그 고민은 짧게 끝났다.
‘포스터 잘 끝내셨네요. 수고하셨어요. 부장님한테는 제가 대신 말씀드리겠습
니다.’
한록의 그 말이 생각났던 것이다.
‘이대리님도 나 감싸주고 칭찬해주셨는데, 이 정도야 뭐...문제 안되겠지?’
그리고 그렇게 생각한 순간, 유선의 손목에 묶인 연한 분홍색 실이 반짝거렸다.
“그게...구과장님이 갑자기 연차를 쓰셔야할 일이 생기셨나 봐요.”
그래도 최대한 모르는척, 중립적인척 말한다.
다만 아주 약간 한록의 편을 들어줄 뿐이다.
자신에게 손해가 안 되는 선에서.
“그래? 어지간히 급했나 보지.”
“네, 저는 잘 모르지만...”
다행히 정부장도 이 일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알겠어. 가 봐.”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적당히 잘 말했다.’
유선은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정부장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구과장의 자리를 바라보는 것을 미처 알
지 못했다.
*
점심시간이 지나고 오후.
“.......”
점심 직후인데도 불구하고 사무실은 조용했다.
바로 구과장이 드디어 출근을 했기 때문이었다.
“과장님.”
한록이 구과장의 앞에서자, 사무실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사무실에 타자 소리만이 들린다.
아마 대충 이런 대화가 오가고 있으리라.
[구과장님이 진짜 너무했어요. 동생이 아프다는데......]
[이대리도 참 안됐어. 구과장님은 이대리를 왜 이리 싫어하시나 몰라.]
[그래도 뭐, 구과장도 알고 한건 아니니까....]
[이대리 속이 말이 아니겠다.]
그리고 구과장의 대답.
“어. 가서 일해.”
그 말에 타자소리가 더욱 불타오른다.
*
병원에서의 이틀.
한록은 한서의 곁에 꼭 붙어서 많은 생각을 했다.
‘회사에 남을 것이다.’
‘하지만 이전처럼 살지는 않을 것이다.’
오차장의 밑에서 휘둘리며, 결말은 억울한 누명인 인생.
이제 그런 멍청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이제 구과장에게 어떻게 하느냐...’
과거 한록은 휴직을 하고 두달만에 회사로 돌아왔다.
그리고 돌아오자마자 구과장에게 주먹질을 했다.
이 일로 한록은 일년간 회계부로 발령을 받게 된다. 사실상 좌천이다.
그리고 일년 후 다시 마케팅부로 복귀.
구과장의 얼굴을 볼때마다 또 주먹질을 하고 싶었지만, 참을 수 밖에 없다.
동생이 큰 병을 앓고 있는 상황. 거기에 회사에서는 병원비 지원이 나온다.
그런 상황에서 회사에 트러블을 만들 순 없었다.
‘참아야 한다. 참아야 한다. 참아야 한다. 얌전히 있자.’
....라고 예전에는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은 생각한다.
‘내가 왜?’
‘구과장은 날 싫어해. 오차장도 마찬가지고. 둘 밑에 있어봐야 예전처럼 실적
만 뺏기고, 누명만 쓸 뿐이야.’
9년간 회사생활을 하면서 알게 된 게 있다.
자신을 싫어하는 상사.
그 밑에선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팀을 바꿔야 한다.’
지금 한록이 해결 해야하는 가장 시급한 목표는 바로 이것이었다.
‘하지만...쉽지는 않을거다.’
다만, 정부장이 쉽게 팀이동을 허락해주지 않을 것이다.
‘아직 3개월차 부장이니 귀찮은 일을 만들고 싶지 않겠지.’
아직은 때가 아니다.
적당한 때가 올때까지, 구과장과 오차장이 도저히 한록과 같은 팀이 될 수 없
다는 걸 계속 보여줘야 한다.
그리고...
“어, 가서 일해.”
지금은 아주 좋은 기회였다.
*
“어. 가서 일해.”
구과장의 말에 타자소리가 더욱 거세졌다.
[와, 지금 뭐야?]
[저건 진짜 아니죠; 미안하단 말 한마디 정돈 할 수 있는거 아닌가?]
[최소 안부라도 물어봐야 하는거 아니에요?]
[구과장이 보통 성격이 아니잖아. 그래도 너무했네.]
[근데 이대리님도 성격 엄청 쎄신데..]
[그치, 이대리도 보통 성격 아니지.]
[난리나는거 아니에요?]
그러나 그 타자소리는...
“저한테 할 말 없으십니까?”
그 한마디에 뚝 끊겼다.
모두 눈치 챈 것이다.
장난이 아니고, 진짜 뭔 일이 날 것이다.
“내가 무슨 말을 해?”
“저한테 사과하십시오.”
벌겋게 달아오른 구과장에게 한록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지금 당장요.”
[...이대리 미쳤나?]
눈치 없는 사원의 마지막 타자소리가 톡, 들려왔다.
작가의말
이대리가 미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