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7. 말도 안 되는 제안 (1)
성기사의 호출에 올리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을 들은 성기사는 아무도 모르게 은밀히 올리버를 데려가려 하였으나, 올리버는 그의 뜻에 따르지 않고 제인을 작게 속삭여 불렀다.
“제인 아가씨.”
“예.”
“······?!”
아르망이란 거물에게 시선이 빼앗겼음에도 제인은 올리버의 부름에 바로 반응했고, 성기사는 깜짝 놀랐다. 그도 그럴 게, 몰래 올리버를 데려가려고 했으니.
그러거나 말거나 올리버는 자기 하고픈 대로 했다.
“잠시 볼일이 있어 실례 좀 하겠습니다. 괜찮을까요?”
눈치 빠른 제인은 그 말을 듣자마자 자기 위치에서 벗어난 성기사를 발견, 눈을 마주쳤다.
당황한 성기사.
제인은 그 찰나와 같이 짧은 순간 구체적이진 않으나 뭔가를 눈치챘고, 올리버에게 캐묻는 대신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여줬다.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들었음에도 이토록 배려해주다니. 올리버는 고마움을 느낄 따름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제인은 괜찮다는 듯이 미소로 대답을 대신할 뿐이었다.
딱. 딱. 딱.
뚜벅. 뚜벅. 뚜벅.
제인과 인사를 주도 받은 뒤 올리버는 파티장 내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성기사를 따라 걸어갔다.
모두의 시선이 아르망에게 쏠린 터라 딱히 신경 쓸 건 없었다.
“조용히 따라오란 뜻이었습니다.”
파티장 1층 구석진 곳으로 이동하던 중 성기사가 나직이 말했다. 올리버가 이에 답했다.
“죄송합니다. 다만, 일행에게는 말씀드리는 게 예의라도 생각해서요.”
성기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납득했다. 그는 올리버를 보며 경계심과 미묘한 의문을 빛냈으나, 그럼에도 성기사치고는 상당히 우호적인 감정이었다.
“······틀린 말씀은 아니군요. 지금 만나실 분에게도 그러한 예의를 지켜주시길 바랍니다.”
올리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어디로 가는 건지 여쭤볼 수 있겠습니까?”
올리버가 갈수록 구석지고 허름해지는 복도를 보며 물었다.
가는 길에 불만이 있는 건 아니나, 파테르교와 갈로스의 고위직을 겸임하는 거물을 만나러 가는 자리치고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기사도 그 생각을 읽었는지, 한 지점에 멈추며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시죠. 이쪽 길이 맞으니.”
그와 동시에 성기사는 벽돌이 드러난 벽의 한 부분을 눌렀다.
푸욱.
누른 부분의 벽돌이 깊숙이 들어가며, 그 주변의 벽돌이 안쪽으로 말려 들어가듯 들어가 새로운 길이 열렸다.
비밀통로였다.
“따라오시죠.”
익숙한 듯 비밀통로로 들어가는 성기사. 한두 번 이용한 태도가 아니었다.
올리버는 성기사의 말대로 따라갔고, 곧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마주했다.
척 봐도 아주 깊었으나, 올리버는 개의치 않고 성기사를 따라 내려갔다.
‘실용적인 곳이네.’
올리버가 비밀통로 안쪽을 살피며 평가했다.
적당히 크기의 통로와 딱 필요한 만큼의 마감처리. 그림이나 장식품 같은 것은 일절 보이지 않았다.
말 그대로 비밀통로의 역할에만 충실하였는데, 적잖게 이어진 계단과 계단이 끝난 후 나타난 길쭉한 복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딱 비밀통로의 역할에만 충실하였다.
이 정도 비밀통로를 만드는 데 제법 돈이 들었을 걸 예상할 수 있었지만, 딱 필요한 만큼의 돈을 쓴 것도 알 수 있었다.
돈을 아끼진 않지만, 낭비하지 않는다고 할까?
올리버는 이 비밀통로를 지은 사람, 혹은 주인이 대충 어떤 성향일지 예상 갔다.
‘함부로 예상하진 말자. 내가 제인 아가씨나, 포레스트 님 같은 재주가 있는 건 아니니.’
올리버가 자기가 아는 수완가들을 떠올리며, 복도에 비해 화려한 문 앞에 섰다.
올리버를 안내한 성기사는 올리버가 흑마법사임에도 불구, 친절히 문을 열어줘 안으로 들어갈 것을 제안했다.
끼익.
“먼저 들어가서 기다리시지요. 곧 오실 겁니다.”
성기사는 끝까지 누가 올 것인지 이야기해주지 않았으나, 올리버는 묻지 않고 순순히 안으로 들어갔다.
누가 올 것인지 대충이나마 알 것 같았고, 또, 안을 한번 둘러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음, 예상 밖인데.”
성기사의 말대로 문 안으로 들어온 올리버가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이곳으로 오기까지 둘러본 복도에 비해 내부가 화려하긴 했으나, 거기에 놀란 것은 아니었다.
접견실(接見室)은 어느 정도 꾸미는 건 사치가 아닌, 예의라는 걸 포레스트와 일할 때 배웠으니까.
올리버가 놀란 건, 접견실 안에 있는 무수히 많은 책이었다.
고풍스럽지만, 심플한 디자인의 책장에 다닥다닥 빈틈없이 꽂힌 책들.
귀족과 자산가들이 모여 파티 중인 별장 아래에 있는 이곳 지하실에는 수백 권의 책이 있었으며, 책들은 척 보기에도 사람의 손때를 탄 흔적이 보였다.
그저 장식을 위해 가져다 놓은 게 아니라는 증거.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건 책의 종류였다.
사회, 정치, 경제, 종교와 같은 교양서적뿐 아니라, 마법과 같은 전문 서적도 있었는데, 그 구성이 제법 인상적이었다.
적당히 유명한 책을 가져다 놓은 게 아닌 전문가가 아니면 이해하기 어려운 책도 체계를 갖춰 꽂혀있었다. 책 구성만 보면 마탑 도서관이라고 착각할 정도.
허나,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은 흑마법 서적도 있다는 점이었다.
화기, 조작, 질병, 창조 모든 계열의 책들.
그뿐 아니라 흑마법사의 개인 연구일지, 일기 등도 있었다.
그중 몇몇 권은 올리버도 읽고 싶을 정도로 희귀한 책도 있었다.
“관심 있으신가?”
갑자기 들린 목소리. 올리버는 당황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예, 흥미로운 책들이 많군요.”
“다행이군. 구하느라 적잖은 애먹은 책인데 헛수고는 아니었나 보군······. 관심 있는데 왜 읽지 않았는가?”
“관심은 있지만, 주인의 허락 없이 읽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것이라 배워서요······. 철갑 성기사님.”
올리버는 책이 빼곡히 꽃인 책장 사이에서 나와 한 남자를 바라보며 답했다.
그는 다름 아닌 귀족, 자산가 신분 고하를 망라하고 모두의 이목을 끈, 파테르교의 추기사제이자, 갈로스의 재상 아르망이었다.
넓은 이마와 큰 눈망울, 멋들어진 수염을 지닌 온화한 인상의 중년 남성은 올리버를 보며 대꾸했다.
“전하(殿下)라 부르게. 그게 예의에 맞는 거니.”
“예, 전하.”
올리버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하더니,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혹시, 손등에 키스도 해야 합니까?”
올리버가 아르망 추기사제가 나타났을 때, 벌떼처럼 몰려든 귀족들을 떠올리며 물었다.
도도하고 자존심 높던 그들은 놀랍게도 추기경이 등장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그의 주변으로 몰려들어 잘 보이고 싶다는 욕망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 그 손등 위로 입을 맞췄다.
돈을 최고의 가치로 치는 자유도시 란다에서 지낸 올리버로서는 약간 놀라운 광경이었다.
“하고 싶나?”
예상과 다르게 아르망은 대답 대신 질문했다.
“솔직히 대답드려도 됩니까?”
“그래.”
“딱히 하고 싶진 않습니다.”
란다에서 살아온 경험 탓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탓인지 올리버가 그리 답했다.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춰 인사하는 것까지는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예의였지만, 사람이 사람에게 무릎 꿇고, 손등에 입을 맞추는 건 뭐랄까? 좀 과한 거 같았다.
사람 대 사람이 아닌. 마치 다른 종(種)을 대하는 거 같아.
그게 예의고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하겠지만, 굳이 선택권을 준다면 거절하고 싶었다.
다행히 아르망은 해당 사실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럼, 하지 말게. 나도 남자가 내 손등에 입 맞추는 걸 즐기진 않거든.”
“······혹시, 농담입니까?”
“농담이지만 진심이기도 하지. 그쪽은 소문대로구만.”
소문대로? 아르망은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어깨에 걸치고 있던 붉은빛 모제타(Mozeta)를 벗어 걸고는 좀 더 편한 복장이 돼 의자 위에 늘어지듯 앉았다.
“후우······. 좀 살겠군.”
올리버가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봤다. 종교인을 많이 알거나, 성기사를 잘 아는 것도 아니지만, 본능적으로 눈앞의 남자가 보통의 종교인이나 성기사와 그 궤가 다르다는 걸 직감했다.
낯설고, 신선했다.
그런 올리버와 아르망이 눈을 마주쳤다.
“왜 그러나?”
“······피곤해 보이셔서요.”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올리버는 그중 가장 쓸데없는 말을 했다.
하고 싶은 말이 오히려 너무 많아 이런 것으로, 아르망은 바보 같다는 듯 대꾸했다.
“너무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내 직위 못 들었나?”
“아뇨, 들었습니다. 파테르교의 추기사제이자, 갈로스의 재상이시라고요.”
아르망이 올리버의 말을 받아내듯 이어 말했다.
“-그 말은 즉 선택받은 국가 중 두 번째로 넓은 영토를 가진 이 나라의 모든 정무(政務)와 신전의 정무(政務)가 나한테 온다는 거지. 안 피곤할 리가 있나.”
올리버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고로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일수록 일이 더 많은 법이니. 그건 시(市) 내무부 장관인 폴 카버도, 마탑의 교수인 케빈, 중개인이자 사업가가 된 포레스트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의문이었다.
“그런데 어찌해 밀리유와 함께 인육 요리사의 유산을 직접 찾으러 오셨습니까?”
“오, 알아봤나?”
아르망은 놀랐다는 듯 말하였으나, 올리버는 그가 이미 예상해 놀라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이유는-
“흑마법사의 눈 덕분입니다.”
올리버가 자기 눈을 가리켰다.
“사람마다 가진 고유의 감정과 생명력을 읽을 수 있거든요. 그래서 여기 나타나셨을 때 알아봤습니다.”
그랬다. 올리버가 아르망이 철갑 성기사라는 걸 눈치챈 건 흑마법사의 눈 덕분이었다.
사람의 지문, 나무의 나이테처럼. 사람의 감정과 생명력은 고유의 기운, 결 같은 것이 있어 사람마다 다 달랐다. 그건 가족이나 형제도 마찬가지였다.
“대단하군.”
아르망이 감탄했다. 아까와 달리 약간 진심이 담겨 있었다.
“칭찬 감사합니다.”
“진심이야. 그 정도로 정확한 흑마법사의 눈은 잘 없거든. 모르나?”
올리버는 침묵했다.
“하긴, 보통 진짜 천재들은 자기가 얼마나 천재인지 잘 모르지. 흑마법사의 눈이 감정을 꿰뚫어 본다고 하나, 보통은 형태만 간신히 읽는 수준. 얼마나 화가 나고 기쁜지 제대로 읽는 건 소수고, 감정을 통해 생각을 읽고, 사람을 구별하는 건 더더욱 소수지. 애당초 그게 가능했다면 그 누가 쉬이 흑마법사를 무시할 수 있었겠나?”
아르망이 흑마법에 조예가 있는 듯, 청산유수처럼 말했다. 더 놀라운 것은 그저 되는 대로 지껄인 게 아닌, 학식에 기반해 말했다는 거였다.
해당 사실은 올리버도 공부를 통해 안 것이었으니까. 쉽사리 대답하지 못한 건 파테르교 사람이 이를 훤히 알고 있어 놀랐기 때문이었다.
꽤 당황스러웠다. 파테르교 사람이 이 정도로 흑마법에 조예를 보이다니. 허나, 곧 아까 전 본 흑마법 서적을 떠올리며 납득했다.
겉표지마저 반들댈 정도로 읽었다면 그 정도 학식을 쌓은 건 전혀 이상하지 않을 터였다.
“성기사 출신이라 들었는데, 흑마법에 대해 잘 아시는군요.”
“성기사니까. 쥐를 잡으려면 쥐에 대해 잘 알아야 하고, 늑대를 잡으려면 늑대에 대해 잘 알아야 하지. 어디 주로 거주하며, 습성은 뭐고, 뭐가 치명적이고, 뭐가 효과적인지.”
간단하지만 명료한 대답에 올리버가 물었다.
“말 되는군요······. 혹시, 절 여기 남게 하고, 부르신 이유도 그것과 관련된 겁니까?”
“들은 것과 달리 눈치가 빠르군. 정답이야. 제안하고 싶은 게 있네.”
“뭐죠?”
“자네가 인육 요리사의 빈자리를 채울 생각이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