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7. 드루이드의 의뢰 (1)
“만나서 반갑네. 데이브. 아니, 제논인가?”
얼굴까지 가린 후드를 벗으며 알버트 왕자가 말했다.
그 얼굴을 확인한 올리버는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왕-”
알버트 왕자가 손을 들어 말을 멈추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왜 이러나 싶었는데, 올리버는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오언이 듣고 있었다.
올리버의 시선을 느낀 오언이 변명하듯 말했다.
“아······. 오는 길 만난 꼬마인데, 대표님과 아는 사이라 해서······. 과거 도움을 받은 적 있어 인사드리고 싶다고······. 혹시 제가 실수를 한 건지요?”
오언은 행여 자신이 실수했나 싶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파이터 크루에서 덩치와 힘은 압도적이나, 순박하고 성정이 모질지 못한 그는 아무래도 왕자의 거짓말을 덥석 믿은 듯했다.
‘아니지. 거짓말은 아닌가? ’
올리버가 가만 생각해봤다. 왕자인 신분만 숨겼다 뿐 아는 사이이며 도움을 받은 것도 사실이었으니 엄밀히 따지면 거짓말은 아니었다.
오언도 흑마법사의 눈을 통해 이를 확인해 데려온 걸 거고.
대충 상황을 파악한 올리버는 왕자의 말에 맞춰줬다.
“아뇨, 아는 사이 맞습니다.”
“아! 다행이군요······!”
걱정하던 오언이 눈에 띄게 안심했다.
“대표님을 부르는 게 좀 아닌 것 같아 끌고 갈까 했지만, 꼭 따로 단둘이 만나야 한다고 해서······. 도련님인 거 같기도 하고······. 제가 실수했는가 싶었는데 다행입니다.”
동생들 탓인지 아이들에겐 마음이 약한 오언이 그리 말했다.
다행히 이는 올리버에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니었다.
만약 보는 눈이 많은 데서 알버트를 만났다면 누군가 왕자인 걸 알아봤을지도 모르고, 그렇게 된다면 괜한 소문이 퍼지는 등 곤란한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었으니까. 오언의 순박한 면이 올리버에게 도움이 됐다고 할 수 있었다.
의문이 해소되자 자연스럽게 새로운 의문이 생겼다.
왕자가 왜 올리버를 찾아왔냐는 거였다. 그것도 비서나 경호원 하나 없이 혼자서.
비록 소년이라도 해도 왕자는 신대륙 대화재 때 왕자로서 자기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고 했는데, 그 점을 고려하면 이는 너무나도 예상치 못한 돌발행동이었다.
혼자 멋대로 자리를 비운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 텐데.
올리버는 왕자가 이곳에 홀로 온 이유가 궁금해졌다.
“오언, 잘해주셨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잠시 물러나 주시겠습니까? 사람들이 절 찾으면 잠시 볼일을 보고 있다고 말씀 부탁드립니다”
본격적인 대화에 앞서 올리버는 오언을 물러날 것을 부탁했고, 오언은 이에 따라줬다.
덕분에 올리버와 알버트는 X구역 뒷골목에 혼자 남게 됐다.
“머리가 원래 색으로 돌아온 건가?”
올리버가 방음 마법과 위장 마법으로 주변을 가리던 중 왕자가 대뜸 물었다.
처음에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으나 곧 이해할 수 있었다.
왕자와 처음 만난 건, 불타버린 자 덕분에 머리 한쪽이 새하얗게 탈색됐을 때였으니까.
“아뇨, 염색한 겁니다. 왕자님.”
“염색?”
“예, 너무 눈에 띄는 것 같아 염색했습니다. 왕자님.”
“그렇구만. 난 괜찮았던 거 같았는데, 신비한 느낌이 있어서.”
“그러시군요. 왕자님.”
“저기······. 계속 왕자라 부르는 건 그만둬주지 않겠나?”
“예?”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그게 예법에 맞지만, 지금은 조금 불편해서 말이야.”
“아······. 예, 알겠습니다······. 저기 괜찮으시다면 저도 질문 하나 드릴 수 있겠습니까? 어찌해 왕자님께서 홀로 X구역을 방문하셨는지요?”
올리버가 지극히 상식적인 질문을 했다.
오늘 막 방문한 왕자가 홀로 X구역을 찾아온 것은 여러모로 이상한 일이었으니까.
아마, 오언이 왕자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 것도 그 탓일 터였다.
사람의 눈은 생각보다 날카롭지 못하고, 너무 말이 안 되는 경우면 더 날카롭지 못했으니까. 눈앞에서 일이 벌어져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조금만 늦게 오셨어도 위험할 뻔했습니다. 원래 밤은 위험하지만, 란다의 밤은 더 위험합니다.”
“그럴 일은 없을 거라 판단했네. 한때 최대 빈민가 중 하나인 X구역이 란다 앞 구역만큼 안전해졌다고 들었거든.”
올리버는 뭐라 말하지 못했다. 왕자의 말이 맞았기 때문이었다.
Y, Z구역을 제외하면 최대 낙후 구역은 X구역은 재개발이 진행됨에 따라 치안이 몰라볼 정도로 좋아졌다.
그 이유는 개발로 낙후된 곳이 사라진 것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파이터 크루와 선택하는 사람, 포레스트에게 고용된 용병, 해결사 등이 자경단처럼 X구역을 순찰한 덕분이었다.
범죄가 아예 사라졌다고는 할 수 없으나, 최소한 K, L, M, N, O 구역과 같은 중상층 거주지만큼은 치안이 좋아졌다.
치안의 부재로 공동체를 설립해야 했던 과거 X구역을 생각한다면 장족의 발전이라 할 수 있었다.
허나, 여기서 감탄해야 할 것은 X구역의 발전이 아니었다. 바로, 란다 사람이 아님에도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알버트였다.
“잘 아시는군요?”
“우리 왕실 비서들이 유능하거든. 그들이 알아봐 줬지.”
진심. 그러나 대답을 들을수록 의문은 가시지 않고 더욱 늘어났다.
“란다에 관심이 많으시고요.”
“아니 그건 아니야, 그저, 자네 소문을 들었거든.”
올리버가 고개를 갸웃댔다. 자신의 소문이라니.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왕자는 머뭇머뭇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대가 말하지 않았나? 개인 사정을 더 중시한다고. 그래서 내 스카우트 제의를 거절했고.”
“아, 새로운 마법 기관 말씀하시는 거군요. 왕실에서 진행하는.”
“그래 그거······. 솔직히 당황스럽고 이해하기 어려웠네. 왕실을 위해 일한다는 건 명예로운 일일 텐데, 그걸 거절하다니. 좀 불쾌하기도 했어.”
올리버는 ‘개인차가 있는 법이니까요.’라고 말할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해결사와 마탑 직원으로 지내온 세월이 그 말을 하지 않는 게 좋다고 알려준 덕분이었다.
“하지만 이젠 알 것 같네. 그냥 거절한 게 아니란 걸. 자넨 자네 나름대로 원대한 목표가 있었군. 빈민가를 개발해 사람들을 도와주고, 자신만의 학파를 세우려는······. 일종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알버트는 감탄과 존중과 같은 감정을 빛내며 말꼬리를 흐렸다.
무엇인가 더 말하고 싶은 눈치였으나, 특유의 인내심과 조심성 탓에 알버트는 말하지 않고 참았다.
아주 미세한 감정. 허나, 올리버는 볼 수 있었고, 그런 복잡한 감정은 올리버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며, 좀 더 솔직한 태도를 끌어냈다.
“왕자님. 실망하게 해드려 죄송하지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런 게 아닙니다.”
“뭐가?”
“제가 빈민가를 개발하는 데 힘을 보탠 것도 맞고, 새로운 학파를 세우려고 한 것도 맞지만, 처음부터 이러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최소한 왕자님의 제안을 거절한 이유는 아닙니다.”
“그런가······?”
“예, 그냥 어쩌다 보니, 하게 된 거죠. X구역 재개발은 사업 아이템이 될 것 같아 하게 된 거고, 학파를 세우는 것 역시 근래 세금 때문에 세우려고 한 겁니다.”
알버트의 눈빛이 흔들렸다. 아기는 황새가 물어다 주는 게 아닌, 침대 위에서 만드는 걸 알게 된 표정이었다.
물론, 고아원에서 자란 올리버는 처음부터 침대 위에서 만드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듣기로 많은 사람을 도와줬다고 하던데? 오염구역? 거기 난민들에게 일부러 일자리를 제공한다고 했고.”
올리버는 속으로 조용히 감탄했다. 왕실 비서들이 정말 유능한 것 같았다.
“그건 사실입니다. 여유가 되면 살 터전도 마련해주고, 공장도 세워 일자리도 제공해 줄 생각입니다. 다만, 왕자님께서 말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아닙니다.”
“그럼 다른 이유가 있다는 건가?”
“예, 사실, 제 욕심 때문에 하는 거거든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싶어서요.”
“좋은 사람?”
“예.”
올리버의 설명을 들은 알버트는 미간을 찌푸리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군······.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니.”
“말 그대로입니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좋은 사람이니까요.”
알버트는 대답을 들을수록 수렁에 빠지는 듯했다. 당연한 거긴 했다. 과정과 결과가 같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으니까.
들으면 들을수록 불쾌감만 생기는 화법. 허나, 왕자는 화를 내긴커녕 오히려 풉 하고 웃을 뿐이었다.
신대륙에서 대화를 나눴을 때처럼 말이다.
어른 흉내를 내기 위해 온몸에 힘을 주고, 일부러 근엄한 말투를 흉내 내던 알버트는 짧게나마 나이대에 어울리는 모습을 하였다.
얼마 가지 않아 근엄의 가면과 망토를 얼굴과 몸에 둘렀지만.
“큼, 큼. 실례했네······. 솔직히 자네가 하는 말 하나도 못 알아듣겠네.”
“저도 가끔씩 그렇습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저도 모를 때가 있습니다.”
알버트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래도 난 나쁘지 않은 것 같네. 내가 평소 보던 사람들보다는 솔직한 것 같아서······. 그래서 그렇게 싫지가 않아.”
“평소 만나는 사람들이 솔직하지 못하십니까?”
“아, 흉보는 것처럼 들렸다면 오해일세. 거짓말쟁이라는 뜻은 아니야. 다만, 속을 드러내지 않는 것도 사실이지. 우리 가족은 왕족이고, 난 왕자니까.”
무슨 말인지 올리버는 이해했다. 높은 자리에 있다면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현상이었다.
왕자가 쓴웃음을 지었다.
“어쩔 수 없는 건 이해하지만, 가끔씩은 너무 피곤해. 그래서인지 자네의 알 수 없지만 솔직한 태도가 썩 나빠 보이진 않네. 뭐가 됐건, 좋은 일도 하는 건 사실이고.”
“칭찬 감사합니다.”
“나야말로 고맙지. 개인적인 이유든 뭐든 그대 덕분에 연합 왕국의 백성들이 도움을 받고 있으니. 비록, 왕세자는 아니나, 왕족으로서 감사를 표하네.”
알버트는 평소 보이던 모습보다 한층 자연스럽게 말했다. 진심이라는 증거였다.
“사실, 내가 여길 몰래 찾아온 건 형님이 시켜서였네. 자넬 만나보라고.”
에드워드 10세.
“그것도 몰래. 그래서 자네 중개인을 찾아가는 대신 이리 왔지. 중개인을 만나면 흔적이 남을 테니까.”
“왕자님의 형님께서 왜 절 만나보라 하신 거죠?”
“다시 한번 스카우트 제의를 해보라고 그러셨네. 왕실에서 만들려는 마법 기관에는 인재가 필요하다며.”
“아······.”
올리버가 짧게 탄성을 냈다. 다만, 납득해서가 아닌 이해하지 못해서였다.
“걱정하지 말게. 형님의 부탁을 거절할 수도 없어 일단 왔지만. 그대를 곤혹스럽게 할 생각은 없으니.”
“······형님을 존경하시는군요.”
“비록, 과거에는 사고를 많이 치셨고, 지금도 가끔씩 치시지만 한 나라의 왕세자로서 어울리는 모습도 보이고 있으니······. 왜 그러나?”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야말로 왕자님을 헛걸음하시게 한 것 같아 죄송할 따름입니다.”
“아니, 그건 부당하네. 여기 온 건 내가 멋대로 한 것이니. 또, 개인적으로 그대를 만나보고 싶기도 해서, 헛걸음했다고 생각하지도 않네. 신대륙에서 그대를 봤을 때 재밌는 사람인 것 같아 또 보고 싶었거든.”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란다에는 얼마나 계실 예정인지요?”
“좀 있을 거 같네. 가지고 온 사안이 여러 개라. 사실, 오늘 찾아온 것도 그 때문이야. 내일부터 꽤 바빠 지금이 아니면 오지 못할 것 같아서.”
“고생이 많으시군요.”
“당연한 내 의무니. 불평할 생각 따위는 없네······. 또, 그런 실무는 수행원으로 따라온 비서와 중앙 의회 의원들이 할 거라 난 크게 신경 쓸 게 없어. 난 란다 행사를 돌아다니며 사진 정도 찍고, 연설문 몇 번 읽는 게 다일 걸세.”
“일에 경중이 있겠습니까? 다 필요한 일이니 있는 것이겠죠. 왕자님께서 최선을 다한다는 게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 말에 알버트는 오늘 두 번째로 나이대에 어울리는 얼굴이 되었다.
의무과 긴장, 두려움에 구속된 얼굴 근육이 자유를 얻어 자연스러운 표정을 이룬 것. 왕자는 감사를 표했다.
“말 고맙네······. 기분이 한결 좋구만.”
“다행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조언하나 하지.”
알버트가 대뜸 말했다.
“자네도 나와 같이 온 수행원들과 한번 만나야 할 걸세.”
“드루이드 분입니까?”
“역시, 알고 있었군. 맞아. 그들은 자연의 힘 사용하는 것에 관해 항의할 거야.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마찰을 피하고 가급적 맞춰주는 방향으로 가게. 그들은 현재 왕실을 보조하고 있고, 또, 호전적인 자들이니. 진심으로 조언하는 거야.”
알버트는 진심이었다. 올리버가 이에 화답했다.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
시간이 흐르고 며칠 후.
정장을 입은 녹색 머리 거구의 남성이 말했다.
“자연의 힘과 주술. 드루이드의 힘 사용을 그만두시오.”
이에 올리버가 화답했다.
“싫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