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1화 (1/263)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

저한테 사과하시죠.(1)

“일 잘하는 게 최고의 정치라는 건 대리까지야. 과장부터는 행실도 능력이지.”

세계에서도 손꼽는 영화 제작사 ck enm.

그곳의 영화사업본부 회의실에서 두 사람이 얘기를 하고 있었다.

“이한록. 알아들었나?”

35층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는 중년의 남자 오수창. ck enm 영화마케팅부의

부장.

그의 발밑으로 서초동의 불빛들이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 앞의 젊은 남자, 이한록.

서른다섯에 대기업 차장까지 올라간 ck enm 최고의 인재이자.

“그러니 뇌물을 받았겠지.”

마케팅부 뇌물수수 사건에 연루된 사람이었다.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김현성씨한테는 어떤 것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자네가 뇌물을 받았다고 말한 사람이 3명이네.”

“믿을 사람들을 믿으십시오.”

“입조심 해.”

한록의 말에 오부장이 위협적으로 말했다.

오부장 특유의 사람을 찍어누르는 듯한 말투.

사무실의 공기는 숨이 막히기 직전이었다.

오부장이 테이블에 놓인 서류를 넘기며 말했다. 한록의 인사평가지였다.

“이한록. 동료평가 전사원 중 유일하게 ‘미달.”

한록의 실력은 우수하다. 모두가 안다.

그러나 동료평가, 그리고 부장의 평가는 사내 꼴찌.

심지어 한록의 실적마저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기재되어 있었다.

“우리 부서 대부분이 자네를 두고 ‘같이 일하고 싶지 않다’고 기재했네. 뇌물

은 두 번째 문제야. 이곳에는 자네랑 일할 사람이 없어.”

그 말에도 한록은 묵묵부답이었다.

“택시비도 안 받는 자네가 뇌물을 받았다라. 우습지도 않군. 그런데 다들 자

네가 뇌물을 받았다고 얘기하고 있어.”

한록이 답이 없자 오부장이 말을 이었다.

“자네는 우리 회사 최고의 직원이야. 사원 때부터 천만 영화를 만들어서 초고

속 승진했지. 지금은 우리 회사 최대 프로젝트인 ‘식물’을 하고 있고. 그걸로

베니스 영화제를 수상해왔어.”

한록의 무용담. ck enm의 사람이라면 모두가 아는 내용이었다.

“능력 좋고, 배짱도 크면서 깔끔하게 일하지. 능력 하나로 최연소 차장이 됐

어. 그래서 자네를 라인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이 참 많았지.”

그러나 한록의 회사 생활은 오로지 일, 일, 일.

한록은 그저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서만 움직였다.

사내 정치나 인맥 관리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자네는 그걸 다 거절했어.”

오부장이 계속 말했다.

“자네 입사 동기들, 이제 겨우 과장이야. 그런데 자네는 차장이지. 까마득한

선배들이랑 부장 자리를 두고 경쟁하고 있어. 이대로 가면 최연소 임원도 노

릴 수 있겠지.”

최연소 임원...

한록은 생각해본 적 없는 일이다.

하지만 회사에서 얘기가 나오는 일임은 알고 있다.

“절대 내 편이 되지 않는 경쟁자. 심지어 나보다 우수해. 그러면 주위에 차

장, 부장들이 자네를 어떻게 볼까?”

그 답.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죽이고 싶어 하지.”

그게 지금 누명 사건의 전말이었다.

한록과 경쟁상대인 이들이 한록에게 누명을 씌운 것이다.

그리고 그 상대는...

“나는 자네가 이렇게 될 줄 미리 알았어.”

바로 오부장.

오부장은 오랫동안 한록과 같은 부서에서 일했다.

그리고 한록이 자신의 ‘라인’을 거절하자 지독하게 한록을 괴롭혀왔다.

한록의 인사평가가 최악이 된 것 또한 오부장의 작품이었다. 아마 사람들에게

엄청난 압박이 들어갔을 것이다.

“이한록. 너무 뛰어나면 오히려 독이 돼. 그런데 그보다 더 문제인 건...”

“네가 그 뛰어남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순진하단 거야. 아니, 멍청하다고 해

야 하나.”

자신에게 누명을 씌운 사람이 하는 비난.

한록은 모욕적인 말에 이를 악물었다.

"이한록. 자네 짓이 아니란 거 알고 있네. 그런데 시기가 안 좋군."

오부장이 갑자기 표정을 바꾸고 한록을 바라보았다.

평소의 날카롭고 무뚝뚝한 말투와 달리 부드러운 표정.

오부장이 ‘설득’을 할 때 쓰는 표정이었다.

"올해가 내 마지막 승진 연차야. 나는 임원이 되거나, 회사를 그만두거나 둘

중 하나지. 그런 상황에서 자넬 돕긴 어려워. 그러니까."

"그러니까 내 밑으로 들어오게."

몇 번이나 반복되었던 그 말.

오부장의 밑으로 들어가서 오부장과 똑같은 사람으로 살 것이냐.

아니면, 이 더러운 사내 정치에서 또 발을 뺄 것이냐.

이제는 정말 선택의 시간이 온 것이다.

그리고 한록의 대답은 이번에도 같았다,

"싫습니다."

죽어도 오부장의 밑으로는 들어가지 않는다.

남에게 누명을 씌우고, 비난하고, 그렇게 자기 자리를 만들어나가는 인간.

회사에서 잘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인간과는 손을 잡지 않는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평생 그러고 살게."

오부장이 다시 한번 한록을 비난했다.

한록이 입을 다물고 있자 오부장이 한록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자네는 정말 멍청해.”

솔직하다 못해 비난에 가까운 말.

"자네는 내가 인정한 직원이야. 똑똑하고 우수하지. 그런데 대체 왜 이리 뻣

뻣하게 구는 건가? 내 밑에 들어오는 게 그렇게 싫은가 보지?"

누구나 물어볼 법한 질문이었고, 한록에게도 할 말은 있다.

동생이 오래 아팠다. 동생이 나은 후로는 어머니가 아프셨다.

신경 쓸 일이 너무 많아서 회사생활은 일만 하기도 벅찼다.

아픈 가족을 두고 골프 모임, 술자리에 나갈 시간따윈 없었다.

그리고, 무엇 보다...

‘한록아. 다 내 탓이다. 다 내 탓이야.’

‘전부 내 탓이다. 정직한 건 착한 게 아니라 멍청한 거야.’

‘한록아.’

‘너는 나처럼 살지 마라...’

아버지의 그 말.

그 말이 틀렸다고. 정직하게 살아도 괜찮다고. 아버지의 잘못이 아니라고. 오

부장같은 인간처럼 살지 않아도 괜찮다고.

언젠가 그런 말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결과는...

"더 일 키우지 말고 여기서 끝내. 알아서 사표 내고 나가게."

"어차피 명확한 증거도 없지 않습니까."

"제대로 싸워보자는 건가? 자네가 날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나?"

"아뇨, 나가겠습니다. 대신 ‘식물’은 끝내고 나가겠습니다."

그 결과는 맡은 프로젝트가 끝날 때까지만 자르지 말아 달라고 애걸하는 것이다.

“이 지경이 돼도 아직도 일 얘기인가? 정말 이한록답군.”

오부장이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나갈 사람한테 ‘식물’을 맡길 수는 없지.”

“그렇게 나온다면, 저도 쉽게 그만두지는 않겠습니다.”

“자네가 내게 한 첫 번째 딜이군. 좋아. 3개월. 그 안에 정리하고 나가게.”

“알겠습니다.”

오부장의 허락.

승리라고도 말할 수 없는 초라한 성과를 얻은 한록은 인사를 하고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한록이 나가고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노크소리와 함께 누군가 회의실으로 찾아왔고, 오부장에게 갈색 파일을 내밀

었다.

“이거면 됐어.”

파일에서 사진을 하나 꺼내든 오부장이 사진을 보며 말했다. 감정이라고는 존

재하지 않는 듯한 오부장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그리고 오부장의 말.

“바로 잡아서...”

“그대로 내보내.”

그 말에 방문자가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향했다.

*

'영화 마케팅.'

포스터와 예고편. 방송 출연, 인터뷰, 굿즈제작, 이벤트, 영화전까지. 영화를

광고하고, 홍보하고, 사람들에게 알리는 모든 일을 말한다.

한국 최고의 영화 배급사 ck enm. 그리고 ck enm 영화 마케팅부 최연소 차장.

그게 나다.

공채로 들어온 회사에서 지금까지 9년을 다녔다.

입사 후 미친 듯이 일에 매달렸다. 그리고 ck enm의 대표 천만 영화들을 내

손에서 탄생시켰다.

영화를 사랑했고, 영화를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을 사랑했다.

누구에게도 피해 주지 않고, 오히려 궂은 일은 솔선수범하며 일했다.

다만.

‘어이, 이대리. 끝나고 남자끼리 술 한 잔 할까?’

‘이과장은 김팀장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이팀장. 이거 한 번만 덮어줘. 부장님 말씀이야.’

‘일이 아닌 것’에 끼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아뇨. 저는 가보겠습니다.’

그 말 한마디의 대가가 이거다.

사무실에 도착하자, 아무도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내가 부장과 면담을 하고 온 걸 모두 알면서.

내게 인사평가 최하위를 주고서. 내가 누명을 썼다고 거짓말을 하고서.

다들 모르는 척 일을 하고 있다.

“...이 팀장님.”

그때 송대리가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내 팀. 내 직속 부하. 아마 인사 평가 최하위를 주지 않은 몇 명 중 한명.

그리고 나처럼 정치란 걸 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나가서 얘기해요.”

나는 송대리를 데리고 1층의 사내 카페로 내려왔다.

*

1층 카페.

나는 송대리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했다.

“송대리님. 저는 더 이상 여기 남아있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부장님에게는

‘식물’이 끝나면 나간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솔직하게 말하자 송대리가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묻는다.

“식물이 끝나면 나가신다구요?”

“네. 아직 테마파크 건도, 프랜차이즈 건도 남아 있지만...거기까지는 못 끝

낼 것 같네요.”

디즈니 월드의 규모에 버금가는 한국 최초의 영화 테마파크. 사극 좀비 영화

프랜차이즈.

ck enm에서 가장 열중하던 프로젝트이며, 모두 내가 맡아오던 일이다.

“이팀장님. 설마.. 아직 부장님이 말씀 안 하셨나요?”

내 말을 들은 송대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불길한 예감이 든다.

“...뭐가 더 있습니까?”

“....아까 2팀에서 핵심 자료 가지러 왔었어요. ‘식물’... 구팀장님 팀으로

이관된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내가 오전까지 거래처랑 컨택 했는데. 구팀장님 ‘식물’

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

“이팀장님은 어차피 나가실 분이니까..구팀장님한테 실적을 몰아주겠다는 거죠.”

'이게 무슨 말이지?'

'분명 얌전히 회사에서 나가는 대신, ‘식물’은 내가 끝내기로 했는데?'

갑작스러운 소식에 머리가 깨질 것 같이 아팠다.

“그리고, 저희 팀원들도...”

그러나 진정할 새도 없이 소식들이 이어진다.

“최소 부서 이동이나, 지방발령을 생각 하라고...”

‘어떻게 이런 짓을...’

누명을 쓰고, 프로젝트를 뺏기고, 나 때문에 내 팀은 산산조각이 나게 생겼다.

계속되는 악재에 머리에 두통이 엄습했다.

“...송대리, 먼저 올라가세요. 잠깐 쉬다 가겠습니다.”

“네. 먼저 가볼게요.”

내 말에 송대리가 머뭇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괜찮아요. 들어가 보세요.”

나는 송대리를 향해 다시 한번 말했다. 그러자 송대리는 몇 번이나 나를 돌아

보며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송대리에게 미안했지만, 지금 더 중요한 문제가 남아있었다.

‘오부장이...약속을 어겼다.’

한 시간 사이에 어떤 과정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명확한 것은 한가지.

회사에서 쫓겨난다.

그것도 내가 한 프로젝트까지 뺏기면서.

‘그렇다면 나도 가만히 있을 생각은 없다.’

감사팀에 바로 고발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남자 두 명이 나를 찾아왔다.

“이한록 차장님. 같이 가시죠.”

감사팀 사람들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감사팀장이 꺼낸 것은 사진 하나.

몰래 찍은 듯한 구도의 사진이었고, 사진 속에선 내가 돈 가방을 들고 있었다.

김현성의 뇌물을 거절했을 당시의 사진이다.

...그런데 이렇게 보니 누가 봐도 내가 돈을 받고있는 것처럼 보였다.

“누가 이걸 찍었습니까?”

"제보자는 말할 수 없습니다. 조사에 응해주시죠."

“저게 뭐야?”

“이팀장님 아니야? 그, 영화사업부 천재..”

“그런데 감사팀이랑 왜?”

감사팀장이 위협적으로 말과 주위에 모여서 수군거리기 시작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는...김영도가 있었다.

김영도. 중학교 시절부터 알던 동생.

그런데 영도의 표정이 뭔가, 뭔가 이상했다.

어딘가 불안한 표정. 나와 마주치지 못하는 시선...

“컴퓨터 수거했지?”

“네. 출입권한도 정지했습니다.”

그 '이상함'에 감사팀 사람들이 내 손발을 잘라가는 와중에도 내 눈은 김영도

를 향하고 있었다.

친한 형이 감사팀에게 잡혀가는데 아무런 말도 없는 김영도의 모습...

‘아.’

아무리 남에게 신경을 안 쓰는 나라도 드는 ‘직감’이 있다.

내가 아끼는 동생.

입사 전부터 함께한 친구.

서로의 부모님까지 알게 된 사이.

그리고...

이 사진을 보낸 사람. 김영도.

“김영도!”

내가 소리치자 김영도가 몸을 움찔했다.

그러더니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하는 김영도.

“김영도! 너지, 김영도!”

소리쳐 불러봤지만, 영도는 아무런 답이 없이 정문으로 도망칠 뿐이었다.

“김영도!”

“이차장님.”

김영도를 따라가고 싶었으나, 감사팀이 내 어깨를 강하게 잡았다. 두 명에게

몸을 붙잡히니 조금도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윽-!”

그리고 무엇보다 머리를 엄습하는 두통.

“이차장님?”

감사팀이 당황한 얼굴로 내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그 소리는 점점 희미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저 느껴지는 것은 두통, 억울함.

‘한록아. 너는 나처럼 살지 마라.’

그리고 아버지의 그 말...

“어떡해. 쓰러졌어!”

“이차장님! 정신 차리세요. 이차장님!”

“구급차 불러!”

나는 사람들의 비명과 밀려오는 후회 속에서 정신을 잃었다.

*

그리고 눈을 떴을 때는...

“이한록. 반차 취소하라고. 내 말 안들려?”

5년 전의 어느 날이었다.

작가의말

안녕하세요, 한룡이라고 합니다.

주인공이 1화부터 연차를 위협받는 글이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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