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4. 새로운 이브? (1)
알버트 헌트.
모이라이 학파 소속의 마법사.
올리버는 과거 셰이머스 건으로 그와 처음 만나 잠시 합을 맞출 수 있었다.
썩 나쁘지 않은 시간이었다······. 마지막에 올리버가 이브(Eve)를 풀어줌으로써 좀 꼬이긴 했지만 말이다.
“이제 신경 쓰지 않으니, 마음에 담아두지 마시죠. 그보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좀 다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알버트가 올리버의 모습을 훑어보며 말꼬리를 흐렸다. 이야기처럼 올리버의 몸 상태는 척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전 괜찮습니다. 전보다는 나아졌거든요. 다만······.”
“다만?”
“머리 색깔이 마탑 사람들이 보기 너무 촌스러울까 봐 걱정이긴 합니다.”
“······.”
“농담입니다.”
“아······.”
전혀 농담 같지 않은 농담에 알버트가 탄성을 내며 비위를 맞췄다.
“정말 재밌는 농담이네요.”
“매일 유머책을 1시간씩 읽거든요.”
“아아아······.”
“왜 그러시죠?”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알버트는 고개를 빠르게 저으며 해당 이야기를 빠르게 종료, 곧바로 새로운 이야기를 꺼냈다.
“음······. 실례가 안 된다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다름이 아니라 사실 제논 씨에게 의뢰할 일이 있거든요. 마탑 차원에서 말입니다.”
“제논이라고 하시면, 해결사가 아닌 마탑 직원으로 말씀입니까?”
올리버가 그답지 않게 빠르게 눈치챘다. 알버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물론, 제논 씨의 몸 상태가 괜찮으시다는 전제하에서입니다. 몸이 불편하시면 거절하셔도 됩니다. 그게 서로를 위해 좋으니까요.”
“괜찮을 것 같습니다.”
“정말입니까?”
“예······. 격하게는 움직이긴 힘들어도 임무는 수행할 수 있으니 괜찮을 것 같습니다. 의뢰 내용이 뭐죠? 마탑 차원에서?”
“혹시, 마탑 프로젝트가 도둑맞았다는 거 들으셨습니까?”
“예.”
“그걸 되찾아주셨으면 합니다.”
“아······. 죄송하지만, 알버트 씨. 전 흔적도 없이 사라진 물건을 찾는 능력은 없습니다.”
“흔적은 찾았습니다.”
알버트가 품 안에서 소켓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리고는 손가락을 딱! 튕겼다.
소리가 울리자 소켓 안에 내장된 마력이 뿜어져 나와 마력 입자를 재구성, 기계에 담긴 술식을 토대로 허공에 영상을 투영했다.
“보안 영상은 모두 먹통이 된 줄 알았는데요?”
“저희 쪽에서 따로 설치한 건 살았습니다.”
“그럼, 저긴······?”
“마탑 행정부 아래 있는 금고입니다. 마탑의 지원을 받는 프로젝트의 연구 내용과 성과를 모두 저기 보관합니다. 혹여 모를 소실이나 도난을 대비해서요.”
“모아놓는 게 도난당할 확률이 더 높지 않습니까?”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보물을 보물창고에 넣는 거랑 비슷한 이치죠. 대신, 그만큼 보안에 힘을 씁니다. 저들 때문에 허무하게 뚫렸지만요.”
알버트가 허공의 영상을 가리켰다. 말하기 무섭게 영상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왔다.
인원은 총 여덟. 모두 똑같은 전신 슈트를 입고 있어,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마법 아이템이군요.”
“맞습니다.”
알버트가 소켓을 조작해 영상을 일반 화면에서 마력 화면으로 변경시켰다.
그러자 사람의 모습과 주변 풍경은 텅 빈 검은색으로 변하더니, 슈트에 깃든 마력만이 선명하게 보였다.
푸른빛 마력이 슈트에 설치된 마력회로를 따라 신경전달물질처럼 빠르게 왕복 운동을 하며, 여러 술식을 그렸다.
“보시면 알겠지만, 보통 물건이 아닙니다. 군용물건이죠. 슈트의 마력회로를 분석해 본바, 부여된 술식만 해도-”
“-육체강화, 물리방어, 투명화, 원소마법 저항력이 있네요.”
정확한 평가에 알버트는 말문이 막혔다. 자신들도 이틀이 걸려 분석했건만 단번에 보고 맞추다니. 너무 어이가 없어 분하지도 않았다.
“예, 맞습니다. 한두 푼이 하는 물건이 아니죠. 거기다 착용자들 모두 전문가입니다.”
올리버가 영상에 나오는 모습을 보곤 동의했다. 뒷세계에서 해결사로 적잖은 시간을 보낸 덕분에 걸음걸이와 손동작, 시선 처리만 봐도 실력과 경험을 대충이나마 알 수 있었다.
올리버가 보기에도 영상에 나온 사람들은 모두 전문 훈련을 받은 베테랑들. 최소한 군인 아니면 폭력을 업으로 삼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다름 아닌 저겁니다.”
알버트가 한 여성을 가리켰다. 정확히는 그녀가 든 조잡한 기기를. 마치 다리미처럼 생긴 물건이었는데, 여성이 금고에 기기를 부착하자 2분도 안 돼 금고가 해제됐다.
“정확히는 1분 12초. 1분 12초 만에 뚫렸습니다. 넷 내비게이터(Net Navigator)나, 드루이드 없이요······. 금고의 성능에 대해 아십니까?”
“정확히는 모릅니다.”
“세계수를 이용해 만든 금고입니다. 여덟 겹의 방어 시스템을 구축했고, 그 방어 시스템마다 다른 유동성 패턴을 부여했죠. 방어보다는 시간 소진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뚫릴 순 있겠지만, 쉽게 뚫리진 않겠군요.”
“정확히 맞추셨습니다. 뚫는 건 가능해도 40분 안에는 힘들고, 20분 내는 절대 불가능합니다······. 거기다 시스템을 다 구축한 뒤에는 외부 해킹을 방지하기 위해 세계수를 잘라 물리적으로 고립시켰습니다.”
“즉, 외부의 지원 없이 저기 바로 앞에서만 해킹할 수 있다는 거군요.”
올리버가 핵심을 바로 짚어냈다.
푸는 데 40분이 걸리는 금고를 사전 준비 없이 1분 12초 만에 해제했더라······. 꽤 대단하긴 했다.
“솔직히 말해 침입자들의 실력이나, 그들이 걸친 전신슈트는 그리 놀라운 게 아닙니다. 비싸긴 하겠지만 반대로 말하면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거니까요. 하지만 저 기계는 전혀 아닙니다.”
올리버는 침묵으로 동의했다.
얼핏 보면 조잡하기 그지없는 다리미에 불과했지만, 마탑이 설치한 보안 시스템을 혼자서 뚫어버리다니. 현재의 기술로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저 영상을 토대로 저희는 저들의 흔적을 찾았습니다. 제논 씨께서 도둑맞은 프로젝트와 이 기술을 확보해주셨으면 합니다”
도둑맞은 마탑의 프로젝트 회수와 미지의 기술 확보라······. 충분히 납득이 되는 의뢰였다. 한 가지 점을 빼고.
“왜 하필 저죠?”
“······제논 씨의 실력을 믿으니까요. 가장 믿고 맡길 수 있고요. 당연히 거기에 걸맞은 보상을 드릴 겁니다.”
“음······. 신경 쓰이는 게 하나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뭐죠? 신경 쓰이는 게?”
“진짜 노리는 건 뭡니까?”
“······.”
올리버는 물었고, 알버트는 침묵했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는지, 아니면 뜨끔해서인지 알버트는 계속해 침묵으로 대답하였는데, 올리버는 멈추지 않고 한 걸음 다가갔다.
“혹시, 이브(Eve)에 관한 겁니까?”
“······?!!”
정보의 바다 룻 넷(Root Net)에서도 버틸 수 있는 강력한 정신력을 가진 넷 내비게이터(Net Navigator) 알버트가 소리 없이 놀랐다.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음······. 감이요?”
올리버가 적당히 둘러댔다. 그러나 반은 사실이기도 했다.
세계수에 접속해도 보이지 않는 이브(Eve)와 그런 이브(Eve)에게 집착하던 모이라이 학파를 보자 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이없는 대답에 알버트는 반쯤 포기하며 말했다.
“이제 와 부정해봤자 믿지 않으시겠군요.”
“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단번에 거절하는 알버트. 올리버가 이유를 묻자 그가 설명해줬다.
“데이브 씨께서 과거 이브(Eve)를 멋대로 풀어준 전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께 이브(Eve)와 관련된 일을 맡길 순 없지요.”
“마탑에서는 제논입니다.”
“그건 뭐라 할 말이 없군요. 어쨌건 힘듭니다.”
“알겠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알아보는 건 문제없지요?”
“당연히 안 되죠.”
알버트가 진심으로 질색했다. 말이 안 되지 않은가?
“이브(Eve)는 모이라이 학파는 물론, 마탑에서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죄송하지만, 이번 임무에서 제논 씨께서 맡으실 수 있는 일은 도난당한 프로젝트를 회수해 시선을 끄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그 외에는 마탑에서 허락하지 않을 겁니다.”
알버트가 곤혹스러움을 빛내며 답했다. 그도 그럴 게, 원래 계획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데이브를 눈속임용 작전에 투입해 상대의 이목을 끄는 동시에 변수를 제거하는 거였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시작하기도 전에 일이 꼬이고 말았다.
허나, 꼬이는 건 지금부터였다. 왜냐면 올리버가 품 안에서 사직서를 제출했기 때문이었다.
“사직서?”
“예.”
“예는······! 하······. 왜 품에서 갑자기 사직서가 나오는 겁니까? 마탑을 그만두실 생각이셨습니까?”
“아뇨, 마탑을 그만둘 생각은 없습니다. 전 마탑이 좋거든요. 책도 많고, 급여도 따박따박 나와서요.”
“근데 왜?”
“[직장인들을 위한 조언]이란 책에서 모든 직장인은 가슴에 사직서를 품고 다녀야 한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미리 준비해둔 겁니다.”
“죄송하지만, 이상한 책 좀 그만 읽으세요. 유머책을 포함해서요. 소용없는 거 같은데.”
“말씀이 심하시네요······. 어쨌건, 지금 사직서를 내겠다는 제 뜻은 진심입니다. 사직서를 내면 전 더 이상 마탑 소속이 아니니 제 뜻대로 해도 문제없지 않겠습니까?”
“헷갈려서 그러는데, 지금 협박하시는 겁니까?”
“아뇨, 협박이 아니라 진심입니다. 마탑이 좋긴 하지만, 전 내키지 않을 걸 억지로 하는 것도 좀 그렇거든요. 그래서 가급적 조직에 소속되지 않으려고 한 거고요······. 의견이 안 맞다면, 제가 나가는 게 맞죠.”
담담하고 차분한 미친 소리. 그러나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하기야 이미 해결사로도 사업가로도 란다에서 입지를 다진 그가 마탑을 떠난다 해도 크게 아쉬울 게 없긴 했다. 뭣보다 사람 자체가 그런 거짓말이나, 블러핑을 할 인간도 아니었다.
“하아······. 원하시는 게 뭡니까?”
“일단, 하던 이야기마저 해주십시오. 이브(Eve)에 관해서요.”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 알버트는 골치가 아픈 듯 관자놀이를 누르더니 팔짱을 끼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과거 데이브 씨께서 이브(Eve)를 놓아준 후, 저희는 이브(Eve)를 따로 추적했습니다. 그만큼 이브(Eve)는 저희에게 의미가 깊거든요.”
“압니다.”
“아뇨, 모르십니다. 안다면 그렇게 풀어줄 수 없거든요. 문장으로 이해해도, 그 속의 뜻은 모르는 거죠.”
알버트가 처음으로 꼭꼭 숨기고 있던 원망의 감정을 내비쳤다.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었다.
세계수의 인공정신 이브(Eve)는 해당 분야에 종사한 모든 사람의 꿈이라 할 수 있었다. 마법사, 드루이드 가리지 않고.
그런데 그런 존재를 올리버가 놓아줬다? 원망이 생기지 않는 게 더 이상한 거였다.
“글쎄요. 관점의 문제라 생각합니다. 이브(Eve)는 분명 커다란 가치를 지닌 존재이지만, 그 이전에 자의식 역시 있습니다. 그런 존재를 억지로 구속하는 게 과연 좋은 건가 싶더군요. 좀 그렇지 않습니까?”
알버트는 침묵했다. 흑마법사에 사람 피 값으로 먹고살던 해결사가 저리 말하니 뭐라 대꾸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하던 이야기를 마저 했다.
“······어쨌건 그 이브(Eve)의 행방을 찾았습니다.”
“어떻게 찾으셨죠? 쉽지 않았을 텐데요?”
“재밌게도 저 기기로 찾았습니다.”
알버트가 영상 속 다리미 같은 기기를 가리켰다.
“영상과 금고에 남은 기기의 잔흔을 찾아 분석해 봤죠. 조사해 본 결과 저 기계는 해킹 기능이 아닌, 매개체 기능이 있더군요.”
“매개체라고 하시면?”
“누군가 기계를 통해 원격에서 조종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흔적을 정확하게 거꾸로 따라 올라가 봤습니다. 그 끝에 이브(Eve)가 있더군요.”
“······이브(Eve)요?”
“예, 놀랍게도 그 이브(Eve)는 또 다른 이브(Eve)를 쫓고 있었습니다.”
올리버가 멈칫했다. 이브(Eve)가 또 다른 이브(Eve)를 쫓고 있다니. 신대륙에서 만난 판도라와 레이크 빌리지를 고립시킨 또 다른 이브(Eve)가 떠올랐다.
‘판도라는 아닐 거고······. 레이크 빌리지의 이브(Eve)? 아니면 내가 모르는 새로운 이브(Eve)?’
올리버는 의문을 품으며 처음 이브(Eve)를 손으로 후려쳐 부쉈을 때를 떠올렸다.
“마탑과 저희 모이라이 학파는 도난당한 프로젝트를 찾는 척하며 이브(Eve)를 추적해 확보할 생각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두 개 다, 최소한 하나는요.”
“그게 진짜 노리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프로젝트는 또 진행할 수 있지만, 이브(Eve)는 아니니까요.”
“이브(Eve) 문제를 제게 맡겨주십시오.”
올리버가 뜬금없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예?”
“이브(Eve). 제게 맡겨달라고 했습니다.”
“······마탑을 위해 이브(Eve)를 확보해주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아뇨, 확보할 생각은 없고, 설득할 생각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들어보니 이브(Eve)도 보호해 줄 사람이 필요한 것 같아서요······. 세 가지 조건만 들어주시면 이브를 설득해 마탑에 데려오도록 해보겠습니다.”
“제가 대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럼, 대신 전해주실 수 있습니까? 마탑이나, 모이라이 학파에요.”
평소 예의 바른 모습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무리하고 무례한 요구. 알버트는 반쯤 포기하며 대답했다.
“······안 들어주시면 사직서 내고 저희를 방해하실 생각이시겠죠?”
“아닙니다. 방해라뇨······. 그저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할 뿐입니다.”
올리버의 고집에 결국 알버트의 고집이 꺾였다.
“······도대체 뭐죠?”
“첫 번째는, 이브(Eve)에게-”
“-아뇨, 그걸 묻는 게 아닙니다. 풀어준 것도 그렇고, 왜 이브(Eve)를 위해 그렇게 하냐는 겁니다. 이브(Eve)의 가치와 상징성에 그다지 관심도 없으신 것 같은데.”
“음······. 글쎄요? 미안해서요?”
올리버가 이브(Eve)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
“흐음······.”
새하얀 피부, 빛나는 금발, 가느다란 목과 몸.
죽어가는 도시에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미녀가 거대한 나무에 기댄 채 앉아 두 눈을 감고 야릇한 소리를 냈다.
꽤나 이상하게 보일 법한 광경이었지만, 여성의 외모 탓에 그마저도 한 폭의 그림이 되었다.
“무슨 일 있나?”
여성의 곁에 한 남자가 다가왔다. 굵은 선의 남성적인 미남으로, 얼굴에 걸맞게 몸도 크고 두꺼워 힘이 절로 느껴졌다. 그럼에도 남자에게선 마법사 특유의 학자 같은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늦었네요?”
여성이 한쪽 눈만 살짝 떠 남자를 바라봤다. 남자의 등 뒤로 거대한 빙판이 퍼져 땅과 건물을 다수 얼렸다. 공기 중의 허연 김만이 냉기의 위력을 대변해 줄 뿐이었다.
“5분도 안 걸렸어.”
“네, 인신매매나 하던 촌놈들을 상대로요.”
여성이 예의 바르게 비아냥거렸다. 그 말에 남자는 할 말이 없는지 인상만 썼지만, 사실 이는 너무 부당한 처사였다.
란다에 의해 죽어가는 도시라 해도 이 도시의 갱들은 엔조이먼트 드루이드를 주축으로 인신매매에 종사해 나름 인근에선 위세가 대단한 편이었다.
물론, 그것도 불과 5분 전 이야기였지만. 지금 남은 거라곤 동사(凍死)한 시체밖에 없었다.
“드루이드 시체만 챙기고 나머지는 적당히 치우세요. 드루이드 시체는 구하기 힘드니까.”
남자는 여자에게 지시받는 게 익숙지 않은 듯 어색하게 고개를 까딱여 다른 동료들에게 지시했다.
“이제 방해꾼은 사라졌어. 바로, 작업에 들어가지.”
“급하시네요.”
“물리적으로 이브(Eve)를 이 도시에 가뒀다 해도, 여긴 먼 타지.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할 수 없어. 방해꾼이 나올지도 모르고.”
“어머, 재미없어라······.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네요. 지금 란다에서 방해꾼이 오고 있으니까요.”
“방해꾼? 누구?”
“마탑요. 다들 마탑, 마탑하더니 그만한 저력이 있나 보네요. 역으로 절 찾아낼 줄이야.”
남자는 다시 얼굴을 구겼다. 마탑은 오래전 자신들을 배신한 반역자들이자, 가짜들이었으니. 저런 평가조차 거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여성은 상관하지 않았다. 그런 사소한 건 자신에게 아무것도 아닌 그저 재료에 불과했으니. 미래를 알기 위해 재료.
지금 그녀는 그 재료를 바탕으로 자신이 원하는 미래를 도출하고자 했다.
“인근 로드 갱에게 연락을 넣어야겠어요.”
“그따위 갱이 도움이 되겠어? 기껏해야 시간이나 끄는 정도겠지.”
“그거만 충분하지 않나요? 아니면 마탑이 온다고 하니 겁먹은 건가요?”
여성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남자는 눈앞의 여자가 진짜 여자가 아니란 걸 앎에도 발끈하고 말았다.
“내가 그따위 배신자들에게 겁먹을 거 같나?”
“그럼, 다행이고요. 갱들이 시간을 끌거나, 상대의 저력만 파악해도 충분하니, 우리는 이 도시의 세계수를 천천히 조여 이브(Eve)를 이 나무에 몰아넣어 가두기나 하죠.”
여성이 자기 옆에 있는 세계수를 탁탁 쳤다.
“그렇게만 된다면 스카디 학파는 이브(Eve)를 손에 쥘 수 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