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6. 빨간 책 (2)
마탑 행정부.
이름 그대로 마탑이란 거대한 조직의 행정을 책임지는 곳이었다.
어느 학파에도 소속되지 않는 마탑 최초의 자체 부서로, 그 역할은 각 학파가 자기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보조해주는 것이었다.
영역의 모호하고 자질구레한 행정을 전담하며, 평시(平時) 마탑의 입장을 대변하고, 폐쇄적인 학파가 서로 고립, 적대하지 않게 연결해 주는 등. 행정부는 수많은 일을 도맡았다.
허나, 자질구레한 설명을 제하고 핵심만 콕 짚어 말하자면 행정부란 마탑의 집사(執事), 좀 더 속되게 표현하자면 하수인(下手人)이라 할 수 있었다.
행정부도 이를 부정하지 못했다. 그게 사실이었으니까. 그래서 행정부에 배속되는 마법사들은 여러모로 애매한 자들이었다.
실력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행정부의 역할을 생각한다면 결코 무능한 자를 배치할 수 없었다.
그저 실력은 우수하나, 독보적이지 않고, 그렇다고 배경이 특출하지도 않은 자들을 뜻했다.
10점 만점 중 7~8점. 대체재가 있는 자들.
그래서 마탑 행정부는 처음에 비해 그 권한이 확대했음에도 뭔가를 주도하긴 애매한 위치에 있었다.
그 일례로, 긴급상황 시 각 학파의 지도부를 호출할 권리가 있음에도, 막상 사용한 건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허나, 이를 반대로 말하면 행정부가 권한을 행사할 시 각 학파도 일단 따른다는 걸 의미했다. 그만큼 보통 상황이 아니라는 거였으니까.
오후 4시라는 애매한 시간에 마탑에서 영향력이 있는 학파의 간부들이 이곳 행정타워를 방문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처음 온 이들은 원소학파의 원마스터들이었다. 아그니, 스카디, 가이아, 엔릴, 묠니르 소학파의 원마스터.
비록 원소학파의 위상은 과거만 못해도, 규모가 가장 크고, 역사 역시 가장 깊은 학파라 마탑 내에서 영향력을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두 번째 방문한 이들은 순수마력 학파였다.
원소학파에 비할 바는 아니나 순수마력 학파 역시 오랜 역사를 지닌 학파로, 위세가 상당한 편이었다. 무엇보다 왕국군의 중추를 담당하는 로어 가문이 지배하고 있어, 마탑의 중요한 일을 논할 때 빠질 수 없었다.
세 번째로 도착한 것은 모이라이 학파.
세계수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이들은, 규모가 작고, 역사도 짧았으나 시대가 가장 요구하는 학문을 다룬다는 점에서 무시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근래 확보한 이브(Eve)의 존재를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마지막으로 공간학파가 참석했다.
공간학파 역시 모이라이 학파처럼 급부상한 학파로, 그 잠재력 하나만으로 마탑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자랑했다.
원래라면 생명학파도 이 자리에 있어야 마땅했으나, 그들은 아직 레이크 빌리지의 업보에서 벗어나지 못해 여기 참석할 수 없었다.
‘그래서 주요 마법사들이 떠난 거겠지.’
마탑의 행정타워 회의실. 행정부장인 버크 포스트가 생각했다.
불혹(不惑)을 넘어 지천명(知天命)을 바라보는 나이가 된 그는 지금 인생이란 참으로 어찌 될지 모른다는 당연한 진리를 새삼 실감했다.
좀 시간이 지나긴 했으나 또 그렇게 오래되지 않은 과거 이 자리에서 데이브 라이트, 아니, 제논 브라이트의 처우를 논했던 것 같았는데, 지금은 전혀 다른 주제로 논해야 했다.
“······큼. 더 올 사람도 없는 거 같은데, 이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게 어떻습니까?”
한 원마스터가 침묵을 깼다. 뒤이어 다른 원마스터가 맞장구쳤다.
“예, 데이브······. 제논에 관해 논의하고 싶은 게 무엇입니까?”
버크의 호출에 온 이들은 하나둘 호기심을 빛냈다. 호출한 주제(제논 브라이트)에 관해 언질은 줬으나, 정작 자세한 내용은 말하지 않은 탓이었다.
허나, 이는 호기심으로 괴롭히기 위한 게 아니었다. 혼란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가 흑마법 학파를 세우고 싶다 합니다.”
“뭐라고요?!”
바로, 이렇게.
“지금 진심으로 말씀하시는 겁니까?”
“학파를 세우겠다니?”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는 겁니까?”
“정말 그거 때문에 저희를 부른 겁니까?”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다들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불가능하고, 불가능해야 한다는 반응.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었다. 길거리에 있는 사이비 학파가 아닌 진짜 제대로 된 학파를 세운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으니까.
초인이 용병단을 차리거나, 사업가가 공장을 세우는 것과 전혀 달랐다. 그보다는 국가를 세우는 것에 더 가까웠다.
단순히 돈과 힘이 있다고 되는 게 아닌, 정통성을 가진 주변 기존 세력의 인정이 필요한, 좀 더 섬세하고 고차원적인 일이었다.
그래서 긴 마법 사회 역사를 통틀어도 새로운 학파가 나타나는 건 드문 일이었다.
이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었다. 시대의 문제였다.
마법이 명확히 정립되지 않은 고대나, 시대가 급격히 발전한 현재가 아니면 새로운 학파가 등장하긴 아주 힘들었다. 그래서 몇 세기가 지나도 새로운 학파가 나타나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문제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한 개인이 학파를 세우는 건 처음 듣는 경우입니다.”
시대의 흐름을 탔다 해도 한 개인의 의지에 따라 학파가 뿅 하고 나타나는 경우는 없었다.
대부분 학파는 새로운 학문을 발견한 마법사들이 모여 세를 구축한 후 학문의 방향성을 구체적으로 잡아, 지도자를 선발하는 등. 차근차근 점진적으로 이뤄졌다.
건물을 세우기 위해 지반을 다지고, 주춧돌을 놓으며, 그 위에 기둥을 세우는 것과 같은 이치.
아무리 힘이 강하고 명성이 드높다 해도 한 개인의 의지로 학파를 세우는 건 전설 속의 극히 일부를 제외하곤 유례가 없었다.
대마법사인 아카이브조차 학파를 세운 경우가 없는 게 대표적인 예시. 기껏해야 멀린처럼 여러 개의 학파를 합치거나 나눌 뿐이었다.
한데 웬 흑마법사가 학파를 세운다고 했고, 그걸 행정부장이란 자가 말하고 있었다.
당연히 소집에 응한 각 학파 간부의 반응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고루할 수밖에 없었다.
“말도 안 되는군요.”
“논할 가치도 없습니다.”
“진심으로 이거 때문에 부른 건 아니겠지요?”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원소학파에서는 말도 안 된다고 딱 선을 그었으며, 현재 가장 각광 받는 학파 중 하나인 공간학파에서는 불쾌함을 드러냈다. 다른 학파라고 다르지 않았다.
그나마 조용한 건 순수마력학파의 로어 가문 원마스터와 모이라이 학파의 원마스터 알버트 헌트였다.
‘로어 가문의 수장은 제논과 친분이 있고, 모이라이 학파 역시 제논과 인연이 있지.’
버크는 행정부의 정보력을 통해 얻은 정보를 속으로 되뇌었다. 제논은 이미 혼자서 마탑 내에 영향력을 심었다.
“설마 행정부장님께선 이를 진지하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한참 동안 불만을 토로하던 마법사 중 하나가 조용히 침묵하던 버크에게 말을 걸었다. 어째 질문보단 추궁에 가까운 태도였는데 그래서 마음에 안 들었다.
“나도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상식적으로 논의할 수 없는 이야기지요.”
하아······. 안도의 한숨.
“하지만 이미 일어났다면 논하지 못할 이유도 없겠지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한 마법사가 눈을 부릅떴다.
“말 그대로.”
시건방진 눈깔에 버크가 존대(尊待)를 버리며 화답했다.
“다들 소집에 응한 이유가 제논 때문이지 않나?”
“저희가 소집에 응한 이유는 행정부의 권한을 따른 것일 뿐입니다.”
“늦지 않게 참석한 이유는 제논 때문이겠지.”
버크가 시계를 보며 말했고, 마법사들은 부정하지 못했다.
아닌 척했으나, 자신들보다 한 끗발 떨어지는 행정부의 소집에 성실히 응한 이유는 제논 때문이었다.
마탑 바깥에서는 데이브라는 해결사로 활약하고, 마탑 안에서는 제논이라는 이름으로 굵직한 사건에서 크고 작은 활약을 한 정체불명의 사내. 허나, 그중 가장 큰 이유는-
“-그는 아카이브 멀린의 제자일세.”
누군가 반박했다.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케빈처럼 실험체이기도 한데. 뭣보다 아카이브께서는 마탑, 아니, 속세 일에 관심 없지 않습니까? 또 다른 제자인 케빈만 해도 마탑에서 불합리한 대우를 받음에도 말 한마디 없고요.”
“그 케빈은 최근 모든 속성의 정령을 다룰 수 있다 하더군.”
움찔.
“홍인(紅人) 특성을 본 덕분도 있겠지만, 아마, 아카이브께서 봐주신 것도 있겠지. 그리고 정말 아카이브가 케빈의 뒤를 안 봐줬다고 생각하나? 아예 안 봐줬으면 케빈은 마탑에 들어오지도, 버티지도 못했을 거야.”
“······그거랑 학파를 세우는 거랑 천지 차이지 않습니까?”
“나도 동의해. 한 학파를 세우는 건 아카이브조차 쉬운 일이 아니지. 솔직히 안 쉽다기보다는 안 하는 것에 가깝지만.”
“예, 그게 무슨······?”
“내 말의 요점은 환경만 조성되면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야.”
“그게 무슨 말입니까?”
“다들 소식이 어둡군. 갈로스 소문 못 들었나?”
“제논이 갈로스의 골칫거리인 흑마법사를 소탕하는 것 말입니까?”
“정확히는 성기사를 도와서 흑마법사를 소탕하고 있지. 여기서 중요한 키워드는 흑마법사 소탕이 아니라, 성기사야.”
“그게 왜?”
“그 성기사를 지휘하는 추기사제가 교단에서 한 가지 건의를 했다 하네. 일부 믿을 수 있는 흑마법사들을 교단의 이름 아래 인정해주고 흑마법사에 대한 통제를 맡기자는. 쥐로 쥐를 잡는 거지.”
“그게 사실입니까?”
“설마 여기서 흰소리하겠나? 참고로 추기사제의 건의는 일단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게 관례지. 그만큼 높은 자리니까. 그 말은 즉, 제논이 파테르교의 인정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는 거네. 이유는 설명 안 해도 되겠지?”
침묵이란 긍정의 대답이 돌아왔다. 마탑의 마법사는 특유의 자부심 때문에 때때로 머리가 딱딱하게 보일 수 있으나, 그렇다고 정말 바보는 아니었다.
마법사들도 시류(時流)를 읽을 줄 알고, 세상의 소식에 귀를 열어두었다.
그래서 제논이 X구역을 재개발하며, 신대륙에서 성기사들과 함께 일하고, 얼마 전에는 인육 요리사의 유산을 찾았으며, 망각의 해에서 아카이브를 도와 바다 괴물을 소탕한 것도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 때문에 더더욱 제논을 견제하려는 건지도 몰랐다. 실력과 재능이 넘치는 놈에게 차별이라는 족쇄마저 풀어준다면 마탑에서 어찌 날뛸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으니까.
“그가 파테르교의 인정을 받아 학파를 다시 만들겠다고 의견을 내면 우리가 무시할 수 있겠나?”
“당연히 무시할 수 있죠, 흑마법사이지 않습니까? 흑마법도 마법이라 주장할 셈이랍니까?”
“그것도 충분히 가능하지. 물론, 우리도 무시할 수는 있겠지만, 멀린이 개입하면 어떻겠나? 멀린이 개입하고도 우리가 그냥 무시할 수 있을 거 같나? 다들 멀린이 어떤 사람인지 들었을 거 아닌가?”
또 침묵이 되돌아왔다. 지금의 멀린이야, 어디 동네에서 볼법한 할아버지였지만, 조금만 연배가 있는 마법사는 그게 본 모습이 아니란 걸 알았다.
젊은 시절 멀린은 테어도어보다 더한 우생학 신봉주의자에, 호전성은 말할 것도 없었다.
원소학파가 쇠퇴할 것 같자, 당시 각 학파의 그랜드 마스터를 불러놓고 대결을 신청. 힘으로 찍어 눌러 지금의 원소학파로 통합한 미친 정복자였다.
자연히 계급이 한 단계씩 추락한 마법사들은 불만을 품었지만, 이를 겉으로 드러낸 자들이 없었다. 그게 멀린이었고, 다들 멀린을 조심하는 이유였다.
아카이브이기 이전에 멀린이란 사람 자체를 두려워했다. 미친놈이 또 언제 미친놈이 될지 몰라서 말이다.
잔혹한 현실을 알려주자 각 학파의 대표 마법사들이 한숨을 쉬었다.
“하아, 요점이 뭡니까?”
“무조건 안 된다고 하지 말고, 돌아가 진지하게 논의해 보라는 거야. 반대하려 해도 그럴듯한 논리를 짜서. 그게 안 되면 견제할 방법이라도. 무조건 안 된다고 하면 아카이브가 나설 수 있어.”
장내에서 끙하는 침음성이 울려 퍼졌다.
“질문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행정부장님께선 어느 쪽입니까? 보아하니 먼저 알고 계셨던 듯한데요.”
“뒤의 질문부터 대답하자면 알고 있었네. 그리고 허튼소리라 해 잠시 잊고 있었지. 상황이 이쯤에 이르자 나도 이야기한 거야.”
“그렇군요. 그럼, 앞의 질문에는요?”
“그대들하고 같아.”
“······.”
“마탑에 이로운 쪽이 옳다고 생각하네. 특히, 행정부의 장으로서 말이야. 자네들을 부른 이유도 그 때문이고.”
버크는 진심이었다.
불혹(不惑)을 넘어 지천명(知天命)을 바라보는 나이가 될 때까지 행정부에서 일한 버크는 자신이 평생에 걸친 업에 부끄럽지 않게 마탑의 이익을 생각했고, 그래서 지금 눈앞에 있는 마법사들을 불러들였다.
제논 브라이트의 요청대로 학파를 세울 수 있는 토대를 다지기 위해. 이렇게 알리면 마탑 내 당연히 소문이 퍼질 테고, 누가 찬성하고 반대하는지, 반대의 이유가 뭔지 알 수 있을 테니까.
제논이 정말 학파를 세울 인물이라면 그에 걸맞게 대응할 수 있을 터였다.
두근. 두근. 두근.
혼란스러워하는 원마스터들을 본 버크는 심장이 뛰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흑마법사의 신분으로 파테르교와 거래한 제논이란 걸출한 인물의 등장과 그 걸출한 인물이 마탑에 어떤 변화를 줄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 변화에서 마탑의 하인인 행정부가 어떻게 변할지도 상상이 가지 않았다.
단 하나 확실한 건 모이라이 학파를 세운 것 보다 그 파급력이 더 크다는 것뿐.
버크는 평화로운 은퇴를 바라볼 나이였건만, 문득 말년에 이런 일을 겪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으로 신기했다. 한 청년에게 이만한 힘이 있다니. 문득 지금 그 청년이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혁명이다! 혁명!!”
“지배 계급들이 혁명 앞에서 벌벌 떨게 하라!”
“단결하라! 잃는 것은 쇠사슬이요! 얻는 것은 세계다!!”
“노동! 소외! 착취!”
“꾸루루룩!!”
X구역 재개발 연합의 회의장. 차일드들과 먹보주머니가 외쳤다.
장내에는 침묵이 엄습했고, 양복을 입은 조가 올리버에게 노동자 진압용 몽둥이 FRP-105을 정중히 내밀었다.
올리버는 저도 모르게 진압용 몽둥이 FRP-105을 받으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차일드, 먹보주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