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9. 새로운 국면 (1)
밀리유와 도굴꾼 오페르트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올리버는 유유히 성채 앞으로 걸어가 누구보다도 자연스럽게 성채 문을 닫고 열쇠를 돌려 잠갔다.
철컥.
자물쇠가 걸리는 소리가 울리자 모두의 시선이 쏠렸고, 뒤이어 올리버는 선언했다.
“도굴꾼 오페르트 씨 말고 다른 분들도 모두 나와주시겠습니까? 제가 좀 피곤해서요. 안 나오시면 이 열쇠 부러트리겠습니다.”
그랬다. 올리버는 인육 요리사의 금고로 갈 수 있는 유일한 열쇠를 부러트리겠다고 선언했다.
처음엔 다들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해 침묵했으나, 올리버가 열쇠를 살짝 구부리자 곧 말뜻을 이해 제각기 반응을 보였다.
“······어? ······어!?”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이완과 밀리유였다. 왜냐면 올리버가 진짜 저지를 인간이라는 걸 알았기에.
그런 아군의 반응 때문인지, 곧이어 오페르트 말고도 상황을 지켜보던 이들이 하나둘 그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곰과 사슴, 늑대, 개로 이뤄진 짐승 떼로, 시야 범위에 들어오자 옷을 벗듯 짐승의 모습을 탈피. 사람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뿜어져 나오는 녹색 자연의 힘으로 볼 때 드루이드 같았는데, 그들은 몸에 걸친 가죽의 힘을 빌려 짐승으로 변한 듯했다.
‘엔조이먼트인가? 전부 잡힌 줄 알았는데······. 거기다 몸에 지닌 기운도 깊고.’
올리버가 드루이드를 보고 생각하는 사이, 다른 이들도 하나둘 그 모습을 드러냈다.
땅 아래에서 위로 솟아오른 갈색과 녹색이 뒤섞인 복장을 한 마법사 한 무리와 그림자를 이용해 주변의 어둠에 숨어 있던 흑마법사 한 무리. 이질적인 복장을 한 용병 부대 등.
오페르트를 말고도 넷 정도 되는 무리가 숨어 있었다.
모두 상당한 실력자들이었다.
특히, 갈색과 녹색이 뒤섞인 복장을 한 마법사는 그 기운으로 볼 때 가이아 학파인듯했는데, 하나하나 마스터 급이었다.
지상으로 나오자마자 흙과 돌로 이뤄진 거대한 골렘을 다수 만든 게 그 증거. 심지어, 골렘마다 전위와 후위로 역할이 나뉘기까지 했다. 그만큼 깊이가 다르다는 이야기.
그들의 모습을 본 루시앙이 말했다.
“허······. 가이아 학파 마법사 님들 아니요? 재정적으로 어렵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설마, 마법사가 흑마법사의 유산을 차지하겠다니······. 마법의 시대라는 게 무색해질 정도로 슬프구려.”
전통 가이아 학파에 대해 아는 게 있는지 루시앙이 마법사를 향해 말했다.
놀라긴 올리버도 매한가지였다. 마법사도 있을 줄은 알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길거리 마법사.
설마, 학파에 정식으로 소속된 마법사까지 있을 줄은 몰랐다.
루시앙의 말을 들어봤을 때 재정적으로 힘든 듯했는데, 그렇다 해도 그 이유 하나만으로 온 건 왠지 이상했다.
‘아니지. 돈은 중요한 문제니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지······. 그건 그렇고 다들 바깥에서 대기하던 사람들인 거 같네.’
올리버가 잠자는 숲을 훑어봤을 때를 떠올리며 생각했다. 당시에 보지 못한 사람들뿐.
그 말은 즉, 잠자는 숲 바깥인, 울창한 숲 외곽에서 대기하다 잠자는 숲이 사라지자 서둘러 온 사람이라는 거였다.
루시앙의 예의 바른 비아냥을 들은 마법사가 근엄하게 꾸짖었다.
“일개 갱 주제 멋대로 우릴 판단하지 마라. 우린 한낱 재물을 위해 온 게 아니니.”
마법사는 진심이었으나, 밀리유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했다.
“평소 콧대 높이 굴다 쥐새끼처럼 기어 나온 인간이 할 말은 아닌 거 같은데?”
“바보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군. 비겁한 게 아니라 영리한 거지. 자고로 사냥은 상대가 가장 약해졌을 때 하는 법. 그러지 못하는 게 무능하고 어리석은 거지.”
짐승의 가죽을 걸친 드루이드가 맞받아쳤다.
그러자 방해꾼들의 등장에 불쾌해진 도굴꾼 오페르트가 끼어들었다.
“그 쪽에게 한 말도 아닌데······. 뭐라 하는 거 보니 찔리나 봐?”
“뭐?”
“아닌가?”
오페르트의 개입으로 곧 방해꾼들은 서로에게 으르렁대기 시작했다.
도굴꾼 오페르트와 엔조이먼트 드루이드는 서로 말싸움을 펼쳤고,
전통 가이아 학파 마법사는 흑마법사를 견제.
용병은 겉보기에는 별다른 마찰이 없었으나, 그 누구보다 경계를 받았다. 밀리유 다음으로 수가 많았으니, 당연한 거였지만.
다들 침묵과 비난, 언쟁을 통해 자기들이 유리한 상황을 만들려고 하였다.
하긴 밀리유를 포함하면 총 육파전(六巴戰).
집단이란 특성과 난전이라는 특수성까지 고려하면 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갖춘 이들이 있다 하더라도 피해는 피할 수 없었다.
특히, 사방이 적이면 변수와 위험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졌으니.
밀리유의 각 보스는 그러한 점을 고려해 움직이려 하였는데, 그때, 이를 눈치챈 용병 대장이 제안했다.
“일단, 저들부터 쓰러트리고 생각하는 게 어떤가?”
소모적이고 얄팍한 선동이 아닌 구체적인 목표와 방향성을 가진 의견에 모두의 이목이 쏠렸다.
이를 감지한 용병대장이 계속해 말을 이었다.
“지치고 다쳤다지만 여기서 가장 숫자가 많은 건 저쪽 밀리유. 열쇠를 가진 것도 밀리유······. 우리끼리 핏대 세워봤자 가장 재미를 보는 건 역시 밀리유인 거 같은데. 응?”
단순하지만 그만큼 일리 있는 주장에 모두의 신경이 밀리유를 향해 꽂혔다.
그의 말대로 현재 숫자가 가장 많은 건 밀리유. 열쇠를 가진 것도 밀리유, 이 상태로 난전에 들어가면 유리한 것도 밀리유였다.
얼핏 열쇠를 가진 밀리유가 모두의 목표가 될 것 같았지만, 빼앗으려는 자들끼리도 서로 견제해야 하기에 쉬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애당초 이걸 노리고 전부 나오라 한 거겠지.”
용병대장이 올리버를 바라보며 날카롭게 말했다. 네 얕은 속셈은 다 눈치챘다는 듯.
이에 올리버는 손사래를 칠 뿐이었다.
“아닙니다. 그런 생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흥미로운 이야기니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
남의 일인 듯 무덤덤하고 차분한 올리버의 대답에 용병대장이 아닌 척하면서도 머쓱한 감정을 빛냈다.
“······거짓말을 잘하는군.”
“거짓말 아닙니다. 그냥 여러분 모두에게 드릴 말씀이 있어 부탁드린 것뿐입니다. 오늘은 좀 피곤해 나오실 때마다 말씀드리기가 힘들어서요······. 양해 부탁드립니다.”
올리버는 이완의 손에 이끌려 울창한 숲에 홀로 버려지고, 레드후드에 이어, 잠자는 숲, 백조 왕자, 퍼펫 등을 연이진 사건을 돌이켜 봤다.
정말 배고프고, 피곤했다······. 이쯤에서 슬슬 쉬고 싶었다.
미묘하게 남들과 궤가 다른 태도에 밀리유를 제외한 모두 올리버를 미묘한 눈빛으로 보기 시작했다.
얼핏 예의 발라 보였으나, 전부 아래로 보는 듯한 오만함이 느껴졌다. 악의 없는 오만함이.
“······건방진 놈이로고.”
올리버의 악의 없는 오만함에 자존심이 강한 마법사가 처음 반응했다. 올리버는 별생각 없이 사과하며 대화를 이어갔다.
“잘은 모르겠지만, 혹시 불쾌하게 해드렸다면 죄송합니다. 생각보다 많은 일이 있어서요······.”
정말 피곤한지 올리버가 한 박자 쉬고 다시 말을 이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미 제가 인육 요리사 님의 유산을 절반 가지기로 했고, 나머지는 제 동업자분들이 가지기로 했다는 겁니다.”
올리버는 당당히 인육 요리사의 유산 중 절반이 자기 것이라 주장했다.
올리버의 활약을 옆에서 본 밀리유는 거기에 그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잠자는 숲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다른 이들은 뭔 헛소리냐는 반응을 보였다.
하긴, 직접 보지 않으면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으니. 몇몇 이들은 비아냥거리는 태도로 밀리유에게 묻기까지 했다.
“지금 저 말이 사실이야? 저런 애송이가 절반이나 가진다고?”
“······.”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의 질문에 밀리유는 침묵했고, 올리버고 앞서 그러하듯 자기 할 말을 계속했다.
“혹시, 저분들이랑 나머지 절반을 나눌 생각 있으십니까?”
올리버가 밀리유 보스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당연히 그들은 고개를 저어 거부했다.
돈 문제를 떠나 갑자기 난입한 쥐새끼들과 몫을 나누는 건 가당치 않은 이야기였으니.
대답을 들은 올리버는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앞을 봤다.
“혹시, 여러분 모두 물러나 주실 수 없겠습니까? 먼저 온 것도 저희, 열쇠를 가진 것도 저희. 유산의 권리는 저희에게 있다고 생각해서요······. 나눠드리고 싶긴 하지만 나눠드리기 싫다고 하시네요.”
그 말에 도굴꾼, 마법사, 흑마법사, 용병, 드루이드 등 방해꾼들이 멍한 표정을 짓다 모조리 웃음을 터트렸다.
분노에 찬 웃음을.
폭탄처럼 터진 웃음소리는 얼마 가지 않아 잦아들며, 곧 차가운 목소리로 변했다.
“고작 그따위 말로 물러날 생각이었으면 나오지도 않았지.”
“그리고 권리는 힘에서 나오고.”
“이거로 확실해졌네. 누구부터 조질지.”
도굴꾼 오페르트의 마공학 장비에서 증기가 뿜어져 나왔고,
마법사는 다수의 골렘을 전진 배치,
드루이드는 신체 일부분을 짐승의 것으로 변형,
흑마법사는 자신의 그림자를 조작해 수십 개의 칼날을 형성,
용병들은 공격 대형을 갖췄다.
올리버의 말에 분노해 최우선 목표를 정한 것. 저들의 빛내는 살의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하나하나 상당한 실력자들. 긴장해야 마땅할 상황이었지만, 앞서 상대한 이들 탓인지, 올리버는 그렇다 할 긴장을 하지 못했고, 밀리유 역시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렇게 양 진영이 충돌하려는 찰나-
-탁.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있던 성기사가 올리버의 어깨를 붙잡아 뒤로 슬며시 당겼다.
예상치 못한 성기사의 행동에 모두가 의문을 품는 와중 성기사는 알 수 없는 위압감을 품으며 이곳의 공기를 주도했다.
“나도 제안하지.”
“······?”
“이대로 조용히 물러나면 굳이 쫓진 않겠다고.”
마치, 도마 위에 생선을 대하듯 성기사가 말했다. 그 당당하고 위엄에 찬 태도에 루시앙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성기사 님?”
성기사란 단어에 사람들이 반응했다.
“성기사?”
“미쳤군······. 성기사라고?”
“성기사도 개입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정말 밀리유와 손을 잡았을 줄이야.”
“말세로구만······.”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비난 섞인 중얼거림. 허나, 성기사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사람이라면 본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본능적으로 비난에 신경 쓰는 법이었건만. 그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보였던 침착한 감정 상태를 유지했다.
정말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그런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성기사의 성법에 영향을 받지 않는 드루이드가 짐승의 것으로 변한 손으로 성기사를 가리켰다.
“어이, 성기사 양반······. 성기사가 힘센 거는 안다만 그래도 혼자서 나서는 건 무리수 아니겠어?”
“······.”
“특히, 누가 뒤져도 알 수 없을 것 같은 숲에서는 말이야. 이런 더러운 일에 관여되면 조사도 제대로 할 리 없고······. 설마, 성기사란 감투 하나만 믿고 이러는 건 아니겠지?”
드루이드는 성기사를 위협했다. 성기사가 강하고 까다로운 상대인 건 사실이었으나, 그렇다 해도 혼자. 명백한 한계가 있었다. 뭣보다 본인은 성법의 영향을 받지 않는 드루이드.
그러나 성기사의 태도는 한결같을 뿐이었다.
“말이 길군. 물러날 건지, 계속할 건지만 답하라.”
노골적으로 내려다보는 태도에 드루이드가 발끈하더니, 그를 선두로 모두 움직이기 시작했다.
드루이드가 성기사를 맡고 나머지 인원이 밀리유와 올리버를 해치우려는 속셈.
이완은 도망치고, 나머지는 모두 전투태세를 갖추는 그때, 성기사가 금으로 만든 묵주를 쥐고 영창했다.
[칼라티오(Calátĭo)]
성기사의 영창에 숲 위 음울한 하늘에서 흐릿한 빛이 비치더니, 곧 상공이 갈라지며 거대한 빛줄기가 주변을 포위하듯 땅 위로 떨어졌다.
흡사, 빛의 폭포수.
올리버조차 흥미를 가질 압도적인 광경에 모두 행동을 멈췄고,
잠시 후, 빛줄기가 약해지자 오십여 명 성기사를 필두로 삼백여 명의 서번트, 십자가를 등에 짊어진 천여 명의 군대가 사방을 포위했다.
순식간에 주변을 포위한 군세에 모두 어안이벙벙해서 하는 와중 성기사가 다시 제안했다.
“투항할 텐가? 죽을 텐가?”
***
뎅! 뎅! 뎅!
어두운 밤. 한 시골 마을에 음울한 종소리가 검은색 연기와 함께 퍼졌다. 뒤이어 성난 파리떼가 물결치듯 날아올라 상공을 뒤덮었다.
소리와 파리떼의 근원지는 마을의 한 입구로, 그곳엔 수십 구의 흑마법사를 허수아비처럼 엮은 골렘-송장인형과 물에 빠진 듯 온몸이 비정상적으로 부푼 흑마법사-송장인형. 그리고 인상 좋은 중년 남성이 서 있었다.
시골에서 여유롭게 산 듯 푸근한 인상에 편하지만 깔끔한 복장을 한.
퍼펫이었다.
“이번에는 공주가 나오셨으면 좋겠는데.”
퍼펫이 골렘-송장인형의 지팡이에 묶여 포획된 왕자 후보 여섯을 보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