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흑마법사-527화 (527/633)

527. 울창한 숲 (4)

인육 요리사의 유산이 숨겨져 있다고 하는 울창한 숲.

수십 년간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그곳 구석에 웬 남자가 앉아 있었다.

빼빼 마른 몸에, 주황빛 머리를 가진 남자가.

그는 수행이라도 하듯 정좌한 채 두 눈을 감고 있었고, 잠시 후, 두 눈을 천천히 뜨더니 입을 쩍 벌려 굳은 얼굴 근육을 풀었다.

“하아······. 빌어먹을······.”

주황빛 머리의 남자가 착 가라앉은 음울한 음성을 뱉었다.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었다. 나름대로 신경 써서 만든 자폭 인형. 그것도 백여 구가 1, 2초도 안 돼 전멸했으니.

만드는 데 들어간 시간과 비용을 생각하면 속이 쓰릴 수밖에 없었다.

최소한의 정보라도 뽑아냈으면 이리 억울하진 않았을 텐데.

클로드 말대로 가만히 있는 게 나았나 싶었다.

“에헤이······. 왜 건드린 거야?”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사고를 치자마자 클로드가 나타났다.

주인님인 퍼펫의 명에 따라 신대륙으로 가 프로메테우스 사(社)의 주주총회에서 왕실의 편을 들고 온 클로드가.

그가 다시 물었다.

“베이······. 우리 폭탄장수 베이. 왜 멋대로 움직였냐고 묻잖아? 가만히 있기로 약속했는데 말이야.”

“염병할 왜 풀네임으로 부르고 지랄이야······. 그리고 어떻게 바로 나타난 거야? 소름 끼치게.”

주황빛 머리 남자, 아니, 폭탄마 베이가 뒤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그곳에는 허수아비처럼 온몸에 마대와 붕대를 두른 역병 상인과 훤칠한 외모의 클로드가 서 있었다.

둘 모두 베이와 같은 퍼펫의 제자였다.

“지랄은 네가 했지. 우리 원래 계획 기억 안 나?”

“기억나지.”

클로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답했다. 원거리에서 송장인형을 통제하느라 오랫동안 앉아 있던 탓인지 다리 관절에서 뚜둑 소리가 울렸다.

“아고고······. 결정적인 순간까지 몸을 웅크린 채 상황을 관망하는 거.”

클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원래 계획이었다. 자신들이 처음부터 그 모습을 드러내면 여러모로 불리했으니.

검은손의 손가락. 퍼펫의 제자라는 직위는 거북이의 등껍질처럼 자신들을 지켜주는 방패이기도 했지만, 때때로 발목을 잡는 짐이기도 했다.

가령, 지금처럼 여러 세력이 한 가지 목표를 노리고 경쟁하는 상황에서는.

이유는 간단했다. 쓸데없이 높은 명성은 적들의 견제와 단합을 유발했으니까.

자연에서 쉬이 볼 수 있는 행태.

물론 아예 어중이떠중이만 있다면 다들 지레 겁먹고 발을 빼는 등 생각보다 쉽게 갈 수도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

인육 요리사라는 폭군이 사라지고,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야심가들과 대륙 중부에서 눈치만 살피고 있던 짐승들이 모두 흥분한 상태였으니.

인육 요리사의 유산과 비어버린 권력의 공백을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굶주린 개들은 도망치기보다 목숨을 걸고 도박하려 할 터였다.

당장은 탐욕이 공포보다 더 강했으니.

클로드는 의문이었다. 자신의 주인께서 인육 요리사가 보유했다고 알려진 그 물건에 관심이 없는 건지.

허나, 클로드는 그런 의심과 생각마저 중간에 포기했다. 자신의 주인은 그 속을 쉬이 파악할 수 있는 분이 아니니.

그래서 클로드와 베이, 역병상인은 스스로의 의지로 여기 왔고. 그렇기에 어떠한 사태도 스스로 감내해야 했다.

“근데, 전부 망했잖아? 가뜩이나 네 공격방식은 개성이 강해 알 놈들은 전부 다 알 텐데.”

“데이브 놈만 안 나타났어도 작전대로 했을 거야······. 어떤 놈인지 알고 싶었다고.”

“정신 나갔구나. 인육 요리사도 쓰러트린 자인데.”

“그러니까 더더욱 찔러봐야지. 주인님께서 자진해 검은손으로 데려오려고 한 놈이기도 하니까. 뭐가 얼마나 특별한지 봐둬야지.”

베이가 뻔뻔하게 말했으나, 클로드도 아무 말도 못 했다.

지금 타박하는 클로드조차 데이브에게 강렬한 호기심을 느껴 내기라는 명목으로 싸움을 건 적이 있었으니. 가만, 생각해보면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다.

이 바닥에서 그런 내기 따위는 무시하곤, 비위를 거스르면 누구든 멱따는 자들투성이인데.

아마, 데이브 특유의 태도, 분위기가 아니었다면 클로드도 감히 시도하지 못했을 터였다.

“그래, 그럼 뭘 알아냈어?”

“아니. 뭐라도 알아냈으면 억울하진 않지. 데이브가 뭔가 하려는 찰나 웬 반딧불이 끼어들었어.”

“반딧불이라면, 성기사?”

“그래.”

클로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성기사란 존재 자체가 놀라운 건 아니었다.

이단아라 불리는 갈로스의 현 재상 아르망이 인육 요리사의 사후 날뛰는 흑마법사를 억누르기 위해 밀리유를 지원하는 것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니.

그 과정에서 성기사도 지원해 준 것으로 알려진바. 이곳 울창한 숲에 성기사가 있다 하더라도 전혀 이상할 게 아니었다.

그렇다 해도 성기사가 데이브까지 구해준 건 예상 밖, 그 의중이 궁금했다.

성기사 출신 추기 사제임에도 보통의 종교인과 그 사고방식이 다른 아르망이기에 더더욱.

“무슨 무기를 사용했지?”

“한 손에 장착할 수 있게 개조된 개틀링 기관총.”

“아르망의 온건파 맞네. 성법을 냉병기가 아닌 화기에도 적용하는 건 그들일 테니······. 좋네, 소문내야겠어.”

짧은 고민 후, 결정 내린 클로드가 한쪽 눈을 감으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이곳 울창한 숲에 온 수많은 세력 중 일부에 잠입시킨 자신의 송장인형을 조종하는 것으로,

퍼펫처럼 단번에 수십, 수백 구를 조종할 순 없었지만, 두세 구 정도로도 소문을 만들긴 충분했다.

소문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더더욱 그랬고.

“소문낼 필요까지 있나? 성기사가 있다고 하면 다들 도망치기만 할 텐데.”

“그렇겠지. 성기사는 그 존재 자체로도 막강한데 흑마법과는 상성이 최악이니, 일부러 덤비러 가는 놈들은 잘 없겠지. 하지만, 시선은 집중될 테지.”

“아······!”

말뜻을 이해한 베이가 탄성을 냈다.

“다른 이들에게 시선이 집중되면 상대적으로 우리에 대한 경계와 시선도 줄겠지. 그만큼 우린 움직이기 편하다는 거고.”

그랬다. 클로드는 몇 가지 상황을 듣자마자 자신들의 처한 문제를 수습하는 동시에 보다 유리하게 판을 다시 짰다.

얼마나 효용이 있을지는 의문이었지만, 퍼펫의 제자가 등장한 것보다 성기사가 바다 건너온 흑마법사를 도와준 게 남들의 이목을 더 끌 가능성이 높았다.

베이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너무 조심스러운 거 아니야?”

“조심스러워 나쁠 건 아니지. 알다시피 이 숲, 보통 숲이 아니잖아?”

“······.”

“거기다 참가한 인원도 보통이 아니고. 인육 요리사의 잔당은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을 테니 최선을 다해 발악할 거고, 대륙 중앙에서 온 레드후드도 만만치 않지. 듣기로는 인육 요리사가 모은 특이체(特異體) 샘플을 먹었다 하니······. 뭣보다 소문이긴 하지만, 그동안 얌전히 있던 인신공양의-”

-부스럭.

이야기 도중 저 멀리서 들린 미세한 소리와 기척에 퍼펫의 제자들이 재빠르게 고개를 돌려 반응했다.

잡담에 가까운 편안한 대화 도중에서 방심하지 않고 주변에 대한 감시와 대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증거.

클로드의 그림자가 일렁이며 그 아래에서 여성형-송장인형이 다수 나와 제각기 대형을 구축. 마력과 자연의 힘, 감정을 추출했고,

베이 역시 조끼 형태의 먹보주머니에서 자폭 인형을 다수 꺼냈으며,

아까 전부터 침묵하던 역병상인은 묵묵히 몸에 뒤덮고 있는 붕대와 마대 아래에서 썩어빠진 쥐와 지네와 같은 벌레를 끄집어냈다.

조작계열 흑마법을 제각기 형태로 단련한 세 명의 흑마법사들은 단숨에 소대 단위 병력을 구성했다.

잠시 후, 울창한 나무 사이에서 한 흑마법사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인위적으로 뭉친 듯한 생명력과 마력으로 볼 때 인육 요리사의 잔당인 듯했는데, 피를 흘리고 비틀거리는 등 그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그가 손을 뻗으며 웅얼거렸다.

“도, 도와······,”

푹!

이름 모를 흑마법사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등에서 배로 살덩어리 칼날이 꿰뚫고 나왔다.

살덩어리 칼날은 얼핏 뭉뚝해 보였으나 등골이 서늘해지는 특유의 날카로움을 느껴졌고, 그 느낌은 잘못된 게 아니었다.

우직! 꽈드드득······!!! 꽈라락! 꽈직!!

살덩어리 칼날을 중심으로 강력한 중력이 발생한 듯 흑마법사는 안쪽으로 우그러지더니 이내 빨려 들어가듯 칼날에 흡수됐다.

그 모습은 마치 마개가 빠진 배수구 사이로 빨려 들어가는 물을 연상케 했는데, 인육 요리사 계파의 가장 큰 무기인 재생력조차 무의미했다.

그 끔찍한 광경 너머로 한 인형(人形)이 보였고, 클로드가 하던 이야기를 마저 했다.

“······인신공양의 백조 교단.”

***

[신기하군요.]

셔츠 칼라 안쪽에 부착된 작은 기기에서 이브(Eve)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 목소리에 올리버가 화답했다.

“저도 그렇습니다······. 이런 작은 기기를 통해 바다 건너 이브와 통신이 가능하다니요. 정말 놀랍고, 대단합니다.”

올리버는 진심으로 이브를 칭찬했다.

그도 그럴 게 칼라 안쪽에 부착된 초소형 통신기기는 다름 아닌 이브가 가르쳐 준 설계도로 만든 물건.

기계공학에 깊은 이해가 없는 올리버가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성능을 발휘했다.

이브가 설명하길 통신기기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헤르메스 사(社)의 기술을 참고해, 자신이 개량한 거라 하였는데 참으로 놀라운 능력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게 신기하다는 뜻은 아니지만······. 데이브도 대단하십니다. 제가 드린 설계도가 있었다지만, 정밀 장비가 없으면 제작이 불가능해 못 만드실 줄 알았거든요.

“운이 좋았습니다.”

올리버가 프타스 어시스턴트(Ptah's Assistant)를 썼던 것을 기억했다.

이브의 말처럼 이 초소형 통신기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초정밀 장비가 필요했는데, 해당 장비는 전문적인 소수의 기업만 다루는 거라 올리버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운이 좋게도 올리버는 테어도어에게서 배운 프타스 어시스턴트로 이를 대체할 수 있었다.

참으로 운이 좋았다.

“그런데 그게 신기한 게 아니라니요?”

[제가 신기하다고 한 건. 지금 데이브가 처한 상황입니다.]

“아······.”

올리버가 탄성을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올리버도 동의하는 바였다.

아무리 수도가 큰 피해를 입고, 흑마법사가 쥐 떼처럼 날뛴다 해도 갈로스를 다스리는 왕실이 뒷세계의 밀리유와 협력 관계를 맺다니. 다소 충격적이긴 했다.

‘아니, 꼭 그렇지도 않나?’

올리버가 정좌한 상태로 다시 고민해봤다.

범죄조직과 통치 기관이 손을 잡는다니. 얼핏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될 것 같았으나, 의외로 그런 경우는 왕왕 있었다. 당장 란다만 해도 그게 일상.

물론, 협력만 하는 게 아닌 서로 경쟁과 견제도 했지만, 여하튼 그리 이상한 게 아니었다.

그런데도 올리버가 이를 신기하게 여긴 건 아무래도 자신에게 호의적인 성기사의 존재 때문인 듯했다. 전신에 철갑을 두른 성기사 말이다.

[동의합니다. 흑마법사에게 호의적인 성기사는 드문 편이니까요.]

“순수한 호의가 아닌 어떠한 계산이 깔려있긴 하지만, 그래도 이례적인 건 사실이죠.”

신대륙에서 성기사와 같이 일해본 경험이 있는 올리버가 말했다.

허나, 그것도 꽤 특이한 경우였다. 필립 로어가 나서지 않았다면 애당초 성립될 수 없는 이야기.

그때, 이브가 의견을 냈다.

[한 가지 짚이는 게 있습니다.]

“뭐죠?”

[갈로스의 현 재상이자, 추기 사제인 아르망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습니다.]

“추기 사제이자 재상요?”

문장이 이해되지 않아 올리버가 되물었다.

[그렇습니다. 현재는 다소 보기 드물지만, 과거에는 성황청(聖皇廳)의 추기 사제가 나라의 재상을 맡는 경우가 더러 있었습니다. 지금도 존재하고요.]

세속적인 란다에서 산 올리버는 뭐라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기본 상식부터 어긋나는 일이라 뇌가 반응조차 못 했다.

“그런데, 성기사가 제게 호의를 가지는 게 어떻게 추기 사제와 관계가 있을 수 있죠?”

[왜냐면 그는 다른 성기사와 그 성격이 다르기로 유명하기 때문입니다. 좀 더 현실적이고, 세속적입니다.]

성기사 출신이지만 현실적이고, 세속적이라. 올리버는 흥미가 동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통신장치 너머 이브도 눈치챌 정도로.

[원하신다면 조사해 드릴 수 있습니다.]

“괜찮을까요? 마탑에 아직 적응 중이잖아요?”

[괜찮습니다. 모두 잘 대해 주십니다.]

통신장치 너머라 사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었으나 올리버는 믿기로 했다.

이브가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었고, 모이라이 학파 역시 이브를 못살게 굴 이유가 없었으니.

오히려 처음 이브를 가져다줬을 때 반응을 고려하면 사실일 가능성이 높았다. 뭐가 됐건 이브는 세계수란 학문을 파고든 학자들에게 꿈과 같은 존재였으니.

‘거기다 어르신께서도 이브를 보호해주기로 약속했고.’

생각을 마친 올리버가 입을 열었다.

“그럼, 부탁드려도 될까요?”

[예, 물론입니다.]

“감사합니다. 하는 김에 이곳 울창한 숲의 지형과 인육 요리사의 유산을 노리는 세력들에 대한 정보도 조사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올리버가 부탁했고, 이브가 뜸을 들인 뒤 대답했다.

[이건 좀 당황스럽네요.]

“괜찮으시다고 하셔서요. 안 될까요?”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오, 감사합니다. 자, 그럼 이제 같이 드루이드 명상을 연습하도록 하죠.”

자연스럽게 더 많은 일을 준 올리버가 두 눈을 감고, 자세를 가다듬으며 몸 안에 저장한 자연의 힘을 등 뒤에 댄 세계수의 방출했다.

녹색 자연의 힘을 매개로 이브와 접촉해 드루이드 명상에 도움을 받으려는 것.

거듭되는 업무를 받았음에도 막상 올리버가 명상에 들어가자 이브는 준비한 대로 자연의 힘에 반응. 올리버의 명상을 보조해줬고,

곧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눈꺼풀 뒤편 어둠 너머로, 한 이미지가 생성됐다.

자연의 힘으로 연결된 이브가 올리버의 머릿속에 직접적으로 투여해주는 이미지로, 한 어린 드루이드 수련생이 수련받는 모습이었다.

올리버는 눈꺼풀 뒤편을 통해 그 모습을 볼뿐 아니라, 머리로 간접적으로 그 감각을 느끼며, 드루이드의 명상을 똑같이 흉내 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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