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한테 사과하시죠.(3)
*
목요일.
어머니도 오셨고, 이틀 더 연차를 낸 한록이 출근을 하는 날이다.
“오빠, 잘 다녀와.”
“그래, 한록아. 고생 많았다.”
“네, 다녀오겠습니다.”
한서가 아직 아프고, 어머니도 바쁘시지만 더 이상 연차를 쓸 순 없다. 일이
있으니까.
한록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병실 밖으로 향했다.
“형, 가자!”
병실 밖에선 영도가 한록을 기다리고 있었다.
*
영도가 병원까지 온 것은 한록을 회사로 데려다주기 위해서였다. 운전을 하던
영도가 한록에게 물었다.
“형, 좀 괜찮아? 오늘도 쉬는 건 어때?”
“삼일이나 빠질 순 없어. 가서 프로젝트 체크는 해야지. 유선씨가 많이 고생
하고 있을 거야.”
유선. 한록과 다른 팀의 계약직 사원.
한록이 자리를 비운 이틀 동안 급하게 한록의 업무를 봐주고 있었다.
“아, 그래. 형 빠지면 회사가 안 돌아가지. 형 없으면 우리 회사 망하지. 나
머지는 다 멍청이지.”
영도가 조금 삐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영도는 법무팀 2년차.
연차도 그렇고 법무팀 특성상 아직 중요한 업무를 맡지 못 하는 상황이다.
“너 자꾸 그런 식으로...”
영도를 혼내려던 한록이 입을 다물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 것이다.
‘영도도 속이 말이 아니겠어.’
같은 고등학교 출신. 거기에 입사 시기도 비슷한 친한 형 한록은 벌써 대리다.
그런데 자신은 아직도 회사에 적응하지 못한 상태라니.
‘그런 상황에서 날 많이 챙겨 줬는데...내가 제대로 보답하질 못했지.’
한록 나름대로 노력했다. 그러나 그게 영도에게충분하지 못했단 생각이 든다.
한록 자체가 감정표현이 많지 않은 사람이니까.
‘이번에는...좀 다르게 해보자.’
기왕 다르게 살아보기로 한 거, 시작부터 적을 만들 생각은 없었다.
한록이 영도에게 말했다.
“영도야.”
“아, 왜. 또 혼내려고?”
“너도 잘하고 있어.”
“...어?”
영도가 놀라서 한록을 바라보았다. 한록이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앞에 봐라. 운전 중이잖아.”
“어, 어. 근데 형, 뭐라고?”
“얼마전에 사내 저작권 교육 너희 팀에서 했지? 그때 프로그램 좋다고 다들
좋아하더라.”
“어, 그거...”
“응. 네가 짠 프로그램이잖아.”
영도의 얼굴에 조용히 미소가 걸린다.
“아, 그냥 작년 거 참고해서 짠 건데 뭐. 너무 대놓고 칭찬하는 거 아냐?”
“작년에는 좋단 말 안 나왔어. 올해는 다들 좋다잖아. 만족도 평가도 높지 않
았어?”
“응, 그렇긴 한데...”
영도가 머쓱한, 그러나 나쁘지 않은 표정으로 물었다.
“근데 형, 갑자기 그건 왜?”
"그냥. 갑자기 칭찬해주고 싶어서."
한서가 쓰러지자마자 찾아와주고, 오늘 한록을 출근까지 시켜준 영도.
물론 미래에 영도가 한 짓은 용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로 적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지금 영도는 한록
에게 정말 잘하고 있으니까.
"아, 진짜, 쑥스럽게..."
"그래서 싫냐? 앞으로 하지마?"
"아니! 그런 말이 아니잖아! 형은 빈말도 몰라?"
영도의 징징거리는 말에 한록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영도도 아직 앤데. 예전에는 그 생각은 못 하고 혼만 냈구나.’
영도가 질투를 하거나 열등감을 느낄 때.
그때 늘 ‘남과 널 비교하지 말라’고 혼을 냈다.
그런데 나이를 먹고 나니, 오히려 그게 영도에게 역효과였을 수 있단 생각이
들었다.
지금 영도는 고작 스물여덟이다.
스물여덟의 한록 역시 어리고, 조급하고, 칭찬을 바랬다.
그러니 동생에게도 칭찬 한마디 정도는 해줘도 될 것 같았다.
한록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영도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형, 교육 좋았다고 해줘서 고마워."
진심을 담은 말.
그리고 조금 반성하는 듯한 말이었다.
‘영도는 칭찬을 해줘야 하는 애구나. 그런데 나는 혼내기만 했어.’
항상 옳은 말만 하는 것. 그것이 한록의 장점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주위 사람
을 상처 주기도 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아무도 자네와 일하고 싶지 않다고 했어.
오부장의 말.
한록을 비난하기 위한 말이다.
...하지만, 그 말이 어쩌다 나왔는지는 이제 알겠다.
생각에 잠긴 한록에게 영도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형, 앞으로 내가 도울 일 있으면 언제든 말해."
"그래, 고맙-"
그리고 고맙다고 말하려던 한록은 눈 부신 빛에 눈을 찡그렸다.
‘...이게 뭐지?’
자신의 손목에서 무언가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형?"
한록은 영도가 자신을 부르는 것도 듣지 못하고 자신의 손목을 바라보았다.
손목에는 아주 진한 빨간 실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실은 영도의 손
목으로 이어져 있었다.
"마술인가? 이게 갑자기 왜..?"
실을 만져봤지만 실은 그저 손을 쑥 통과할 뿐이었다.
잠시 실을 바라보던 한록이 영도에게물었다.
"영도야, 너 그거 뭐야?"
"그거?"
"실 말이야. 손목에 실."
"무슨 실? 형 피곤한 거 아냐?"
그러나 영도는 전혀 모르겠다는 대답이었다. 아마 영도에게는 실이 보이지 않
는 것 같았다.
‘...또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 같은데.’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자신은 과거로 돌아왔다. 그처럼 팔목에 실이 생겨난 것도 마찬가지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게 대체 뭐지?'
한록이 실에 대한 생각에 잠긴 사이 둘은 회사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기 직전 영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형, 좀 아픈거 아냐? 출근 할 수 있겠어?"
"여기까지 왔는데 출근은 해야지."
"하여튼 형도. 나 갈게. 아프면 꼭 병원 가!"
"응. 수고해."
영도가 한록의 어깨를 치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아프면! 병원 가!"
영도가 멀어지면서 한록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한록은 영도의 손에 묶인
실을 유심히 살필 뿐이었다.
*
잠시후. 한록은 자신의 사무실에 도착했다.
“이대리! 동생은 괜찮아?”
자리에 앉자마자 옆팀 현과장이 한록을 보자마자 달려와서 묻는다.
구과장은 반차를 쓴 건지 아직 출근을 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네. 다행히 치료가 빨라서 후유증도 없을 거라 합니다.”
“어우 진짜 어떡하냐. 동생 아직 어리지 않아? 혹시 도울 일 있으면 언제든
말해.”
현과장이 안타까워하는 표정으로 한록을 바라보았다.
일하는 걸 죽기 보다 싫어하는 현과장.
그런 현과장이 ‘도와주겠다’고 하는 걸 보면 어지간히 걱정이 되는 모양이다.
‘이렇게 좋은 사람이 많았는데, 난 왜 사람들을 다 떠나보냈을까.’
자신에 대한 반성을 하며 한록은 현과장에게 고개를 숙였다.
“네, 감사합니다.”
자리로 돌아간 한록은 업무를 같이 하는 3팀 김유선에게 메신저를 보냈다.
3팀은 현과장의 팀이다.
[유선씨. 안녕하세요.]
[아 이대리님! 동생분은 괜찮으세요?]
[네, 괜찮습니다. 걱정 감사합니다. 혹시 ‘오셀로’포스터 마감 시안 받으셨나
요?]
3팀 김유선 사원과 한록이 같이 홍보를 진행하는 ‘오셀로’.
그 포스터를 받아야 하는데, 한록이 휴가를 쓰는 동안 김유선이 일정을 관리
하기로 했다.
[네네! 수정 포스터 받았습니당. 여기 파일이요. 인쇄소에 이대로 인쇄해달라
했습니다!]
김사원이 보내준 파일을 보니, 수정사항이 제대로 반영되어있었다.
[네. 인쇄소에 연락하기 전에 부장님께도 결재받으셨죠?]
[헉...죄송합니다 그제 너무 바빠서 ㅠㅠㅠㅠㅠ잊어버렸어요ㅠㅠㅠ]
'...하.'
한록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정부장. 3개월 전 새로 온 부장이다.
정부장은 외부로 나가는 일들에는 아주 민감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김유선은 덤벙대는 성격이라 자주 이런 일들을 놓치고는 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일단 제가 부장님한테 사후결재 받겠습니다.]
한록은 바로 정부장에게로 향했다.
*
"부장님, 안녕하십니까. ‘오셀로’ 포스터 결재 받으러 왔습니다."
한록이 인사를 하자 정부장이 고개를 들었다.
정부장.
맡았던 프로젝트가 크게 실패해서 지방으로 좌천되었다가, 다시 상경한지 반
년도 채 되지 않은 신참 부장.
부장 중에서 가장 합리적이고 유능한 사람이지만...
"메신저로 보내."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냉철한 사람이다.
신입들은 부장이랑 대화하는 것조차 두려워하기도 했다.
"이미 인쇄소에 인쇄를 넘겨서요. 사후결재라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한록의 말에 정부장이 컴퓨터를 보다가 물었다.
"김유선이 결재를 누락했나?"
"네. 제가 과정을 상세히 알려주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지금 내 자리로 오라고 전해."
"...알겠습니다."
이런. 나름 커버를 쳐주려고 했는데 안 통했다.
‘유선씨..안됐군.’
한록은 정부장에게 인사를 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유선에게 메세지를 보내려다가, 유선이 보낸 메시지를 발견했다.
[대리님, 저 때문에 정말 죄송합니다...]
엄청 기가 죽어있는 듯한 메시지.
문득 한록은 자신이 보낸 메신저가 너무 차갑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일단 제가 부장님한테 사후 결재 받겠습니다.]
지금 보니 유선의 죄송하다는 말에 대답도 안 했다.
‘음...’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이제 영도나 유선 같은 어린애들을 보면 마음이 약해진다.
고작 이십대 중반, 혹은 후반.
아직 얼마든지 실수 할 수 있는 나이다.
잠깐 생각하던 한록은 유선에게로 향했다.
"유선씨."
"대리님..!"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던 유선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본다.
한록의 짐작대로 당황해서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한록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유선씨, 이번에 포스터 수정 잘했어요."
"네..?"
한록에게 혼이 날 것이라 예상했던 걸까. 어깨를 움츠리고 있던 유선이 놀란
듯 물었다.
"저 없는 동안 일 맡아줘서 고마워요. 덕분에 동생 잘 돌보고 왔어요. 그러니
까 실수는 신경 쓰지 말아요."
"...대리님..."
그 말에 유선이 입을 꾹 다물었다. 한록이 자신을 격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아차린 것이었다.
크게 감동을 받은 건지 한동안 말이 없던 유선. 잠시 후 유선이 겨우 입을 열
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대리님...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리고 유선의 그 말과 함께, 한록의 눈앞에 무언가 희미한 것이 스쳐 지나갔다.
눈앞을 스쳐 지나간 희미한 무언가는, 바로...
"...실?"
영도와 같은 실이었다.
‘영도의 손목에 생긴 거랑 비슷해. 그냥..아주 가는 실이다.’
한록과 유선의 사이에 실이 이어져 있었다. 다만, 영도와는 달리 끊어질 듯
아주 가늘고, 하얀색에 가까운 연한 분홍색의 실이었다.
한록이 실을 주의깊게 보다가 유선에게 물었다.
"유선씨. 팔에 그게 뭐예요?"
"네? 팔이요?"
그러나 유선은 영도처럼 아무것도 모른다는 반응이었다.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차피 보이지도 않는 상대에게 말해봤자 이상한 취급만 받을 게 분명했다.
한록은 일부러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부장님이 찾으세요. <오셀로>포스터 건 때문입니다."
"아, 네..!"
정부장이 찾는다는 말에 유선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진다. 아마 겁을 먹은
모양이었다.
‘저렇게 긴장할 정도는 아닌데...’
또 다시 마음이 약해지는 한록.
결국 한록은 다시 입을 열었다.
‘영도에게 한 것처럼...’
"유선씨. 실수는 다음부터 안 하면 되는 거예요. 그리고 갑작스럽게 생긴 일
이라 그런 거니까 너무 자책하지 마요."
위로해주고.
"네..."
"포스터 잘 넘겼고, 사후 결재는 제가 받았어요."
칭찬해주고.
"네. 그게, 일정 관리는 처음이라 좀 당황했어요..."
"그럴만해요. 그래도 부장님 앞에서 그렇게 말하진 말고요. 그냥 죄송하다고,
주의하겠다고만 말하면 돼요. 알았죠?"
해결책과 대처방안까지 제시하기.
"..네!"
한록의 어른스러운 격려에 유선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조금 정신
이 든 모양이었다. 한층 마음이 놓인 한록이 유선에게 말했다.
"이제 가봐요. 그리고 끝나고 커피 한 잔 해요."
"커피요?"
"네. 그동안 고생했으니까."
한록의 말에 유선의 얼굴이 또다시 밝아졌다. 그러더니 유선이 조금 밝은 목
소리로 말했다.
“네, 커피 제가 살게요!”
“됐어요. 이런 건 선배가 사는 거예요.”
“아뇨!”
한록의 말에 유선이 열심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꼭 제가 사고 싶어요. 저 오늘 정말...”
그리고 유선이 씩씩하게 말하는 순간-
“대리님한테 감사하거든요.”
‘...실이...변했어?’
손목의 실이 아까와는 다른 색으로 변해 있었다.
작가의말
유선씨는 선이 이어져서 유선씨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