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8. 도움 요청 (1)
“흔쾌한 승낙 감사합니다.”
올리버는 이완의 족쇄를 풀어준 뒤, 손을 내밀며 인사했다.
이완은 기껍게 그 손을 맞잡았다.
“내 이빨은 소중하니까. 약속대로 날 보호해 줘야 하고, 빈 시티(Bean City) 놈들과도 화해시켜 줘야 해.”
이완은 올리버를 안내해주는 대신 내민 조건을 다시 한번 언급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완에게 원한을 가진 빈 시티의 불특정다수를 어떻게든 설득해 이완과 화해시키는 것으로, 아무래도 이완 역시 흑마법사의 도시인 빈 시티에 가지 못하는 게 아쉬운 눈치였다.
그래서 올리버의 요청을 들어주고 차라리 원하는 걸 얻고자 했다.
“물론입니다. 대신 저도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젠장, 그건 이야기에 없었잖아? 나 너 싫어.”
“죄송합니다.”
올리버는 입으로 사과하면서도 망설임 없이 허리 뒤쪽에서 물건을 꺼냈다.
핏빛으로 물든 뼈와 선홍빛 살점으로 이뤄진 톤파(Tonfa)였다.
“오······. 내가 만들어줬던 물건이네.”
“이걸 재가공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왜, 씨발?”
이완이 욕지거리했다. 다만, 그냥 욕을 한 건 아니었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내가 나름대로 신경 써서 만든 물건인데, 이걸 왜 재가공해?”
이완은 진심이었고, 올리버 역시 어느 정도 동의하는 바였다.
이완이 만들어 준 이 톤파는 몹시도 단단한 경도(硬度)를 자랑했으며, 흑마법을 저장해 꺼낼 수 있는 기능까지 있었다.
단순하지만, 그만큼 위력적인 물건.
그런데, 대뜸 재가공해달라 하면 흑마법 장인인 이완으로서 불쾌할 법도 했다.
다만, 올리버 역시 아무 이유 없이 바꿔 달라는 건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오해는 하지 말아주십시오. 결코, 이완 님 작품이 마음에 안 들어서 이러는 건 아니니······. 그저 더 이상 이 형태로는 사용하기 적절하지 않아 부탁드리는 겁니다.”
“뭔 소린지 좀 알아듣게 이야기해 줄 수는 없어?”
“해당 무기를 쓰던 송장인형이 크게 파손됐습니다.”
그랬다. 물고기 인간이 만든 호수를 통해 등장한 거대한 파충류의 팔. 그 거대한 팔을 막는 과정에서 송장인형-던칸이 고치기 어려울 수준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그도 그럴 게, 송장인형-듀란스와 달리 던칸은 팔을 거대화시켜 올리버와 같이 근접 공격으로 막았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던칸의 팔은 거인의 주먹이라 할 정도로 그 크기와 위력이 커졌으나, 거인보다도 거대한 파충류의 팔은 이를 간단히 파훼, 던칸의 머리와 왼쪽 어깨, 팔을 제외하고는 가루로 만들었다.
송장인형에 관해 기술이 상당히 높아진 올리버도 수리할 엄두가 안 날 정도로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차일드인 세컨드(Second)와 포스(Fourth)는 가벼운 부상만 입었다는 거였다.
“그거 아쉽겠구만. 송장인형-던칸. 엔조이먼트 수백 명을 살해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물건일 텐데. 나무 거인도 한 방에 부숴버렸다지?” 아까워서 어째?
이완도 엔조이먼트를 쓰러트린 무용담을 어디서 들었는지 아는 체했다. 올리버가 정정했다.
“82명만 죽였습니다.”
“구체적이니, 그게 더 소름 끼치는구만······. 뭐, 좋아. 안타깝긴 하지만, 장비는 사용자에 따라 바꿔야 하는 법이니. 인정해. 뭐로 바꾸고 싶지? 부탁하는 거 보니, 이미 정한 거 같은데?”
“······프렌치 나이프 두 자루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올리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프렌치 나이프라면······. 내가 아는 프렌치 나이프야? 부엌에서 쓰는?”
“예, 그렇습니다.”
대답을 들은 이완은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장비란, 그 사람을 나타내는 정체성의 일종.
그런데 무기가 아닌 부엌칼을 만들어 달라? 이완은 올리버가 던칸을 대체해 어떤 송장인형을 만들지 눈치챈 듯 했다.
그 증거로, 그는 딴소리하거나, 쓸데없는 협상을 하지 않았다.
그저 올리버의 부탁에 귀 기울일 뿐.
“좋아, 만들어 주지. 까짓거. 근데 문제가 있어. 아무리 나라도 살점 무기를 재가공하는데, 제법 시간이 필요해. 괜찮겠어?”
“괜찮습니다. 저도 잠시 란다로 돌아가 볼일을 봐야 하거든요.”
“그거 의외구만. 급하다고 해서 난 바로 빈 시티로 달려갈 줄 알았는데? 요란하게 소리를 지르며, 우와아아아앗!!”
올리버는 멈칫했다. 이완이 말대로 당장 제인을 구출하러 가고 싶었다. 허나, 아직은 아니었다.
“준비할 것이 있습니다.”
“준비? 그래도 괜찮겠어? 그 돈 많고, 예쁜 아가씨가 내일 당장이라도 죽을 수도 있는데? 팬 그 망상에 빠진 놈 보통 위험한 게 아니야. 미친놈이니까.”
뭔가를 아는 듯한 이완의 발언에 루시앙은 눈썹을 모았으나, 올리버는 기존의 태도를 고수할 뿐이었다.
“예, 괜찮습니다. 전 제인 아가씨가 무사할 거라 믿거든요. 제인 아가씨는 용감하고, 똑똑하니까요.”
“호오······. 그렇구만.”
올리버의 대답을 들은 이완은 그답지 않게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 오히려, 올리버를 지지하는 기색마저 내뿜었다.
“마음대로 해. 애당초 그건 네가 정하는 거니까. 그럼, 난 천천히 가공하도록 하지. 각자 볼일 끝나면 여기서 만나는 거로 하는 게 어때?”
“좋은 생각이십니다. 무리한 부탁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올리버가 이완에게 감사를 표하며, 품 안에서 공간 마법이 깃든 종이를 한 장 꺼냈다.
“전 바로 란다로 돌아갈 생각인데, 이완 님도 같이 가시겠습니까? 살점 무기를 가공하려면 Z구역에 가야 하지 않습니까?”
“아, 난 됐어. 남자랑 같이 가는 게 뭔 재미라고. 난 내 알아서 하도록 할 테니, 너 혼자가.”
“알겠습니다. 다시 한번 잘 부탁드립니다.”
올리버는 이완의 대답을 들은 뒤, 루시앙에게 정중히 인사하곤 망설임 없이 지하실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지하실에는 루시앙과 이완 단둘만이 남게 되었다. 루시앙은 놀란 눈으로 이완을 바라봤다.
왜냐면 이완이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올리버의 부탁을 쉽게 들어줬기 때문이었다.
올리버가 차용증에 이빨을 뽑는다는 설득을 하긴 했지만, 솔직히 이것만으로 부족한 걸 루시앙은 알고 있었다.
빚이란 개념을 신경 쓰고, 이빨 뽑는다는 협박을 두려워하는 놈이면, 애당초 빈 시티와 밀리유 등. 뒷세계의 거물들에게 빚을 지고, 원한을 사는 일을 할 리 없을 테니.
그렇기에 루시앙은 이완이 올리버를 돕는데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을 예측했다.
“신기하오?”
이완이 우두둑 등과 허리를 펴며 물었다.
“내가 이렇게 순순히 돕는 게 말이야? 그런 눈치인데?”
루시앙은 침묵했다.
이완이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흥청망청 돈을 써, 몇 차례나 거액의 빚을 만드는 인간 말종이긴 했으나, 또 한편으로는 놀라운 실력을 갖춘 흑마법 장인이자, 뭐라 설명하기 힘든 신비함을 지닌 인간인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별 볼 일 없는 인간이라면 빈 시티와 밀리유에 이 정도 원한을 사고도 살아있을 리 만무했다.
“데이브 씨 때문이요?”
루시앙이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질문했다. 질문은 정답이었다.
“맞소. 데이브 때문이긴 하지. 그가 드디어 변했거든.”
“변하다니······. 뭐가 말이요?”
“관찰자에서 당사자로. 문제는 이게 좋은 방향일지, 나쁠 방향일진 알 수 없다는 거지만, 난 뭐 상관없소. 어차피 피할 수 없을 테고, 뭐든 재미있을 테니까.”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음에도 루시앙은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작은 공포를 느꼈다. 본질적으로 극복할 수 없는 공포를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루시앙은 알고 싶으면서도 알기 싫은 그런 모순적인 기분을 맛봤다.
***
수많은 학파가 모여 있는 란다의 마탑.
그 마탑에는 고유의 학파 특성과 성격에 맞춘 거대한 타워가 즐비해 있었다.
가령, 원소학파는 아그니, 스카디, 엔릴, 가이아, 묠니르 이 다섯 개의 타워가 조화를 이루가 복합적인 구조를 하고 있었으며,
순수마력 학파의 경우, 심심하다 할 정도로 올곧은 원통형 기둥 형태를 띠고 있었다.
세계수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모이라이 학파는 세계수와 하나로 합체된 형태를 하고 있었고.
그렇게 각 학파가 소유한 타워는 각 학파의 특기와 철학을 철저하게 반영돼 있었다.
그건 생명학파도 예외가 아니었다. 꼭짓점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기형적인 원뿔형 탑.
올리버는 그 탑을 방문해 가장 꼭대기로 향했다.
딱. 딱. 딱.
올리버가 쿼터스태프로 바닥을 짚으며 걸어가자, 타워 내 있는 마법사와 학생 등은 올리버의 소문 탓인지, 아니면 근래 바뀐 학파의 기조 탓인지, 그것도 아니면 미묘하게 변한 올리버의 분위기 탓인지 경멸하는 시선이나, 시비 같은 것을 일제 걸지 않고 길을 비켜줬다.
덕분에 올리버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생명학파의 그랜드 마스터(Grand Master)실까지 방문할 수 있었다.
문 앞을 지키는 비서가 막기 전까지만 해도.
“자, 잠시만요!”
건장한 체격의 비서가 갑자기 등장한 올리버를 멈춰 세웠다.
과거와 차이점이 있다면, 부담감, 압박감, 두려움 같은 감정을 빛내며 올리버를 어려워한다는 점이었다.
마탑 내에서도 해결사 데이브의 소문이 어느 정도 퍼진 걸 고려하면 자연스러운 일이긴 했다.
올리버는 그런 비서를 무시하고 문을 열고 들어가고픈 욕구를 참으며 멈춰 섰다.
“예.”
순순히 따르는 올리버의 태도에 비서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안도의 한숨을 쉬곤 자기 할 일을 했다.
“혹시······. 약속을 잡고 오신 겁니까? 그랜드 마스터와는 미리 약속을 잡아야지만 면담할 수 있습니다.”
“아······. 죄송합니다. 사정이 급해 약속은 잡지 못했습니다. 언제쯤 하면 될지요?”
“최소한 전날에는 해주셔야-”
-삐익.
비서가 난감하게 설명하던 중 갑자기 통신장치가 울렸다.
비서 책상에 설치된 그랜드 마스터실과 직통 통신장치로, 비서는 다급히 책상 앞으로 가 버튼을 눌렀다. 잠시 후, 멀린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들여보내게.]
“아······. 예, 알겠습니다.”
비서는 대답과 동시에 정중히 문을 열어줬고, 올리버는 그런 비서에게 인사하며 안으로 걸어갔다.
“갑자기 실례해 죄송합니다.”
“······.”
마땅히 할 말이 없는지 침묵하는 비서.
그런 그를 지나쳐 올리버는 과거보다 간소해진 생명학파 그랜드 마스터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곳엔 과거보다 줄어든 서류 더미와 씨름하는 멀린이 앉아 있었다.
“어서 오게.”
“오랜만입니다. 어르신.”
올리버는 멀린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
쪼르르륵.
올리버가 등장하자 멀린은 잔을 두 개 꺼내 커피를 따랐다.
아주 여유로운 모습. 그러나 올리버는 보채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해봤자 뭐하나 해결되지 않는 걸 이미 알았기에.
지금 필요한 건 차분함과 준비였다.
‘그런데도 한편으로는 보채고 싶은 욕망이 드네.’
올리버는 머리와 가슴이 따로 노는 듯한 신비한 기분을 느끼며 멀린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다행히,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정말 빨리 오더군. 탑 입구에서부터 여기 그랜드 마스터실까지.”
“어떻게 아셨습니까? ······아, 건물 전체에 마력을 퍼트려 감시하셨습니까?”
“아니, 그거보다는 좀 더 편한 방법을 썼지.”
올리버의 추측에 멀린이 대답하더니, 업무용 책상 아래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딸깍 소리와 함께 책상 주변으로 마력이 퍼지더니, 생명학파의 탑 곳곳을 감시하는 영상 수십 개 떴다.
“······이런 취미가 있으셨습니까?”
“아니, 테어도어 때부터 있었던 거니, 오해 살 만한 소리 하지 마······. 뭐, 편리해서 쓰고 있긴 하다만.”
멀린이 마력을 조작해 영상을 뒤로 돌렸다.
마력으로 이뤄진 영상 위로 방금 전 이곳으로 오기까지 올리버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그 어디에도 시선을 주지 않고, 복도 한가운데를 일직선으로 걷는 올리버의 모습이.
높은 프라이드를 가진 생명학파 소속의 마법사들은 그런 올리버를 보고는 주춤주춤거리며 옆으로 비켜섰다.
영상으로 보니 생명학파 마법사들이 올리버에게 겁먹은 게 더 잘 보였다.
“제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민폐를 끼친 것 같군요.”
“뭐 어떤가? 알아서 비킨 건데. 그래도 생명학파 내에서 보긴 힘든 모습이긴 해. 외부인에게 길을 비켜주는 건······. 생명학파 마법사는 아직도 자기들이 다른 학파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있거든.”
올리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명을 직접 다뤄, 영생과 무한한 힘의 축적을 연구하던 그들이니. 자연스러운 일일 수도 있었다.
“제가 해결사로 활약하고, X구역에 사업체도 세워 그런 게 아닐까 합니다.”
“마탑의 오만함을 너무 쉽게 보는구만. 이들의 자신감과 오만은 그 정도로 꺾이지 않네. 그래봤자, 뒷골목 건달에, 돈이나 만지는 인간이라 생각하지. 필요하다면 잠시 비위는 맞춰도 속으로는 인정하지 못하네.”
“그럼, 어르신 덕분 아니겠습니까? 제 임시긴 해도 스승님이지 않습니까.”
“동시에 실험동물로 인지하는 사람도 있지. 뭣보다 뒷배는 그 사람 자체에 두려움과 존중을 끌어내는 데 한계가 있어.”
올리버는 지나오면서 본 사람들의 감정을 떠올리며 납득했다. 확실히 생명학파 내 마주친 사람들은 올리버의 뒷배인 멀린이 아닌, 올리버 자체에 두려움을 품었다.
“······잘 모르겠군요.”
“소문이 퍼져서 그렇네. 아직은 확실한 게 아닌 카더라 수준이지만.”
올리버는 작은 불안감을 느꼈다.
“뭐죠?”
“네가 손가락인 퍼펫과 맞서 싸웠다는 소문······. 아무래도 진짜인가 보구만.”
올리버의 반응을 살펴본 멀린은 예상했다는 듯 말했다. 오히려, 예상 밖인 건, 올리버의 심심한 태도였다.
“예······. 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평소의 올리버라면 살짝 골치 아파하며 해결책을 물었을 터이건만, 올리버의 반응은 생각 이상으로 건조했다. 마치, 아무래도 좋다는 듯.
그 변화를 멀린은 꿰뚫어 봤다.
“아무래도 많은 일이 있었던 듯하구만.”
“조금요······. 그래서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허, 뭔가?”
“바다 괴물 좀 상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