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8. 빚쟁이 (1)
‘이건······. 신기하군.’
두 눈을 감고 정좌한 올리버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브를 설득하기 위해 마탑의 특명을 받고 소도시 노프턴을 방문했을 때, 올리버는 마탑이 진행 중이던 프로젝트를 직접 보고, 경험할 수 있었다.
개중에는 세계수와 관련한 프로젝트도 꽤 있었다.
세계수를 매개로 한 장거리 이동 마법, 세계수에 깃든 마력의 에너지화, 세계수의 기억을 현실에 구현하는 술식 등.
하나하나 역사에 남을 만한 연구였고, 올리버는 마탑이 왜 마탑인지 새삼 알 수 있었다.
비록, 그 기술을 구현한 건 마탑이 아닌 릴리스였지만, 중요한 건 올리버가 그걸 두 눈으로 직접 봤다는 사실.
하나하나 놀랍고 인상적이었으며, 올리버는 임무를 끝마치자마자 보고 기억하는 것을 노트에 따로 정리하는 동시에 자신이 응용할 수 없을지 고민해봤다.
다행히 있었다. 바로, 지금 하고 있는 수련방식이 그러했다.
자연의 힘을 이용해 세계수와 접촉, 이브와 교신하며, 이를 매개로 이브가 정제한 이미지를 받아, 머릿속으로 드루이드의 수련을 간접적으로 느끼는 것.
이론으로는 세웠지만 성공할 줄은 미지수였는데, 생각 이상으로 성공적이었다.
‘이브 덕이 컸어······. 룻 넷(Root Net)에 들어간 상태에도 명상은 가능할 테지만, 시간이 제한적이라 제약이 따랐을 텐데.’
올리버가 속으로 생각했고 이는 정확한 지적이었다.
올리버가 세계수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감정이든, 마력이든, 자연의 힘이든 이용료가 필요했고, 필연적으로 이는 시간적 제약이 따랐다.
그 외에도 여러 어려움이 있었다.
가령, 지층처럼 켜켜이 쌓인 세계수의 기억에서 원하는 기억만 정확히 꺼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고, 또 세계수에 접속하는 동안 육체가 무방비해진다는 위험도 있었다.
물론 행당 문제는 시간을 투자한다면 해결 가능한 영역이었으나, 문제는 시간. 그런데, 이브 덕분에 올리버는 그 자잘한 과정을 전부 건너뛰고 바로 수련에 돌입할 수 있었다.
생선 가시를 발라 떠 먹여주는 거나 다름없는 상황.
올리버는 이러한 행운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감은 눈꺼풀 너머, 이브가 직접 투사해 준 이미지에 더욱 집중했다.
[두 눈을 감고, 자세를 똑바로. 그렇게 자연의 힘을 느껴라.]
어린 수련생 앞에 한 드루이드가 와 말했다. 그의 한쪽 손에는 몽둥이라 하기에는 얇고, 회초리라 하기엔 굵은 나뭇가지가 들려있었다.
새로운 이미지에 집중력이 잠시 흐트러졌으나, 올리버는 곧 의식을 다잡으며 흉내 내고자 하는 어린 수련생에게 집중했다.
올리버처럼 아직 자연과의 교감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곧 하는 소년을. 그럼, 흉내 내기 더 쉬울 테니까.
‘자연의 힘, 정령과의 교감.’
올리버는 자신의 목표를 명확히 상기하며 의식을 집중했다.
물론, 당장 느껴지거나 하진 않았지만, 눈앞에 따라 할 존재가 있는 것만으로도 훨씬 나았다. 나침반이 있고 없고의 차이라 할까?
덕분에 올리버는 당장 구체적인 변화나 성취를 느끼지 못함에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명상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자 변화가 생겼다. 자연의 힘이 느껴지는 건 아니었지만, 이브가 투사해준 이미지가 선에서 면으로 그 형태가 좀 더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변한 것.
그뿐 아니라 어린 수련생을 중심으로 이미지의 영역이 확장돼 올리버가 흉내 내던 소년 외에도 다른 아이들이 보였다.
소녀와 소년. 그들의 공통점이라면 지치고 배고파 보인다는 것으로, 길쭉한 나뭇가지를 든 드루이드가 한 소녀를 후려쳤다.
[정신을 집중해라. 적응 기간이 곧 끝난다. 그때까지 자연의 축복을 느끼지 못하면 배급을 제대로 받을 수 없다.]
배급. 고아원과 광산에서 자라온 올리버는 그게 뭔지 알았다. 음식, 먹을 것. 가장 필요하고 두려운 거였다.
그 탓인지 올리버는 한순간 자신이 다른 수련생과 같은 처지가 된 기분을 느꼈다.
‘근데, 왜 이미지가 확장한 거지? 난 분명 흉내 내기 적당한 딱 한 명만 보여달라고 했는데.’
올리버가 의문을 가졌으나, 곧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이브가 이러는 편이 더 좋다고 판단한 거겠지. 실제로 현장에서 직접 지도받는 기분이 들어 더욱 몰입하기 좋았다.
[끄으으윽······!]
올리버는 명상에 계속 집중하던 중 한 소년이 눈을 까뒤집으며 게거품을 물었다.
누가 설명해 준 것도 아니었건만 올리버는 자연의 힘에 거부 반응을 일으킨 것을 알 수 있었다.
모든 사람이 마력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것처럼 자연의 힘 역시 개인의 재능과 기질, 이를 소화할 육체 등 여러 조건이 필요했으니.
[불량품이군. 내쫓아.]
수련생을 지도하는 드루이드가 나뭇가지로 가리키며 단호히 말했다.
신기하게도 광산에서 아픈 아이가 나왔을 때와 똑같은 반응.
일꾼들이 소년을 끌고 나갔고, 뒤늦게 정신을 차린 소년은 다시 한번 기회를 달라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더 이상 자신은 돌아갈 데가 없다고, 이대로 쫓겨나면 죽는다고.
허나, 그 누구도 소년의 외침에 대답하지 않았고, 소년의 목소리는 저 멀리 사라졌다.
[······.]
[······.]
다시 찾아온 침묵. 그저 머릿속에 투사된 이미지에 불과했으나, 올리버는 수련생으로 있는 아이들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저 상황과 감각에 따른 추론에 불과했지만, 올리버는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처음 올리버가 흉내 내기 위해 눈꺼풀 너머로 투사된 소년의 감정을 말이다.
소년이 느끼는 분노와 억울함, 각오. 그 감정이 고조됨에 따라 소년의 감각은 극한으로 날카로워졌고, 당연히 소년을 흉내 내던 올리버의 감각 역시 날카로워졌다.
그렇게 올리버는 과거 느끼지 못한 성취에 한발 가까워지려는 찰나 인기척을 느끼며 두 눈을 떴다.
“······루시앙 님?”
두 눈을 뜬 올리버가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방해했습니까?”
“······아뇨, 아닙니다.”
올리버가 고개를 옆으로 돌려 저 멀리 멀찍이 선 루시앙을 바라보며 답했다.
루시앙 때문에 방해받았다고 하기엔 그는 너무 멀리 있었다.
눈치 빠른 그가 짐짓 올리버를 배려해 적정거리에서 멈춘 것.
그럼에도 명상이 끝난 건 날카로워진 감각에 올리버의 집중력이 흐트러진 것이었다.
귀가 갑자기 좋아져 작은 소리에도 의식을 빼앗기는 것과 비슷한 이치.
잘 진행 중이던 명상이 중간에 끝나 아쉽긴 했지만, 올리버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처음 명상에는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지만, 지금은 약간이나마 건졌으니 그 차이는 엄청났다.
아마, 두 번, 세 번, 네 번 더 한다면 더 나은 성과를 거둘 터.
그렇게 올리버는 이미 지나간 일을 신경 쓰지 않고, 현재에 집중하기로 했다.
“전 정말 괜찮습니다. 그보다 무슨 일로 오셨지요?”
“제 동업자들이 데이브 씨를 한번 뵙고 싶다고 청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한 번 얼굴을 비춰주실 수 있겠습니까?”
“예, 알겠습니다.”
올리버가 망설임 없이 수락했다.
이곳 울창한 숲의 위치와 인육 요리사의 유산을 노리는 세력, 밀리유와 왕실의 은밀한 협력 관계 등. 루시앙은 귀한 정보를 조건 없이 가르쳐줬고, 거기다 밀리유가 점유한 캠프 공간 일부도 제공해줬다.
그런 마당에 얼굴 한번 보여주는 건 그리 어려운 게 아니었다.
올리버는 대답만큼이나 망설임 없이 일어났고, 그 모습에 루시앙이 정중히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아뇨, 저야말로 많은 도움을 얻었습니다.”
인사치레가 아닌 진심으로 올리버가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완이 올리버를 버리고 간 덕분에 한순간 어안이 벙벙.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감조차 잡지 못했으니.
처음 조셉을 따라 나왔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고, 그나마 아는 사이인 루시앙을 만나 제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아, 그런데 가기 전에 잠깐 볼일 좀 볼 수 있겠습니까? 중요한 거라서요.”
“아, 물론······. 그런데, 뭔지요?”
“곧 식사 시간이라서요. 조리 중이던 스튜 좀 챙겨가고 싶습니다.”
올리버가 시계를 꺼내 보여주며 말했다.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하게.
***
휘적······. 휘적······. 휘적······.
울창한 숲 외곽. 밀리유가 터를 잡은 캠프 한쪽 구석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그 이유는 참으로 기괴하고, 보기 드문 광경이 펼쳐졌기 때문이었다.
“저거 송장인형 맞지?”
“어. 존나 송장인형이야.”
구경꾼들이 대화를 나눴다.
그들의 대화처럼 캠프 한쪽 구속에 설치된 야외 취사도구. 그중 스튜를 끓이는 거대한 솥 앞에 앞치마를 두른 송장인형이 쉬지 않고 스튜를 젓고 있었다.
스튜를 젓기만 하는 단순 작업임에도, 모두 시선을 떼지 못했다.
상식적으로 송장인형을 저런 식으로 사용하는 경우는 듣도 보도 못했으니. 어떤 정신 나간 놈이 송장인형이 조리한 음식을 먹으려고 하겠는가?
혹시, 루시앙이 데려왔다는 그 나무꾼이라는 흑마법사가 기선을 제압하려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생각하기 무섭게 당사자가 루시앙과 같이 숲에서 나왔다.
“루시앙 님도 드시겠습니까?”
올리버는 너무나도 자연스레 송장인형이 젓고 있던 거대한 솥 앞으로 가 물었다. 루시앙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냄새가 끝내주는군요. 제 할머니가 만든 요리처럼요.”
루시앙의 감정을 꿰뚫어 본 올리버가 다시 물었다.
“억지로 안 드셔도 됩니다.”
“아닙니다. 먹고 싶습니다.”
거짓인 동시에 진심을 빛내는 루시앙. 모순된 감정이었지만, 단 하나 올리버를 배려해주려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올리버는 그에게 스튜를 한 그릇 퍼줘 내밀었다.
“간을 조금만 더 세게 부탁드려요.”
스튜를 한 모금 맛본 올리버가 송장인형에게 부탁했고, 앞치마를 두른 송장인형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소금을 더쳤다.
탁. 탁. 탁.
사실, 말할 필요 없이 조종만 해도 됐지만, 올리버는 차일드와 같이 일한 경험 탓에 올리버는 말을 걸었다. 일종의 루틴인 셈이었다.
올리버는 대기 중인 밀리유 병력이 보는 앞에서 송장인형이 만든 스튜를 먹으며 루시앙과 같이 나아갔고, 그 기괴하면서도 이질적인 모습에 모두 바다 건너온 흑마법사에게 길을 터줬다.
“스튜가 맛있군요.”
“칭찬 감사합니다. 그리고 부탁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식사 시간을 꼭 지켜야 해서요.”
그랬다. 인육 요리사의 손바닥 살점을 먹어 허기라는 후유증을 얻은 올리버에겐 먹는 건 생각보다 큰 문제였다.
전에도 먹는 걸 즐기고, 많이 먹기도 했지만, 그 정도는 전치 차이.
그걸 알기에 루시앙도 허락한 것이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레스토랑의 재료 다 떨어질 때까지 먹은 적이 있다고 하니, 정상적인 수준은 아니었다.
루시앙이 조심스레 질문했다.
“이해합니다. 전투 후유증으로 허기를 얻었다는 소문을 들어서요.”
이쪽 바닥에서 자칫 예민한 질문. 다행히 올리버는 딱히 그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 그렇습니까?”
“예······. 하지만 나아지신 줄 알았습니다. 식사 시간 때 외에는 뭘 드시지 않아서요.”
“음······. 나아졌다고도 할 수 있긴 하네요.”
알 수 없는 소리, 허나, 아주 틀린 소리도 아니었다.
비록, 화상으로 인한 작열통 때문이긴 하나 어쨌건 그로 인해 허기는 한결 나아졌으니.
최소한 툭하면 칼로리바나 초콜릿은 안 먹어도 됐다. 대신, 정해진 시간마다 일정량의 음식은 반드시 섭취해야 했다.
현재 올리버의 육체는 허기와 작열통. 두 가지 통증이 서로 맞물려 그나마 버틸 만한 컨디션을 유지하는 외줄 타기와 같은 상황이었기에.
그래서 올리버가 자리를 내어준 사람들이 만남을 청함에도 불구, 스튜부터 챙긴 거였다.
‘뭐, 야외 취사도구와 송장인형도 활용해 보고 싶은 것도 있지만.’
올리버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어느새 올리버는 루시앙과 같은 밀리유 소속의 보스인 카이드(Caïd)가 모인 천막에 도착했다.
거대한 텐트를 여러 개 덧대 흡사 이동식 저택과 같은 천막 안에는, 제각기 다른 복장을 한 두목들이 모여 있었다.
회색 철갑으로 전신을 두른 채 거대한 장검을 짊어진 노인,
커다란 망토 아래 채찍과 단검, 송곳, 그물 등을 숨긴 청년,
화려한 복장에 얼굴에는 칼자국이 있는 여성,
거대한 석궁과 마력이 감도는 단안경을 낀 중년 신사,
바구니 모양의 투구를 쓴 채 전신에 도끼와 장검, 단검, 창으로 무장한 면갑 투구 사내 등, 하나같이 보통 실력자가 아니었다.
몸에 지닌 마력량과 자세만 봐도 알 수 있는 부분.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편의상 밀리유는 크라임 펌과 비슷하다고 하나, 이들은 몰락 귀족, 전사, 도적의 후예라 했으니.
거기다 뭐가 됐건 인육 요리사와 갈로스 뒷세계를 양분한 자들. 실력이 없는 게 더 말이 안 됐다.
‘아, 저분도 빼먹으면 안 되지.’
올리버가 막사 안 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는 철가면 성기사를 보며 생각했다.
어떠한 속셈을 빛내긴 했지만, 뭐가 됐건 올리버가 오는 걸 환영해 준 정체불명의 성기사.
올리버가 루시앙에게 성기사의 정체에 관해 물어봤으나, 루시앙조차 구체적으로 누군지 모른다고 대답할 뿐이었다. 그래서 자신들조차 성기사, 혹은 철가면 성기사라고 부른다고 했다.
올리버는 철가면 성기사와 눈을 마주치자 인사했고, 놀랍게도 그는 그렇다 할 거부감을 없이 올리버의 인사에 화답해줬다.
“데이브 씨. 먼저 제 동업자들을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좌측부터 피에르 씨, 레오, 발레히, 나텅, 아론입니다.”
루시앙은 좌측에서 우측으로, 순서대로 가르쳐줬다.
모두 밀리유로, 그중에서도 라빌리 내부와 인근에 터를 잡은 이들이었다.
구성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밀리유 역시 내부에 계파가 나뉘는 듯했다.
이상한 건 아니었다. 거대하고 방대한 조직일수록 그런 경향이 두드러졌으니. 크라임 펌 역시 그 탓에 작게는 란다 내부, 크게는 셀랜드 지역 단위로 계파가 나뉘었다.
이름을 소개한 후에도 루시앙은 친절하게도 다른 조직에 관해 자세히 설명해줬다.
각 두목의 주 수입원이라던가, 누가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졌는지, 누가 가장 큰 세력을 가졌는지 말이다.
올리버를 위한 배려라기보다는 동업자들을 치켜주려는 것 같았으나, 흥미로운 정보긴 했다.
동업자들에 대한 설명을 끝마치자 루시앙은 곧바로 올리버도 소개했다.
“여기 소개하지. 날 두 번이나 도와준 분이시네. 연합왕국의 란다에서 가장 크게 명성을 날리고 있는 나무꾼 데이브 씨야.”
“만나서 반갑네요.”
모두 올리버를 살펴보던 중 가장 먼저 손을 내민 건, 홍일점이 발레히였다.
그녀는 영민한 눈빛을 통해 각종 계산을 빛냈고, 이를 숨길 기색 따윈 전혀 없었다.
이미 손익계산이 필요하다는 걸 모두가 아는 상황. 숨기기보단 드러내 신뢰를 구할 생각이었다.
이를 증명하듯 그녀는 망설임 없이 직구를 던졌다.
“루시앙이 말하시길 저희와 함께하실 거라 하던데 맞나요?”
예상치 못한 질문에 올리버가 루시앙을 봤고, 루시앙은 정정했다.
“그럴 가능성도 있다고 한 거지, 그렇다고 말한 건 아니야.”
“그게 거기지······. 그리고 이분 입장에서도 썩 나쁜 제안이 아닐 텐데.”
루시앙이 말하려는 타이밍에 올리버가 손을 들어 발언권을 가져갔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 건지 여쭤볼 수 있을까요?”
발레히는 기회를 포착한 사냥꾼처럼 눈을 번뜩였다.
“왜냐면 인육 요리사의 유산을 얻기 위해서는 혼자보다는 집단으로 움직이는 게 유리하니까요.”
허세가 아닌 진심. 올리버가 그 이유를 또 물었다.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지금 이 숲에 생각보다 많은 세력이 들어왔고, 하나같이 쟁쟁한 편이거든요. 각종 용병단과 도굴꾼, 대륙 중부 흑마법사와 퍼펫까지요······. 아무리 잘나도 혼자서는 힘들죠.”
여성이 자신 있게 말했으나, 올리버는 무덤덤하게 스튜를 먹을 뿐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협업해보긴 했지만, 딱히, 그런 걸 신경 써본 적은 없었기에. 대신, 손을 들었다.
“뭐죠?”
“아마, 퍼펫 님은 참가한 게 아닐 겁니다.”
뜬금없는 이야기에 모두 고개를 갸웃댔으나, 다들 관심을 보였다. 퍼펫의 참가 여부는 그만큼 중요한 것이었으니까.
“무슨 근거로 그리 말씀하시는 거죠? 퍼펫의 제자인 폭탄마 베이가 이곳에 왔는데요?”
“그래서 참가 안 하신 거 같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
“저도 처음에는 퍼펫 님이 참가한 줄 알았는데, 생각을 해보니 아닌 것 같더군요.”
“근거가 뭐죠?”
어느새 대답하던 발레히가 되려 질문했다. 이는 그녀의 정보 수집 능력이나, 대화 주도 능력이 떨어져서가 아니었다.
검은손의 손가락인 퍼펫을 마치 잘 안다는 듯한 올리버의 태도가 그만큼 상식 밖인 거였다.
“확실한 근거는 없습니다. 다만, 제가 아는 퍼펫 님이라면 제자들과 같이 움직이는 대신 혼자서 움직일 거라 생각했을 뿐입니다.”
얼핏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으나, 올리버가 곧 설명했다.
“퍼펫 님께선 송장인형을 다루는 분입니다. 그것도 군대 단위를요. 그런 분께서 제자를 데리고 이곳에 온 게 더 이상하지 않습니까?”
올리버가 정확히 핵심을 찔렀다.
조작계열 흑마법의 정점인 퍼펫에게 있어 숫자와 병력의 개념은 보통 사람과 다를 수밖에 없었다.
혼자서 군대 단위의 좀비를 다룰 수 있는 그에겐 제자의 존재 유무는 큰 의미가 될 수 없었다. 오히려 방해일 가능성이 더 컸다.
살아있는 사람은 송장인형보다 더 통제하기 힘들었으니.
물론, 이를 아는 건 퍼펫을 몇 차례 만나본 올리버만이 할 수 있는 추론이었다.
썩 나쁘지 않은 의견이었는지, 루시앙을 비롯해 모두 나름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올리버에 대한 눈빛도 달라졌다.
저 멀리 바다 건너에서 온 막연한 소문이 좀 더 피부로 느껴진다고 할까?
못 미더운 빼빼 마른 모습과 흑백이 뒤섞인 촌스러운 머리마저 하나의 개성으로 보였다.
루시앙의 태도, 명성, 지금 보여준 모습 등. 속으로 계산을 마친 발레히가 올리버에게 다시 같이 일할 것을 제안했다. 그에 따른 이점을 어필하며.
그러나 올리버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뭐가 마음에 안 드신 거죠? 저희가 여기 외곽에 자리를 잡은 건 힘이 부족해 그런 게 아니에요.”
진심. 올리버가 대답했다.
“저도 그런 뜻으로 거절한 게 아닙니다. 그저 저 혼자 결정할 사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같이 온 파트너가 있으시다고요?”
“파트너는 아니고 이번 일만 같이할 동업자입니다.”
“혼자 버리고 갔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래도 동업자는 동업자라서요. 그분 의견을 여쭤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음······. 혹시, 누군지 알 수 있을까요? 저희가 아는 사람일 수도 있으니까요.”
올리버가 대답할까 말까 고민하는 그때, 갑자기 막사 안에 귀에 익은 파쇄음이 들렸다.
쩡!!
일제히 고개를 돌리는 사람들. 허공에 금이 생겼고, 이질적인 광경에 다른 밀리유의 보스들이 무기를 쥔 그때, 올리버가 말했다.
“저분입니다.”
“······?”
“저랑 같이 인육 요리사의 유산을 챙기러 온 분요.”
쩡!!
올리버의 말이 끝마치자마자 다시 한번 파쇄음이 울리며, 허공이 깨지는 이질적인 광경과 함께 한 남자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완 브래넘 님입니다. 기적의 물건을 만드는 뛰어난 장인이자, 콩과 소를 바꾸는 위대한 협상가, 위대한 방랑자이자 빚쟁이요. 저분이 제-”
“-저 개새끼 잡아.”
“때려.”
“묶어.”
“죽여!”
이완의 모습을 보자마자 루시앙을 비롯한 막사 안의 보스들이 일제히 외치며 제각기 퇴로를 막고, 채찍을 휘둘러 이완의 팔을 붙잡은 뒤, 쇠그물을 던져 이완을 포박, 구타하기 시작했다.
마치, 잃어버렸던 빚쟁이라도 만난 듯이 말이다. 그때, 루시앙이 말했다.
“마치가 아니라 진짜 빚쟁이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빚을 졌죠. 잠깐만요.”
루시앙이 그리 말하며 이완을 다시 패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