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1. 오염구역 (4)
드드드드드드.
오염구역 지하. 바닥이 진동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느낄 수도 없을 정도로 아주 미세한 진동이었으나, 전통 가이아 학파 출신인 살라스 리가스는 땅이 진동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당연한 거였다. 살라스는 한평생 어머니 대지를 연구하고, 그 위에 성취를 쌓아왔으니까.
검었던 머리가 새하얗게 새고, 탱탱했던 구릿빛 피부가 축 처질 정도로 아주 긴 시간을. 그러니 보통 사람이 못 느끼는 걸 당연히 느낄 수 있어야 했다.
산업의 시대가 시작해 현재 절정에 이를 정도로 긴 시간을 고단하게 보냈으니, 그게 옳았다.
마법사로서의 힘을 성취하겠다는 단순한 욕구를 넘어, 세상의 진리를 보고, 어머니 대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는 숭고한 목적을 위해 그 길고, 지루하며, 차가운 시간을 담담히 견뎌냈으니까.
전통 학파가 쇠퇴했다는 주변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긍지를 가지며 말이다.
‘그리고 그 긍지가 깨졌을 때. 그 얼마나 어찌나 허무하던지.’
살라스는 전보다 조금 탱탱해진 자기 손을 보며 기쁨과 공허함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부장님!”
몇 초의 시간이 흘렀을까. 핑크빛 정장을 입은 마법사가 이쪽으로 다가와 보고했다.
“침입자입니다! 나무꾼 데이브입니다.”
나무꾼 데이브. 란다로 오기 전 들은 별명과 이름이었다.
핑크맨 정보부에서 말하길 란다의 해결사 데이브가 엔조이먼트 드루이드 82명을 살해하고 얻은 별명이라고 했다.
실로 경이로웠다.
드루이드. 강력한 육체와 술식을 동시에 다루는 존재로서, 특유의 폐쇄성 탓에 그 수가 적을 뿐 마법사에 결코 뒤지지 않는 초인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드루이드를 82명이나 살해했다고 하였다. 나이와 배경, 직책 탓에 살라스는 겉으로 내색하지 못했지만 감탄했다.
데이브 라이트. 분명 이십 대 중반이라 하였는데, 어떻게 그 젊은 나이에 그런 성취를 쌓은 건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아카이브의 실험체 혹은 제자란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음, 아무래도 실험체는 아닌 듯했다.
그 멀린이라고 하니 한순간 가능할 것도 같았지만, 생각해보니 아니었다.
개차반이던 멀린은 아카이브가 된 이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했으니까.
그러자 다시 궁금해졌다. 아카이브가 되는 건 도대체 어떤 거길래 한 사람이 그 정도로 변하는 건지.
뭐, 이제는 알 길이 없겠지만.
“부장님! 계속 아래로 내려오고 있답니다. 지시를······.”
“채굴 진행 상황은?”
“현재 40퍼센트 채굴하였습니다.”
“40퍼센트라······. 나무꾼은 혼자 쳐들어온 건가?”
“예, 데리고 온 부하들은 난민촌 하나에 두고 왔다고 합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거기 난민들을 보호해 주고 있다 합니다.”
“음, 흑마법사치고는 이상하군. 아니면, 근래 떠도는 소문 탓인가? 파테르교의 후원을 받는다는? 막고는 있나?”
“예, 필사적으로 막으려 하고 있긴 하답니다. 다만, 모두 무시하고 이곳 지하로 빠르게 내려오고 있습니다.”
살라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 지하의 특성을 고려하면 이상한 건 아니었다.
오염구역 지하는 비밀 통로 술식이 거미줄처럼 엉켜있어 실력 있는 마법사가 작정하면 마음대로 헤집고 다닐 수 있었다.
“자네는 동료들을 데리고 일단 물러나게.”
“예?”
“일단, 우리 신분은 들키면 안 되니까. 이 병신 같은 핑크빛 정장을 입은 모습을 보이면 안 되지. 뭐, 핑크맨 흉내 내는 거라 우길 수도 있지만, 여하튼.”
살라스는 바닥의 흙과 먼지를 끌어올려 몸 전체에 두른 뒤 압축시켰다. 그러자 회색빛의 돌 정장이 만들어졌다.
흡사, 성벽을 몸에 두른 듯한 위압감.
마력으로 원소 단위까지 통제해야 가능한 경지였다. 직책만 원마스터지 한때 전통 학파의 그랜드마스터 후보로 거론된 실력자라 할만한 솜씨였다.
핑크빛 정장을 입은 마법사가 물었다.
“부장님께서는?”
“누군가는 일하는 티를 내야지 않겠나. 또, 나 개인적으로는 데이브라는 젊은 친구를 만나보고 싶기도 하고. 서로 안 마주치면 가장 좋았겠지만, 이왕 이리된 거면 기회를 활용해야지.”
그 말을 마치자마자 살라스는 몸 안에서 마력을 분출해 미세한 먼지와 흙으로 이뤄진 바닥에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얼핏 보면 별거 아닌 광경.
그러나 핑크빛 정장을 입은 마법사는 곧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고, 착각이 아니라는 듯 살라스 앞쪽 바닥 위에 또 다른 파문이 일며 무엇인가 솟아올랐다.
그것은 머리가 녹색으로 빛나며, 몸체는 회색, 팔다리는 갈색으로 빛났다.
또 반투명했는데, 그렇다고 존재감마저 흐릿하진 않았다. 오히려 존재감만큼은 어지간한 마법사보다 선명했다.
그제야 핑크빛 정장을 입은 마법사는 그게 뭔지 깨달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정령이었다. 마력으로 구성된 사슬에 목과 팔다리가 묶인 정령.
소문대로 마법으로 정령을 구속한 것이었다.
살라스는 마력에 구속된 정령에게 명령했고, 곧이어 정령은 비명에 가까운 괴성을 지르며 대지를 뒤흔들었다.
숭배하는 마음으로 마법을 연구한 전통 가이아 학파 출신의 살라스가 어머니 대지를 지배하였다.
***
“여, 여긴 E-14! 이곳에 나무꾼이-”
오염구역 지하 아래층을 내려오자마자 방패 형제단의 일원 중 하나가 통신장치에 대고 보고했다.
아무래도 오염구역 아래에 임의로 좌표까지 설정한 듯했다.
아무리 군벌화가 됐다 해도, 그 근본은 갱인데, 그런 것치고 너무나도 치밀한 움직임이었다. 전문가의 솜씨가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즉, 대부분의 병력은 비소속 갱단 출신이던 방패 형제단이 맞아도, 지휘하는 건 다른 이들이라는 이야기인가?’
란다의 해결사로 몇 년 동안 살아온 올리버가 예리하게 추측했다.
탁.
“쏴라!”
방패 형제단을 무시하며 아래로 계속해 내려가자마자 고함이 들렸다.
이 밑에서 대기하고 있던 갱들이 올리버를 향해 일제히 총구를 겨눈 채 기다리고 있었던 것.
저 위에 있던 갱들이 올리버를 계속해 놓침에도 불구하고 위치를 보고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인 듯했다.
밑으로 이동하는 올리버의 위치를 종합해 다음 층 어디 내려올 건지 예상하기 위해.
이를 통해 올리버는 또 두 가지 사실을 추측할 수 있었다.
하나는 저쪽에 상당한 수준의 마법사가 있다는 거였다. 오염 구역 지하에 설치된 비밀 통로 술식을 전부 파악하고 정리할 정도로 이론, 실기 모두 수준 높은 마법사가.
또 다른 하나는 그의 지휘권이 아주 공고하다는 거였다. 힘으로 찍어 누른 건지, 아니면, 그만한 대가를 지급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어느 쪽일지 고민하진 않았다. 왜냐면 그보다 더 급한 게 있었으니까.
가령, 지금 올리버를 겨누는 수십 구의 총구라든가.
호령에 맞춰 갱들이 올리버를 향해 총구를 당겼다.
올리버를 포위한 총구에서는 불과 함께 요란한 총성을 내뿜었다.
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
푸른 마력으로 강화한 납탄이 올리버에게 날아들어 왔고, 올리버는 몸 안에 저장한 마력을 끌어올려 바닥을 주물(鑄物)해 사방을 에워싸는 돌벽을 만들었다.
납탄이 돌벽에 부딪히자 꿰뚫다 못해 박살 나는 소리가 울렸고, 곧이어-
퍼엉━!!
-벽이 폭발하며 주먹만 한 돌파편이 사방으로 퍼져나가 올리버 주변을 에워싼 갱들을 타격했다.
갱 대부분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응하지 못해 머리가 깨지고, 복부와 가슴이 터지는 등 심각한 피해를 보았다.
이는 올리버가 돌벽을 만들 때 한 겹으로 만들지 않고, 가운데가 빈 두 겹으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튼튼한 내벽(內壁)과 상대적으로 덜 튼튼한 외벽(外壁). 그리고 그사이를 가득 채운 예민해진 마력.
뭐라고 할까? 기름을 가득 채운 통이라 할 수 있었고, 방패 형제단은 그 기름통에 총을 갈긴 거나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그 피해는 기름을 가득 채운 통을 갈겼을 때랑 같았다.
폭발, 충격, 파편, 화염.
튼튼한 내벽(內壁) 안에 있던 올리버만이 그 폭발에서 멀쩡할 수 있었는데, 올리버는 주변에 널브러진 방패 형제단을 무시한 채 아래로 내려가고자 했다.
이미 전투 불능이었고, 뭣보다 이들보다는 핵심 인원을 제압하는 게 더 중요했으니까.
그렇게 올리버가 마력을 바닥에 대량으로 부여해 술식을 발동. 아래에 겹겹이 있는 바닥을 동시에 열어버렸다.
바로 아래로 내려가기 위해.
촤르르륵. 촤르르륵.
오염구역 지하를 구성하는 벽돌 바닥이 차례차례 열렸고, 이를 확인한 올리버는 바로 아래로 뛰어내렸다.
옆구리의 통증과 허기, 오른팔의 작열통 등 격한 움직임은 자제해야 했으나 그래도 일이 먼저였으니까.
개인적으로 오염구역 지하에 있는 악마의 연구자료와 거래 흔적 등을 누가 캐는 건지 궁금하기도 했고.
‘방해 안 받고 내려가려면 이게 최선이야. 도망치기라도 하면······응?’
차례대로 열리는 바닥 아래로 떨어지던 중 올리버가 뭔가를 발견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정령이었다. 그것도 마력에 묶인 정령.
잘못 본 건가 싶어 흑마법사의 눈에 신경을 집중했으나 역시나 정령이었다.
정령을 다루는 마법사가 있는가 싶었다.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드루이드에 비해 적다 뿐 일부 마법사 역시 정령과 교감할 수 있었으니. 그 대표적 예시가 멀린의 제자인 케빈 던바였고.
그러나 저건 좀 달랐다. 정령이 있긴 했지만, 감정 상태가 불만과 분노에 가득 찼고, 뭣보다 강력한 마력에 구속된 상태였다.
과거 셰이머스에게 붙잡힌 이브(Eve)를 연상케 하는 광경.
바로 그 순간 땅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올리버가 통제를 발휘하던 오염구역 지하 비밀 통로의 술식이 뒤틀리는 대지와 함께 파괴되더니, 뒤이어 거대한 굉음과 함께 지하 지형이 변하기 시작했다.
아래를 향해 내려가던 올리버를 향해 거대한 돌기둥이 솟구쳐 올라 주먹으로 올려치듯 올리버를 강타했고, 덕분에 아래로 내려가던 올리버는 다시 위로 올라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촤르르르륵!! 촤르르르륵!!
새로운 통로가 열리는 수준의 지하가 지각 변동이라도 겪듯 거대한 굉음을 내며 재구축 돼 전혀 다른 지형으로 변해버렸다.
지진이라도 난 듯 벽과 바닥이 갈라져 거리를 벌렸고, 미로처럼 복잡하던 벽이 사라지며, 바닥 전체가 움직여 여기저기 퍼져있던 방패 형제단을 한자리에 모아줬다.
덕분에 올리버는 통 속의 개미와 같은 형세가 되어버렸다.
그것도 허공에 홀로 떠 있는 개미가.
정령이 등장해 대지 그 자체를 조종하였기에 발생한 상황.
올리버를 포위한 갱들이 일제히 총구를 겨누며 방아쇠를 당기려 하였고, 바로 그 찰나 올리버는 대량의 마력을 쿼터스태프에 모아 지면을 내리쳤다.
탁!
맑고 고운 소리가 지하에 은은히 울려 퍼지며, 쿼터스태프에 응축된 대량의 마력덩어리가 올리버를 받친 돌기둥 아래로 쭈욱 내려갔다.
구구구구구구······!
불길한 소리와 함께 지하 전체가 흔들리며, 바닥에 금이 가고, 천장에서 흙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그 이유는 올리버가 땅에 대량의 마력을 억지로 주입해 정령에게 부담을 줘서였다.
자연의 일부인 정령과 통제권 싸움은 힘들다고 판단해 내린 결정으로, 옳은 결정이었는지 정령은 음식이 목에 걸릴 듯한 약간의 호흡 곤란 상태에 빠졌다.
허나, 그 약간의 곤란으로 인해 정령의 통제 아래 있던 지하는 그 형제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고, 그 안에 있던 방패 형제단은 큰 혼란에 빠졌다.
모든 화력을 올리버에게 집중할 천재일우의 타이밍마저 놓칠 정도로. 그러나 이해 못 할 것은 아니었다.
자칫 잘못하면 산 채로 지하에 묻힐 수 있었으니까. 그렇다 해도 기회를 놓친 것은 놓친 거였고, 올리버는 상대의 실수를 놓치지 않고 품 안에 축소화 마법으로 숨겨둔 송장인형-듀란스를 하늘 높이 튕겨내 축소화 마법을 풀었다.
허공에서 원래 크기로 돌아가는 듀란스. 올리버의 품 안에서 차일드-세컨드가 튀어나와 듀란스의 안으로 들어갔다.
새 생명을 얻은 듀란스는 그대로 양쪽 팔과 한쪽 다리, 옆구리 어깨 등 여덟 개의 총구를 사방으로 만들어 탄환을 난사했다.
마력으로 이뤄진 일반 마력탄에, 살점으로 이뤄진 특제 살점 탄환까지.
순식간에 포위된 형세가 됐던 올리버는, 또 순식간에 전황을 뒤집어 무방비한 상대측 가운데서 포격을 가하는 형세를 만들었다.
이것이 마법사, 흑마법사들의 숨은 힘이었다.
한 번의 수로 전황을 뒤집는.
허나, 그 말은 상대도 여차하면 전황을 다시 한번 뒤집을 수 있다는 뜻이었고, 놀랍게도 뒤집었다.
허공에 높이 뛰어올라 공중에서 폭격에 가까운 화력을 퍼붓던 송장인형-듀란스 바로 아래에 거대한 바닥이, 올리버 기준으로는 천장이 생성됐다.
마력을 과도하게 넣어 호흡 곤란에 빠졌던 정령이 회복한 것으로, 듀란스는 탄환을 쏴 올리버와 자신을 막는 벽을 없애려 했지만. 정령이 직접 다루는 대지는 이를 견뎌냈다.
실로 놀라운 통제력.
그렇게 올리버와 듀란스는 순식간에 생긴 천장 덕분에 분리됐고, 뒤이어 저 위에서 쥐 울음소리가 들렸다.
오염생물체인 벌거숭이쥐인 듯했다.
오염생물체인 벌거숭이쥐와 송장인형.
쥐와 시체.
서로 상극이었는데, 올리버가 직접 천장을 부숴 원군이 되려는 그 찰나, 올리버를 받치고 있던 돌기둥이 먼지처럼 바스러지며 올리버를 지하로 잡아당겼다.
쾅!!
다리에 블랙 슈트를 두른 올리버는 안정적으로 착지했으나, 그래도 옆구리와 오른팔에 미세한 충격이 전해져 약간 인상을 쓰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본 한 노인이 말했다.
“몸이 불편한가 보군.”
바위를 깎아 만든 정장과 가면을 쓴 마법사로 그는 감탄하듯 말했다.
“그건 그렇고 생각 이상으로 젊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