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9. 모든 걸 삼키는 괴물 (4)
그림자가 자신을 집어삼키는 순간 제인은 엄청난 답답함을 느꼈다.
숨을 제대로 쉴 수 없는 답답함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답답함을.
소리조차 마음대로 낼 수 없는 답답함을.
그건 제인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감정이었다.
그림자가 제인을 완전히 삼키자, 끝을 알 수 없는 어둠의 바다가 펼쳐졌고.
잠시 후, 제인은 자신이 느끼는 답답함의 근원을 볼 수 있었다.
‘어머니······.’
어둠의 바닷속. 제인의 눈앞에 어머니가 나타났다.
이제는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두 눈만큼은 선명하게 보였다.
자신을 증오하고, 혐오하는 두 눈을.
제인은 어머니의 눈을 볼 때마다 답답한 감정을 느꼈다.
언제 버려질지 모른다는 답답함이.
그런데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답답함이.
뭐,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어머니 역시 자신을 볼 때마다 괴로웠겠지.
자신은 어머니의 인생이 굴러떨어진 일종의 증거.
그래서 시스터후드에 자신을 팔아버린 걸 터였다.
목돈도 얻고, 괴로운 기억도 치울 겸.
참고로 제인은 어머니의 선택을 원망하지 않았다.
최소한 지금은.
어차피 어머니가 계속해 제인을 길러 봤자 뻔한 인생이 펼쳐졌을 테니.
차라리 리스크를 감수하더라도 시스터후드에 가는 게 제인으로서도 나쁘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답답함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시스터후드의 가르침 역시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이제 너희들은 이상적인 여자가 되는 법을 배울 거다.]
제인의 눈앞에 있던 어머니가 갑자기 사라지고, 대신 시스터후드에서 처음 만난 교육관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녀는 제인을 최고의 여자로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몸가짐, 자세, 화술, 인내심, 교양과 같은 기본을 시작으로, 종국에는 남자의 호감을 얻고, 이를 이용해 남자를 조종하는 방법까지 알려주겠다고 했다.
[그것이 여성의 가장 큰 무기며, 너희가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교육관은 말했고, 제인은 별 저항 없이 받아들였다.
가난한 어머니가 어찌 살았는지 두 눈으로 봤으니까.
교육관은 이상적인 여성이란 자신을 철저히 죽이고, 남들이 바라는 모습을 보여주는 거라고 했다.
미소, 나긋나긋한 목소리, 겸손과 같은.
그래서 제인은 그 조언대로 자신을 철저히 죽여 이상적인 여자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고, 말 하나하나 조심하며, 늘 겸손한 태도를 몸에 둘렀다.
답답하지 않은 건 아니나, 이미 익숙했기에 견딜만했다.
[진정한 사랑이 있을 거라 믿지 마라.]
[사랑이란, 남자의 충동, 소유욕, 욕정의 또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으니.]
[너희는 사랑을 이용하는 사람이지, 사랑에 빠져서는 안 된다.]
어둠의 바닷속에 나타난 교육관이 과거의 가르침을 다시 읊조렸다.
진정한 사랑은 없으며, 진정으로 믿을 수 있는 건 사랑이 아닌 주머니 속 돈과 시스터후드뿐이라고.
제인은 그 가르침 역시 받아들였다.
매일 돈을 주고 여자를 사러 오는 남자들을 봤기에.
멍청하게 가르침을 어기고 사랑에 빠진 여자들의 비참한 말로를 봤기에.
아니, 그 이전에 에디스가 어머니에게 저지른 일을 알았기에.
그래서 제인은 사랑을 믿지 않았고 딱히 원하지도 않았다.
덕분에 제인은 누구보다 시스터후드의 가르침을 잘 배우고, 활용할 수 있었다.
필요하다면 마법 아이템까지 사용해.
[그런데 어디 있지?]
교육관이 제인에게 물었다.
시스터후드에서 준 마법 아이템이 어디 있냐고.
‘도망칠 때 버렸어요.’
제인은 움직이지 않는 입술로 대답했다.
던칸에게 배신당해 하수도로 도망쳤을 때.
‘추적기능이 걸려있어······. 그때 버렸어요.’
[그럼 왜 새로 안 받은 거지?]
교육관이 추궁하듯 물었고, 제인 역시 자신에게 물었다.
왜 새로 받지 않은 거냐고.
[설마, 진실한 사랑이라도 하고 싶어진 거더냐? 네가 할 수 있을 거라 믿는 것이냐?]
과거 믿고 따랐던 가르침이 제인의 가슴을 비수처럼 찔렀다.
답답함이 다시 밀려왔다.
[정녕 널 사랑하는 남자가 있을 것 같더냐? 거짓말과 속임수를 배우고, 더럽혀진 너를?]
사방을 뒤덮은 어둠이 일렁이며 과거 제인의 기억을 보여줬다.
시스터후드의 가르침을 얼마나 제대로 배웠는지 시험하고.
이를 이용해 얼마나 많은 남자를 홀리며.
남자를 어디까지 조종하는지.
이를 위해 무엇까지 할 수 있는지.
이제는 지우고픈 부끄러운 기억.
어쩌면 제인이 성공하려는 이유는 이것 때문일지도 몰랐다.
데이브가 단순히 대단해서만이 아닌, 자신의 더러운 과거를 지우기 위해.
천한 신분을 감추기 위해 금붙이로 자신을 치장하려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제인 아가씨?”
자신의 과거에 짓눌리던 중 익숙하고 그리운 목소리가 들렸다.
데이브.
길을 잃은 아이가 부모를 발견하듯, 제인은 반사적으로 앞을 봤고, 앞에는 창문 하나가 생겨났다.
어둠에 짓눌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제인은 그 창문을 통해 자신을 내려다보는 데이브를 간접적으로 볼 수 있었다.
환상? 아니었다.
제인은 본능적으로 이게 현실임을 자각했다.
정말 온 것이었다.
어딘지도 모르는 이 낯선 곳에. 손가락이 지배하는 이 위험한 곳에 데이브가 온 것이었다.
제인을 구하기 위해.
구해 준다고 약속한 적도 없었건만, 그는 구해 주러 온 것이었다.
믿고 있긴 했지만, 그렇지만······.
‘정말 구하러 올 줄이야······.’
제인은 마음속 한구석에 있던 아주 작은 불안감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
저주받은 태생과 어릴 적의 교육 덕분에 지니고 있던 불신 등 부정적 감정이 사라졌다.
제인은 데이브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몸을 옥죄고 짓누르는 어둠 탓에 꼼짝할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데이브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제인을 깨우려 했다.
-푹
데이브가 다시 제인을 부르려는 찰나, 날카롭고 축축한 소리가 울렸다.
제인이 단검을 꺼내 데이브의 옆구리를 찌른 것.
제인의 손에 그 감촉이 느껴졌다.
‘안 돼. 하지 마.’
푸우욱
어둠에 짓눌려 아무것도 못 하는 제인은 몸이 멋대로 움직이는 감각만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그림자가 된 기분이었다.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그림자.
제인은 느꼈다.
단검을 더욱 깊숙이 찌르며 일어나는 자신을.
원치 않음에도 입꼬리를 올리는 자신을.
이곳까지 와준 데이브를 배신한 자신을.
이기적이게도 제인은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고 싶었다.
데이브가 과거 만난 남자들과 똑같은 표정을 지을까 봐.
“아······.”
짧게 울린 탄성. 제인은 반사적으로 창문을 봤다.
그곳엔 뭔가를 깨달은 표정을 지은 데이브가 있었다.
단검에 찔린 그의 표정에는 어떠한 원망도 없었다.
덜그럭.
데이브는 왼손에 쥐고 있던 쿼터스태프를 떨어트리곤 자연스럽게 제인의 손을 잡았다.
힘이 셌지만, 아프진 않았다.
그러고는 붕대를 두른 반대 손을 천천히 들어 창문을 덮더니.
쫘악!
제인을 짓누르던 어둠의 바다가 갈라지고.
빛이 비쳤다.
“괜찮으십니까?”
***
그림자를 찢은 올리버가 괜찮은지 제인에게 물었다.
그림자에 둘러싸였던 동안 어떤 영향을 받았을지 알 수 없었고, 또, 그림자가 찢어졌을 때 어떤 영향을 받았을지 알 수 없어.
‘그림자는······. 원래대로 돌아가는군.’
깃들어 있던 술식이 붕괴해 원래대로 돌아가는 제인의 그림자를 보며 올리버가 생각했다.
다행이었다.
그림자는 사람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존재.
그렇기에 그림자를 매개로 하거나, 재료로 한 흑마법의 위력과 부작용을 쉬이 가늠할 수 없었다.
팬의 그림자와 올리버의 그림자가 대표적.
무엇보다 제인을 덮고 있던 그림자에서는 미세하지만 불타버린 자의 기운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오른팔이 없었다면 해제하기 어려운 수준.
‘세상에 쓸모없는 건 없다더니······.’
올리버는 극심한 작열통을 선사해주는 오른팔에 처음으로 감사함을 느꼈다.
단순히 고통만 주는 게 아닌 듯했다.
“아······.”
올리버가 제인의 상태를 살펴보며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우는 듯한 신음이 들렸다.
제인이 낸 소리로,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올리버의 왼쪽 옆구리를 보고 있었다.
올리버의 옆구리에는 피가 흘러나왔고, 그 피 중 일부는 제인의 손에 묻었다.
제인은 그 광경이 믿기지 않은 듯 죄악감, 두려움을 빛내며 손을 떨었다.
“데, 데이-”
“-괜찮으십니까?”
올리버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제인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제인은 올리버의 얼굴을 바라봤고, 올리버는 피 묻은 제인의 손을 닦아줬다.
“천사의 집 종업원분들의 가르침은 역시 하나같이 유용하네요.”
“······.”
“손수건을 늘 챙기고 다니라 하셨거든요. 진정한 신사는 여성이 필요할 때를 대비해 손수건을 챙겨야 하는 법이라고요.”
“······.”
“······농담입니다.”
올리버는 태연하게 말하며 요상한 표정을 지었다.
놀랍게도 웃으려고 시도한 거였다. 안타깝게도 실패하고 말았지만.
“괘, 괜찮으세요?”
제인은 새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물었다.
그녀가 이렇게 동요하는 것 처음인 것 같았다.
제인이 미안하다고 홀린 듯 사과하려 할 때, 올리버가 답했다.
“전 당연히 괜찮습니다······. 오는 길에 실수로 인해 생긴 상처인데 신경 쓰지 마시죠. 가벼운 상처입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거짓말에 제인이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올리버의 반응은 똑같을 뿐이었다.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그냥 제 실수로 생긴 상처입니다. 그리 깊지도 않고요. 그러니 제인 아가씨도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너무나도 뻔한 거짓말이었다. 의도가 훤히 보이는 뻔한 거짓말.
그렇기에 더더욱 제인은 그 말에 토를 달 수 없었다.
그저 올리버의 옷을 붙잡은 채 머리를 가슴에 대고 우는 소리를 줄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자신이 뭐라고. 도움받는 것밖에 하지 못하는 자신이 뭐라고.
친구이기 때문?
제인은 그 사실에 더욱 죄책감을 느꼈다.
괜히, 주제에도 어울리지 않는 자신이 곁을 맴돌아, 데이브에게 쓸데없는 짐을 준 것 같아.
자신의 과욕이 그를 상처 입힌 것 같아.
어떻게든 대등한 관계를 만들어 보겠다고 발버둥 쳤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아니었다.
전혀.
대등한 관계는커녕. 일방적으로 도움받기만 했다.
유산을 물려받을 때도, 경매장에서도, 파티장에서도, 갈로스에서도, 지금 이 순간마저도 도움만 받고 있었다.
창피했다.
데이브와 대등해지고 싶다는 소망 자체가 오만이라는 걸 깨달아.
미안했다.
그 오만으로 얼마나 많은 민폐를 끼쳤는지 이제야 알 수 있어서.
그리고 죄스러웠다.
그 와중에도 제인은 데이브에게 또 부탁하려고 해서.
부디, 자기만 데리고 가지 말고, 이 섬에 갇힌 아이들도 같이 데려가 달라고.
‘못 하겠어······.’
제인이 속으로 신음했다.
이토록 다치고 애쓴 그에게 어떻게 더 부탁하냐고.
‘하지만······.’
하지만 동시에 아이들이 눈에 밟혔다.
목 매달린 숲에서 제인처럼 자신을 죽인 채 연기만 하는 아이들이.
잊혀진 창고에 갇혀 가축처럼 방치된 아이들이.
하지만, 하지만······.
“······갑자기 떠오르네요.”
제인이 눈물이 젖은 얼굴을 들었다.
“인육 요리사님의 유산을 찾고. 갈로스에 잠시 머물 때 제인 아가씨 기사가 실린 신문을 읽었거든요.”
“······.”
“기사가 아직도 기억납니다. ‘란다에서 온 여성 사업가 제인. 고아원에 이어 미혼모를 위한 옷감 공장 설립에 투자. 좌초될 뻔한 공장 건설, 동력을 얻다!’ ······라고요.”
올리버의 표정은 평소와 같은 무표정이었지만. 눈물 탓인지, 아니면 기분 탓인지 아주 조금 웃는 것 같았다.
마치, 이 세상 존재가 아닌 듯한 미소였다.
너무나도 아름답고, 따뜻해 보이는.
“읽고 놀랐습니다. 아, 이미 한번 이야기했나요?”
제인은 아무 말도 못 했다. 허나, 올리버는 개의치 않고 혼자서 대화를 이어갔다.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이.
“제인 아가씨께선 별거 아니라고 했지만, 전 감탄했습니다. 너무 대단해서요.”
“아니에요. 저는-”
-쉿.
제인이 입술 위에 손가락을 얹었다.
원래는 고압적인 제스처였겠지만, 지금은 너무나 상냥해 보였다.
“근래, 전 혼란스러웠습니다. 옛날에는 뭐든지 단순하고, 명확했는데, 최근에는 그러지 못했거든요.”
어딘가 슬퍼 보이는 얼굴. 제인은 팬의 말이 떠올랐다.
지옥의 왕자.
두근. 두근. 심장이 뛰었다.
“······근래, 알고 싶지만, 알고 싶지 않은 게 있었거든요. 그래서······신경질을 부리고 저도 제가 뭘 하려는지 모를 정도로 맴돌기만 했습니다. 제자리를요.”
“······.”
“그러던 중 제인 아가씨의 신문을 읽었죠. 어찌나 자랑스럽던지.”
“······.”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더 나아지기 위해 노력하며, 그 와중에도 다른 사람들을 돕는 거요······. 저보다 훨씬 낫더군요. 자랑스럽더군요. 그런 사람이 제 친구라는 게요.”
“전 도움받기만 했어요······. 데이브에게요.”
“저랑 똑같네요. 저도 도움받기만 했거든요. 광산을 벗어난 것도, 글을 배운 것도, 세상 밖으로 나간 것도, 어딜 갈지 안 것도, 상식을 배운 것도. 중요한 건 전부 남의 도움으로 해결했습니다······. 가만 생각해보니 도움 안 받고 사는 사람이 있나 싶군요.”
올리버는 말을 끝마치고 제인을 바라봤다.
그 눈에서 올리버의 생각을 읽어낸 제인은 힘겹게 자신의 소망을 입 밖으로 꺼냈다.
“······이 섬에 갇힌 아이들이 있어요······. 그 아이들도 같이 데려가 주실 수 있나요?”
올리버가 대답했다.
“잘됐네요. 저도 그러려고 온 거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