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5. 공주의 영토 (1)
이데아(idea).
현재 마탑에서 연구 중인 프로젝트 중 하나로, 과장을 보태면 신의 영역을 넘보는 마법이라 할 수 있었다.
세상 대부분의 모습을 보고, 기록하는 세계수의 방대한 기억 속에서 원하는 이미지를 쏙 꺼내 구현하는. 일종의 가상 세계를 만드는 마법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쉽지 않은 마법이기도 했다.
정보의 바다라 할 수 있는 세계수의 내면세계 룻 넷(Root Net)에서 정제된 이미지를 찾아 끌어올리는 것부터가 바다에서 바늘을 찾듯 어려운 일이었고,
하나의 공간을 구현하기 위해 세계수에 깃든 대량의 마력을 통제하는 것 역시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거대한 마력의 흐름에 휩쓸려 정신과 몸이 부서질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게 끝이 아니었다.
세계수에서 정제된 이미지와 대량을 마력을 가져온다 해도 이를 바탕으로 공간을 구축하는 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비유하자면 혼자서 건물의 청사진을 그리며, 벽돌을 쌓는 고행과 비슷하다 할 수 있었다.
그 모든 일련의 과정을 견딜 수 있는 높은 체력과 정신력은 말할 필요도 없었고.
하나하나 술사의 안전을 담보로 요구하는 일.
그렇기에 이데아(idea)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숙련된 마법사가 최소 수십 명이 필요했다.
세계수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세상을 현실로 구현하는 거였으니, 이상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이상한 거라면 지금 그걸 혼자서 해내고 있는 올리버가 이상한 거였다.
[모이라이 학파 & 공간학파: 이데아(idea) 구축 : X구역]
올리버가 영창하자 땅 밑 깊숙이 있던 세계수의 뿌리에서 흘러나온 대량의 마력이 바닥에 쏟아진 물처럼 퍼져 주변 일대를 순식간에 장악했다.
형용할 수 없는 무지갯빛 마력은 젖은 종이 사이를 뚫고 나오는 물처럼 지상 밖으로 흘러나와 주변을 침식하기 시작.
레드후드의 분신체들이 장악한 울창한 숲은 지우개로 지워지듯 점차 사라졌고, 그 빈자리를 회색빛 콘크리트 숲이 차지해 나갔다.
란다의 최대 빈민가 중 하나인 X구역이었다
“크르르르······. 말도 안 돼······.”
녹색 수림이 회색빛 콘크리트 숲으로 변하는 진풍경에 레드후드는 두려움, 경계, 당혹 등의 감정을 빛내며 중얼거렸다.
지금 올리버가 벌인 술식이 뭔지 대략적으로나마 이해하는 것.
세계수와 공간마법. 하나조차 제대로 익히기 어려운 마법을 올리버가 동시에 구현하고 있다는 걸 이해한 거였다.
물론, 올리버가 정말 혼자 힘으로 이룬 거냐면 그건 아니었다. 이데아(idea)를 구축하는 데 필요한 세계수의 이미지와 마력은 이브(Eve)가 대신 맡아주고 있었으니까.
올리버가 한 것이라고는 자연의 힘으로 이브와 접촉해 현실로 이미지와 마력이 나올 수 있게 길을 터주고, 올리버는 그걸 받은 것뿐이었다.
문제는 그마저도 뇌가 타버리거나, 육체가 부서질 수 있는 위험하기 그지없는 행동이라는 거였지만.
“운이 좋았습니다.”
올리버가 경악하는 레드후드에게 말했다.
공간을 장악하는 걸 넘어, 창조하는 거나 다름없는 술식을 쓰면서 말이다.
레드후드는 올리버가 자신을 기만하고 조롱한다고 생각했으나, 올리버는 진심이었다.
이 술식을 개발한 것은 다름 아닌 마탑이었고, 이를 맨 처음 현실로 구현한 것은 릴리스(Lilith)와 퍼펫이었기에.
올리버가 한 것이라고는 그걸 보고 분석해 자신에게 맞춰 개량한 것뿐이었다. 그마저도 이브(Eve)가 도움을 줬기에 가능한 거였고.
올리버는 압도적인 힘의 차이에 절망하는 레드후드에게 위와 같은 사실을 간략하게 설명해줬다.
레드후드 역시 실력과 재능 노력 모두 뛰어났기에, 이대로 꺾이면 안타까울 거 같아서였다.
그러나 레드후드는 경악할 뿐이었다.
“조롱이다······. 봤다고 이걸 혼자서······. 가능하단 말인가?!!”
레드후드는 사람 혹은 짐승이기 이전에 한 학자로 따졌다.
이해 못 할 것은 아니었다.
이브(Eve)가 세계수의 이미지와 마력을 전달해 준다 해도 그것을 소화하는 건 오로지 술사의 몫.
이브가 도와주면 술식의 난도(難度)가 낮아지는 건 사실이었으나, 그 점을 고려해도 이데아(idea)를 구축하는 건 결코 쉬운 일 아니었다.
받아들인 이미지와 마력을 현실로 투영하는 것은 뇌를 불태울 정도로 막대한 정보처리가 필요했으니.
“아, 이것도 제가 개량한 방법입니다. 혼자서 낯선 풍경을 구현하는 건 어려울 것 같아, 익숙한 풍경을 골랐거든요.”
올리버가 순순히 자신의 노하우를 공유했다.
올리버 본인이 말했다시피 이브의 도움을 받았다 해도 거대한 공간을 마력으로 구축하는 것은 결코 쉬운 게 아니었다.
특히, 낯선 환경은 더더욱.
릴리스가 가능했던 이유는 릴리스가 본인이 세계수의 정수(精髓)인 이브인 데다, 퍼펫이 강화해준 육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에 반해 올리버는 그냥 사람이었고. 공간을 구현하는 건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었다.
“저도 이 점에 대해 고민해봤고, 해결 방안을 모색해 봤습니다. 결론이 나오더군요.”
“······.”
“제가 잘 모르는 낯선 풍경이 아닌 익숙한 풍경을 구축하면 되는 거였습니다. 평소 걷던 길은 별로 인지하지 않아도 헤매지 않는 것처럼요.”
레드후드는 인상을 찌푸렸다. 대단한 해법이라도 되는 듯 이야기했지만, 과연 그 정도로 홀로 공간을 구축하는 게 가당키나 한가 싶었다.
수저나 국자나 바다를 다 퍼낼 수 없는 것은 매한가지.
그런데도 그게 가능하다면 그건 수저나 국자가 아닌 수저와 국자를 든 사람이 문제라는 거였다.
정작 당사자는 이를 모르는 눈치였지만······. 아니면 모르는 척하거나.
허나, 레드후드는 그런 사실을 감히 따지지 못했다. 머리 위에 있는 말도 안 되는 구조물이 신경 쓰였기 때문이었다.
“여기가······. 익숙하다고······?”
레드후드는 머리 위를 바라보며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레드후드의 머리 위에 건물과 맞먹는 크기의 시멘트 말뚝이 자그마치 일곱 개나 둥둥 떠 있었다.
저 말뚝이 레드후드가 공격하지 못하는 이유였다.
감정과 시멘트, 철근, 벽돌, 총기류로 이뤄진 건물 크기의 말뚝이 지상으로 추락하면 그 압도적인 물리력에 이 일대는 초토화가 될 게 뻔했다.
이데아(idea)라는 가상공간에 갇힌 상태에서는 피할 방법도 없으니 더욱 위험했다.
“예, 제가 만들었습니다.”
올리버가 파이터 크루와 크라임 펌과의 전쟁을 막기 위해, 인육 요리사의 제자인 요리사와 만났을 때를 떠올리며 답했다.
조는 올리버를 죽이기 위해 왔으나,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고, 올리버는 그런 조의 안내를 받아 파이터 크루를 두고 요리사와 싸우게 됐다.
하늘 위에 떠 있는 거대한 말뚝은 그 과정에서 만든 것이었다.
올리버가 요리사와 싸울 자격이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적잖은 시간이 지난 꽤 오래전 일.
그런데 지금 바다 건너 어딘지도 잘 모르는 숲에서 다시 보게 됐다. 세상일이라는 게 참으로 흥미로운 거 같았다.
투두둑······.
하늘 위의 시멘트 말뚝에서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머리 위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 있는 것처럼 아슬아슬하기 그지없는 상황 속에서 레드후드가 물었다.
“왜 순순히······. 이야기해주는······. 거지?”
“나름의 사과 표시입니다.”
올리버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진심이라는 증거.
레드후드 역시 이를 느꼈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고개를 갸웃댈 수밖에 없었다.
왜 자신에게 사과하는지 이해가 안 됐기에.
“제가 레드후드 님에게 무례하게 대한 것 같거든요······. 짐승이라고요.”
올리버가 사과한 이유를 본인 입으로 직접 말하자 그제야 더욱 자신이 실수를 깨달을 수 있었다.
마치 레드후드를 재밌는 실험 동물 보듯 했으니.
아이러니하게도 올리버는 아까 전 레드후드와의 싸움을 통해 그가 얼마나 높은 지성과 학식을 쌓으며, 강력한 의지를 가졌는지 알게 됐다.
그러니 단순히 짐승 취급하는 건 옳지 못했다.
“역시······. 봐줬던 건가······?”
레드후드가 이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던 사실을 새삼 깨달으며 물었다.
수십 년간 모은 인육 완자를 다 털어먹어 극한까지 전투력을 끌어올리고, 인육 요리사가 보관 중이던 특이체(特異體)까지 먹어 과거의 자신과 전혀 다른 존재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강해졌건만.
올리버 같은 존재에겐 별반 차이가 없던 거였다. 짐승의 재롱처럼 말이다.
“아뇨, 그렇지는-”
“-잔혹하고, 오만해.”
올리버의 말을 레드후드가 자르며 말했다.
처음 올리버를 봤을 때 도망치기 바쁘고, 이후, 대화할 때도 띄엄띄엄 말했던 걸 고려하면 상당히 이례적인 태도라 할 수 있었다.
올리버의 목숨을 노리고 공격하던 때조차 말은 조심스러웠는데.
그 이유가 아까 전의 싸움 때문인지, 아니면 잔혹한 올리버의 태도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올리버가 부여해준 흑마법 캄(Calm)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여하튼 흥미로운 상황이었다.
정작 당사자인 레드후드에겐 중요한 게 아니었지만. 그에게 중요한 건 자신의 쌓은 모든 노력이 결국 눈앞의 존재에게 유흥 혹은 양분에 불과하다는 사실이었다.
아마, 지금 펼친 술식도 정말 필요해서라기보다는 연습해보기 위해서 쓴 것일 터.
이만큼 잔혹하고 오만한 게 무엇이 있겠는가?
“하긴, 넌······. 너희는 그럴 수 있는 존재지.”
올리버가 그 말에 반응을 보였다.
“너희? ······너희가 누구죠?”
“피리 부는 사나이······. 그 괴물!!”
레드후드가 자신을 이렇게 만든 마녀와 그 손녀를 잡아먹고 지성을 유지하기 위해 사람을 잡아먹던 시절을 떠올렸다.
그때, 처음 레드후드는 우연히 마을에서 아이들을 납치하는 피리 부는 사나이를 마주했고, 형용할 수 없는 공포와 굴욕감, 닿을 수 없는 그곳에 닿고 싶다는 욕망, 야심을 얻었다.
다 나은 존재가 되고 싶다는 향상심. 지성을 유지하기 급급한 짐승에서 사람이 된 것.
그런 레드후드의 말에 올리버 역시 반응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게 피리 부는 사나이는 검은손의 손가락 중 올리버가 만나보지 못한 유일한 흑마법사였기 때문이었다.
그 탓에 올리버는 그에 관해 아는 것도 없었다. 기껏해야 마탑 학술회 때 방문한 관광 마을인 레이크 빌리지가 피리 부는 사니아로 인해 몰락했다는 것뿐이었다. 심지어 그 이유조차 정확히 알지 못했다.
“난! 더 이상! 떨고만 있지 않을 거다!! 그러기 위해! 그러기 위해!! 이곳에 왔다!!”
올리버가 피리 부는 사나이가 있는 대륙 중앙 방향을 향해 바라본 그때, 레드후드가 제법 예쁜 빛을 내뿜으며 분신체와 함께 돌진해왔다.
죽음을 각오한 의지.
올리버도 쉬이 보지 못한 그것을 짐승에 뿌리를 둔 레드후드가 빛냈다.
아주 인상적인 순간.
올리버는 그 빛을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품 안에서 감정을 추출. 마력으로 이뤄진 이데아(idea)에 덧씌워 통제력을 발휘했다.
[블레스(Bless)]
마리의 오리지날 흑마법이 안개와 빛 중간 형태로 엷게 이데아 전체로 퍼져나갔다.
흑마법이 덧씌워지자 마력으로 이뤄진 X구역은 그 성질이 변화했고, 주변의 벽돌 하나하나가 의지를 가진 채 올리버를 지키려 했다.
촤라라라라락!
마력으로 이뤄진 포장도로가 블록처럼 분해돼 저 아래로 사라지며 절벽을 형성. 올리버에게 다가오는 경로를 제거했고,
건물은 기둥과 벽이 해체돼 공중에 붕 뜨더니, 일부는 올리버를 지키는 방벽으로 재구성됐으며, 또 일부는 포탄처럼 레드후드와 그 분신체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조밀한 자연의 힘, 강력한 마법, 치명적인 흑마법을 몸에 두른 레드후드와 그 분신체들은 기세 좋게 돌진했음에도 불구. 도시 전체가 방해하지 쉽사리 다가오지 못했다.
불과 몇 분 전 레드후드가 울창한 숲을 장악했던 것과 정반대가 된 상황.
머리 위에 있는 말뚝의 위용에 압도돼, 말뚝뿐 아니라 이 공간 자체가 올리버의 통제 아래에 있단 걸 잊은 결과였다.
레드후드는 속으로 한탄했다. 이데아(idea)가 구축된 시점에 싸움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건만.
레드후드는 한순간 감정에 휘둘린 자신을 원망하며, 역시 본능이 시키는 대로 도망쳐야 했나 후회했다. 한낱 짐승처럼.
그때, 레드후드의 머리 위로 짙은 어둠이 드리웠다.
압도적인 존재감을 내뿜던 거대한 시멘트 말뚝. 일곱 개가 흑마법을 두른 채 점점 아래로 추락하고 있는 것.
머리 위로 수직으로 떨어지는 거대한 구조물에 레드후드는 경악하며 주변을 빠르게 훑어봤으나, 이미, 올리버의 손에 의해 재구성된 X구역은 시멘트 숲에서 시멘트 감옥으로 변한 상태였다.
발밑의 포장도로, 짓다 만 시멘트 건물 모두 레드후드를 가두는 우리나 다름없었다.
쿠구구구구!!!
저 높이 하늘 위에서 공기를 짓뭉개 터트리는 소리가 들렸다.
흑마법을 두른 막대한 중량의 말뚝이 중력에 의해 밑으로 떨어지는 소리였다.
쿠구구구구구구!!!!
쿠구구구구구구구구!!!!!
말뚝이 지상에 점점 가까워지자 소리는 더욱 커져 귀를 먹먹하게 했고, 말뚝이 형성한 그림자는 밤처럼 주변을 검게 물들였다.
아마, 올리버의 통제 아래 있는 게 아니었다면 올리버 역시 이곳을 벗어날 생각부터 했을 터. 하지만 그게 아니었기에 올리버는 레드후드를 관찰할 수 있었다.
과연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감탄스럽게도 벗어날 방도를 찾지 못한 채 죽음을 느낀 레드후드는 절망하는 대신, 날카로운 이를 까딱 깨물며, 품 안에 있는 마지막 고기 완자를 더 털어 넣고는 한 번에 감정과 마력, 자연의 힘을 동시 출력했다.
비장의 수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이 상황에서조차 포기하지 않고 발악하고자 하는 것.
레드후드는 전혀 섞이지 않는 감정과 마력, 자연의 힘을 꾸역꾸역 담아 육체를 강화.
하늘 위에서 떨어지는 거대한 말뚝을 방어하려 했다.
말뚝이 지상에 충돌하려는 찰나 올리버는 손가락을 까딱여 말뚝의 위력을 격감시켰다.
콰과과과아아아아아아아아아━━━!!
격감시켰음에도 불구 일곱 개의 말뚝이 동시에 지상에 충돌하자 세상이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이데아에 공간에 균열이 발생. 지면은 볼(bowl)형태로 움푹 들어갔다.
터벅······. 터벅······.
올리버는 충돌 후 발생한 흙먼지와 침묵 속을 걸으며 아슬아슬하게 직격을 피한 채 쓰러진 레드후드를 내려다봤다.
말뚝의 위력을 격감시키는 순간 말뚝의 방향을 틀어 직접 타격을 피한 것으로. 그럼에도 그 충격량이 엄청난지 레드후드는 기절해 있었다.
올리버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절망하지 않고 맞서 싸운 레드후드를 한참을 바라보다, 감정을 추출. 흑마법을 사용했다.
[보미트(Vomit)]
억지로 토를 하게 하는 질병-약화계열 흑마법으로, 레드후드는 기절한 채 대량의 고기 완자와 묵직한 무쇠 열쇠를 토했다.
올리버는 망설임 없이 무쇠 열쇠를 집어 들어 손수건으로 닦아 챙겼다. 레드후드를 만나러 온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으니.
첫 번째 목표를 완수. 올리버는 다시 레드후드를 내려다봤다.
레드후드를 만나려고 한 두 번째 이유는 왜 자신을 두려워하는지 알기 위해서였으나, 생각 이상으로 시원한 대답은 못 해줬다.
그럼에도 그는 그 이상으로 흥미로운 것을 보여줬다. 신기한 실험 동물로 본 게 미안해질 정도로.
고민 끝에 올리버는 레드후드가 보여준 의지에 존경의 뜻으로 일단 치료해주고자 하였는데, 갑자기 셔츠 칼라 안쪽에 부착된 통신장치를 통해 이브가 다급히 올리버에게 말을 걸었다.
[데이브!]
좀처럼 당황하는 기색이 없는 이브였기에 올리버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고, 이브는 이어서 말했다. 재난이라도 마주한 듯.
[이데아(idea) 바깥. 관측 불가능하던 울창한 숲 한가운데 심상치 않은 기운이 포착됐습니다. 지금 빨리- 치지지지직!!]
이브가 말하는 도중 통신장치에 노이즈가 발생하며 이브의 말이 끊겼다.
이는 심상치 않은 일이었다. 이브가 준 설계도대로 조립한 이 통신장치는 오직 이브와 통신을 할 수 있었지만, 그 대신 근처에 세계수만 있으면 어디서든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그렇기에 마력으로 이뤄진 가상공간 이데아(idea) 내에서도 문제없이 쓸 수 있는 거였고.
그런데 그런 통신장치가 먹통이 된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었다.
현재 위치가 세계수의 영역 밖으로 밀려났다는 것.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거였으나, 놀랍게도 이는 현실이었다.
이데아(idea) 너머, 울창한 숲 안쪽에서 느껴지던 결계가 그 기운이 강해지며 팽창하더니 이데아(idea)를 잡아먹듯 침식하고 있었다.
방금 공격으로 이데아(idea)에 균열이 생긴 것을 고려해도 엄청난 일.
허나, 그 못지않게 신경 쓰이는 것은 다름 아닌 결계의 기운이었다.
흑마법이 뒤섞인 기묘한 기운의 결계는, 과거 오염구역에서 퍼펫이 보여준 지옥의 입구와 비슷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 지옥의 기운은 점차 선명해졌고, 이윽고 뿌연 안개와 가시넝쿨이 회색 시멘트 숲을 삼키며 올리버와 기절한 레드후드 쪽으로 돌진해왔다.
안개로 인해 멀어지는 시야.
놀랍게도 결계의 기운 탓인지 흑마법사로서의 시야도 한순간 멀어버렸다.
아카이브, 악마 같은 존재들에게만 통하지 않은 올리버의 눈이 말이다.
기묘한 것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분명 올리버는 제자리에 있었건만 기묘한 안계의 흐름과 미묘한 대지로 인해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기분이 들었고,
뿌연 안개가 서로 뒤엉켜 한 여성의 모습을 형상하기 시작했다.
기껏해야 십 대 중후반 정도 될 법한 소녀의 모습을 말이다.
안개로 이뤄진 소녀가 올리버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불합리한 운명을 짊어진 분이여.”
그 순간 안개가 걷히며 올리버는 볼 수 있었다.
기묘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우거진 숲과 그 숲에 있는 각종 크리처. 그런 크리처를 상대로 분투하고 있는 사람들을 말이다.
인육 요리사의 유산을 차지하기 위해 온 자들로 추정됐는데, 개중에 올라버가 아는 얼굴도 있었다.
“······클로드 님?”
수많은 흑마법사 사이에서 여성형-송장인형을 조종해 분투하던 클로드가 올리버를 봤다.
상처를 입은 그는 놀라고 반가운 감정을 빛내며 소리쳤다.
“아, 데이브 님!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만나자마자 죄송하지만, 혹시 저희 좀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죽을 거 같거든요.”
클로드는 차분하고 예의 바르게 인간으로 만든 크리처들을 상대하며 부탁했고, 그런 클로드에게 올리버는 질문했다.
“여기가 어딘지 아시나요?”
“예?”
“여기가 어딘지 아시는지 물어봤습니다.”
심상치 않은 올리버의 물음에 클로드가 대답했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 그녀의 영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