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2화 (2/263)

저한테 사과하시죠.(2)

“이한록. 반차 취소하라고. 내 말 안 들려?”

한록에게 그 말을 하는 사람은 오부장과 결탁해 한록의 ‘식물’을 뺏어간 사람.

바로 구차장이었다.

‘분명 방금전 1층에서 감사팀에 끌려가고 있었어. 그런데 내가 왜 사무실에

있지?’

심지어 아까는 오후 5시였는데, 지금은 밖이 환했다.

거기에 눈앞에 있는 구차장의 얼굴이 묘하게 젊어 보였다.

“오늘 우리 아들내미 입시설명회 있잖아. 한 팀에서 둘이나 자리 비우는 건

차장님 보기 좀 그러니까, 오늘 반차는 내가 쓴다고.”

“반차라니, 무슨...”

“아, 그리고 내일이랑 이날도 반차 쓸 거야. 그러니까 이대리는 회사 나와.”

구차장은 그렇 게 말하며 한록에게 달력을 보여주었다.

구차장이 보여준 달력의 날짜는 2022년 3월.

한록이 기억하는 날부터 정확히 5년 전이었다.

‘지금이 2022년이라고? 그러니까, 5년 전이라고?’

5년 전. 그렇게 생각하니, 바로 떠오르는 기억들.

2022년 3월. 한록이 대리로 오부장의 팀에서 일할 때다.

‘이게 대체 무슨..’

그러나 고민도 잠시. 이어지는 구차장의 말을 들으니 몸에 전기가 통하는 기

분이었다.

“동생 병원은 모레 데려가. 나는 아들 입시라니까. 내가 더 급해. 알았지?”

‘동생 병원.’

한록이 오늘 반차를 쓴 이유. 바로 동생을 병원에 데려가기 위해서였다.

한록의 동생 한서는 5년 전 뇌졸중을 겪었다.

‘그래서 1년간 병원에 있었지...’

이제야 모든 것이 기억이 난다.

‘한서가 자꾸 어지럽대서 오늘 큰 병원에 검사를 받으러 가려고 했지. 그런데

구차장..아니, 이때는 구과장이지. 구과장이 연차 날짜를 바꾸라고 어거지를

부렸고.’

“야. 이한록. 왜 대답이 없어? 나 간다?”

구과장이 한록에게 협박조로 말하더니 등을 돌렸다.

‘과거에는...반차를 양보했다.’

한록은 어지럽다는 동생의 말에 빈혈 정도를 생각했다.

그래서 병원에 가는 날짜를 하루 미뤘다.

그리고 그날 한서는 길에서 쓰러졌다.

‘한서는 후유증 때문에 1년이나 병원에 있어야 했어.’

가족이 쓰러졌다. 그것도 어린 동생이. 길바닥에서.

그리고 1년간 병원에 누워있다.

-나 때문에. 내가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가족을 끔찍이 생각하는 한록. 죄책감과 스트레스에 한록마저 회사에서 쓰러

진 적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술을 마실 수도, 울 수도, 동생 곁에 붙어있을 수도 없었다.

‘일을 해야 하니까. 그래야 병원비를 대니까.’

아침에 눈을 뜨고 싶지 않고.

지하철을 타는 게 죽기보다 싫고.

회사 문을 보면 구토감이 밀려오고.

그래도, 출근을 해야 한다.

돈을 벌어야 하니까.

그게 회사원이다.

그렇게 한록은 지금까지 회사에서 버텨왔다.

가족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며 버티고 또 버텼다.

그렇 게 버티며 한록은 생각했다.

‘과거로 돌아간다면. 딱 한 번만 기회가 생긴다면-’

“과장님, 연차는 제가 쓰겠습니다.”

절대 동생을 혼자 두지 않겠다.

“뭐?”

구과장이 의아한 얼굴로 한록을 돌아보았다. 마치 자신이 잘못 듣고 있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야, 휴가 내가 쓴다고. 못 들었어?”

“부장님께 휴가 보고 드렸고, 이미 휴가 사용서도 제출했습니다. 그러니 휴가

는 제가 쓰겠습니다. 가보겠습니다.”

“야, 이한록. 너 그 게 무슨 소리-”

“저 갑니다.”

구과장의 말이 끝나지 않았으나, 한록은 자리에서 일어나 빠르게 뛰어나갔다.

‘이게 꿈이든 뭐든 상관없다.’

과거로 돌아간다면 꼭 하고 싶었던 것.

구과장에게 속 시원히 엿을 먹이는 것도, 구과장의 말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다.

바로 동생의 병을 치료하는 것이었다.

한록은 동생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한서야!”

“아, 깜짝이야. 왜 소리를 질러, 오빠?”

“회사 앞에 벤치 있어. 거기 앉아있어! 서 있지 말고!”

“어?”

“기다려, 오빠 빨리 갈게!”

한록은 회사 밖으로 달려 나갔다.

*

그날 저녁, 병원.

한록은 의사의 말을 듣고 있었다.

“일단 약물치료로 끝났습니다. 좀 지켜보시다가 큰일 없으시면 퇴원하시면 됩

니다.”

의사의 말에 한록이 다급한 얼굴로 물었다. 과거 한서는 1년이나 병원에 누워

있었고, 후유증으로 자주 쓰러지곤 했다.

“수술은 안 합니까? 후유증은 없을까요?”

“뇌졸중은 발생했을 때 빠르게 병원에 오는게 중요한 질병입니다. 다행히 초

기에 병원에 오셔서 수술까진 할 필요 없습니다. 2주 정도면 퇴원하실 수 있

을 겁니다.”

“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빠르게 대처해서 차도가 좋은 편입니다. 증상이 나타

나기 전에 병원에 오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보호자 분이 동생을 살리셨네요.”

동생을 살렸다...

그 말에 가슴 속에 무언가가 풀어지는 느낌이 난다.

'한서가 쓰러졌을 때 내가 곁에 있었다면. 바로 병원에 데려갈 수 있었다면.

그럼 한서가 이렇게 오래 아프지 않았을텐데.'

매일밤 꿈 속에서 ‘그때 내가 그러지 않았다면.’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하고 후회했던 일들.

그게 정말 현실로 이뤄진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한록은 겨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몇 번이나 인사를 한 뒤 진료실을 나왔다.

진료실에서 나와 한서의 병실로 향한 한록.

한서는 지친 건지 이미 침대에서 잠이 들어 있었다.

‘예전에는 1년이나 병원에 있었던 걸 생각하면..정말 다행이야.’

안도의 한숨을 쉬는 한록.

그러나 정작 한서는 많이 긴장했는지, 입술은 다 터져있었다.

“...다행이다, 한서야. 정말로..”

한록은 잠든 한서의 손을 잡았다.

눈물이 날 것 같지만 참아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가족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는 것. 그게 가장이 해야 하는 일

이니까 울 수 없다.

“형, 형도 좀 쉬어.”

그때 누군가가 한록에게 말을 걸었다.

“내가 한서 옆에 있을게.”

걱정스러운 얼굴로 한록을 바라보는 사람...

바로 김영도였다.

“....”

한록은 말없이 영도를 바라보았다.

김영도. 한록의 절친한 동생이자...과거에 자신을 고발한 사람.

그런 영도는 한서가 쓰러졌다는 연락을 듣자 퇴근 후 바로 병원으로 와주었다.

‘형, 한서는? 한서는 괜찮아? 형은? 어머님은?’

영도는 마치 자기 일처럼 한서를 걱정했다.

그리고 10시가 넘은 지금까지 한록과 함께 있어 주었다.

‘왜 그랬냐. 이 개자식아. 무슨 생각으로 여기에 있냐.’

묻고 싶은 것도 많고, 하고 싶은 말도 많다.

하지만 여기서는 아니었다.

“영도야. 잠깐 나갔다 오자.”

한록이 영도에게 말했다.

*

둘은 옥상에 도착했다. 영도가 한록에게 커피를 내밀며 물었다.

“어머님은? 강릉에 계시잖아.”

“날 밝자마자 첫차 타고 오신대.”

“응, 다행이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다 본론을 꺼낸다.

“형, 오늘 구과장이랑 들이받았다며?”

“...거기까지 소문이 났어?”

“응. 형이 워낙 유명해야지.”

영도는 한록과 다른 부서에서 일하고 있다.

그런데 다른 부서에까지 오늘 구과장과의 일이 소문 난 것이다.

“구과장 그 인간도 진짜 못됐다. 그래도 형, 형도 좀 숙이지 그랬어.”

“숙였으면 한서 병원 못 왔어.”

“아니! 병원은 와야지. 그래도 그냥 들이받는 게 아니라 좀 머리를 쓰란 거

지. 부장님한테 살짝 흘리는 방법도 있잖아.”

영도가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영도는 한록과는 반대로 회사 생활에서 머리를 잘 굴리는 타입이었다.

“나 그런 거 안 좋아하는 거 알잖아.”

한록의 낮은 목소리에 영도가 슬쩍 한록의 눈치를 봤다.

“...알지. 아는데...”

영도가 이렇 게 한록의 눈치를 보는 이유.

한록의 진짜 ‘본심’을 알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렇게 살기 싫다, 영도야.”

바로 한록의 아버지 일.

한록의 아버지는 15년 전. 한록이 15살일 때 돌아가셨다.

그 이유는 자살.

한록처럼 약지 못했고, 그래서 사내 정치에서 밀려났고, 해고당했다.

지금처럼 이직이나 퇴사가 자유롭던 시기가 아니다.

20년간 몸 바친 회사에서 하루아침에 잘렸다는 사실.

그게 한록의 아버지를 괴롭 게 했고, 끝내 알콜중독과 자살로 몰고 갔다.

‘나처럼 살지 마라, 한록아.’

‘아빠처럼 살지마.’

그러나 한록은 그 유언을 지키지 못했다.

한록은 아버지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당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회사에서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나쁜 거라고.

열심히 회사를 다니고, 일만 해도 괜찮다고.

그래서 오히려 더 인간관계를 줄였고, 아부와 공치사를 경멸했다.

‘그랬는데, 결국 아버지랑 똑같은 길을 걸었지.’

웃음도 나오지 않는 일이다.

“....그래도 형, 회산데....하고 싶은 말만 하고 살 수는 없는 거잖아. 인간

관계도 좀 신경 써야지.”

영도가 조심스레 말했다.

과거의 오부장과 달리 정말로 걱정 어린 목소리.

미래가 어떻든 일단 지금 영도는 정말로 한록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놈의 회사.”

회사, 그놈의 회사. 그게 대체 뭐란 말인가.

그게 뭐길래 사람을 죽음으로 내밀고, 친한 친구마저 배신하게 만든단 말인가.

지긋지긋하다.

“사내 정치나 인맥 같은 거...그런 거 없는 회사는 없을까? 일만 할 수 있는

곳.”

“그런 회사가 어딨어?”

“그래. 네 말이 맞다.”

“뭐...형이 사장이라면 모를까.”

한록의 질문에 영도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형이 사장이고 회장이어서, 되도록 그런 일이 없도록 만들 수는 있겠지. 근

데 그 정도가 아니면 그냥 참고 다니는 거지.”

“사장이 되면 뭐가 달라질까?”

“사장이 싫단 짓을 누가 하겠어? 저기, 방송국도 국장이 그런 거 싫어하잖아.

거기 옛날에는 완전 정치판이었는데 국장 바뀌고 분위기가 좀 낫더라.”

영도의 말에 한록은 회사 계열사인 방송국을 떠올렸다.

국장이 철저히 실력을 중시하는 방송국.

확실히 그만큼 인맥이나 위계가 덜하고, 개인적인 분위기가 있다.

“그럼 내가 부장이 되면, 그보다 더 높은 사람이 되면 최소한 내 부하들은 편

하겠네?”

“그렇지? 왜, 우리 형 승진하려고? 임원 되시려고?”

영도가 장난스럽 게 웃으며 한록을 쳤다. 그러나 한록의 표정은 진지했다.

“만약 내가, 높은 사람이 된다면...”

누명을 써서 팀까지 위험하게 했던 자신.

그리고 회사의 분위기를 바꾼 방송국의 국장.

“형 정도 능력이면 당연히 임원 되지! 그때 나 밀어줘야 한다? 어?”

임원이 되겠다, 사장이 되겠다....지금 당장 그런 생각이 든 것은 아니다. 다

만...

“근데 형, 임원 되려면 정치는 필수인 거 알지? 형이 정치를 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어.”

“하하, 그래. 형이 무슨 정치야.”

“그래도 이제 노력은 할 거야.”

“어? 진짜?”

다만 예전처럼 살 수는 없다는 것쯤은 깨달았다.

*

한록은 영도와 함께 병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내일 출근을 위해 짐을 챙기는 영도를 보고 생각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싶진 않다.’

이 회사의 모든 게 싫다. 그래도 회사를 나갈 수 없는 이유. 그건 간단하다.

‘여기보다 돈을 많이 주는 곳은 없다.’

한국 최고의 영화 제작사 ck enm.

업계 최고 대우는 물론, 한서의 병원비까지도 지원이 나온다.

‘물론, '식물'도 두고 갈 순 없지.’

거기에 이 회사에서 만났던 수많은 영화들. 5년 뒤 한국 영화계에 전설이 될

영화들. 한록이 눈부시게 성공시킨 영화들. 그 프로젝트를 두고 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역시 오부장에게 맞서는 수밖엔 없다.’

“형, 형도 얼른 자. 그리고 나 내일 반차 내고 다시 올게.”

생각에 잠긴 한록을 보고 영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미래에 자신을 배신했던 것과는 너무 다른 얼굴이다.

‘영도는 대체 왜 날 배신했을까.’

대충 짐작 가는 이유는 있다.

‘형이라면 임원도 가능하지! 그땐 나 밀어주는 거다?’

영도는 한록의 능력을 동경한다. 그리고 그런 만큼 한록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

한록이 최연소 팀장이 되고, 차장이 되면서 그 열등감은 더욱 커졌다.

‘아마 오부장이 그 점을 자극했겠지.’

오부장이 영도를 포섭한 것이다. 아니, 영도만이 아니라 회사 전체를 포섭한

것이다.

한록을 싫어하도록. 한록이 누명을 써도 아무도 돕지 않도록.

오부장은 그렇게 하나하나 수를 썼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가만히 앉아서 멍청하게 당했고.’

과거에는 그게 맞는 일이고, 옳은 행동인 줄 알았다.

하지만 누명에 배신까지 당해보고 나니 이제는 안다.

‘싫다고 피할 수는 없다.’

그게 정치다.

오부장은 한록을 죽이겠다고 칼을 빼 든 상황.

오부장과 한록의 사이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었다.

그렇다면...

‘나도 칼을 들어야 한다.’

이제는 전쟁에 나서는 수밖에 없다.

작가의말

한록은(는) 연차를 지켜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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