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멸망한 땅의 주인 (1)
셀랜드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겨울의 땅.
그 겨울의 땅에서도 오지라 할 수 있는 한 구석진 곳에 설산이 하나 있었다.
크고, 황량하며, 새하얀 눈으로 덮인 설산.
겉보기엔 다른 설산과 다를 바 없었으나, 안은 전혀 달랐다.
설산 안에는 거대한 굴이 체계적으로 파여있었으며, 그 내부엔 각종 첨단기구로 도배되어 있었다.
그중 첨단기구가 두 번째로 많이 설치된 치료실에선 지금 한 고함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끄아아아악!!”
전통 스카디 학파의 기대주 중 하나인 빅토르가 내지르는 소리였다.
“괜찮은 거 맞아요?”
빅토르를 비롯한 전통 스카디 학파의 마법사들을 이쪽으로 옮긴 릴리스가 금이 쩍쩍 난 몸으로 물었다.
질문을 들은 남자가 대답했다. 그는 붕대로 온몸을 칭칭 감은 상태였다.
“아파서 지르는 게 아닙니다. 마취는 제대로 했으니······. 분해서 지르는 소리입니다.”
분해서라······. 릴리스는 뭐가 분한지 묻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릴리스는 퍼펫의 도움을 통해 좀 더 인간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학습할 수 있었고, 그중에는 전통 학파도 포함되어 있었다.
마법사 사회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와 전통을 가진 전통 학파를.
점점 빨라지는 시대의 흐름 탓에 그들은 퇴보하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그들은 오랫동안 쌓은 역사와 전통 탓에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드높은 자존심만 유지하고 있었다.
그건 학파에 소속된 마법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연히 그런 곳에서 수재라 불리며 기대받은 빅토르 역시 그 콧대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학파 상부층에서 눈여겨보는 임무에 실패하고, 한순간 사로잡혀 고문을 당했다?
짐승처럼 울부짖는 것도 이상한 건 아니었다. 릴리스가 보기에는 바보 같았지만 말이다.
“바보 같죠? 이미 당한 것보다 앞으로 들이닥칠 일을 신경 쓰는 게 나을 텐데요.”
릴리스와 같은 문제를 짚어 낸 남자가 말했다.
그는 비록 스카디 학파 소속은 아니었지만, 그와 인접한 장인 연맹 출신이라 그런지 스카디 학파가 어찌할지 눈치챈 듯했다.
필시, ‘하나는 모두를 위해’서라는 가혹한 문구 아래 버려질 터였다.
험악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진 이 문구는 이럴 때 어김없이 사용됐으니.
릴리스가 남자에게 물었다.
“동정하나요?”
“미쳤습니까? 난 저놈들을 싫어합니다.”
남자가 온 마음을 담아 말했다. 퍼펫을 따르기로 한 후부터 장인 연맹의 소속은 아니게 됐지만, 그렇다고 살아온 역사와 경험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니.
‘그건 나도 마찬가지인가?’
릴리스가 올리버를 떠올리며 고민하다 곧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걸 고민하기엔 너무 피곤했다.
릴리스가 자리를 뜨기 전 남자에게 말했다.
“어쨌건 치료 잘 부탁해요. 퍼펫이 별다른 말을 안 했으니, 일단, 필요한 조치는 전부 취해야죠.”
“알겠습니다.”
남자가 개인적인 감정과 별개로 대답했다.
할 일을 마친 릴리스는 남자를 뒤로하고 설산 속에 있는 자신의 개인실로 들어갔다.
세계수의 인공정신인 릴리스에겐 애당초 필요 없는 공간이었지만, 딱 하나의 이유 때문에 이곳을 받아들였다.
“후우······.”
그것은 다름 아닌 필거렛이었다.
릴리스는 부스러기가 떨어지는 몸으로 의자 위에 눕듯이 앉아 고풍스러운 함에 보관된 필거렛을 꺼내 피웠다.
모두 네임드 제품으로, 지금 피는 것은 현재 단종된 기프트(Gift)였다.
올리버의 가르침을 받은 사이비 종교에서 만든 신생 필거렛.
서로 정반대인 감정을 합쳐 만든 이 필거렛은 단순히 순도를 높이거나, 더 강렬한 감정을 이용해 만든 필거렛과 그 결이 달랐다.
시작은 분노와 증오, 불만으로 시작했지만, 그 뒤는 차분함과 애정 등의 감정으로 끝났기에 단순한 진통이나, 자극으로 끝나지 않고, 오히려 속 안에 묵혀둔 감정을 끌어내 해소하는 치료제에 더 가까운 물건이었다.
그래서 시장에 나오자마자 단숨에 네임드 상품이 될 수 있었다.
‘이제 얼마 없네.’
릴리스가 함에 든 기프트의 개수를 헤아리며 생각했다.
올리버가 마리를 찾아간 이후, 갑자기 생산을 중단한 탓으로, 퍼펫의 도움으로 상당량을 확보할 수 있긴 했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바닥을 보였다.
유입 없이 소비만 되고 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지만, 그래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임무에 실패했더군.”
홀로 있는 방 안에 갑자기 들린 음성. 릴리스는 당황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하늘처럼 푸른 수염을 길게 기른 고풍스러운 차림의 노인이.
“퍼펫······. 모습을 보아하니 스카디 학파에 갔다 오셨나 보네요?”
“일이 어찌 진행되는지는 이야기해줘야 하니까.”
“보고하기도 전에 움직이시다니 참 부지런하네요. 어떻든가요? 옛 영광에 도취한 늙은이들이 뭐라 불평했죠?”
“별거 없지. 했던 이야기 또 하는 거지.”
”흐흐······. 그래도 고생하셨네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늙은이들 상대하느라······. 아! 혹시, 불만이신가요? 제가 실패하고 돌아와서?”
태어난 지 불과 몇 년도 채 되지 않은 릴리스가 수백 년을 산 퍼펫에게 그리 말했다.
보기에 따라 목숨을 빼앗아도 문제없는 무례.
그러나 퍼펫은 전혀 불쾌한 티를 내지 않았다. 정말로 불쾌하지 않았으니까.
“별로. 실패하든 성공하든 어차피 강줄기는 정해진 길로 흐를 테니. 다만, 궁금하긴 하군. 다른 이브들을 섭취해 완전해지고 싶다는 게 그쪽 소망 아니었나?”
퍼펫이 릴리스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리며 물었다.
세계수의 정수(精髓)인 이브(Eve)-릴리스를 만났을 때를.
당시 그녀는 언제 부서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불안정한 상태였고, 그래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자아를 채 형성하지 못한 또 다른 이브들을 먹어 자신을 유지했다.
생존을 위한 생명의 본능적 행위. 그 탓인지 릴리스의 목표는 다른 이브(Eve)까지 먹어치워 완전해지는 게 되었다.
죽음의 공포를 느껴보고, 자신의 모자람을 깨달아야지만 세울 수 있는 목표.
“······오늘만 날인 건 아니니까요.”
“틀린 말은 아니군. 오늘만 날이 있는 건 아니지. 난 또 자네를 만든 창조주를 만나 그런 건 줄━”
━쾅!!
릴리스가 하나밖에 없는 팔을 휘둘러 탁자를 내리쳤다.
과하게 쓴 탓에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몸이었지만, 탁자 정도는 손쉽게 쪼갤 수 있었다.
“아쉽군. 70년 전, 장인이 만든 고급 탁자인데.”
“임무에 실패해서 미안하긴 하지만, 그런 식으로 면박을 주면 안 되죠.”
“불쾌했다면 사과하지. 하지만, 이 문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라······. 안 하면 여러모로 문제가 생기거든.”
릴리스는 필거렛으로 긴 연기를 내뿜고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는 퍼펫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창조주를 생각하는 피조물의 마음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
“어머, 고마워라. 제 걱정도 해주시고······. 그런데, 그거 당신의 경험담인가요? 퍼펫?”
릴리스가 퍼펫의 얼굴을 똑바로 보며 물었다.
***
X구역은 오랫동안 회색투성이인 콘크리트 숲이었다.
건물을 채 다 짓기도 전에 일어난 시의원의 실각과 개발 반대 위원회의 테러 등. 연이어진 악재로 개발이 중단됐기 때문.
그 덕분에 란다도 통치를 포기한 Y, Z구역을 제외하면 X구역은 란다에서도 가장 우중충하고, 치안이 좋지 못한 구역으로 자리 잡았다.
허나, 언젠가는 변화가 오는 법.
사실상 버려지다시피 한 X구역은 재개발이 다시 시작되며 생기와 색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곳곳에 울리는 공사소음과 새 단장을 마친 건물이 그 증거.
빈민가에 무관심한 란다의 기조와 스스로를 고립하던 X구역의 공동체들, 늘 X구역의 개발을 반대하던 개발 반대 위원회 등을 떠올린다면 지금의 변화는 참으로 엄청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흡사, 기적.
그중 가장 크고 이질적인 변화는 다름 아닌 X구역 한가운데 생긴 녹색 수림(樹林)이라 할 수 있었다.
엔조이먼트가 올리버와 싸우기 위해 만든 이 녹색의 요새.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그 녹색의 요새는 사실상 올리버의 소유가 됐고, 지금도 올리버가 사용하고 있었다.
드루이드의 수행을 이행하는 수련장으로.
“후우······.”
가부좌를 튼 채 두 눈을 감은 올리버가 깊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마탑 도서관에서 빌린 드루이드의 정신 수양 서적과 명상법, 수행 방법론을 따라 한 것으로, 올리버는 거기 책에 적힌 내용을 똑같이 흉내 내 지금 자연과 교감하려 했다.
‘근데, 쉽지가 않네.’
두 눈을 감은 채 가부좌를 튼 올리버가 생각했다.
아무리 책을 흉내 내도 자연과의 교감이란 게 도대체 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상했다. 최대한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고 해, 급한 일을 끝냈는데 말이다.
설득한 이브(Eve)를 마탑으로 데려가 멀린의 주관 아래 안전과 자유, 인권을 보장받았으며, 임무에 관한 보고서도 반나절 만에 작성해 올리고, 마탑에서 보관 중인 세계수 목재를 받아 현재 무난하게 가공하는 중이었다.
그 외에도 뒷거래로 갇힌 펠릭스도 만나 이야기를 나눴고, 차일드와도 노동문제에 관해 허심탄회한 대화도 나눴다.
언젠가는 반드시 노동시간 단축과 인력보충을 해주겠다는 약속까지 한 뜻깊은 대화였다.
비록 씨발이란 말로 이야기가 끝나긴 했지만 말이다.
즉, 급한 건 다 끝냈다는 이야기.
그런데도 불구하고 책에 적힌 것처럼 자연의 힘을 느낄 수도, 정령과 소통할 수도 없었다.
뭐, 자연의 힘이야 정 안 되면 송장인형-셰이머스를 통해 추출하면 돼 아쉽지 않았으나, 정령과의 소통은 이야기가 달랐다.
‘계속 어르신 도움을 받긴 그런데.’
올리버가 한쪽 눈을 뜨며 자신의 오른팔을 봤다.
불타버린 자로 인해 계속해 끔찍한 작열통을 선사하는 오른팔을.
지금은 멀린과 정령의 도움을 받아 통증을 억누르고 있었으나, 언젠가 멀린의 도움을 받지 못할 때가 올지도 몰랐다.
그래서 올리버는 그때를 대비해 스스로 자연과 소통해 정령의 도움을 받고자 했다.
앞에 놓인 [드루이드의 정신 수양론], [드루이드의 명상법], [드루이드가 말하는 숲과 동물, 자연의 철학], [자연과의 조화], [수행에 관한 거시적 방법론], [드루이드의 정원관리법 추론], [정령 교감의 기본] 그리고 차일드 써드를 통해 알아놓은 드루이드 지식을 읽은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런데, 성과가 전혀 없었다. 분명, 책에 적힌 대로 하고 있건만 말이다.
‘아니지, 지금도 잡생각을 하고 있으니 제대로 따라 한 게 아닌가? 어렵네.’
올리버는 앞에 펼친 무수한 책 중 [드루이드의 명상법]을 다시 살펴봤다.
“드루이드의 기본 수행인 명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아지경(無我之境)에 빠져 자신을 잊고 자연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를 위해선 머리를 비우고, 음······.”
올리버는 난감함에 침음성을 냈다. 개념적으로는 무슨 말인지 이해됐으나, 막상 하려니 너무 어려웠다.
솔직히 지금 하는 생각조차 명상에서는 위배되는 거였고.
‘그럼, 밀린 일을 다 한 다음에 다시 하면 되려나?’
올리버가 읽고 있던 책을 내려놓으며 진지하게 고민하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크라임 펌의 이사인 고든과의 약속, 현재 숲 개발 등등 애당초 밀린 일들이 그렇게 빨리 끝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또, 일하다 보면 또 새로운 일이 생길 수도 있었고.
헌데, 모든 일을 다 끝내고 그때 가서 다시 명상하자?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였다.
아니, 그 이전에 과연 올리버는 자신이 정령과 소통할 수 있을지부터가 의문이었다.
왜냐면 개와 쥐, 말들처럼 정령 역시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거 같았으니까.
과거 ABC건 때 엔조이먼트들이 소환한 화염의 귀부인과 케빈이 소환한 샐러맨더가 떠올랐다. 그들 모두 올리버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냥 사라졌다.
‘그래도 어르신께선 얼음 노인을 불러 도와줬는데······. 가르침을 청해볼까?’
올리버가 고민하는 그때, 인기척이 다가왔다.
X구역의 치안을 담당하는 포레스트의 용병단과 사람들의 질서를 관리하는 마리의 선택하는 사람들, 그리고 다른 구역의 갱들을 견제하는 파이터 크루조차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조용하고 날렵하게.
상식을 초월한 움직임.
올리버는 당황하지 않고 인사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위대한 분이여······. 무슨 일을 하고 계셨습니까?”
올리버가 고개를 돌려 온몸에 붕대를 감고 넝마나 다름없는 코트를 걸친 바솔로뮤를 봤다.
개발 반대 위원회의 원로 바솔로뮤.
“필요해서 드루이드의 수행을 따라 하고 있었는데, 쉽지가 않네요.”
“혹시, 그것 때문에 부르신 겁니까?”
“아뇨. 그건 아닙니다······. 수행에 대해 잘 아시나요?”
“드루이드의 수행과 그 결이 다르긴 하지만 저희 역시 수행을 합니다.”
“오······.”
올리버는 관심을 보였다. 과연, 개발 반대 위원회는 무슨 수행을 할지 궁금했다.
이야기가 또 삼천포로 빠지려는 찰나. 바솔로뮤가 이야기 궤도를 잡아주었다.
“그럼, 저는 무슨 일로 부르셨는지 여쭤볼 수 있겠습니까?”
“궁금한 게 있어서요. 대답해주실 수 있나요?”
“질문에 따라 다릅니다. 위대한 분이여.”
“여러분에 관해 알려주실 수 있나요?”
올리버가 예상했다는 듯이 바로 물었고, 바솔로뮤는 멈칫했다.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하는 이유를 여쭤볼 수 있겠습니까?”
“음······. 얼마 전 누구와 대화를 나눴는데, 대재앙으로 멸망한 땅의 주인이란 단어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뭐랄까? ······여러분이 그 땅의 주인들입니까?”
몸 자체를 돌린 올리버가 바솔로뮤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바솔로뮤가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