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흑마법사-565화 (565/633)

565. 탈출 (4)

올리버의 부름에 품 안에 있던 차일드-세컨드(Second)와 포스(Fourth)가 밖으로 나왔다.

동시에 축소화 마법으로 크기를 줄인 송장인형-던칸과 듀란스도 미리 설정해 놓은 술식에 따라 올리버의 품 밖으로 튀어나왔다.

공교롭게도 둘 모두 원래의 조직을 배신한 배신자들.

허나, 아이러니하게도 송장인형이 된 지금은 올리버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후우·········.”

“후읍····!”

찰나와 같은 짧은 순간 올리버는 볼 수 있었다.

축소화 마법이 풀리자 원래 모습으로 돌아간 송장인형-던칸과 듀란스를.

차일드-세컨드와 포스는 각각 자신의 송장인형인 듀란스와 던칸 안으로 들어갔고, 들어가자마자 호흡을 들이키고 뱉더니 움직였다.

첫 번째로 움직인 것은 송장인형-듀란스 안에 들어간 세컨드였다.

삼십 대 초반의 미형의 여성형 송장인형은 마법사답게 마법을 이용. 디디고 있던 지면을 조작해 거대한 돌기둥을 만들고 그 위에 올라가 고지를 점유했다.

그리고는 고유 특기인 신체조작을 이용해 어깻죽지에 각각 두 개의 새 팔을 돋아나게 했다.

우두두두둑!!

뼈와 살이 재조립되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울리며, 팔이 총구형태로 변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생긴 여섯 정의 총기.

듀란스의 몸에 난 미세한 구멍에서 푸른색 마력증기가 뿜어져 나오며, 팔에 달린 총구가 제각기 푸른색 불꽃을 내뿜기 시작했다.

수십 명의 기관총 사수가 동시에 방아쇠를 당기듯 폭력적인 소음이 공기를 강타했다.

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

총구에서 불을 뿜을 때마다 충격에 공기가 일렁이며, 살점으로 이뤄진 탄환이 공기를 가르고 날아가 사방에서 몰려드는 크리처에게 커다란 총상을 남겼다.

살을 터지고 뭉개는 축축한 소리와 함께 대부분 크리처들의 몸에 거대한 구멍이 생겼다.

어찌나 구멍의 크기가 큰지 사지(四肢)가 나가떨어지는 건 물론, 상반신과 하반신이 분리되고 머리가 완전히 사라지다시피 터지는 크리처도 있었다.

로큘리 대학의 학장에 인육 요리사의 지식을 전수 받고, 생명학파의 그랜드 마스터 테어도어의 살점까지 이식받았기에 가능한 화력이었다.

거기에 보조-송장인형들까지 가세하자 대부분의 크리처들이 먼지처럼 쓸려나갔고, 간신히 총격을 버틴 소수의 크리처는 던칸이 맡아주었다.

테어도어의 살점을 가장 많이 이식받은 던칸은 양쪽 다리에 대량의 마력을 섬세히 모으더니, 그대로 땅을 박찼다.

텅!!

땅을 박차자 후폭풍이 퍼지며 던칸의 모습은 지워지듯 사라졌고, 총격과 포격을 버틴 크리처들 앞에만 순간순간 나타나 톤파를 휘둘렀다.

이완이 만들어 준 살점 톤파가 허공을 가를 때마다 형용하기 힘든 굉음이 울렸고,

굉음이 울릴 때마다 크리처를 말 그대로 찢어져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렇게 두 구의 송장인형이 추가되자 수백 마리의 크리처들이 소멸했다.

그 모습을 본 귀족과 성기사, 경호원은 물론 동물 망토를 뒤집어쓴 소년들 역시 경악하고 말았다.

발목을 잡을 줄 알았으나, 곧바로 상황이 뒤집혔으니.

상황이 정리된 거라 판단한 올리버는 경악한 소년들을 내버려 두고 다시 갈 길을 가려 하였는데, 그때, 곰 망토를 두른 뚱뚱한 소년이 악다구니를 썼다.

“거, 겁먹지 마!! 팬이야말로 진짜 왕자야!!”

역시나 팬의 부하인 듯했다.

수백 마리의 크리처가 단숨에 소멸한 걸 보고도 이런 말을 하다니, 참으로 용감-

‘-한 건 아닌가?’

올리버가 소년들의 감정을 꿰뚫어 보며 생각했다.

수백 마리의 크리처가 쓰러진 것을 보고도 전의를 불태우는 건 용감한 게 맞았지만, 지금 눈앞의 소년은 경우가 달랐다.

두려움을 극복했다기보다, 더 큰 두려움에 떠밀리고 있었다.

사자가 있는 우리에 들어가는 대신, 투견이 든 우리에 들어가는 것과 비슷한.

이 소년들 모두 팬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으아아아악!!”

곰 망토를 두른 소년은 다시 한번 몽둥이에 흑마법을 때려 박아 올리버를 향해 휘둘렀고, 합을 맞춰 여우와 너구리 망토를 두른 소년들 역시 바람총과 나무막대기 총을 다시 겨눴다.

얼핏 장난감 같은 외형이었으나, 늑대-크리처도 단숨에 죽인 위협적인 무기.

올리버는 그 모습을 아주 잠시 가만히 바라봤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처럼.

“죽어라!!”

“죽어!”

“죽어!”

여우와 너구리 망토 소년이 각각 나무총과 바람총을 쏘며 외쳤다.

모두 진심으로, 흥미로운 건 보통 사람들과 달리 악의는 옅었다는 거였다. 살의가 옅은 살인이라고 할까? 올리버가 보기에도 어딘가 기괴한 것 같았다.

[블랙 실드(Black Shield)]

지독한 질병을 머금은 탄환이 닿기 직전 올리버는 검은빛 장막을 만들어 방어했다.

다행히 장막을 꿰뚫을 정도의 위력은 없는 듯했는데, 그때, 곰 망토 소년이 몽둥이로 실드를 내리쳤다.

“죽어라!!”

쾅!

소년이 휘두른 몽둥이에 실드가 산산이 부서졌다.

곰 망토 소년은 그 상태로 다시 올리버를 후려치기 위해 몽둥이를 번쩍 들었고, 올리버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산산이 부서진 실드 파편을 소년들에게 날려 보냈다.

파바바바밧!!

공격과 공격 사이 틈새를 비집고 들어간 날카로운 실드 파편에 소년들이 움찔거렸다.

“·······.”

실드 파편이 소년들의 연약한 살을 난자하려는 찰나, 올리버는 실드 파편을 조작해 밀랍처럼 소년들의 몸을 감싸 구속하는 형태로 바꿨다.

덕분에 소년들은 꼼짝도 못 하는 처지가 되었지만, 몸이 갈가리 찢어지는 신세는 피할 수 있었다.

“·····?!”

“········?”

“뭐야?”

“뭐야?”

실드에 묶인 소년들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하지 못한 채, 제각기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이 순간만큼은 그냥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소년들이었다.

“·······.”

그런 소년들을 아주 잠깐 바라본 올리버는 바로 늑대-크리처를 새로 만들어 송장인형-던칸과 듀란스와 함께 올라탔다.

“헤·····. 안 죽이는 거야?”

올리버가 움직이려 할 때, 귀에 익으면서도 어딘가 달라진 목소리가 들렸다.

“팬 님?”

올리버가 소리가 들린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한 소년이 나무 위에 여유롭게 앉아 있었다···. 이제는 소년이라 하기엔 좀 어색한 구석이 있긴 했지만.

“······오랜만이군요.”

올리버가 ‘모습이 좀 변하셨군요?’라고 묻고 싶은 말을 간신히 삼키며 인사했다.

왜냐면 팬의 모습이 정말 변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보일 정도로 확 바뀐 것은 아니었으나, 팬의 모습은 미세하면서도 어딘가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옅어진 주황빛 머리카락과 탄력을 잃고 주름이 생긴 피부, 변성기가 온 듯한 목소리, 어딘가 변한 분위기가 그 일례.

하지만 그중 가장 큰 변화는 눈으로, 늘 자신감에 차 있던 장난기 가득한 팬의 맑은 눈은 흙이라도 묻은 듯 질투와 집착으로 탁해져 있었다.

신대륙에서 겪었던 일을 생각하면 그리 이상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너무 기묘하면서도 큰 변화라 약간 놀라웠다.

“····역시 약해빠졌네.”

“예?”

“약해 빠졌다고. 거기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넌 애새끼 하나 못 죽일 만큼 나약해 빠졌어. 나였으면 진작에 죽였을 텐데.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뭐야?”

그제야 팬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거기서라면 아마 신대륙을 말하는 것일 터. 그때, 올리버는 팬의 부하 중 하나였던 한 소년. 아니, 소년이라고 부르기도 뭣한 아이를 도와줬다.

머리를 쪼개려던 성기사의 도끼로부터.

의식한 게 아닌 저도 모르게 한 무의식적 행동이긴 했지만. 올리버는 성기사의 공격을 한번 막아줬다.

이상하게도 팬은 그때의 일과 지금 올리버가 다른 소년을 죽이지 않은 사실을 지적하며, 비난하듯 질문했다.

이해할 수 없는 태도에 올리버가 반문했다.

“음·····. 저분들. 팬 님의 부하분들 아닌가요?”

“난 왜 안 죽이는지 물었어.”

팬이 추궁했다. 그 추궁에 올리버는 뒤쪽으로 시선을 돌려 일행을 봤다.

갑작스러운 팬의 등장에 도도하던 귀족들은 겁에 질려 있었고, 성기사와 경호원 역시 긴장이 극에 달했다.

하긴 상대는 수백 마리의 크리처를 아무렇게나 동원한 팬이었으니.

유일하게 아르망만이 이 상황을 흥미롭다는 듯 지켜볼 뿐이었다.

‘어떻게 한다······.’

올리버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고민했다. 팬과 대화를 나누고 싶긴 했지만, 보는 눈이 많은 게 걸렸고, 그렇다고 대화하지 않고 무시하고 이동하자니 리스크가 따랐다.

지금 불안정한 팬의 감정 상태를 볼 때 무슨 일을 일으킬지 예상할 수 없었다.

그렇게 고민한 끝에 올리버는 일단 대화에 응하기로 했다.

“글쎄요. 특별한 이유는 딱히 없습니다······다들·····어리시지 않습니까?”

올리버가 너무 당연한 사실을 이야기했다. 어쩌다 보니 해결사로 란다에 자리 잡긴 했으나, 그래도 선이라는 건 지키고 싶었다. 애까지 죽이는 건 좀 그렇지 않은가?

대답을 들은 팬은 웃었다. 비록, 겉으로일 뿐이었지만.

“킥킥킥····! 진심이야?”

“아마도요····. 보시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흑마법사의 눈으로 자기감정을 읽어보라 올리버가 말했다. 팬은 눈에 힘을 주더니, 이내 분한 감정을 빛냈다. 아무래도 읽지 못한 눈치였다.

그럼에도 그는 읽은 척 거짓말했다.

“거 참, 착하네····. 상이라도 줘야겠어?”

“아뇨, 아뇨. 말씀은 감사하지만, 과찬입니다. 전 딱히 착하지도 상 받을 일도 하지 않거든요.”

다급한 와중이었지만, 올리버는 저도 모르게 진심으로 말했다.

착하다고 하기엔 자신은 너무 문제가 많았다.

누가 굶어 죽어도 수프를 나눠주지 않고 홀로 먹고, 흑마법을 배우는 과정 살인을 한 건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올리버는 자신의 행적이 이기심으로 가득 찬 걸 인지하고 있었다.

편의를 위해 해결사로 사회에 첫발을 뗐고, 필요하면 살인도 마다하지 않았으니. 어차피 뒷세계에 온 사람들. 목숨 내놓고 사는 사람들이란 이유로.

그 외에도 올리버는 자신의 무수한 흠결을 가지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었다.

‘가령, 감정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다 지하에 사는 선량한 가족들을 겁에 질리게 한다던가.’

그런 올리버가 착하다? 특별하다는 단어처럼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거기다 방향성도 목표도 없네.”

올리버의 대답과 태도를 관찰한 팬이 비난하듯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너에겐 흑마법사가 응당 가져야 할 욕망이 없어. 그게 가장 기본인데.”

올리버는 반박하지 못했다. 욕망이 없는 게 무엇 있겠느냐마는, 흑마법이란 학문은 그중에서도 욕망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학문이었다.

부, 힘, 혹은 개인적인 소망과 같은.

호텔의 화려함을 보고 흑마법 실력을 갈고닦은 조셉과 힘을 얻기 위해 조셉의 제자로 들어갔던 마리, X구역에서 살아남기 위해 파이터 크루에 들어간 조가 그 대표였다.

“근데, 넌 그런 게 없어. 아무것도 없다고.”

“······흑마법이란 학문이 예쁘고 신기했거든요.”

“거참 웃기는 대답이네. 난 목표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넌 예쁘고 신기하다고 대답하다니. 예쁘고 신기한 게 목표야?”

“그러면 안 되는 겁니까?”

“당연히 안 되고말고! 그건 감상이거든! 목표라는 건 말이야. 아주 간절하고 필사적인 거야! 인간답게 살고 싶다거나, 더 나은 존재가 되고 싶다거나·····. 너처럼 예쁜 꽃 보는 듯한 태도는 안 되지·····. 그건 불공평한 거잖아?”

올리버가 그 말에 아무 말도 못 했다.

확실히 올리버에겐 그런 간절함이 좀 부족한 구석이 있었으니.

그러자 팬이 반응했다.

“아! 내 말에 공감하는구나 그렇지! 이제 좀 말이 통하네······! 간절한 자가 가지는 게 맞는 거잖아? 방향성과 의지도, 간절함도 없는 놈보다, 확고한 방향성과 의지, 간절함을 가진 사람이······!!”

맥락 없이 이어지던 대화의 흐름이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히자, 올리버는 팬이 하고자 하는 바가 대충 뭔지 이해하기 시작했다.

올리버는 뒤쪽에 있는 일행들을 다시 보며 입을 열었다.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건지 얼추 이해할 것 같습니다. 전 팬 님께서 목표하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니-”

-촤롸라라라랑!!

허공에 어둠이 맺히며 그 사이에서 갈고리가 달린 쇠사슬이 날아들었다.

올리버는 반사신경을 이용해 쿼터스태프로 쇠사슬을 막았다.

신대륙에서 한 번 본 적 있는 쇠사슬이었다.

팬의 그림자 크리처와 어둠, 인간의 영혼을 재료로 만든 쇠사슬로, 팬은 이 쇠사슬을 이용해 불타버린 자를 제압하려 했었다.

비록, 불타버린 자의 압도적인 힘에 실패로 돌아가긴 했으나, 그가 저항하기 전까지만 해도 몸을 꿰뚫고, 포박하는 등 나름대로 선전을 펼쳤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호흡만으로 사람을 불태워 죽이는 불타버린 자의 힘을 직접 본 올리버로서는 이 쇠사슬을 무시할 수 없었다.

꾸우우우우······!

그 증거로 쿼터스태프로 막은 쇠사슬의 압력은 상당했다.

인육 요리사의 손바닥 살점을 먹어, 초인적인 힘을 가지게 된 올리버 기준에서도 무시하지 못할.

“힘이 좋은데?”

“요즘은 쉬고 있지만, 운동을 조금 했거든요.”

“오, 그럼 얼마나 열심히 운동했는지 살펴볼까!!”

팬이 소리치자 허공에 이슬처럼 맺힌 어둠이 먹물처럼 퍼지며 주변을 완벽하게 뒤덮었다.

흡사, 어둠으로 이뤄진 감옥.

그 감옥에선 거대한 대못과 꼬챙이, 가시가 달린 목줄, 아이언 메이든, 갈고리가 달린 쇠사슬 등 무수히 많은 고문 기구가 튀어나오려고 했으나, 그때, 올리버는 그림자를 깨워 어둠으로 만든 장막을 먹어 치우게 했다.

잠에서 깨어난 그림자는 순식간의 팬이 펼친 어둠의 장막을 먹어 치웠고, 여세를 몰아 팬을 공격하려 했는데, 그때 팬의 얼굴을 본 올리버는 순간 멈칫하고 말았다.

공격이 무위로 돌아갔건만 당황하긴커녕 예상했다는 듯 팬이 반응했기에.

마치, 이 정도는 어느 정도 예상했다는 듯.

그리고는 팬의 시선이 어딘가로 향했고, 올리버도 저도 모르게 그쪽을 향해 시선을 움직였다.

그 순간 올리버는 볼 수 있었다.

별장 인근에 있던 호수에서 보았던 물고기 크리처를.

놀랍게도 해당 크리처들은 두더지처럼 땅을 허물어 호수의 물을 이곳으로 끌어왔다.

이게 가능한 건가 싶었으나, 그러한 의문은 거대한 호수 아래에서 솟아오른 거대한 파충류의 손에 의해 곧 사라지고 말았다.

거인조차도 작게 느껴지는, 하늘조차 뒤덮어 인위적인 어둠을 만드는 그 거대한 크기와 미세하게 느껴지는 불타버린 자의 기운에.

올리버는 본능적으로 저것이 최근 신문에 나온 바다 괴물이라는 걸 직감했다.

“레비아탄. 후려쳐.”

***

삐이이이이이·········!!

뿌연 흙먼지가 사방에 나부끼고, 하늘과 땅이 반전, 땅은 흔들거리며, 알 수 없는 이명이 올리버의 귀를 가득 채웠다.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기억나는 건 땅이 무너지며 생긴 거대한 호수와 그 호수 아래에서 나타난 거대한 파충류의 손. 그리고 그 손을 향해 명령하던 팬의 목소리뿐이었다.

후려치라는.

놀랍게도 거인보다도 거대하며, 하늘조차 완전히 가린 재앙(災殃)과 같은 팔은 팬의 목소리에 반응.

움찔움찔거리더니 이내 누군가에 의해 조종이라도 받는 듯 억지로 움직여 올리버와 그 일행이 있는 지면을 후려쳤다.

느리고, 정확성도 떨어진 공격이었지만, 수백 개의 철갑을 겹친 듯한 비늘이 다닥다닥 붙은 거대한 팔은 그것만으로 재앙이라 하기 충분했다.

굴착기로 판 듯 움푹 들어간 지면과 피를 흘리며 쓰러진 무수한 사람들, 그런 그들을 치료하는 성기사, 올리버와 같이 파충류의 손을 막다 박살 난 송장인형들이 그 증거였다.

‘던칸이 거대화한 주먹을 내질렀고, 듀란스는 대포를 쐈고, 보조-송장인형들은 포격했지.’

산산조각난 송장인형을 보자 올리버는 파충류의 손이 내려치기 전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떠올렸다.

송장인형들에게 할 수 있는 최강의 공격을 하게 했고, 올리버 역시 그림자-크리처와 함께 파충류의 손을 필사적으로 막았다.

그저 압도적인 크기와 불타버린 자의 기운이 깃든 힘에 무시당했을 뿐.

대응할 시간이 부족했다 하더라도 엄청났는데, 그 기억까지 돌아오자 두 가지 의문이 생겼다.

첫 번째는 지금이 공격하기 딱 좋은 상황임에도 왜 공격하지 않는 지였고, 두 번째는 제인이 어디 갔냐는 거였다.

“여기다!”

승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올리버가 고개를 홱 돌리자 크리처의 우악스러운 손에 붙잡힌 제인과 그런 제인 옆에 선 팬, 곰, 여우, 너구리 망토를 두른 소년들이 보였다.

올리버가 파충류의 거대한 손을 막는 데 실패한 사이 제인을 납치한 거였다.

상상도 해보지 못한 그 광경에 올리버의 눈은 살짝 커졌고, 동공은 쪼그라들었다.

사람도, 짐승의 것도 아닌 듯한 눈.

그 모습에 소년들은 겁에 질렸으나, 팬만큼은 미소를 지었다.

아주 아주 만족스럽다는 듯이.

“이제 너도 간절해 봐.”

올리버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팬은 그 상태로 너구리 망토를 두른 소년 하나만 놔둔 채 어둠을 매개로 한 포털을 열어 올리버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올리버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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