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9. 드루이드의 의뢰 (3)
[란다 시(市)에서는 왕실 수행원으로 참여한 중앙 의회 의원들과 생산적인 대화를 나눴다고 발표했으며, 이를 통해······.]
올리버의 자택. 라디오 소리가 흘러나왔다.
왕자에 관련된 이야기 혹은, 수행원단과의 이야기가 잘 풀렸다는 것으로, 왕자가 방문한 지난 며칠 동안 나온 소식과 레파토리만 다를 뿐 내용은 비슷했다.
왕자와 왕실은 란다와 보다 좋은 관계를 유지할 생각이 있으며, 이를 통해 연합 왕국과 란다는 이익을 공유할 거라는 뻔하디뻔한 이야기.
허나, 교사와 경제 평론가, 정치 낭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지 그 뻔하디뻔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자신들의 의견과 추측, 전망에 관해 이야기했다.
뭐, 올리버가 모르는 걸 수도 있었다. 그런 쪽에 밝지는 않았으니까.
왕실 인사. 그것도 왕자가 방문한 게 이례적인 일이기도 했고.
여하튼, 왕자가 방문하고 나서 란다의 신문과 라디오 등 언론사는 화수분이라도 얻은 듯 매일매일 수많은 기사를 쏟아냈다.
그리고 올리버는 그 기사 내용을 들으며 외출 준비를 했다.
블랙 마켓에서 산 ‘가짜 얼굴’을 써 외형을 바꾸고, 거기에 멈추지 않고 천사의 집에서 배운 화장술을 활용해 전혀 다른 인상을 풍기도록 노력했다.
최소한 해결사 데이브나, 마탑 직원 제논으로 보이지 않게.
“음······.”
올리버가 침음성을 내며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살펴봤다.
위장은 실로 오랜만. 그래도 나쁘지 않게 됐는지 거울 속 자신이 낯설게 보였다.
올리버는 위장이 잘 됐다는 뜻으로 해석하며, 옷을 갈아입었다.
갈 장소에 어울리게 투박한 옷으로. 손때가 타 반들반들한 갈색 바지와 갈색 겉옷. 그리고 때가 묻은 플랫 캡을 머리 깊숙이 썼다.
그런 다음 눈에 띄는 쿼터스태프는 축소화 마법으로 줄여 품 안에 넣고, 한쪽에 방치해둔 송장인형에게 흑마법을 사용했다.
참고로 송장인형은 해결사 데이브와 비슷하게 생겼다. 왜냐면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메모리 오브 블러드(Memory Of Blood)]
피와 피에 축적된 데이터를 이용한 창조계열 흑마법.
술식을 발동하자 송장인형의 인조 혈관에 있는 혈액이 생물처럼 내부에서 움직여 송장인형을 조종했다.
원래는 외부로 혈액이 튀어나와 조종했지만, 개량을 통해 지금은 내부에서 조종할 수 있었다. 그편이 여러모로 보기 좋았으니까.
올리버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는지 송장인형은 겉보기에 평범한 사람처럼 보였다.
올리버는 적당히 구한 막대기를 내밀며, 송장인형 내부에 있는 피 인형-크리처에게 부탁했다.
“잠시 볼 일이 있어 나가봐야 하는데, 저 대신 이곳에 자리 좀 지켜주시겠어요? 바깥에서 제가 자리를 비우는 걸 눈치채지 못하게요.”
올리버가 흑마법사의 눈으로 저 멀리 있는 드루이드를 보며 말했다.
의뢰를 맡긴 후부터 적게는 한 명, 많게는 두, 세 명씩 올리버를 감시했다.
그래서 올리버가 해결사 데이브의 외형과 생명력이 비슷한 송장인형을 만든 거였다.
주문을 이해한 피-인형은 고개를 끄덕였고, 대답을 들은 올리버는 감사를 표하며 자택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에는 비밀 연구실이 있었다.
당연히 비밀 연구실답게 벽 곳곳엔 보안 마법과 흑마법을 설치돼 있었다.
어지간한 술사도 꿰뚫어 보기 힘든 수준으로.
올리버는 그곳에서 종이를 던져 공간 마법 술식을 전개해 보랏빛 포털을 만든 뒤 안으로 들어갔다.
위이이잉 곤충의 날갯소리와 함께 풍경이 바뀌었다.
포레스트의 안전 가옥 중 하나로, 올리버는 포털을 닫은 뒤 옷을 추스른 후, 발걸음과 호흡 등을 조절해 안전 가옥 밖으로 나갔다.
행여 올리버를 아는 사람이 봐도, 올리버인 줄 모르게끔 말이다.
터벅. 터벅. 터벅.
올리버는 올리버도, 데이브도, 제논도 아닌 척 걸어가 한 주점에 방문했다.
낮인데도 불구하고 주점 내부에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노동자인 척하는 군인과 초인들이.
이방인의 방문에 그들은 일제히 올리버를 노려봤으나, 올리버는 개의치 않고 바(Bar) 앞에서 컵을 닦고 있는 주인장에게 갔다.
대머리에 붉은 코, 배가 툭 튀어나온 중년 남성은 올리버를 보지도 않은 채 물었다.
“뭐로 드시겠소.”
올리버는 대답 대신 허리에 찬 단검을 뽑아 내밀었다.
피처럼 붉은 날을 가진 단검으로, 자세히 살펴보면 칼날에 체크무늬와 같은 독특한 무늬가 있었다.
일종의 명함, 소개장.
올리버에게 눈길을 주지 않던 주인장의 눈빛이 흔들리더니, 믿기지 않는 듯 칼을 살펴봤다.
“베이지 않게 조심하십시오.”
수천수만 가지의 질병이 깃든 칼날에 행여 주인장이 베일까 싶어 올리버가 조언했다.
주인장이 의심을 빛내며 물었다.
“여긴 전당포가 아닌데······. 다만, 이런 칼을 사줄 사람은 알고 있소. 잠시 가져가 봐도 되겠소?”
올리버가 고개를 끄덕이자 주인장이 잠시 자리를 비켰고, 주점 내 손님 중 몇몇은 술을 마시는 척, 곯아떨어진 척하며 품 안의 총과 단검을 쥐었다.
그들 입장을 고려하면 이해할 수 있는 행동.
잠시 후, 주점 주인이 다시 나타났다.
“칼을 사고 싶다고 합니다. 따라오시죠.”
한결 누그러든 목소리에 주점 내 긴장감이 누그러들었다.
올리버는 요청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주인장을 따라갔고, 거기서 켈 자유독립군의 지휘관 중 하나인 윌레스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아까 전 올리버가 주인장에게 건네준 단검을 한 손에 쥔 채 살펴보고 있었다.
“내가 준 칼에 무슨 짓을 한 거야?”
대화가 시작되자마자 주점 주인은 밖으로 나갔다.
단둘이 남게 되자 올리버가 대답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위험하니 조심하십시오.”
마법사로 제법 높은 경지인 윌레스는 대충 무슨 말인지 바로 이해했다.
“그래 조심해야겠네. 조금만 베여도 골로 가겠어.”
윌레스가 한때 자신이 준 단검을 책상 위에 올려 올리버 쪽으로 쭈욱 내밀었다. 돌려준 것. 올리버는 책상 위에 있는 단검을 챙겼다.
“내가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안 거지?”
“가일 씨에게 들었습니다.”
흑마법사 가일. 하수도 뱀이라는 갱단의 우두머리로, 과거 란다로 숨어든 도망자를 숨겨주는 사업을 한 자였다.
참고로 과거라 칭한 이유는 현재는 하지 않기 때문이었는데, 그래도 노하우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었는지, 윌레스가 어디 숨어 있을지 알아냈다.
“켈족이 숨을 곳은 뻔하고, 배편을 구하는 사람은 티가 잘 난다더군요.”
“오, 그렇군······. 근데, 내가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안 건지?”
윌레스는 같은 질문을 다시 했다. 어떻게 여기 주점에 숨어 있는지 묻는 게 아닌, 어떻게 란다에 있는지 알았냐는 거였다.
말뜻을 이해한 올리버가 솔직히 대답했다.
“알버트 왕자님을 따라온 드루이드들이 알려줬습니다. 정확히는 의뢰한 거지만요.”
“맞춰보지. 우리가 납치했다고 주장하면서 드루이드를 찾게 협조해 달라고 했지?”
이미 짐작 가는 바가 있는지 윌레스는 바로 알아맞혔다.
이야기 진행이 빨라 나쁘지 않았다.
“예.”
“수락했나?”
“예.”
“의외군.”
“거절하기 어려운 제안을 했거든요.”
“뭘 제안했길래?”
“자연의 힘과 주술 등 드루이드의 힘을 제가 사용해도 항의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고작 그딴 걸로? 란다 특성을 고려하면 무시해도 됐을 텐데?”
“이왕이면 마찰 없이 진행하고 싶었거든요. 제가 하려는 일에 필요해서요.”
“무슨 일인지 궁금하구만.”
“오염구역을 청소하는 데 필요하고, 사업을 하려는데도 필요하거든요.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가르쳐 줄까 합니다.”
“······드루이드의 힘을?”
“정확히는 자연의 힘이죠, 배울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가르쳐주려고요. 자고로 좋은 건 나눠야 하니까요.”
그랬다. 올리버가 드루이드의 제안에 응한 이유는 단순히 마찰을 피하고 싶은 욕심만은 아니었다.
드루이드가 허락하자마자 차일드-써드를 통해 얻은 드루이드의 수련법, 주술, 식물학을 주변에 공유하고 가르쳐 줄 예정이었다.
이유는 딱히 없었다. 그냥, 드루이드가 자연의 힘을 자신들 것이라 주장하길래 누구든 배울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졌다.
사용이란 단어는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으니 아마 문제는 없을 터였다.
설사 문제가 있다 해도 그때 올리버의 입장을 보여주면서 몰랐다고 이야기하면 괜찮을 터.
앞서 말했듯이 사용이란 단어는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으니까.
대답을 들은 윌레스가 파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좀 변한 거 같구만. 오래전이라 가물가물하지만 이런 성격은 아니었던 거 같은데. 아니지. 이런 성격이었나? 어쨌건 조금 바뀐 거 같긴 해.”
“······.”
윌레스의 평에 올리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과연 자신이 변할 걸까?
올리버가 고민하는 사이 웃음을 흘리던 윌레스는 언제 그랬냐는 듯 웃음을 거두며 진지하게 물었다.
그의 허리춤에는 장검이 채워져 있었다.
“그래서 날 잡으러 왔나?”
올리버는 장검에 올라간 윌레스의 손과 감정 상태를 봤다.
그는 여차하면 올리버와 싸울 생각이었다. 허나, 그렇다고 올리버를 우습게 본 건 아니었다.
오히려 올리버를 위협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자신보다 강한 강적.
하긴, 윌레스 역시 올리버의 최근 명성을 들었을 테니. 그럼에도 그가 이런 태도를 보인 것은 책임감 때문이었다.
승패 여부를 떠나 싸워야 하는 자신의 책무.
누군가는 미련하다고 할 수 있었으나, 올리버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애당초 힘의 크기로 싸울지 말지 결정하는 사람이었다면 연합왕국에 대항하는 켈 자유독립군에 복무하지 않았을 테니.
차라리 가지고 있는 높은 수준의 마법을 이용해 켈 자유독립군을 때려잡아 자신의 영달을 위해 힘썼을 터였다.
그게 좀 더 안전하고, 성공 가능성이 크며, 보상도 클 테니.
그럼에도 윌레스는 위험하고, 가능성이 낮으며, 불안정한 켈 자유독립군에 투신해 지금까지 싸우고 있었다.
올리버가 그에 대한 존중심을 빛내며 솔직히 대답했다.
“아뇨, 지금은 대화하려고 왔습니다.”
“무슨 대화?”
“정말 윌레스 씨께서 드루이드를 납치했나 싶어서요.”
“아뇨, 아닙니다.”
올리버의 물음에 제3의 목소리가 끼어들어 대답을 대신했다.
갑작스러운 난입. 그러나 올리버는 당황하지 않았다.
저쪽에서 나름대로 술식을 사용해 숨어 있는 듯했으나, 한층 눈이 좋아진 올리버는 이미 누가 있다는 걸 꿰뚫어 봤었다.
모른 척한 것은 올리버 나름대로 예를 취한 거뿐이었다.
올리버는 소리가 난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비밀 문을 통해 들어오는 더벅머리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뒤틀린 생명력과 감은 두 눈으로 볼 때 여성은 장님으로 추정됐다.
올리버가 말없이 여성을 바라봤고, 여성 역시 감은 눈을 통해 올리버를 말없이 바라봤다.
“······피어스 씨가 찾으시는 드루이드시군요.”
적막을 깬 올리버. 이에 여성 드루이드가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페델름이라 합니다.”
“안녕하십니까. 란다 T구역 30번 거리의 해결사 데이브라고 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세계수를 통해 들었거든요.”
“세계수요?”
“예, 제 특기입니다. 세계수를 이용하고 활용하는 게요.”
“흐음······. 혹시, 그게 도망치신 것과 상관있습니까?”
“호오, 어떻게 아신 거죠?”
“아까 전에 납치된 게 아니라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여기 있다면 이유는 하나뿐이죠. 스스로 도망친 것. 아닌가요?”
조금만 머리를 굴리면 알 수 있는 사실이었지만, 올리버가 하니 어색한지 윌레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정정하지. 너 변한 게 맞네. 확실히.”
“그렇습니까?”
“그래, 머리를 제법 굴리게 됐어.”
“제가 아둔하긴 하지만, 란다에서 몇 년을-”
“-잘못 알아들었어. 난 네가 멍청하다고 말한 게 아니야.”
윌레스가 정정했다. 입 발린 말이 아닌 진심이었다.
“난 네가 멍청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오히려 머리는 좋은데 그 머리를 안 쓴 거에 가깝지. 자잘한 이해득실에는 관심이 없으니까.”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흥정도, 손익계산도, 일의 배후를 캐는 데도 올리버가 재주가 없는 건, 머리가 떨어져서라기보다 관심 자체가 없어서였다.
과거 올리버는 아름다운 빛이나, 흑마법 등. 자기 관심 분야가 아니면 어지간해서는 아무래도 상관없었으니까.
그런데, 올리버가 이제 그런 걸 신경 쓰기 시작했다. 즉, 머리가 좋아졌다기보다는, 성향이 바뀐 것에 가까웠다.
그 증거로 과거 올리버였다면 하지 않았을 반응을 보였다.
“페델름이 우리와 함께 도망친 이유는 왕실과 관련된 비밀을 알아냈기 때문이야. 너는 대충 뭔지 짐작 갈 거고······. 관심 있나?”
“음······. 아뇨.”
올리버의 입에서 부정의 단어가 나왔다. 왕실과 관련된 비밀이 악마와 관련된 것임을 앎에도 말이다.
그 반응을 본 윌레스는 비로소 확신했다. 과거 자신이 본 올리버와 지금의 올리버는 큰 차이가 있다는걸.
“다시 정정하지. 너 꽤 많이 변했어.”
“사람은 다 변하는 법 아니겠습니까?”
“뻔뻔해지기까지.”
짧은 문답 뒤에 찾아온 적막. 페델름이란 여성 드루이드가 올리버에게 말을 걸었다.
“데이브 님.”
“그냥 데이브라고 부르십시오. ‘님’자 소리를 들을 만큼 대단한 사람은 아닙니다.”
“데이브 씨. 조언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조언요?”
“사실, 설득에 더 가깝죠. 제가 세계수를 통해 아는 해결사 데이브는 당장은 아니더라도, 결국 저희를 잡을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여태까지 의뢰를 실패한 적이 없고, 신용을 저버린 적도 없으니.”
“페델름 씨는 단순히 세계수를 이용해 정보를 수집하는 드루이드가 아니야. 그 정보를 연산해 미래를 예측할 수도 있지.”
세계수를 이용한 미래 연산 예측. 책에서 본 적이 있었다.
예언이라기보다는 방대한 정보를 조합해보다 실현 가능성이 높은 미래를 예측하는 거였다.
당연히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적었다. 세계수를 다룰 수 있는 것은 극소수였고, 세계수를 이용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또 그중에서도 극소수였으니까.
즉, 드루이드 중에서도 상당히 희귀한 능력을 가진 셈이었다.
“무슨 설득을 하신다는 거죠?”
“저희를 붙잡지 않는 편이 이로울 겁니다. 란다에요.”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뭐죠?”
“왜냐면 곧 왕실에서 무슨 개수작을 부릴 테니까.”
윌레스가 끼어들었다. 올리버를 설득하기 위한 블러핑이 아닌 진심이었다.
“근거가 있으신지요?”
“근거는 없지만, 확신은 있지. 왜냐면 왕실은 늘 이런 식으로 일을 처리해 왔으니까. 겉으로는 미소 짓고 뒤에서 수작을 부리지.”
올리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윌레스의 말을 믿지 못해서가 아닌, 어느 정도 동의했기 때문이었다.
갑작스러운 알버트 왕자의 방문, 왕자 측 수행원의 양보로 화기애애해지는 란다와 왕실의 관계. 너무 느닷없이 이야기가 잘 풀리고 있었다.
올리버조차 뭔가 이상하다고 느낄 정도로 말이다.
무엇보다 가장 이해하기 힘든 점은 이렇게 우호적인 제스처를 취한다면 어찌해 둘째 왕자인 알버트가 왔냐는 거였다.
왕실과 란다의 관계 개선은 적지 않은 공이었고. 정치학을 공부하지 않은 올리버도 둘째 왕자보다는 첫째 왕자인 에드워드 10세가 오는 게 더 합리적이란 걸 알았다.
국가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허나, 막상 온 것은 알버트였고.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보는 게 타당했다.
가령, 무슨 사고가 터진다거나.
“왕실이 수작을 부린다고 치면 어떤 종류의 수작을 부릴까요?”
올리버가 세계수를 이용해 미래를 예측하는 페델름에게 물었다.
“죄송하지만 그건 저도 모릅니다. 다만, 최악의 형태를 생각하시는 게 좋습니다.”
“최악이라면?”
“가장 안 좋은 형태죠.”
가장 안 좋은 형태라······. 올리버는 며칠 전 만난 알버트 왕자와 신문을 통해 접한 왕실 수행원들을 떠올려봤다.
이 조합으로 할 수 있는 최악의 형태라. 그러자 문득 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왕실 수행원단의 요청으로 신(新) 계급 연합인 뉴젠틀맨이 친분을 가질 겸 파티에 참석하기로 했다는.
왕실 수행원과 초인. 이 어색한 조합은 자연스럽게 최악의 형태가 떠올랐다.
긍정적인 관계를 구축하던 왕실과 란다가 한 번에 뒤엎어지는. 다소 믿기지 않는 허무맹랑한 것이었지만, 그게 올리버가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형태였다.
자고로 최악은 상식에서 벗어난 거였으니까.
“윌레스 씨. 란다를 원래는 떠날 계획이었죠?”
확실하진 않으나, 대충 견적이 나온 올리버는 윌레스에게 질문했다.
윌레스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 배편을 알아본 이유가 그거야. 셀랜드에 있으면 결국 잡히는 건 시간 문제. 일단, 해외로 떠날 계획이야.”
“하지만 감시 때문에 그러지 못하고 있으시죠?”
윌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란다의 음지와 양지 배편은 모두 핑크맨과 드루이드가 감시하고 있어 이용이 힘들었다.
배를 잡는 순간 잡힐 가능성이 컸다.
올리버는 품 안에서 종이배를 하나 꺼냈다.
“그건 뭐지?”
“일종의 배편입니다. 쓸 때가 있나 싶었는데, 쓰게 되네요.”
윌레스는 마력 감지능력을 통해 종이배가 마법 아이템임을 간파하며, 올리버의 말을 바로 이해했다.
“조건은 뭐지?”
“제가 말씀드린 날 도망쳐주실 수 있겠습니까? 모두가 알 수 있게끔요?”
“드루이드들에게 쫓겨서?”
“예.”
“제정신이야?”
윌레스가 되물었다. 그도 그럴 게, 알버트의 수행원으로 따라 들어온 드루이드는 스무 명이 넘었고, 그들의 추격이 따라붙으면 도망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에 올리버는 설득 대신 마력을 방출, 바닥에 퍼트렸고, 파문이 일며 정령이 하나 올라왔다.
녹색으로 빛나는 머리와 회색으로 빛나는 몸체, 갈색빛을 띠는 팔다리를 가진 정령이.
“이 정령이 도와주실 겁니다.”
갑작스러운 정령의 등장에 윌레스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놀란 것은 페델름도 마찬가지였는지 이해가 안 되는 듯 물었다.
“어떻게 정령과 계약하신 거죠?”
“계약한 게 아닙니다. 한번 도와드리고 한번 도움받기로 약속한 것뿐입니다.”
그랬다. 정령은 전(前) 가이아 학파 마법사에게 흡수당해 빈사 상태가 되어 생명이 위독했으나, 그때, 올리버가 마법을 사용해 한번 도와주었다.
상처 입은 부위를 마력과 생명력을 이용해 응급처치해 준 것.
사실, 그때 올리버는 정령과 계약이란 걸 하고 싶었지만, 정령의 감정 상태가 도저히 그거까지는 요구할 수 없는 상태라, 차선책으로 약속을 하나 했다.
딱 한 번, 올리버가 요청할 때 힘을 빌려달라고. 한번 목숨을 구해준 대가로 말이다.
다행히 정령은 긴 고민 끝에 이를 받아들였다.
“정령의 힘이 있으면 도망칠 확률이 늘어나지 않겠습니까?”
올리버가 말했고, 윌레스는 부정하지 못했다.
어차피 이 상태로 도망쳐도 드루이드와 접촉할 가능성이 있었는데, 차라리 그럴 바에는 전력을 보강하는 게 더 합리적이었다.
“이 정도면-”
“-아, 아직 더 남았습니다.”
올리버가 윌레스의 말을 가로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소매를 걷으며, 공간 마법이 깃든 종이를 하나 꺼냈다.
“윌레스 씨 잠시 제가 마법 수련을 도와드려도 되겠습니까?”
***
“말도 안 돼?! 이런 힘을 숨겼다고?”
“강렬한 분노가 느껴져!”
윌레스가 탈출을 결행하기로 한 날. 윌레스와 접전을 벌이던 드루이드가 전과 비교할 수 없는 강렬한 화염에 경악하며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