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2. 모든 걸 삼키는 괴물 (7)
타다다닥······!
올리버의 말에 암실(暗室)이 된 네버랜드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그림자가 불타오르는 소리뿐.
혈룡(血龍)으로 변신한 인육 요리사가 뚫은 하늘 위 구멍이 메워질 때까지 침묵은 좀처럼 깨지지 않았다.
“······.”
“······.”
올리버와 팬은 서로를 마주한 채 입을 다물었고.
그 사이 하늘 위 구멍이 점차 메워지더니 이윽고 네버랜드는 다시 완벽히 폐쇄된 공간이 되었다.
“나와 진짜 대화하고 싶다고······?”
그제야 팬이 침묵을 깼다.
“예. 팬 님.”
“아까는 가짜로 대화를 나누고 싶었나 봐?”
“······.”
“아······! 혹시, 웬디 때문인가? 웬디가 들으면 곤란한 내용이라?”
팬이 올리버를 살살 긁었다. 네버랜드의 포위망을 뚫고 간 것에 대한 분노를 표한 것으로,
올리버는 그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런 도발은 올리버에게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
“아뇨, 그냥 말하다 보니 진짜라는 단어가 붙은 것뿐입니다.”
올리버는 그 이상의 말을 붙이지 않았다. 정말 그런 것처럼.
사실인지, 거짓말인지 알 수 없었으나, 팬도 더 이상 말꼬리를 붙잡지 않았다.
“······뭐, 좋아. 뭔 상관이겠어······? 그래, 한번 해보자고 대화. 무슨 말을 하고 싶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대화를 나누자는 거야? 솔직히 궁금해. 우리가 대화 나눌 사이는 아니잖아?”
맞는 말이었다.
라빌리의 하수도, 신대륙 폐광산, 갈로스의 파티장, 이곳 네버랜드까지.
팬과 만난 것은 총 네 번이었으나, 뭐 하나 우호적인 경우가 없었다.
그런데도 불구 올리버는 상식 밖의 말을 꺼냈다.
“혹시, 저와 화해하실 생각 있으십니까?”
타닥······!
다시 한번 장작 타는 소리가 울렸다.
어지간히 미친 팬으로서도 믿기 어려운 말이란 증거.
팬이 물었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예.”
“미친······. 진짜네?”
팬이 조용히 경악했다.
비어버린 듯한 올리버의 가슴 속에서 아주 미세한 진심과 의지를 읽었기에.
지금 올리버는 진심으로 말하고 있었다. 팬과 화해할 의사가 있다고. 그것도 상당한 의지를 빛내가며.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팬은 웃음을 터트렸다.
“킥! 킥! 킥! ······너 정말 미친놈이구나? 아니면-”
팬은 순식간에 미소를 지우며 정색했다.
“-내가 우스워 보이거나?”
아이의 얼굴에 미세하게 잡힌 주름, 거기에 극단적인 음영까지 더해지자, 팬은 어지간한 사람도 움츠러들게 할 분위기를 자아냈다.
아이의 모습을 했다 해도 손가락은 손가락이란 것.
허나, 올리버는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올리버에겐 팬과의 기 싸움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다만, 그 탓인지 가면 같던 올리버의 얼굴에 미세한 변화가 생겼다.
감정이라곤 느껴지지 않던 건조한 얼굴에 어떠한 의지가 깃든 것.
콕 집어 말할 순 없지만, 느낄 수 있었다.
“전 팬 님을 우습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진심으로, 화해하고 싶습니다.”
팬은 비아냥거리는 대신 질문했다.
“······어째서지? 날 찢어 죽이고 싶을 텐데. 그렇잖아? 네 소중한 친구를 납치했는데? ······아! 혹시, 웬디가 사실 너한테 그렇게 소중한 게 아니었어? 이럴 줄 알았으면-”
“-소중한 친구 맞습니다. 그리고 팬 님에게 걸맞은 보복을 하고 싶은 것도 사실입니다.”
진심.
“모가지를 붙잡아 부러트리고 싶고, 쿼터스태프로 머리를 후려쳐 깨트리고 싶고, 발로 밟아 토마토처럼 터트리고 싶고, 팔다리를 하나하나 뽑아 땅을 기게 하고 싶고, 내장을 산 채로 뽑고 싶고, 눈알을 터트리고 싶고, 가죽을 벗기고 싶고, 산 채로 불태우고 싶고, 진심으로 울게 하고 싶습니다.”
올리버가 울창한 숲에서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게 했던 일을 떠올리며 하나하나 말했다.
마지막 울게 하는 것 외에는 전부 다 해보았다. 그건······.
“너 진심이구나?”
“창피하게도요.”
“근데, 왜 안 그러는 거지?”
올리버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왼손에 쥔 쿼터스태프를 매만졌다.
캔트가 올리버에게 준 선물.
“그건······. 너무 중독적이거든요.”
“뭐?”
“중독적이라고 했습니다. 너무 즐거워서요.”
“그게 뭔 문제야? 즐거운 거면 계속해야지!”
팬이 반문했다.
어느 정도 일리 있는 말이었다.
힘이 있어 행하는 게 무슨 문제가 있으랴? 특히, 지금 같은 시대에서.
올리버도 이에 관해 명확한 답을 가지고 있진 않은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주저앉은 채 머리를 긁적였다.
왤까? 왜 하면 안 되는 걸까? 도덕적으로 옳지 못해서? 사회 통념상 맞지 않아서? 그냥 보기 안 좋아서? 좀 그래서?
무엇 하나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올리버는 입 밖에 내놓지 못했다.
조금씩 부족한 것 같아.
그래서 올리버는 스스로가 가장 납득할 만한 다른 이유를 댔다.
대화란 진심이 담겨야 하는 법이니까.
“······제가 저답게 남기 위해서입니다.”
그랬다.
올리버가 당장 팬을 끔찍하게 죽이고 싶은 걸 참은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었다.
올리버. 바로, 자신으로 남기 위해.
캔트가 좋아하는 자신.
‘······자네의 그 독특한 성격이 좋아서 말이야.’
마리가 생각하는 자신.
‘······데이브 님께선 저희를 구해주셨으니까요.’
조의 마음에 담긴 자신.
‘당신은 제······. 아니, 우리 영웅이니까요.’
제인의 친구인 자신.
‘······예! 친구 하고 싶네요!!’
포레스트와 같이 일한 자신.
‘절대 아니지. 자네 같은 친구랑 일할 기회가 내 인생에 얼마나 있다고.’
요안나가 믿어 주던 자신.
‘그럼, 제가 믿을게요.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제가 당신을 믿고, 지지하며, 도울게요.’
올리버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
‘전 그냥 저라는 겁니다.’
올리버는 암담하기 그지없는 눈앞의 상황에서 이 말들을 나침반으로 삼고자 했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두려움을 버티는 버팀목으로 삼고자 했다.
외면하고 부정하고 싶은 현실을 견딜 수 있는 기둥으로 삼고자 했다.
그렇기에 올리버는 감정적인 보복을 그만두고자 했다. 오롯이 자신으로 남기 위해.
그런 올리버의 각오를 들은 팬은 갑자기 발작하듯 웃음을 터트렸다.
“······킥킥킥킥······끼히히히힉!! 꺄하하하하하하학!!!”
정말 즐겁다기보다는 어처구니없어 웃는 그런 웃음.
그렇게 몇 분 동안 팬이 웃는 소리가 사방에 메아리쳤고, 올리버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이 역시 하나의 대화였으니.
-뚝.
완벽히 폐쇄된 네버랜드의 안. 팬의 웃음소리가 칼처럼 끊어졌다.
동시에 입을 열었다.
“역시, 옳지 않아. 옳지 않다고. 내가 왕자여야 해······.”
팬은 신대륙에서 불타버린 자를 공격했을 때와 비슷한 모습을 보였다.
올리버는 그런 팬을 침묵한 채 바라봤다.
“······아니, 그렇잖아? 원치도 않는 네놈보다 내가 더 어울리잖아? 갈망하는 나야말로 특별한 존재에 어울리잖아? 그게 공평한 거잖아?!”
팬의 목소리가 서서히 커지며, 그의 감정은 탐욕과 집착이 번들거리듯 빛났다.
이에 올리버가 물었다. 정말 궁금하다는 듯.
“왜 그렇게 특별하다는 것에 집착하시는 거죠. 이미, 충분히 특별하시지 않습니까?”
목소리의 크기나 억양 무엇 하나 눈에 띄는 구석이 없었지만, 올리버의 물음은 불에 물을 끼얹듯 주변의 공기를 착 가라앉게 했다.
“······뭐?”
“오는 길 제인 아가씨께 팬 님에 관해 어느 정도 들었습니다.”
“······.”
“많이 힘드셨던 것 같군요. 홀어머니를 보살피신다고요······. 전 어머니가 없어 잘 모르겠지만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올리버는 쿼터스태프를 쓰다듬었다.
캔트가 올리버에게 준 선물.
“······제 눈에 팬 님은 이미 충분히 대단하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홀로 아픈 어머니를 모시고, 굴뚝 청소를 열심히 하며, 병에 걸렸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혼자서 흑마법을 사용하신 게요.”
올리버는 제인이 그동안 읽은 팬의 일기 내용을 간략하게 언급했다.
팬은 자신을 왕족이라 주장하는 어머니 밑에서 어떤 고생을 했는지, 그런 어머니 탓에 얼마나 또래에게 괴롭힘을 당했는지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다 굴뚝 청소부들의 직업병인 암에 걸려 절망하던 와중 갑자기 흑마법을 쓸 수 있게 된 것도.
그 세세한 과정은 알 수 없었으나······.
“······그 정도면 충분히 특별한 것 아니겠습니까?”
올리버는 제인이 했던 추측을 바탕으로 말했다.
팬이 특별함을 원하는 건, 어머니에 대한 강박증과 비참한 자신의 과거 탓일 터였다.
인육 요리사가 자길 버린 부모와 비슷한 짓을 했다는 사실에 괴로워 그 죄책감을 털고자 여동생에게 최선을 다한 것처럼.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창조계열 흑마법은 흑마법 계열 중에서도 술사의 심리를 가장 잘 반영하는 흑마법이었으니.
그런 창조계열 흑마법의 정수라 할 수 있는 네버랜드에 그런 일기가 있다면, 그건 팬의 마음 깊숙이 있는 비밀이라 해도 무방할 터였다.
“······그런데 굳이 종말론 따위에 집착하실 필요 있으시겠습니까?”
“······종말론 따위?”
“예, 이미 팬 님은 대단하시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제인에게서 들은 팬의 과거사와 인육 요리사의 과거사를 떠올리며 올리버가 다시 한번 말했다.
비록, 인육 요리사는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귀긴 하나 뭐가 됐건 동생에 대한 애정으로 수백 년에 걸친 시간을 통해 손가락이란 지위까지 올라갔고.
팬 역시 어머니의 세뇌에 가까운 말 때문이긴 하나 손가락이란 지위에 올랐으니.
선악을 떠나 대단하긴 했다.
그 과정에 끔찍한 짓을 저지르긴 했으나······. 올리버는 가급적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자신이 옳고 그름을 판단할 자격이 있는 게 아니니.
그렇기에 올리버는 최대한 자신의 목적에 맞춰 합리적으로 가고자 했다.
올리버의 감정을 엿본 팬은 이에 반응했다.
“너 진심이구나?”
“예······. 그러니 이쯤에서 화해하고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올리버가 온 마음을 담아 말했다.
바다 괴물은 멀린이 상대 중이었고, 멀린이 이길 터이니, 팬과 좋게 마무리한다면 어쩌면······. 아주 어쩌면······. 올리버가 우려하던 흐름에서 벗어날지도 몰랐다.
물론 다른 계획도 있지만, 이게 최상의 계획이었다.
팬을 쓰러트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는 올리버 입장에서는.
이기적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만큼 두려웠기에.
그때, 팬이 갑자기 질문했다.
“듣기 좋은 말 고마워······. 근데 갑자기 궁금해 그러는데 너 살면서 고함을 몇 번 쳐 봤어?”
“예?”
“너 살면서 고함을 몇 번 쳐봤냐고?”
고함. 크게 부르짖거나 외치는 소리.
올리버는 사전적인 의미를 생각했으나, 팬은 그게 아니라는 듯 추가 설명을 덧붙였다.
“내가 묻는 건 그게 아니야······. 분하고, 억울해 고함 지른 적이 있냐고 물은 거야. 아니면 사는 게 힘들어서······. 몇 번이나 고함쳐봤지?”
올리버는 충실한 대화를 위해 곰곰이 생각했다.
사는 게 분하고, 억울하고, 힘든 적이라······. 생각해보면 좀 있는 거 같았다.
고아원과 광산은 고난과 부조리로 점철되어 있었으니.
다만, 그래서 고함을 친 적은 글쎄?
팬이 올리버의 속을 꿰뚫듯 말했다. 아니, 그 이전에 이미 정답을 알고 있는 듯한 말투였다.
“없나 보네?”
“······아파서 고함 지른 적은 한 번 있습니다.”
올리버가 간신히 하나를 찾아 말했다.
신대륙에서 돌아와 멀린과 대련했을 때, 딱 한 번 큰소리로 비명을 질러봤다.
오른팔이 사슬에 묶이자 너무나도 강렬한 통증이 밀려와.
허나, 만족스러운 대답이 아니었는지, 팬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말한 건 비명이 아니라 고함이야.”
“차이가 있겠습니까?”
“바로, 그 점이야. 내가 널 싫어하는 게.”
팬이 질투심과 증오를 빛내며 올리버를 가리켰다.
“네놈 행동 하나하나가 마치 자기는 다르다는 거 같거든.”
“그럴 의도는 없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네가 싫어, 의도조차 없다는 건 진짜라는 거니······. 겁쟁이처럼 도망치는 네놈이 그런 격을 가진 게······. 선택받은 게······. 그건 불공평하잖아······?!”
올리버는 노력했음에도 불구. 이 대화가 어느 방향으로 갈지 예상하며 손가락 끝에 생긴 작은 상처를 매만졌다. 피 몇 방울이 올리버의 손끝에 묻어나왔다.
가급적이면 정말 화해하고 싶었는데. 멀린이 바다 괴물을 쓰러트리고, 올리버는 화해하는 그 형태로 가고 싶었는데.
허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하지만 난 겁쟁이가 아니야. 난 종말의 형태를 뒤틀어서라도 왕자가 될 거야!!”
“······.”
뇌를 번뜩이게 하는 듯한 팬의 말.
올리버는 그 부분에 대해 저도 모르게 깊게 생각했다. 종말의 형태를 뒤틀어 왕자가 된다니. 깊게 생각해 볼 가치가 있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팬은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팬의 외침에 불타오르는 그림자가 꽃봉오리처럼 닫힌 네버랜드에 통제권을 행사한 것.
땅 밑에서 수많은 크리처가 솟아났고, 허공에선 갈고리와 쇠사슬 같은 수많은 포획기구와 고문 기구가 튀어나왔다.
불타버린 자를 붙잡으려 했을 때 사용한 것들로.
수많은 괴물과 쇳덩어리가 올리버를 향해 일제히 날아들었다.
사방에서 포위해 오는 끔찍한 피조물들은 제각기 기괴한 울음소리와 절그럭거리는 쇳소리를 냈고.
그 광경을 본 올리버는 계획이 어그러졌다는 안타까움과 동시에 옳지 못한 유혹을 느꼈다. 종말을 뒤튼다라······.
올리버는 그 부분을 곱씹으며 준비 중이던 술식을 발동시켰다.
[탐화(貪火)]
감정과 마력을 뒤섞은 복합 술식.
거기다 이번에는 손끝에 묻은 피도 한 방울 섞었는데.
그 탓인지 주먹만 한 탐화(貪火)는 네버랜드를 장작 삼아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검은빛 화염으로 이뤄진 이빨이 동서남북, 위아래 가리지 않고 파고들어 모두 재로 만들었으며, 검은빛 화염의 혀가 사방을 핥아 불길을 옮겼다.
끊임없이 몸집을 키운 화염의 괴물은 수많은 크리처와 고문기구를 삼켜 자신으로 양분으로 삼았고,
그 양분으로 탐화는 다시 몸집을 키워 폐쇄된 네버랜드를 채워나갔다.
승패가 정해진 상황.
그러나 팬은 미소짓고 있었다.
이 정도는 예상했다는 듯.
곧 그 자신감의 근거를 볼 수 있었다.
“그림자!!”
팬의 외침에 온몸이 장작처럼 불타는 그림자, 불타버린 자를 연상케 하는 그림자가 움직였다.
후우······.
그림자가 입을 벌려 숨을 내뱉자, 사방을 덮쳐오던 탐화가 갈라져 팬을 피해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딱!
팬의 그림자가 손가락을 튕기자 붉은색과 오렌지색이 뒤섞인 작은 불씨가 생겨나더니, 탐화를 장작 삼아 주변 일대를 뒤덮었다.
화염을 먹는 화염.
주변을 가득 채운 화염의 색이 뒤바뀌었고, 그 광경에 팬이 미친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킥킥킥킥킥킥킥킥!!! 내가 이 정도 준비도 안 했을 거 같나?!!”
탐화를 먹어 치운 화염에 휩싸인 올리버.
그런 올리버를 보며 승리감에 도취한 건지 팬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이대로 널 바싹 구워 네버랜드에 흡수해······.”
팬은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갔다. 불타버린 그림자를 지나쳤다.
“······나의 양분으로 삼아······.”
팬은 그림자의 앞에 서게 됐고, 화염을 지휘하던 그림자는 그대로 팬의 양어깨에 손을 얹어.
“······뭐-”
입을 벌리며 팬을 삼켜버렸다.
[······내, 내가 와, 왕자······.]
***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머리부터 삼켜지는 팬.
팬은 자신의 그림자에 머리가 삼켜지자 발버둥 쳤으나, 그림자는 개의치 않고 왕자라 중얼거리며 팬의 몸을 들어, 뱀처럼 통째로 삼키기 시작했다.
머리, 목, 어깨, 팔, 가슴, 허리, 다리 순으로 천천히 팬의 몸이 그림자 안으로 들어갔고.
화염에 둘러싸인 올리버는 강렬한 열기에도 불구 그 모습을 똑똑히 지켜봤다.
그러나 놀랐냐면 그건 또 아니었다.
분명, 처음 봤던 팬의 그림자는 소멸할 때까지 팬에게 반항 한번 하지 못할 정도로 종속된 크리처였으나, 그건 팬의 힘이 크리처를 압도했기 때문.
그러나, 불타버린 자의 축복을 받은 팬의 그림자는 그 경우에서 벗어났다.
그도 그럴 게, 불타버린 자의 축복을 받아 힘과 자의식이 비정상적으로 커진 상태였으니.
무엇보다 술사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그림자의 특성까지.
팬의 그림자가 팬을 잡아먹는 건 그리 놀라운 게 아니었다.
처음 제인이 자기 그림자에 둘러싸여 꼭두각시처럼 조종당한 것도 이와 같은 이치였으니.
그렇기에 올리버가 요동치는 자기 그림자를 억제한 것이기도 했다.
[······나, 나야말로······와, 왕자······.]
팬의 발까지 집어삼킨 그림자는 네버랜드를 오븐처럼 조작.
내부의 화염을 더욱 키워 내부를 불지옥으로 만들었다.
이대로 올리버를 불태워 네버랜드와 함께 통째로 삼킬 심산.
점점 올라가는 화력에 화염 내성을 가진 올리버도 점점 버티기 어려워졌고,
거기다 마력이건, 감정이건 몸 밖으로 추출하자마자 압도적인 화력에 바로바로 소멸했다.
얼핏 보기엔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
그때, 올리버가 오른손 검지에 두른 붕대를 아주 살짝 뜯었다.
찌직······!
멀린의 도움을 받아 두른 붕대가 일부분이 찢어지며, 불탄 나뭇가지처럼 생긴 검지가 밖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올리버는 차선이라 생각하며, 붕대를 뜯은 검지를 불타고 있는 대지 위에 댔고,
팍.
세상을 탈색시킬 새하얀 화염이 폭발해 주변의 화염과 네버랜드를 단숨에 불태워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