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2. 귀순 (1)
대재앙 이후 그 위에 세워진 란다란 도시는 역사가 짧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이명(異名)을 가지고 있었다.
얼핏 이상하게 보일 수 있었으나, 이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역사는 짧지만, 그 대신 자유와 혁신을 통해 왕국 더 나아가 세계 경제 수도라 해도 무방한 위치까지 도달했으니.
그리고 그런 란다를 대표하는 이명(異名)은 다름 아닌 자유 도시였다.
자유 도시 란다.
일차원적이지만, 란다의 특성을 아주 잘 반영한 이름이라 할 수 있었다.
위험을 감수하고 세운 이 도시는 왕실, 중앙의회 등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았으니까.
그렇기에 ‘자유 도시’는 단순하지만, 대중(大衆) 모두가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제2의 이름으로 자리 잡았다.
허나, 세상만사 대중적이지 않은 자들도 있는 법. 그들은 란다를 다른 식으로 불렀다.
좀 더 란다의 특성에 맞게. 가령, 부와 폭력의 도시가 그러했다.
란다는 세계의 모든 재화가 몰려들 정도로 부유했지만, 대신, 음양으로 폭력이 난무했으니····. 아니, 대신이라는 표현은 부적절할지도.
부(富)가 모여들기에 폭력(暴力)이 난무한 걸 수도 있었으니까.
여하튼, 란다에는 그 외에도 수많은 이름이 있었다.
거대 도시, 기회와 위기의 도시, 도시를 잡아먹는 도시, 부패했지만 유능한 도시 등등.
란다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한 번쯤 그 이명을 실감해 봤고, 그건, 피리 부는 사나이가 휩쓸고 간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부패했지만 유능한 도시 말이다.
“허····. 이 도시가 우리 같은 가난뱅이에게 관심이 있던가?”
란다 빈곤층 거주민 중 하나가 피해를 수습하러 온 공무원 무리를 보며 말했다.
란다의 시의원들은 상류층, 중류층, 하류층 구역을 가리지 않고 도시 전역에서 일어난 재앙에 발 빠르게 대응했다.
평소 보이던 정쟁은 사라지고, 구역을 가리지 않은 채 도시의 피해 확산 억제와 복구에 온 역량을 집중했다.
그동안 꿍쳐둔 비자금 일부를 사용하면서까지.
뭐, 오래 해 먹으려면 도시가 멀쩡해야 했으니까.
이유가 뭐가 됐건, 그 덕분에 빈민가를 중심으로 일어나던 약탈 사태와 폭력 사태는 점점 잦아들었고, 거짓말처럼 쥐 떼가 나타났던 것처럼, 도시의 혼란도 점차 잦아들었다.
그 과정에서 경찰, 군인, 심지어 위생과 직원 등 란다의 모든 공무원 등은 기약 없는 연장근무에 들어갔지만, 불만을 내뱉는 사람 따위는 없었다.
시의원, 장관까지 연장근무에 들어간 마당에 일개 공무원 따위가 투덜거릴 순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그렇게 란다의 공식적인 지배자들은 자신들이 왜 란다의 주인인지 증명해 보였다.
란다 내 언론뿐 아니라, 란다 밖 언론마저 감탄할 정도.
하지만 란다 시(市)가 진정으로 대단한 건, 피해를 수습하는 것 이상의 능력, 피해를 이용할 줄도 알았기 때문이었다.
‘란다 주변 소도시에 있는 거대 갱과 군벌들을 손봐주고 싶습니다.’
시의원이 왕자를 따라 도시에 잔류한 수행원단을 상대로 요구했다.
도시 협정에 명백히 위반되는 행위. 당연히 이렇게 얼렁뚱땅 진행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일반적인 경우에서는 말이다.
‘난 권한이 없소.’
‘압니다. 하지만 지금은 특수한 상황 아닙니까? 막말로 이 혼란을 틈타 갱들이 란다를 습격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아니! 반드시 습격할 거요! 란다가 멀쩡했을 때도 란다를 오가는 트럭을 습격한 놈들인데, 지금은 오죽할까요.’
‘내 권한이 아니라 했소!’
‘웬 미친놈들이 왕자님에게 위해를 가해도 난 권한이 없다고 말할 셈입니까?’
‘협박하는 건가?!’
‘협박은 무슨! 누가 들으면 우리가 왕자님을 잡아 놓고 있는 건 줄 알겠네. 왕자님이 안 가시는 건, 그분이 선택했기 때문이 아닙니까?’
‘끙····!’
‘우리가 바라는 건 좀 더 왕자님의 안전을 제대로 지킬 수 있게, 잠시 눈을 감아달라는 것뿐이오. 허락은 바라지도 않소. 그냥 보안국이 산책 좀 하게 해달라는 거뿐이지. 막말로 왕자님이 란다 밖으로 나가자 그 미친놈들이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시의원들은 왕자의 수행원단 한 명 한 명에게 이리 설득했고, 결국, 위험을 감수하기 싫었던 일부가 해당 사실을 수도에 전해, 잠시 눈을 감아주겠다는 말을 들었다.
허락 아닌 허락.
그러나 란다는 그것으로 충분했고, 시의회는 눈앞에서 왱왱거리던 주변 소도시 갱과 군벌 세력에게 보안국과 뉴젠틀맨 중 목줄 잡힌 초인들을 은밀히 파견. 막대한 피해를 주어 그 기세를 꺾어버렸다.
당연히 시(市)는 신문사에 요청해 해당 사실을 대대적으로 발표하였다.
시(市)가 관련됐다는 것만 빼고, 소도시의 무력 집단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고 말이다.
이 약간의 희소식으로 눈앞의 재난에서 눈 돌릴 수 있게.
그리고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동안 지지부진하던 프로젝트도 같이 진행해 버리죠?’
란다의 피해를 수습하기 위해 창설된 긴급대책본부. 그곳을 맡은 내무부 장관 폴 카버가 대뜸 시의원들 앞에서 제안했다.
‘장관아. 그게 무슨 말이니.’
‘모두 피해 보고서 7페이지 펼쳐주시길 바랍니다. 어떻습니까?’
‘끔찍하구만.’
‘예, 끔찍하죠. 신분 고하를 망라한 인적, 물적 피해····. 하지만 덕분에 프로젝트를 방해하던 이들도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모든 행정을 세계수에 편입시키는 그 프로젝트?’
‘그렇습니다. 이브(Eve)를 확보한 마탑과 협력해 시행정, 금융, 무역 등 도시와 관련된 모든 행정을 세계수로 편입시켜 란다를 하나의 기계로 바꾸고자 하는 프로젝트. 여기 계신 본들 모두 기억하시리라 믿습니다.’
‘기억하고말고. 그거 때문에 지지도 올렸는데.’
‘하지만 막상 시작해보니 쉽지 않았지요. 의외로, 각 분야의 수장들은 그 정도까지는 바라지 않았습니다.’
‘세계수를 이용하고 싶을 뿐, 묶이고 싶은 게 아니니까. 또, 세계수 없이도 이미 최고 자리에 있고.’
‘바로, 그겁니다. 덕분에 란다와 발표한 것과 다르게 프로젝트의 진행 자체는 지지부진했죠. 헌데, 명분이 생겼습니다. 각 은행 기록과 무역 거래 기록이 쥐와 좀비 떼로 인해 소실됐으니까요.’
‘안전상의 이유를 들어 세계수에 기록을 의무화시키자?’
‘도시 전체가 어수선하고, 반대 측의 힘이 약해진 지금이 적기입니다. 차라리 이렇게 된 것 그냥 강행해 버리는 겁니다.’
란다 시(市) 내무부 장관인 카버는 홍수가 들이닥쳐 모두가 떠내려가는 가산을 수습하는 이때, 빈집을 털 계획을 짜고 있었다.
온갖 미친놈들이 있는 란다에선 그리 이상한 게 아니나, 그게 장관이라면 그 의미는 달랐다.
문제는 그 미친놈을 임명한 게 자기들이라는 듯 시의원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를 수락했다는 점이었다.
‘나쁘지 않은데?’
‘하긴, 지금이 가장 적기긴 하네. 도둑질은 자고로 불난 집에서 해야지.’
‘다음 선거 때 당선되려면 뭔가 성과를 보여야 하긴 하지.’
‘잘못된다 해도, 긴급대책본부장만 쳐내면 되니까.’
마지막 말이 신경 쓰이긴 했지만, 중요한 건 위험을 감수하고 시의원들이 수락해줬다는 점.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카버 계획했던 대로 혼란이 가라앉지 않은 지금 일을 강행했다.
필요시에는 약간의 공권력 남용과 폭력을 써서라도 말이다. 일단, 결과가 좋으면 반은 먹고 들어가는 거였으니.
“그래서 이렇게 도시가 시끄러운 겁니까?”
흑마법 학파. 브라이트 학파 창설을 위해 모인 자리. 포레스트가 물었다.
포레스트가 앉은 테이블에는 마탑 측 대표인 케빈 교수와 장관인 카버 그리고 이 자리의 핵심이지만 꼽사리이기도 한 올리버가 앉아있었다.
이들 넷. 정확히 올리버를 제외한 셋은 브라이트 학파의 본격적인 창설을 위한 조직 형태와 시스템, 제공할 혜택 등 체계를 잡았다.
여기서 올리버가 제외된 이유는 나머지 셋이 잘해줘서 그냥 맡겨버렸기 때문이었다.
카버가 포레스트의 물음에 대답했다.
“예, 제가 높은 자리에 올라, 감이 많이 떨어진 것 같더군요. 적당히 힘으로 누르면 상황을 봐가며 못 이기는 척해줄 줄 알았는데, 이 와중에서도 음양으로 저항하더군요.”
카버는 시(市) 프로젝트에 반대하는 도시의 또 다른 지배자들이 연합해 음지로는 폭력과 로비, 양지로는 언론을 써서 세계수 행정 시스템을 반대한다고 설명했다.
시(市)가 마법사 놈들과 붙어먹어 자유를 빼앗으려 한다고 말이다.
“그들이 말한 자유는 탈세와 성과조작, 행정을 허점을 이용한 지원금 횡령을 뜻하지만요.”
“장관님.”
교수 업무를 병행하면서도, 마탑을 대표해 브라이트 학파 설립을 도와주고 있는 케빈이 대뜸 카버를 불렀다. 그는 피곤해 보였다.
“예, 교수님.”
“서론은 그 정도면 충분하니, 본론이 뭡니까?”
눈치 빠른 케빈의 질문. 카버는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그에게 도시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라면 피부색은 별 의미가 없었고, 여러 차례의 회의 덕분에 악의가 없는 것도 파악했기에.
오히려 카버는 마음 편하게 용건을 꺼냈다.
“반대 측에 대응하기 위해 언론의 관심을 돌릴 게 필요한데, 지금 하는 걸 활용할 수 있겠습니까?”
카버가 테이블 위에 쌓인 각종 서류를 가리켰다.
브라이트 학파 창설을 언론에 대대적으로 홍보해, 세계수 행적 시스템에 반대하는 세력을 밀어내버리겠다는 속셈.
얼핏 나쁜 이야기 같진 않았으나, 약속이라도 한 듯 케빈과 포레스트는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곤란합니다.”
“안 되지요.”
무뚝뚝한 케빈, 미소 짓는 포레스트. 표정은 정반대였으나, 둘 다 이빨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단호함이 깃들어 있었다.
장관마저 물러날 정도.
“흑마법 학파를 세우는 건 관심 받을 일이지만, 우려를 낳는 일이기도 합니다. 아직 파테르교 측과 이야기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발표하면 관심 이상으로 물어뜯길 겁니다.”
“저도 동의입니다. 그리고 데이브 이 친구가 필요 이상의 관심을 원치 않고요.”
“이미, 도시의 영웅으로 발표했는데 조금 얹는다고 문제 있겠습니까? 뭣보다 학파. 그것도 흑마법 학파를 세우려는데 관심을 원치 않는다니. 조금 이율배반적이지 않습니까?”
“뒷세계에서 해결사 일하고도 3조나 되는 돈을 빼돌리지 않고 주인에게 돌려준 친구입니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려 하면 안 되죠.”
포레스트가 과거 ABC건을 언급하자, 카버는 입을 다물었다.
시간이 꽤 지났다면 지난 사건이었지만, 그럼에도 ABC사건은 모두의 뇌리에 남아 있었다.
3조가 증발할 뻔한 사건이었으니까. 당연히, 그 돈을 찾은 올리버도 모두의 뇌리에 남아 있었다.
그걸 빼돌리지 않고 그냥 돌려줬으니까. 그냥 먹고 도망치는 게 더 합리적이었을 텐데.
아, 물론 해결사 일을 꼭 돈 때문에 하는 건 아니었지만, 보통은 돈 때문에 하는 거였으니.
올리버는 신경 쓰지 않아 몰랐으나, 이 바닥에 종사하는 이들이라면 몇 번이고 회자하는 골때리는 일이었다.
일개 공무원이 장관까지 오를 정도로. 더 이상 설명하면 입만 아플 뿐이었다.
그 혜택을 누구보다 많이 본 당사자가 납득하며 깔끔하게 물러났다.
“역시, 무리였군요. 알겠습니다. 기삿거리는 제가 좀 더 찾아봐야겠네요.”
“아무거나 괜찮습니까?”
아까 전부터 테이블 위에서 무엇인가를 써 내려가던 올리버 대뜸 물었다.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야 하니, ‘아무거나’라는 범주에 넣긴 그렇지만, 예, 내용은 상관없습니다. 이왕이면 긍정적인 게 좋지만요.”
“그렇군요.”
“혹시, 아까 전부터 쓰고 있던 내용과 관련된 겁니까?”
회의 도중 올리버가 쓰던 내용을 슬쩍 본 카버가 질문했다.
종이에는 각종 전문 용어와 도표, 기계 설계도 같은 게 그려져 있었다.
“아뇨, 그건 아닙니다. 이건 그냥 선물용입니다.”
“선물용?”
“예, 카버 씨에게 드릴 선물도 포함돼 있습니다.”
알 수 없는 말. 카버가 무슨 말인지 되물으려 하던 찰나, 올리버가 쓰던 종이를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하지만, 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도 되겠습니까?”
아직 부상의 여파가 사라지지 않았는지, 올리버의 움직임은 다소 불편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포레스트, 케빈, 카버는 모두 이유를 묻지 않은 채 그냥 보내주었다. 어차피 회의 자체에 올리버가 하는 것도 없었고.
허락받은 올리버는 감사를 표한 뒤 회의실 밖으로 나갔고, 복도를 따라 포레스트 레스토랑으로 나왔다.
한창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손님이 많았고, 손님 수에 비례해 종업원들은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올리버는 그 광경을 한번 슥 훑어보고는 레스토랑 책임자인 알에게 인사한 뒤 레스토랑 바깥으로 나가 T구역 보도 위를 걷기 시작했다.
평소와 다른 길을 따라.
저벅. 저벅. 저벅.
그렇게 평소와 다른 길을 걷던 올리버는 점점 인적이 드문 곳을 향해서 갔고, 잠시 후, 멈춰서 허공에 대고 말했다.
“이제 나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몇 초 동안 반응이 없었으나, 올리버가 계속해 기다리자 그늘이 든 지면 아래에서 누군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림자를 매개로 한 은닉 술식으로, 흑마법 조작계열 중 그림자 조작에 특화된 흑마법사인 듯했다. 실력은 꽤 괜찮았다.
얼굴을 가리는 커다란 후드를 뒤집어쓴 그가 입을 열었다.
외국인 특유의 어색한 음색이 묻어 나왔다.
“언제부터 눈치챈 거요?”
“레스토랑에 식사하러 오셨을 때부터요. 그림자를 이용해 계속 안쪽을 보려고 하셨지요?”
“역시, 그쪽에서 방해한 거군요.”
“제가 부끄러움이 많아서요.”
올리버가 하나하나 친절히 대답해줬다. 최소한 위해를 가하려는 악의는 없어. 그래도 수상쩍은 것도 사실이라, 정체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죄송하지만, 선생님께서 누구신지요?”
“대답에 앞서 한 가지만 더 질문드릴 수 있겠습니까?”
아주 정중한 태도. 올리버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데이브 맞습니까? 란다 T구역 30번 거리의 해결사. 나무꾼 데이브.”
딱히 원하는 별명은 아니었으나 올리버는 일단 예라고 대답했다.
듣자마자 흑마법사는 무엇인가 마음을 먹더니 저벅저벅 다가왔고, 올리버 앞에서 털썩 무릎을 꿇었다.
“저희를 살려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