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7. 모순 (5)
“저쪽이라뇨?”
올리버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순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너무 자연스러워 릴리스와 마리조차 한순간 아무것도 없었다고 믿을 뻔했다.
사기는 지능이 아닌 진심이라는 증거.
잠시 침묵이 공간을 지배했고, 시간이 흐르자 릴리스가 실소를 터트렸다.
세계수의 정수라 할 수 있는 그녀가 할 말은 아니지만, 방금 올리버가 보여준 뻔뻔한 거짓말은, 그전에 보여준 공간 술식 장악 능력과 세계수를 매개로 한 공간 마법보다 훨씬 더 인상적이었다.
객관적으로는 비교할 바가 전혀 아니었음에도 말이다.
헌데도 릴리스는 그렇게 느꼈다. 자신이 왜 이런 반응을 보인 건지 고민해 봤으나 그녀는 해답 대신 헛웃음만 나왔다.
방금까지 올리버를 죽도록 패고, 마리 역시 정말 죽이려고 했건만, 갑자기 그럴 기분이 싹 사라졌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퍼펫의 말이 맞았다. 감정이라는 거 정말 어려운 거였다. 거북하고 위험하면서도 매력적인.
“으아아아악!!”
릴리스는 실소를 터트리다 말고 고함을 내지르더니 올리버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아까 전과 비교하면 몹시도 작아진 타격음.
오히려 피해를 입은 것은 이미 육신에 금이 간 릴리스였으나, 그 모습마저 마리는 머리털이 곤두설 정도로 분노했다.
분노를 바로 행동으로 표출하려는 찰나, 올리버가 손을 번쩍 들었다.
멈춰달라는 제스처.
올리버 대신 분노한 마리는 뭐라 말하려 했으나, 곧 올리버의 얼굴을 보고 관두기로 했다.
평소와 같은 무덤덤한 표정이었지만, 어떠한 깊이가 느껴졌기에.
마리는 식도를 타고 올라오는 분노를 억지로 삼키곤 차분하게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났다.
신을 대하는 사제처럼 경견하고 충성스럽게.
“고맙습니다.”
올리버가 자신의 신자에게 인사했다. 그 목소리에는 평소보다 진심이 담겨있는 기분이 들었다.
“······.”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하는 마리를 뒤로하고 올리버는 부스러기가 흘러내리는 릴리스의 팔을 보며 입을 열었다.
“괜찮으십니까?”
“어머, 걱정해주시는 건가요?”
“예······. 하던 거 마저 해야 하는데, 그 상태로 할 수 있을까 싶어서요.”
“하던 거라뇨?”
“저희가 하던 거요. 전 누워있고, 릴리스는 제 위에 올라와 때리는 거죠. 때리셔서 다시 하자는 건 줄 알았는데요······. 아닌가요?”
농담인지 진심인지 모를 말. 릴리스는 일그러진 웃음을 지었다.
“하······. 할 수만 있으면 하고 싶네요.”
“몸을 고치고 오셔도 됩니다. 사실, 지금 제가 고쳐드릴 수 있긴 하지만 바깥으로 내보낸 마법사분들이 다시 들어오려고 하고 있어 그건 좀 부적절한 거 같고요.”
흑마법사의 눈을 넓게 뜬 올리버가 말했다.
역시, 마탑 마법사들은 끈기가 대단한 건지 분명 내보냈음에도 다시 이곳으로 들어오려고 애쓰고 있었다.
“언제든 제가 찾아와도 된다는 뜻처럼 들리네요.”
“처럼이 아니라 정말 찾아와 때리셔도 됩니다. 그걸로 릴리스의 분노가 조금이나마 달래질 수 있다면요······. 미안하거든요.”
중간에 들어온 마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대화 내용. 그러나, 마리는 끼어들긴커녕 궁금증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그저 똑바로 선 채 묵묵히 들을 뿐.
“전 역시 당신이 미워요.”
“죄송합니다. 그래도 나아졌으면 좋겠네요.”
“그게 가능할 거라 보시나요?”
릴리스의 머리카락이 온갖 색깔로 휘황찬란하게 변하였다.
“글쎄요. 다만, 제가 배운 것 중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돈 때문에 늙은 부자와 결혼했지만, 그 늙은 부자의 배려심에 그가 좋아질 수 있다고요······. 지금은 제가 싫겠지만, 나중에 덜 싫어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올리버가 과거 멀린과 나눴던 대화를 인용했다. 솔직히, 어찌 될지 확신할 수 없었으나, 그래도 기대를 걸어보고 싶었다. 왜냐면, 정말로 릴리스에게 미안했고, 가급적이면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으니까.
그 마음을 꿰뚫어 본 건지 릴리스는 더 이상 이 주제로 대화 나누기를 포기했다.
이미 올리버의 대화법은 세계수를 통해 봤기에 계속 이어가 봤자 재미를 보지 못할 것이 뻔하였다.
저 특유의 페이스에 말릴 게 뻔히 보였으니.
초반에 던진 질문으로 뒤흔들었을 때, 대화를 주도하지 못한 것이 큰 패착이었다.
아쉬웠지만, 릴리스는 곧 그 마음을 집어넣기로 했다.
어차피 시간 차이가 있을 뿐이었으니. 오늘만 날이 아니었다. 차라리 이러는 것도 재밌을지도.
릴리스가 더 이상 공격할 뜻이 없다는 뜻으로 자세를 풀며 입을 열었다.
“좋아요······. 당신의 협박에 굴복해 이브를 두고 이만 물러나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그런데 부탁으로 하죠.”
“어어어······. 싫어요.”
릴리스가 혐오와 거부 등 부정적인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단호히 저었다.
표정을 구분하는데 약간 어려움을 겪는 올리버조차 알아볼 정도.
마음 같아선 부탁이라고 끝까지 주장하고 싶었으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올리버는 릴리스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그리고 조건이 있어요.”
“말씀하십시오.”
“저랑 같이 온 스카디 학파 마법사들······. 모두 제게 돌려주세요. 시체까지 포함해서요. 챙겨가고 싶거든요.”
릴리스가 제법 큰 요구를 했다.
마탑과 전통 학파는 이미 사이가 험악하기로 유명했다.
그럴진대, 먼저 로드 갱과 크라임 펌 지부를 매수해 마탑 사람을 공격한 스카디 학파 포로와 시체를 달라?
그것은 이번 임무에서 가장 중요한 이브 다음가는 전리품이자, 전통 학파와의 갈등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카드를 내어달라는 거나 다름없었다.
한마디로 무리한 요구. 최소한 협박을 받아 이 자리를 물러나는 쪽이 할 이야긴 아니었다.
상식적으로 말이다.
그러나 릴리스에겐 다행히, 마탑 입장에서는 불행히도 올리버는 상식과 거리가 있는 사람이었다.
“여기요.”
올리버가 마탑 마법사를 멀리 내보냈을 때처럼 붙잡힌 스카디 학파 마법사들과 그 시체를 이곳에 소환했다.
릴리스를 똑같이 흉내 내 세계수를 매개로 사용한 공간 마법으로 말이다.
생각보다 어렵진 않았다. 릴리스가 이미 세계수 위로 술식을 구축해 놓은 터라 올리버는 이를 이용하기만 했으면 됐으니.
아무런 매개 없이 공간 마법을 쓰는 게 어려운 거지, 매개가 있다면 이야기는 달랐다. 정밀한 술식까지 덧씌워졌다면 더더욱.
“뭐, 뭐야?”
올리버를 상대로 끝까지 저항하던 덩치 큰 얼음 마법사가 엉망이 된 모습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올리버가 자리를 비운 사이 설득을 당한 모양이었다. 이빨을 뽑는 것과 다른 형태로.
올리버가 어찌 된 건지 설명해주려는 찰나, 릴리스가 먼저 술식을 발동해 이들은 어딘가 저 멀리 이동시켰다.
올리버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볼 땐 최소 도시 밖인 듯했다.
“대단하네요······. 릴리스는 안 떠나시나요?”
“······물어보고 싶은 게 있고, 또,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뭐죠? 물어보고 싶은 것과 또, 할 이야기라는 게요.”
“이대로 제가 돌아가면 마탑에서 온 이들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그 말에 옆에서 가만히 듣던 마리가 움찔했다.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건 올리버의 안위였으니.
“물론 당신의 힘이 있으니 당장은 안 덤비겠지만, 속으로 담아 놓고 보복하려고 할 게 뻔한데요. 마탑이 얼핏 합리적으로 보여도 저들 역시 수많은 폐단을 가지고 있죠. 실력이 있다고 쉬이 인정하지 않죠. 사람은 그런 생물이 아니니까요.”
“글쎄요······. 거기까지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아서요. 제 임무는 이브(Eve)를 설득하는 거니까요.”
올리버가 자기 일 외에는 아무 생각 없다고 시인했다. 그것이 진실.
그래도 릴리스의 말을 듣고 잠시나마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정 안 되면 사직서 내버리죠. 당장은 릴리스 뜻이 더 중요하니까요.”
“······.”
“됐군요. 그럼, 할 이야기는 뭐죠?”
“제가 한 질문······. 이번에도 잘 흘려넘기셨지만, 잊지는 마세요. 당신께서 원하든 원치 않든 해답을 내놓아야 할 때가 올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짧은 침묵 후, 올리버가 짧게 대답했다.
얼핏 별생각 없이 대답한 것처럼 보이고, 실제로도 그런 것일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많은 생각과 뜻이 함축된 거 같기도 했다.
말한 당사자가 올리버라 알 수 없었지만.
대답을 들은 릴리스가 자리를 뜨려는 찰나 올리버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릴리스.”
“······?”
“한번 안아봐도 되겠습니까?”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는지 릴리스가 잠시 멈칫거리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뇨.”
그리고는 금이 쩍쩍 갈라지는 몸으로 마력을 끌어올려 올리버의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처음 만났을 때의 소란을 생각하면 싱거울 정도로 허무한 결말이었으나, 올리버는 개인적으로 만족스러웠다.
릴리스도 만났고, 대화도 나눴고, 이브도 무사했으니······. 거기다 란다에서도 만나지 못한 마리까지 만났고 말이다.
올리버가 마리를 부르려고 고개를 돌리자, 마리가 먼저 조용히 다가와 손수건을 내밀었다.
올리버는 그 손수건을 받아 자기 얼굴에 묻은 피를 닦기 시작했다. 가죽 가면이 또 찢어져 있었다.
‘음······.’
올리버는 직접적인 피해에 취약한 가죽 가면의 내구도에 침음성을 내곤, 프타스 어시스턴트(Ptah's Assistant)를 발동. 마력으로 이뤄진 기계 팔로 가죽 가면을 정밀 복구했다.
“손수건은 빨아서 돌려드릴게요.”
가죽 가면의 복구와 얼굴에 묻은 피를 거의 다 닦아낸 올리버가 말했다.
마리에게서 받은 손수건은 올리버의 피로 지저분하게 물들었다. 이에 마리가 답했다.
“괜찮으시다면 그 상태로 돌려주실 수 있나요?”
“예?”
“실례가 안 된다면 그대로 돌려받고······.”
마리가 말꼬리를 흐렸고, 올리버는 잠시 고민하다 붉게 물든 손수건을 그 상태로 돌려줬다. 본인이 그걸 원한다니.
마리가 손수건을 돌려받은 후, 올리버는 릴리스에게서 가져온 공간의 통제권으로 해당 공간을 원상태로 복구하며 질문에 들어갔다.
먼저 물어본 건 가장 궁금한 거였다.
“몸은 괜찮으세요?”
“예······. 괜찮습니다.”
올리버가 부축해 준 기억이 떠오른 마리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창백한 피부 탓에 더더욱 눈에 띄었다.
“다행이네요······. 그런데 여긴 어떻게 알고 오신 거죠?”
가장 근본적인 질문. 마리가 스스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듯 띄엄띄엄 말했다.
“란다로 복귀하는 중에······. 데이브 님의 기운을 느꼈고······. 누군가 위해를 가하는 것 같기에······.”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대답에 올리버는 마리를 바라봤다. 단순히 둘러대는 건 아닌 것 같았으나, 그와 별개로 받아들이기 힘든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기운이 느껴져 이곳으로 왔다니.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설사, 그렇다 치더라고 릴리스가 구축한 세계수를 이용한 만든 마력 공간까지 뚫고 오는 건 그냥 넘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마탑의 마법사들조차 올리버가 통제권을 빼앗아 술식에 빈틈이 생긴 후에야 간신히 들어왔는데. 마리는 이를 정면으로 뚫고 들어왔다.
공간 마법에 대한 높은 이해와 릴리스가 구축한 술식을 잠식할 술식 전개 능력, 상당한 마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수준. 거기에 릴리스와의 싸움에서 보여준 전투력까지 전부 의문투성이였다.
허나, 올리버는 이 문제를 바로 따지지 않았다.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고, 마리의 머리 위에 있던 정체를 알 수 없는 손을 봤기에.
올리버는 당장 알 수 없는 일은 뒤로 미루고, 당장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혹시, 마리는 궁금한 게 없으신가요? 지금 상황이나, 방금 상대한 릴리스에 관해서요.”
“······솔직히 궁금합니다. 하지만, 데이브 님께서 말씀해 주실 때 듣도록 하겠습니다.”
진심. 마리는 진심이었다. 그녀는 지금 상황과 릴리스에 대해 궁금했으나 동시에 올리버가 말할 때까지 물을 생각도 없었다.
올리버에 대한 존경과 배려심에 기인한 행동.
호기심이 많은 올리버로서는 감탄이 나오는 태도였다.
“란다로 돌아간 후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잠시 헤어질 수 있을까요? 마탑 쪽 사람들과 아직 볼일이 남았는데, 같이 있으면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요.”
올리버가 물어보는 동시에 마리의 발아래 공간 이동 마법진을 만들었다.
릴리스가 만든 걸 최대한 사용해 술식의 구성과 사용 방식을 익히려는 것으로, 마리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괜찮습니다.”
“고맙습니다. 마리······. 아, 그리고.”
“예, 데이브 님.”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올리버는 아까 전 마리에게 하지 못한 감사 인사를 뒤늦게나마 덧붙이며 공간 마법을 발동. 흑마법사의 눈으로 저 멀리 흑마법사들이 있는 곳으로 마리를 옮겨주었다. 아마 일행들일 터.
릴리스와 마리까지 떠나보낸 올리버는 바로 마지막 상대에게 다가갔다.
자그마한 세계수 속에 갇힌 이브(Eve)에게 말이다.
올리버는 이브(Eve)를 설득하기 위해 손을 뻗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
“도대체 방금 뭐야?”
“스카디 학파는 또 어디 갔고?”
죽어가는 소도시 노프턴. 그곳 구석에 모인 마법사들이 말했다.
수가 많아 일일이 소개하기 힘들었으나, 그들 모두 소속된 각 학파에서 라인을 제대로 탄 실력자들이었다.
가문도 중요하고, 인맥도 중요하나 기본적인 실력이 없으면 안 되는 게 마법사였으니까.
그렇기에 그들은 좀처럼 진입할 수 없던 이데아(idéa)가 빈틈을 보이자마자 안으로 진입, 목표였던 이브들을 찾을 수 있었다.
마탑에 널리고 널린 그럭저럭 우수한 이들이었으면 결코 할 수 없는 일.
그런데 목표를 마주 본 순간 갑자기 공간을 넘어 이곳으로 이동했다.
뭐라 채 반응하기도 전에.
무엇에 당한 건지는 다들 알고 있었다. ‘이데아(idéa)’와 더불어 마탑에서 연구 중이던 프로젝트 ‘세계수와 공간 마법의 접목’일 터였다.
성공만 한다면 인류는 공간의 제약에서 완전해질 수 있는 위대한 연구.
그렇기에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아직 연구 단계인 이 두 술식을 구현화 한 건지. 더 충격인 것은 그걸 누가 사용한 건지 모르겠다는 점이었다.
송장인형에 들어간 이브(Eve), 아니면 아카이브의 실험체이자 두 가지 이름을 가진 흑마법사.
이에 관해 알기 위해 비밀 임무를 맡은 마법사들은 데릭과 언너를 추궁하고, 야렐리에게 질문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아는 게 있냐고 말이다.
허나, 반응은 똑같았다. 아는 게 전혀 없었다.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었다. 흑마법사의 뒤를 쫓아 여차할 경우 임무를 인계하라는 비밀 임무를 맡은 본인들 역시 아는 바가 없었으니.
문제는 데릭과 야렐리, 언너가 모두 적극적으로 협력하려는 의사가 없어 보인다는 점이었다.
자신들도 모르게 사람이 따라붙어 기분이 나쁜 것일까?
이에 관해 따져 설득하려는 찰나, 다시 안정을 찾아 외부의 침입을 틀어막던 이데아가 해체되며 누군가 나왔다.
흑마법사이지만 마탑의 직원으로 있는 이질적인 존재. 데이브였다.
그는 엉망이 된 얼굴과 피가 살짝 묻은 옷을 입은 채 어깨에 작은 세계수를 짊어지고 나타났다.
작다곤 해도 나무. 그런데 척 봐도 삐쩍 말라 보이는 올리버가 들고나오니 무슨 장난질을 한 게 아닐까 할 정도로 어색해 보였다.
“다들 안녕하십니까? 마탑의 직원 제논 브라이트입니다.”
놈이 뻔뻔하게 거짓말했다. 뒷골목 해결사인 주제에.
그러나 비밀 임무를 받은 마탑의 마법사는 겉으로 티 내지 않고 대꾸했다. 마법과 성법 아이템으로 감정은 완전히 숨겼으니 자신의 감정은 모를 터였다.
“반갑습니다. 클라우드라고 합니다. 마탑의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가던 중 지원이 필요하다는 소식을 듣고 왔습니다.”
클라우드란 마법사는 미리 준비한 뻔한 변명을 댔다. 따진다면 거기에 맞춰 미리 준비한 근거를 댔을 테지만, 데이브는 전혀 따지지 않았다.
“아, 그렇군요.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말에 클라우드는 한순간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그 기분을 떨치기 위해 질문했다.
“아, 그런데 아까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들어간 순간 갑자기 이곳으로 나와서요.”
질문을 들은 올리버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릴리스가 한 일이라고 짧게 설명해줬다.
허나, 그러한 노력이 무색하게 클라우드는 어떻게 이브가 마탑에서 연구 중이던 마법을 성공시켰냐 등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
올리버는 정식 보고서로 올리겠다고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조금 피곤해서요.”
“아, 그렇군요······. 그럼, 저희가 대신 이브를 옮겨 드릴까요?”
“예?”
“확실히 피곤하신 것 같아서요. 다치시기도 다치셨고······. 괜찮으시다면 저희가 대신 이브를 옮겨 드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냥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 정도 일은-”
“-아뇨, 잘못 이해하신 것 같습니다. 제가 싫어서 괜찮다는 뜻입니다. 제가 맡은 일이니, 제가 끝까지 수행하고 싶거든요. 이브에 관해 마탑과의 약속도 있고요.”
올리버는 평소처럼 부드럽지만, 단호한 말투로 말했고, 들었던 것과 다른 올리버의 태도에 클라우드를 비롯한 몰래 따라붙은 마법사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사람의 말을 막는 묘한 힘이 있었다.
올리버는 그런 그들에게 정중히 인사하곤 앞으로 걸어갔다. 그렇게 몇 걸음 걸었을 때 뒤돌아봤다.
“데릭 씨, 언너 씨, 야렐리 씨는 안 오실 겁니까?”
같이 왔으니, 같이 돌아간다. 지극히 단순한 생각에 기반해 올리버가 물었고, 개인적으로 의탁한 언너를 비롯한 데릭, 야렐리까지 망설임 없이 올리버를 뒤따라갔다.
데릭이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릴리스 님에게 얻어맞다 잘 설득해 양보받았습니다.”
축약된 정보에 데릭을 포함한 모두가 인상을 찌푸렸다.
올리버는 이브 중 하나의 이름이 릴리스라고 알려줬고, 그러자 야렐리가 질문했다.
“어떻게 릴리스를 설득한 거죠?”
“제가 농담을 잘하거든요. 매일 한 시간씩 유머책을 읽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