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9. 공주와 왕자 (3)
조용히 울리는 피리 소리.
음악이나 그런 것에 관심이 없는 올리버가 듣기에도 어딘가 특별했다.
슬프지만, 쾌활했고.
불규칙적이지만, 조화로우며.
무엇보다 사람의 의식을 잡아당기는 뭔가가 있었다.
피리 소리에 흑마법이 깃든 건가 싶었다. 아니면-
-휘익!
갑자기 어둠 속에서 돌풍이 불어왔다.
방금까지 펼쳐지던 그림자 인형극이 연기처럼 사라지고 새로운 배경이 등장했다.
아담한 집들이 오순도순 모여 있는 작은 시골 마을.
그곳에 한 남자가 방문했다. 한 손에 피리를 든 남자가.
그는 마을을 방문하자마자 피리를 불었다.
다시 허공에 울리는 슬프면서도 쾌활한 선율.
그 피리 소리에 맞춰 마을에서 뛰어놀던 아이들은 뭔가에 홀린 듯 남자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어느새 길게 늘어진 아이들의 행렬.
남자는 그 상태로 마을 밖으로 향했고, 아이들 역시 그 남자를 따라갔다. 막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기이함을 느낀 올리버는 마을 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곧 볼 수 있었다.
피리 소리에 몸이 구속된 아이들의 어머니와 아버지,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을.
그들은 필사적으로 움직이려 했으나, 피리 소리에 몸이 묶여 꼼짝도 하지 못한 채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자기 아이들이 피리 부는 남자의 뒤를 따라 사라질 때까지.
남자가 아이들을 데리고 지평선 너머로 사라진 후에야 그들은 움직일 수 있었고, 그제야 통곡하며, 잃어버린 아이들을 외치며 남자가 떠난 방향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그 누구도 아이들을 되찾진 못했지만.
-휘익!
다시 바람이 불며 새로운 배경이 나타났다.
수많은 사람이 모여 군중을 형성해 잃어버린 아이들에 대한 슬픔과 절망 그리고 분노를 쏟아냈다.
아이들을 빼앗긴 부모의 마음은 강력했고, 그로 인해 하나로 뭉친 군중은 대륙 중앙의 수많은 소왕국을 뒤흔들기 충분했다.
왕관을 쓴 자들조차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
결국, 머리에 왕관을 쓴 자들은 군중에 떠밀리다시피 하며 자리를 소집했고, 머리에 왕관을 쓴 수많은 사람이 한데 모였다.
개중에는 세상의 모든 지식이 담긴 책을 든 남성도 초대받았다. 비록, 그는 왕관을 쓰지 않았지만, 왕관을 쓴 자들의 존중을 받았다.
회의가 시작됐다.
대륙을 떠돌며 아이들을 납치하는 유괴범. 피리 부는 남자를 어떻게 할지에 대해.
-휘익!
돌풍이 불며 배경이 바뀌었다.
새로이 바뀐 배경 위에는. 그림자 인형극임에도 불구하고 장엄함이 느껴지는 엄청난 규모의 군대가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무한한 대군.
그 대군을 이끄는 자는 가장 높은 말에 오른 자로, 그의 뒤로 군인뿐 아니라 화염과 얼음, 공기와 대지를 쥔 마법사와 십자가를 짊어진 성기사. 한 손에 모든 지식이 담긴 책을 든 남자도 있었다.
역사상 유례가 없는 규모와 구성. 패배란 단어 따위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 승리의 군대를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거리로 나와 승리와 축복, 염원을 빌어주었다.
그렇게 사람들의 환호성을 받으며, 장엄한 군대는 나부끼는 깃발과 함께 나팔 소리를 내며 당당히 앞으로 나아갔다.
음울한 피리 소리가 나팔 소리를 뒤덮었다.
-휘익!
피리 소리가 울리자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에 끝이 보이지 않던 군대가 먼지처럼 사라졌다.
살아남은 이들은 열 명이 채 안 됐고, 그들은 정신을 놓은 듯 비틀비틀 되돌아와 자기들이 본 것을 알 수 없는 언어로 전했다.
“히히히힉! ······괴, 굇, 괴물? 괴물이야?! 히히히······. 우, 우리끼리······. 응? 우리끼리 죽였어? 어, 얼굴도 모, 못 봤어?? 숲이 우릴 자, 잡아 먹······? 히힉! 히히히히히히힛!! 우, 우린 다 죽을 거야······! ······다 죽을 거라고!!!”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인형극 속 사람들도, 올리버도 알 수 없었으나, 단 하나 확실한 것은 수많은 국가가 연합한 군대가 피리 부는 남자에게 패했다는 사실이었다.
피리 부는 남자는 등장하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아이를 잃은 슬픔과 분노, 절망은 알 수 없는 미지의 공포에 삼켜지기 충분했다.
하나의 대륙이 공포에 물든 것이었다.
머리에 왕관을 쓴 자들이 모여 어찌할지 회의했다.
그들은 책을 든 새로운 남자를 봤으나, 그는 난감한 기색을 보이며 떠나버렸고. 뒤이어 커다란 왕관을 쓴 다른 자들도 떠나버렸다. 그러자 작은 왕관을 쓴 자들도 무력하게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채.
-휘익!
다시 바람이 불었다.
작은 시골 마을과 커다란 마을, 이윽고 거대한 도시가 나타났고. 그곳에는 어김없이 피리를 든 남자가 방문했다.
마을 주민도, 도시의 경비병도 그를 막지 못했고 그는 피리를 불었다.
허공에 울리는 슬프면서도 쾌활한 선율. 그 선율에 이끌리는 아이들.
마을의 규모에 비례해 아이들은 크고 작은 행렬을 이루며 남자를 따라갔고, 사라졌다.
처음과 차이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어른들이 하고자 했다면 움직일 수 있었다는 점.
그러나 그들은 저주라도 걸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인다고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움직이지 못한 척을 한 거였다.
아이들이 눈앞에서 유괴당함에도 무서워 아무것도 못 하는 것보다, 움직이지 못하는 게 덜 비참했으니.
그렇게 갈 곳 잃은 슬픔과 굴욕, 비참, 원망이 쌓여갔고, 해소되지 않은 감정은 분노로 변질해 왕국을 향했다.
갈 수 있는 곳이 이제 거기밖에 없었기에.
수많은 그림자가 나와 왕궁에 분노를 표출했다. 개중에 일부는 수많은 음모론을 내놓았으며, 더 나아가 이 모든 사태가 왕의 잘못이며, 신의 천벌이라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넘치듯 팔팔 끊는 냄비처럼 수많은 왕국은 혼란에 빠졌고.
그것은 공주의 왕국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공주의 예지력을 찬양하며 사랑을 속삭이던 사람들은 어느새 공주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공주님! 도와주십시오!”
“공주님! 뭐라도 조언해 주십시오!”
“공주님! 저희는 어찌해야 하나요? 방법을 알려주십시오!”
“공주님! 제 아이들을 찾아주세요! 구해주세요!!”
“공주님! 뭐라도 말씀을······!”
공주님, 공주님, 공주님······. 수많은 사람이 왕궁 앞으로 몰려와 공주에게 해답을 요구했다.
과거 수많은 재난과 재앙에서 벗어나게 해준 그녀의 예지력에 의지한 것.
그러나 사람들의 바람과 달리 왕궁은, 공주는 침묵할 뿐이었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군중의 기대는 분노와 원망, 의심으로 변질했고, 그때, 13명의 마녀가 나타났다.
그녀들은 속삭였다.
“피리 부는 남자! 그는 결코 인간이 막을 수 없는 존재다!”
“그리고 그가 날뛰는 이유는 공주 때문이지.”
“공주가 멋대로 예지력을 사용해 하늘의 질서를 어지럽혔거든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어디든 방법은 있으니.”
“피리 부는 사나이의 손에서 벗어날 방법이 있답니다.”
악의, 속셈, 농락, 거짓 등을 빛내는 그녀들은 자기들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다면 인간이 아닌 존재의 힘을 빌리면 된다고 말이다.
수상하기 그지없는 이야기. 당연히 사람들은 의심했지만, 시간이 점차 지나자 의심은 기대로, 기대는 확신으로 바뀌었다.
해결되지 않는 재앙이 그들의 판단력을 흩트린 것.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마녀들의 말대로 의식(儀式)을 치러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한때 자신들이 사랑했던 공주를 제물로 바치는 거라 하더라도 말이다.
작지만 아름다웠던 왕국 곳곳에는 기괴한 토템이 세워졌고, 가시넝쿨로 그 토템을 서로 연결해 왕국을 아우르는 거대한 진(陳)을 형성했다.
자식을 잃고, 공포에 떠는 사람들은 갈 곳 잃은 분노를 괭이와 낫, 횃불과 같이 내세워 왕국을 둘러싸 공주를 내놓으라 소리쳤고,
한때 국왕과 왕비를 보조해 왕국을 이끌던 신하들마저도 공주를 내놓아야 한다고 왕을 압박했다.
“왕국을 위한 것입니다! 전하!”
“공주님을 내놓지 않으면 백성들이 어찌할지 모릅니다······.”
“더 이상 군대도 전하를 보호해드릴 수 없나이다.”
“공주님의 잘못도 있습니다. 왜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부탁, 애걸, 협박, 자기합리화.
수많은 감정이 요동쳤고, 이에 국왕은 신하들의 불충과 어리석음을 꾸짖었다.
어찌해 갑자기 나타난 마녀의 말만 믿고 감히 공주를 사교도(邪敎徒)의 제물로 바치려 하냐고, 너희들이 사랑했던 공주가 아니냐고 말이다.
서로에 대한 비난과 힐난이 오가는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국왕과 왕비의 뒤에 있던 공주는 여전히 침묵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채.
그 모습을 지켜본 신하들은 더더욱 흥분했고, 결국, 신하들은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군인들을 불러 공주를 끌고 나갔다.
신하들은 모두 분노하고 슬퍼했으며, 왕과 왕비는 비명을 지르며 이를 필사적으로 막았다.
그러나 그들은 무력했고, 그 와중에도 공주는 침묵하며 순순히 끌려 나갔다.
울지도, 화내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은 채. 모든 걸 포기했다.
그림자 인형극을 구성하는 기억과 감정이 올리버의 머릿속에 들어왔기에 올리버는 직접 체험하듯 알 수 있었다.
두려움, 슬픔, 분노에 빠진 대중 앞에 공주가 끌려 나오자, 곧 의식이 거행됐다.
거대한 재단 위에 놓인 공주와 그런 그녀를 둘러싼 13명의 마녀. 그런 마녀를 군중이 겹겹이 에워쌌다.
올리버는 인형극이 진행됨에 따라 과거 비슷한 기운을 느낀 것을 알아차렸다.
지옥의 문을 열려고 했던 인육 요리사.
악마를 소환하려 했던 팬.
왕국 곳곳에 박아 넣은 토템이 살아있는 듯 움직이기 시작했고, 가시넝쿨은 혈관처럼 꿈틀대 땅과 동화됐다.
근육처럼 꿈틀대는 대지. 공기 중에 안개가 맺히며, 하늘은 말려 들어가듯 균열이 생겨, 그 틈새 사이로 형용할 수 없는 불길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아주 미세한 지옥의 기운.
그와 함께 왕국 곳곳에 방대하고, 정밀하며, 난해한 술식이 가시적으로 떠올랐고, 그 술식은 거미집처럼 공주를 중심으로 수렴했다.
왕국 전체가 하나의 술식으로 변해 한 점에 모인 것.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행위였으나, 한때 왕국 전체에 사랑을 받았던 공주란 존재가 이를 가능케 했다.
공간 그 자체가 요동치며 융화됐고,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군중들은 뭐가 잘못됐음을 깨달았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시간이 정지하듯 모든 사람은 움직일 자유와 권리를 빼앗긴 채 눈앞의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의식을 진행한 13명의 마녀와 의식의 핵심인 공주뿐이었다.
왕의 혈통과 특별한 재능, 왕국의 사랑을 받았던 업(業)을 쌓은 그녀.
시체처럼 침묵하던 그녀는 의식이 절정에 달하자 갑자기 자기 손을 깨물어 피를 내 바닥에 술식을 추가하기 시작했다.
당황하는 마녀들.
그러나, 공주는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의식의 통제권을 순식간에 빼앗아 와 마녀의 육체마저 정지시킨 후 거대한 흐름에 몸을 맡겼다.
잠시 후, 하늘과 대지가 물에 푼 물감처럼 흐릿해지더니, 공주를 중심으로 수축. 왕국이라는 하나의 개념이 하나의 점으로 모이며 그림자 인형극이 끝났다.
[연극은 어떠셨나요? 불합리한 운명을 짊어진 분이여.]
연극이 끝나자마자 사방을 둘러싼 어둠 전체에서 아까 전 들은 소녀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올리버는 왼손을 휘둘러 자신을 둘러싼 어둠을 부순 후, 그 파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소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타겟팅(Targeting)]
날개 달린 노파가 그러했듯 그녀의 목을 올리버의 손아귀에 들어왔고, 올리버는 소녀의 얼굴을 두 눈으로 직접 봤다.
새하얀 피부에 꿀색 머리카락을 가진 십 대 중후반의 소녀.
왕국의 사랑을 받았던 공주.
그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올리버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손에 힘을 줘 소녀의 목을 부러트렸다.
뚜둑.
허무할 정도로 쉽게 울린 골절음(骨折音). 올리버는 쓰레기를 버리듯 소녀를 바닥에 내팽개치고 몸을 돌렸다.
“많이 불쾌하셨나 보군요.”
몸을 돌리자마자 들린 목소리. 올리버가 뒤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방금 목이 부러진 공주가 머리를 정돈하며 다시 일어나고 있었다.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라 합니다. 불합리한 운명을 짊어진 분이여······. 아니면, 다른 호칭. 와ㅇ-”
공주가 입을 여는 도중 올리버는 쥐고 있던 쿼터스태프를 공주의 머리를 향해 휘둘렀다. 공주는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