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2. 오염구역 (5)
투두둑. 투두둑.
오염구역 지하에 때아닌 비가 내렸다.
비는 물이 아닌 시체와 살점, 체액, 콘크리트 파편으로 이뤄졌는데, 다름 아닌 송장인형-듀란스가 단 몇 초 만에 만든 풍경이었다.
그리고 그 풍경 아래에서 살라스 리가스는 태연하게 말했다.
“그건 그렇고 생각 이상으로 젊구만.”
듀란스를 도우려다 아래로 추락한 올리버는 흑마법사의 눈으로 눈앞의 마법사를 살펴봤다.
흥미롭게도 살라스는 방금까지 방패 형제단을 도와 올리버를 죽이려 하였음에도 개인적으론 호의와 감탄을 빛냈다.
흥미로운 점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마법사님은 핑크맨 소속이군요.”
“호오? 어떻게 알았지?”
올리버는 마법사가 핑크맨 소속인 걸 꿰뚫어 봤다. 더 놀라운 것은 이를 부정하지 않고 인정하는 살라스의 태도.
나름 비밀임무임에도 그는 둘러대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허나, 이는 살라스의 불성실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성실했다. 출세에 목숨 거는 편이 아니기에 필요 이상의 일은 하지 않으나, 반대로 말하면 해야 하는 일은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그가 이런 태도를 보인 건 관심이 생기면 거기에 온 정신이 팔리는 마법사 특유의 기질 때문이었다.
즉, 올리버라는 존재가 이 늙은 마법사의 관심을 끌었다는 이야기였다.
올리버가 살라스의 질문에 대답했다.
“핑크맨을 몇 번 본 적 있습니다.”
“흐음?”
“그들이 입는 유니폼에는 특유의 미세한 추격마법이 걸려있었습니다. 마법사님이 입고 있으신 옷에도 그게 있고요.”
“그렇구만.”
살라스는 조용히 감탄했다.
핑크맨의 유니폼인 핑크빛 정장에 아주 미세한 추격마법이 걸려있는 건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여차할 경우 직원들의 위치를 파악해 바로 지원을 보낼 수 있게.
허나, 아는 것과 보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으며, 거기다 지금 살라스가 입은 핑크빛 정장은 마력을 꾹꾹 담은 토갑(土鉀)을 두른 상태였다.
그 토갑(土鉀) 너머에 있는 미세한 위치 추적 마법을 알아채는 건 어지간한 마법사나 흑마법사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역시 괜히 손가락이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그렇게 살라스가 감탄하는 와중 올리버는 더 감탄할 소리를 했다.
“허나 마법사님은 원래 핑크맨이 아니시군요.”
“······어찌 그리 생각하나?”
“마력을 보고요······. 제 식견이 좁아 잘은 모르나, 마법사님께서 쌓으신 마력은 핑크맨으로 일하면서 쌓을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거든요.”
흑마법사의 눈을 통해 마법사의 마력을 살펴본 올리버가 답했다.
해결사를 비하하는 건 아니었지만, 살라스가 쌓은 마력은 해결사 일을 병행하며 쌓을 수 있는 그런 게 아니었다.
살라스의 마력은 흡사 고대 왕의 무덤과 같았다.
반듯하게 깎은 거대한 벽돌을 긴 시간을 들여 차곡차곡 쌓은 듯, 살라스의 마력은 빈틈없고 반듯하며 거대했다.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도 그럴 게 마력이란 마법사 개인의 재능, 성향, 시간, 수련방식에 따라 쌓이는 형태도, 밀도도, 크기도 차이가 났으니까.
그리고 살라스의 마력은 교과서에 적힌 이상적인 형태를 띠고 있었다.
타고난 재능을 바탕으로, 확고한 목표를 잡아, 그 목표만을 바라본 채, 긴 시간을 수련해야 달성할 수 있는 전통적인 경지였다.
“전통 가이아 학파이십니까?”
척 보기에도 느껴지는 학식, 무엇보다 효율을 중시하는 마탑의 마법사라면 하지 않은 마력 수련방식을 토대로 올리버가 추측했다.
추측은 틀리지 않았다.
“맞네. 한물간 전통 학파에서 쫓겨나 핑크맨에 취직해 노후를 대비 중이지······. 라고 거짓말해도 안 믿을 테지?”
올리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뭘 하고 계셨는지 여쭤볼 수 있겠습니까?”
“비소속 갱단을 이용해 의뢰인의 임무를 수행 중이었네. 오염구역 아래에서 행해진 마탑의 비밀 연구를 캐는 것.”
오염구역 아래에서 행해진 비밀 연구.
그것은 다름 아닌 마법사들이 악마와 거래한 흔적과 악마에 관해 연구한 사실을 의미했다.
마법사와 악마. 얼핏 같이 떠올리기 어려운 조합 같았으나, 과거 퍼펫은 이를 정면으로 부정했다.
악마는 위험한 존재이지만, 그만큼 놀라운 지혜와 힘을 가진 존재라고 말이다.
퍼펫의 설명을 들었던 올리버 역시 별로 놀라지 않은 채 납득했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흑마법사가 악마와 거래할 수 있다면, 마법사 역시 불가능하지 않을 테니.
그러한 생각이 밖으로 드러난 건지 살라스는 눈치챘다.
“비밀 연구가 뭔지 아나 보구만.”
“어쩌다 보니까요.”
“허······. 더더욱 놀랍군. 좀 말라 늙어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십 대 중반밖에 안 돼 보이는데, 정말 놀라운 실력과 식견이야. 난 자네 나이 때 뭘 했더라? 창피하군.”
올리버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만졌다.
올리버가 쓴 흑마법 아이템 가짜 얼굴은 이십 대 초반이었던 것 같은데 중반이라니.
‘많이 말라서 늙어 보이는 건가? 아니면, 그냥 보는 눈에 따라 다른 건가?’
올리버가 추측했다. 미세한 나이 차는 사람에 따라 다른 법이었으니까.
잠시 잡념에 잠겼으나, 올리버는 곧바로 정신을 차려 눈앞의 상황에 집중했다. 일단, 일이 먼저였으니까.
“······의뢰인이 누구지요?”
“그건 말해줄 수 없다는 거 알잖나?”
“지금까지 잘 대답해주셔서 대답해주실 줄 알았습니다.”
“자네가 내 질문에 잘 대답해줘서 나 역시 가능한 범위 내에서 호의를 보인 것뿐이라네. 또, 난 높은 성취를 이룬 사람에겐 호감과 존경을 가지거든.”
진심이었다. 살라스의 감정 상태와 대화를 볼 때, 대충 그의 성향이 뭔지 알 것 같았다.
타고난 재능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를 갈고닦으며 그 행위 자체에서 만족과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노력을, 성취를 선(善)으로 삼으며, 그 기준을 남에게도 똑같이 적용하는. 나쁘지 않은 태도였다. 아니, 권장해야 할 태도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의문이었다.
“혹시, 그 숨기고 계신 의뢰인께서 정령을 구속하는 법을 알려주신 건가요?”
살라스가 멈칫하며 자기 뒤에 있는 정령을 봤다. 정령은 여전히 마력으로 이뤄진 사슬에 구속 중이었다.
그리고는 자기 손을 봤다. 원래 자기 나이대에 비해 탱탱해진 손을.
잠시 침묵이 찾아왔고, 살라스는 아쉬움과 부러움이 뒤섞인 목소리로 읊조렸다.
“멀린이 부럽군. 마법사로서의 재능뿐 아니라, 제자 복까지 있으니. 진심으로 부러워.”
“어르신을 아십니까?”
“자넨 스승을 어르신이라 부르나?”
“······어쩌다 보니 호칭이 그리 잡혀서요.”
“흐음, 그렇다고 멀린이 그런 걸 정정 안 할 인간은 아닌데?”
“어르신을 잘 아시는 듯하시군요.”
“젊은 시절 잠깐 교류해봤지. 주로 얻어맞는 형태였지만.”
“얻어맞았다고요?”
“낭만의 시대였거든. 또, 싸우는 것만큼 사람의 본질을 파악하기 좋은 방법도 없고. 믿기 어려운가?”
“저로서는 다소 이해하기 어렵긴 하군요.”
“젊은 친구에게는 그리 보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믿어. 진심으로 하는 조언이니까.”
진심.
“싸움은 그 사람의 기질과 성품이 드러나는 가장 좋은 수단이야. 싸우게 된 배경과 싸우는 방식 등······. 그래서 난 멀린이 평생 제자를 안 만들 줄 알았지.”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가 뭐죠?”
“그는 오직 자신의 성취에만 관심 있는 사람이니까. 나처럼.”
올리버는 잠시 멀린에 관해 생각해봤다. 자신의 성취에만 관심 있다니.
어째 그거는 좀 아닌 거 같았다. 타인에게 무관심하고 자신의 성취에만 관심 있는 사람이 어찌 신분을 감춘 채 헌책방에서 책을 팔겠는가?
“무슨 생각하는지 아는데, 거짓말 아니야. 아마 아카이브가 된 영향 탓이 크겠지. 아카이브가 된 마법사는 성격이 확 변하니까. 때때로 미치기도 하고.”
올리버는 침묵했다.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아카이브란 천 년이란 긴 시간 동안 선대 아카이브의 지식을 이어받은 존재였으니까.
천년이 넘는 지식을 전수받는다면 성격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가만 생각해보니 멀린의 제자는 올리버와 케빈 단둘뿐이었다. 올리버를 제외하면 사실상 케빈 혼자였고.
마법사가 직계 제자를 많이 만들지 않는다 해도 멀린의 지위와 위치, 제자들의 출신 성분(홍인, 흑마법사)을 생각해보면 꽤 이상한 일이긴 했다.
“어르신과 같은 성향이신 분이 어찌해 학파를 뛰쳐나와 핑크맨이 되셨지요?”
올리버가 앞에 했던 질문을 뒤틀어 다시 물어보았다. 허나, 늙은 마법사는 넘어가지 않고 오히려 역공을 가했다.
“글쎄, 앞서 말했다시피 쉬이 말할 수 없는 거라. 다만, 정령이 자넬 보고 덜덜 떠는 이유를 알려주면 알려주겠네.”
살라스가 마력 사슬에 메인 대지의 정령을 보며 물었다.
사슬에 묶인 덕분에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거였지, 사슬만 없었다면 바로 도망쳤을 정도로 공포에 질린 상태였다.
이는 한평생 마법을 수련한 살라스가 그냥 넘길 수 없는 광경이었다.
정령의 태생적인 성향 탓에 나설 일이 없다 뿐, 그 존재는 인간보다 훨씬 월등한 존재였다.
드루이드와 마법사가 정령의 힘을 빌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구애하는 것이 그 대표적 일례.
그런데 그런 정령이 사람을 두려워한다? 이는 아주아주 기이한 현상이었다.
비가 특정한 사람만 피해 내리는 것처럼. 과연, 비마저 피하는 존재가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
살라스는 그 답을 알고 싶었고, 그러한 욕구는 원래 계획에서 벗어나게 했다.
파앙-!
살라스는 몸 안에 내재한 방대하고도 밀도 높은 마력을 끌어 대지에 투여했다.
그러자 사방을 에워싼 지하 전체에 울리며 거대한 흙기둥이 열 개 돋아나 올리버를 향해 돌진해왔다.
흡사, 기둥과 뱀을 합친 듯한 공격.
갑작스러운 공격이었지만, 올리버는 예상이라도 한 듯 능숙하게 공격 궤도를 예측 대량의 감정을 추출해 검은 장막을 쳤다.
거대한 지하 공동에서 열 개의 검은 장막과 흙기둥이 부딪히며 허공에 열 개의 충격파가 생성돼 공명했다.
벽이 울리고 피부가 진동하는 충격. 얼핏 공격이 막힌 듯했으나, 올리버는 느낄 수 있었다.
기둥을 이루는 압축된 흙의 질량과 그 흙을 잡은 마력량이 올리버가 추출한 감정량을 압도했음을.
올리버는 실드를 회전시키거나, 각도를 변경해 충격량을 줄여 보려 해도 힘 자체가 상당해 쉽지 않았다.
단순히 강하고 무거운 걸 넘어 안정감이 있었다. 어지간한 외부 힘으로는 꿈쩍도 하지 않을 안전감이.
그렇게 그 압도적인 힘에 올리버가 눌린 형세가 되자 마법사가 말했다.
“원소계열 마법은 주변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지. 그래서 싸우는 장소를 선택하는 것도 방법 중 하나야. 물론-”
쩌저저적······!
살라스가 말하는 도중 실드가 붕괴하며 열 개의 흙기둥이 올리버를 덮쳐왔다.
하나만 스쳐도 어지간한 초인도 다진 고기가 될 위력.
그러나 올리버는 당황하지 않고, 충격에 깨진 잔여 감정을 재료로 새로운 흑마법을 사용했다.
[타겟팅(Targeting)]
허공에 흩어져 사라지던 감정이 올리버의 통제 아래에서 다시 재구축돼 흙기둥과 올리버의 손에 다트판을 형성했다.
그 상태로 올리버는 다시 한번 흑마법을 발동했다.
[트러스트(Thrust)]
기본 흑마법인 트러스트(Thrust). 올리버는 자신의 몸을 기준 삼아 사방에서 덮쳐오는 흙기둥을 밀어내려 했다.
상대의 질량이 압도적으로 높다면 술사가 피해를 입는 자칫 위험한 흑마법이었으나, 인육 요리사의 살점을 먹어 초인적인 신체를 얻은 올리버는 상식을 비웃기라도 하듯 자신의 수십, 수백 배 될법한 흙기둥들을 억지로 밀어내 붕괴시켜버렸다.
굉음과 함께 허공이 흙먼지에 물들었고, 올리버는 그 상태에서 나무막대기를 살라스에게 던졌다.
탁!
올리버가 던진 나무막대기는 살라스가 만든 흙벽에 가로막혔으나 상관없었다.
올리버는 그 상태로 나무막대기에 새긴 공간 마법 술식을 발동시켜, 올리버와 나무막대기 사이의 물리적 거리가 좁혀졌으니까.
멀린이 보여준 공간 조작 마법과 잠자는 숲에서 익힌 공간 술식을 참고한 것으로, 올리버와 나무막대기 사이 십몇 미터 거리를 좁혀졌다.
얼핏 눈으로는 구분되지 않았으나, 올리버가 한걸음 발을 내딛자.
탁!
바로 앞인 것처럼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단 한 번의 발걸음으로 십몇 미터의 거리를 단숨에 좁힌 올리버는 그 가속도를 이용해 블랙 슈트를 두른 쿼터스태프를 내질러 돌벽을 박살 냈고, 그 너머에 있는 살라스의 몸통까지 꿰뚫으려 했다.
비록, 살라스에게 공격이 닿으려는 찰나 마력 사슬에 붙잡힌 정령에게 공격이 붙잡히고 말았지만 말이다.
거대한 태산을 찌르는 느낌. 참으로 놀라웠다. 정령의 힘도 힘이었지만, 그런 정령을 이 정도의 마력으로 구속해 조종까지 하다니.
태연하게 그 자리에 서 있는 살라스가 말했다.
“······물론, 압도적인 실력이 있다면 크게 상관없는 이야기겠지만. 영생의 퍼펫과 대등하게 싸웠다고 하더니 진짜였나 보군.”
“퍼펫 님을 아시나요?”
“어느 정도는. 젊은 시절 우리 학파 본산 근처에 출몰해 상대해 본 적 있으니까. 솔직히 흑마법사라고 정의하기 어려운 존재지.”
“그래서 퍼펫 님에게 협조하시는 겁니까?”
갑작스러운 올리버의 질문에 살라스가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하하, 어떻게 알았나?”
살라스는 대답과 함께 자신의 마력과 정령의 힘을 공명시켜 다시 한번 지하 전체를 뒤틀어버렸다.
바닥과 천장이 역전되고 벽이 무너지고 다시 생성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