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0. 공주와 왕자 (4)
퍽━!
침대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넓은 공간.
그곳에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울렸다.
올리버는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말없이 쓰러진 소녀를 바라봤다.
겉보기에는 십 대 중후반이었으나, 수백 년을 살았고,
수십만 명의 인간에게 바쳐졌으며, 그들을 바친 멸망한 왕국의 공주를.
‘······.’
그녀는 한쪽 머리가 깨진 채 붉은 피를 바닥에 흘리고 있었다.
올리버는 그녀의 눈동자, 표정, 몸을 유심히 관찰했다.
해결사로 일하며 얻은 경험과 전(前) 생명학파의 그랜드 마스터 테어도어에게서 얻은 의학 지식에 따르면 그녀는 지금 죽은 상태였다.
감정과 생명력 역시 꺼져가는 촛불처럼 사그라들고 있었고.
허나, 하나의 왕국을 바쳐 탄생한 잠자는 숲은 그런 공주에게 생명력을 주입. 그녀를 완벽하게 되살렸다.
공주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바닥에 흘렸던 피와 뇌수는 시간이 거꾸로 흐른 듯 다시 머릿속으로 들어갔고, 공주는 다시 생명을 얻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처뿐 아니라 쓰러지면서 묻은 먼지까지 깨끗이.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말이다.
필시 숲의 의지일 터.
참으로 궁금했다. 잠자는 숲과 공주 중 누가 주인이고 노예인지.
그 의문과 짜증을 해소하고자 올리버는 공주를 향해 한쪽 발을 들어 그대로 즈려밟았다.
콰직!!
***
몇 분이나 흘렀을까?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 흘렀다.
클로드의 말처럼 잠자는 숲은 시간의 흐름이 이상해, 오래 있는 것 같으면서도 얼마 있지 않은 이상한 기분이 드는 곳이었다.
아니면 올리버가 공주를 죽이는 데 너무 집중한 걸지도 몰랐고.
“안 아프십니까?”
올리버가 산채로 찢은 공주의 팔을 들어 보이며 물었다.
맞은편에는 터진 토마토처럼 변한 공주가 쓰러져 있었다.
차라리 빨리 죽는 게 나은 모습. 그러나 공주에 그 뿌리를 둔 잠자는 숲은 자신을 구성하는 왕국 사람들의 생명을 하나씩 소비해 공주를 살려냈다.
공주의 의사와 상관없이 이기적이게.
올리버는 벌레 다리를 잡아 뜯듯 뽑아낸 공주의 팔을 바닥 위에 던졌다.
공주의 팔은 버터처럼 바닥 위에 녹아내려 사라졌고, 잠시 후, 원래 자리에 마법처럼 되돌아가 있었다.
신체는 물론 옷까지.
“꼭 인형 놀이 같네요.”
올리버가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되살아나고, 신체를 수복하며, 옷까지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공주를 보며 말했다.
왜냐면 정말 인형 같았으니까.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저절로 고쳐지는 꼴이 말이다.
공주가 잠자는 숲의 주인인 줄 알았건만, 아무래도 그 반대인듯했다.
“그래서 고통도 못 느낍니까?”
평소와 똑같지만, 조금 더 날이 선 올리버의 말투.
그러나 백 번도 넘게 죽은 공주는 처음처럼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할 뿐이었다.
“아뇨, 고통을 느낍니다.”
진심.
“그렇습니까? 비명을 지르지 않아서 안 아픈 줄 알았습니다.”
“제가 비명을 지르는 거로 분노가 풀리신다면 지르겠습니다.”
이번에도 공주는 진심이었다. 그녀는 진실로 올리버의 기분을 풀어주고 싶어 했다. 미안함과 죄책감에 기인해. 그러나 거기에 후회는 없었다.
올리버에게 한 웃기지도 않은 장난질에 대해 조금도 후회도 없었다. 아마, 그때로 돌아가도 다시 할 정도로 말이다.
“······.”
올리버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가면 같은 얼굴로 빤히 바라보며 떠올렸다.
마텔에서 올리버가 미처 도와주지 못한 아이. 콜린을.
“······.”
잘못된 정보로 그 아이는 올리버를 구원자로 알았고, 올리버를 보자마자 구해주러 와서 고맙다 인사했다. 그리고선 부디 자기를 살려달라고 부탁했다. 지옥에 가기 무섭다고 말이다.
허나, 공교롭게도 당시 올리버에겐 콜린을 살릴 능력이 없었다.
사람을 치료하는 능력 따위 키우지 않았으니까.
“·······.”
올리버는 그때 난감함을 느꼈다. 뭔가를 바라는 아이들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괴리로 인해. 구체적으로 설명할 순 없지만, 난감했다.
그래서 올리버는 저도 모르게 콜린에게 고해성사를 제안했다.
그럴 권한이 없음에도 마약성 진통제를 투약하듯, 콜린의 두려움과 불안감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고해성사를 제안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
다행히 콜린은 올리버의 말을 믿어줬다. 죄를 고하고, 용서를 구하면, 천국에 갈 수 있을 거라고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게 올리버의 말을 믿은 콜린은 자신의 죄를 고하기 시작했다.
꽃병을 깨고, 빵을 더 받으며, 떨어진 돈을 돌려주지 않고, 두려워 동생을 구해주지 못한 일을·····.
죄를 고할 때마다 콜린은 고통스러워했지만 동시에 두려움에서 벗어났고, 종국엔 올리버에게 감사를 표하며 잠에 빠졌다. 천국에 갈 수 있을 거라 믿으며 말이다.
올리버도 궁금했다.
신성력도 존재하고, 악마도 존재하니, 분명, 천국과 지옥도 있을 텐데. 과연, 콜린은 어디로 갔을지 말이다.
고해성사를 통해 진심으로 죄를 뉘우쳤으니 천국에 갔을까?
아니면, 흑마법사에게 고해성사해 지옥에 갔을까?
올리버는 알 길이 없었고, 또 깊게 고민하지도 않았다.
콜린은 이미 죽었고, 올리버가 할 수 있는 것도 없었으니. 생각해봤자 피곤할 뿐이었다.
그런 와중에 올리버는 어둠으로 빚어진 콜린을 마주해 그의 외침을 다시 들었다. 그건 너무나도·····.
“······공주님.”
길게 침묵하던 올리버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자기가 느끼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각을 잊으려는 듯.
“콜린을 어떻게 아는 거죠?”
고요한 짜증 속. 올리버가 질문했다.
콜린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라고는 올리버와 멀린을 비롯해 로스번과 아이들, 마텔 연구소 마법사 등 한 줌밖에 안 됐다.
그중 마텔 관련자들은 모두 구속된 상태.
잠자는 숲. 아니, 술식에 묶여 성 안에만 있는 공주가 어떻게 아는지 의문이었다.
“그 예지력으로 본 겁니까?”
올리버가 그림자 인형극에서 본 공주의 예지력을 떠올리며 질문했다. 올리버 특유의 무표정과 무감각한 눈동자가 합쳐지자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압박감이 내뿜어졌다.
폐를 짓누르고, 고개를 들 수 없으며, 종국에 몸이 짜부라질 것 같은.
공주 역시 이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나, 그녀는 애써 미소 지으며 답했다. 역시, 고통에 익숙했다.
“꿈에서 봤습니다.”
“말장난하지 말아 주시겠습니까? 좀 그렇네요.”
“장난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절 예언자, 미래를 보는 자라 하나, 전 그저 꿈꾼 걸 이야기하는 한낱 인간일 뿐입니다. 나약하고, 무력한 인간요.”
진심······. 올리버는 따지고 싶은 게 많았지만, 인내심이 따라주지 못해 곧바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왜······. 왜, 아까 전 그런 장난질을 친 거죠?”
올리버가 자신이 느낀 불쾌감을 곱씹으며 물었다. 정말 궁금해서 말이다. 도대체 무엇을 원하기에·····.
“혹시, 죽고 싶은 감정에 기인한 겁니까”
속이 꿰뚫린 잠자는 숲속의 공주는 잠시 침묵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늘 상대의 말을 존중하고, 경청하던 올리버가 단호하게 부정했다.
공주가 빛내던 피로와 고통, 쉬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을 읽었기에. 그녀는 쉬고 싶어 했다. 어떤 형태로든 말이다.
“쉬고 싶은 건 맞지만, 당장 죽고 싶은 건 아닙니다. 그 전에 제가 해야 할 게 있거든요······. 맹세합니다.”
진심. 그렇다고 올리버의 불쾌함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그럼, 왜 그런 짓을 한 거죠?”
“진솔한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입니다. 불합리한 운명을 짊어진 분이여.”
“왜 날 그런 식으로 부르는 겁니까?”
“정말 알고 싶습니까?”
올리버의 질문에 공주가 되물었다.
그녀의 질문은 숨긴 단검으로 찌르듯 기습적이었고, 올리버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왜냐면 정말 궁금한지 본인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세상 바깥 존재,
위대한 분,
존귀한 존재.
여태껏 올리버를 가리킨 이 수식어는 호기심을 자아내는 한편, 외면하고 싶은 그런 모순된 감정을 일으켰다.
올리버가 자신의 피가 특별한 촉매 역할을 한다는 걸 무의식중에 알았음에도, 신경 쓰지 않았던 것처럼.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올리버는 피하고 맴돌던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눈앞의 공주에 의해. 그것은 참으로 불쾌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그러한 올리버의 감정을 읽은 것인지 공주가 입을 열었다.
“제 행동이 불쾌하셨다면, 다시 한번 다시 한번 사죄드립니다.”
“······나와 진솔한 대화를 나누고 싶은 이유가, 혹시, 제 눈을 통해 그대가 보여준 기억과 관계가 있는 겁니까?”
올리버가 아까 전 본 그림자 인형극을 떠올리며 물었다.
감정과 기억으로 빗어진 그림자를 통해 올리버는 수백 년 전 피리 부는 사나이가 등장했을 때, 사람들이 느꼈던 공포와 대륙 중앙의 정세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역사의 한 페이지라 해도 좋은 방대한 정보량.
아니, 그 이상이었다. 단순한 정보, 글귀를 넘어 다시 사람들이 느꼈던 슬픔과 공포, 두려움, 광기를 느낄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기억과 감정 속에는 공주의 지식도 가미돼 있었다.
왕국이라는 공간과 개념을 크리처로 변모시킨 창조계열 흑마법과 결계술, 당시엔 학계에 등장하지 않은 공간마법까지.
그뿐 아니라 인간을 제물로 한 금단의 지식 인신공양술과 관계와 업(業) 통한 술식을 강화하며 규칙 부여하는 흑마법의 비기, 기억을 매개로 한 술식 등 수많은 지식이 있었다.
원래는 공주의 것이 아닌 마녀들의 지식이었지만, 수백 년이란 시간 동안 성에 갇힌 공주는 마녀들의 지식을 공부해 분석, 재해석, 재구축해 자신만의 온전한 이론을 정립했다.
본인만이 아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지식.
공주는 그것을 올리버에게 전해줬다. 테어도어와 비슷하지만 다른 형태로.
그 의도가 궁금했다.
공주가 대답했다.
“근본적으로 보면 비슷합니다.”
“나와 진솔하게 대화를 나누고 싶은 이유가 뭡니까?”
올리버가 공주를 죽이는 걸 멈추고 물었다.
“더 이상 시간이 많지 않거든요.”
공주가 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올리버는 신대륙에서 만난 불타버린 자를 떠올리며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정말 이제······.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미소 짓던 공주가 피로가 묻은 목소리로 말했다. 기이하게도 그녀는 더 말하고 싶으나 하지 못했다.
“혹시, 공주께서 종말론을 예언한 흑마법사입니까?”
과거 올리버가 이완을 처음 만나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며 물었다.
이완이 말하길 째깍째깍 종말론. 또는 심판의 종말론은 무슨 공주 혹은 흑마법사가 예언한 거라 했다.
공교롭게도 둘 모두 해당하는 존재가 지금 올리버의 눈앞에 있었다.
나름 중요한 질문. 그러나, 공주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중요한 건 세상 끝에 거대한 구멍이 생겼고, 땅속에 거대한 검은 태양이 뜨고, 모든 걸 삼키는 괴물이 곧 태동한다는 거지요. 정말 시간이 없습니다.”
“······.”
“제가 그대에게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갑자기 궁금해진 건데요. 공주님.”
“······?”
“이 숲을 구성하고 있는 왕국 사람들······. 공주님의 백성을 모조리 없애면, 공주님이 좀 아플까요?”
올리버가 그림자 인형극에서 본 공주의 감정과 지금 쉬고 싶어 하면서도 쉬지 못하는 공주의 감정을 토대로 추측해 질문했다.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공주는 자신을 제물로 바친 왕국의 사람들을 구해주고 싶어 했다.
저주에 가까운 주술에서 말이다.
그래서 올리버가 물어본 거였다. 공주의 백성으로 이뤄진 이 잠자는 숲을 모조리 불태우거나, 그림자의 먹이로 주면 아플지.
과거, 인육 요리사의 여동생을 눈앞에서 살해했듯이.
공주에 대한 순수한 악의에 찬 질문에 공주가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그대께서 헨젤과 그레텔에게 했던 것처럼요? 왕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