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3. 새로운 일상 (3)
뒷거래.
마탑에서 행해지는 각종 어두운 거래 혹은 교칙에 어긋나는 일을 의미했다.
넓은 부지와 높은 타워, 수많은 사람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마탑은 란다에서도 손꼽히는 자원을 보유하여 이를 빼돌리거나, 훔쳐 자기 주머니를 채우는 사람이 적잖게 있었다. 그리고 그 종류도 실로 다양했다.
실험도구나 물건을 빼돌리는 ‘빼돌리기.’
해결사처럼 뒷골목에서 잠시 일해주는 ‘알바’
마탑 내의 정보나 소문 등을 팔아넘기는 ‘귓속말’
아예 조직화해 포션, 스크롤, 마법주, 합성마약 등을 제조해 파는 ‘뒷공정’ 등이 있었다.
얼핏 들어도 그 규모가 상당하다는 걸 알 수 있었는데, 실제로도 그 규모가 꽤 대단한 편이라 할 수 있었다.
란다 음지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할 정도로 말이다.
하긴, 그게 아니고선 블랙마켓에 마법 관련 상품이 마르지 않는 게 설명이 안 됐다.
마법은 마법사들의 전문 영역.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마법사가 끼지 않으면 불가능했다.
‘그래도 펠릭스 씨가 그 뒷거래를 한 건 놀랍긴 하네······. 그래서 열심히 하신 건가?’
올리버가 처음 펠릭스를 봤을 때를 떠올렸다.
모두가 의욕이 없던 와중 어떻게든 케빈의 수업을 듣기 위해 그는 아등바등 수업을 따라왔다.
당시 펠릭스에게선 약간의 독기와 목적의식이 엿보였는데, 혹시 그게 뒷거래를 위한 건가 싶었다. 케빈의 개인연구를 빼돌리기 위해.
아주 가능성이 없는 이야긴 아니었다. 케빈의 연구는 군(軍)에서도 관심을 가질 정도로 꽤 괜찮은 연구가 많았기에.
종군마법사 출신인 그는 전쟁 현장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고, 이를 반영한 학식과 실력을 갖췄기에 군 관계자와 정기적으로 만남을 가졌다.
“음······.”
올리버는 잠시 고민하다 생각을 접기로 했다. 자신이 함부로 판단할 일이 아니라 생각해. 대신, 먹고 있던 칼로리바를 마저 입에 쑤셔 넣은 뒤 가던 길을 마저 갔다.
펠릭스가 뒷거래에 종사한 건 분명 그의 업보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아는 게 하나도 없는 올리버가 함부로 재단할 건 아니었으니.
지금 확실한 거라곤 마탑에서 준비하고 있던 프로젝트가 외부세력에 의해 허무하게 털리고, 그로 인해 대대적인 조사를 통해 펠릭스를 포함해 뒷거래에 종사한 사람들을 대거 붙잡았다는 것뿐이었다.
당사자가 아닌 올리버에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난 내 일부터 해야지.’
올리버는 그리 생각하며 원소학파-타워 내에 있는 도서관에 도착했다.
마탑 출근 초창기에는 자주 들렸건만, 어쩌다 보니 바빠 오랜만에 방문했다.
올리버는 품 안에서 마탑 직원신분증 꺼내 도서관 문에 댔다.
지잉······.
그러자 문이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스스로 열렸다.
올리버는 처음 봤을 때처럼 감탄했다.
오랜만에 보는 탓도 있었지만, 역시나 대단한 기술이었다.
마탑 부지 내 있는 세계수와 건물을 신경처럼 연결해 이런 식으로 활용하다니.
근본적인 원리는 열쇠와 자물쇠 혹은 퍼즐처럼 맞물리게 홈을 파놓은 것에 불과했지만, 그 원리를 세계수에 접목하고 실용화한 건 다른 문제였다.
초창기 마탑을 건설한 마법사들이 참으로 대단한 것 같았다.
‘음······. X구역에도 적용할 수 있으려나?’
올리버는 X구역의 인공 숲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원리는 알 수 없으나, 숲이 생기고 관리하자 작게나마 세계수가 자랐는데, 활용하면 꽤 좋지 않을까 싶었다.
‘문제는 내가 그 정도로 세계수에 조예가 깊지 못하다는 건데, 이브(Eve)라면 모를까.’
올리버가 다시 이브(Eve)를 떠올렸고, 곧 자신의 이기심에 한탄했다. 필요할 때만 또 떠올리다니.
‘음······. 고맙다는 인사라도 할걸.’
올리버가 뒤늦게 후회했다. 어떻게든 시간을 쪼개 인사라도 했었어야 했는데. 특히, 이브(Eve)는 아직 세상을 낯설고 혼란스러워했다.
신대륙에서 만난 판도라가 떠오르자 후회는 한층 무게를 더했다.
“흠, 흠······!”
상념에 빠진 그때 기시감이 드는 기침 소리가 들렸다. 다름 아닌, 사서로 그녀는 문 앞에서 알짱대는 올리버에게 불편함, 성가심, 언짢음 등 여러 부정적인 감정을 빛내며 노려보았다.
처음 도서관을 방문했을 때와 똑같은 상황.
올리버는 그때처럼 사과하며 서둘러 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사서의 감정이 변했다.
처음에는 의아함, 그다음에는 헷갈림, 또 그다음에는 깨달음과 놀람, 당혹감 등을 빛냈다.
올리버를 알아보지 못하다가 뒤늦게 눈치챈 것. 그건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었다.
올리버는 마지막으로 도서관을 방문했을 때보다 몸이 삐쩍 말라졌고, 머리 한쪽이 탈색됐으며, 오른쪽 팔에 붕대도 두르고 있었으니. 실제로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알아보는데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니 사서가 올리버를 못 알아본 것도 이상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이상한 것은 뒤늦게 알아보고 안절부절못하는 사서의 모습이었다.
마치 상급자에게 실수라도 한 듯.
그녀가 더듬더듬 말했다.
“아······. 제논 씨······. 죄, 죄송합니다.”
“예?”
“그 제가 실례를······. 죄송합니다.”
약간 까칠한 분위기를 풍기던 사서는 기가 크게 꺾인 채 사과했다.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었다.
마탑의 정식 직원이 됐기 때문인가 싶으면서도, 뭔가 부자연스러웠다. 좀 과하지 않은가?
허나, 올리버는 그 이유는 묻지 않고 사서에게 괜찮다고 대답하며 그냥 지나갔다. 이유가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 감정 상태로 물어봤자 제대로 된 대답을 듣지 못할 게 뻔히 보여.
사서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자 도서관에는 여느 때처럼 많은 학생이 보였다.
원소학파에 속한 마법사들로, 그들은 올리버를 힐끔힐끔 바라보다 눈이 마주칠 거 같으면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
마탑에 들어왔을 때처럼 마주친 학생들과 지금 사서와 비슷한 감정을 빛냈다.
왜 이러나 싶었지만, 올리버는 깊게 생각하는 대신 도서관에 비치된 거대한 기계로 갔다.
정식 명칭은 ‘WAD-3’ 혹은 ‘와드3’로, 모이라이 학파와 마법공학 학파가 합심해 만든 물건이었다.
넷 내비게이터가(Net Navigator)가 아니더라도 마력만 사용하면 세계수를 한정적으로나마 이용할 수 있게 해주는 보조 장치.
사용에 제한이 있는 세계수의 사용자 범위를 늘려주는 실로 대단한 물건으로, 올리버는 몸 안에 저장된 마력을 끌어올려 기계를 가동, 조작해 찾고자 하는 책을 입력했다.
“[드루이드의 정신 수양론], [드루이드의 명상법], [드루이드가 말하는 숲과 동물, 자연의 철학], [자연과의 조화], [수행에 관한 거시적 방법론], [드루이드의 정원관리법 추론], [정령 교감의 기본]······.”
와드3에 입력된 책 내용을 뒤로 다가온 누군가 말했다.
“오랜만이군. 제논.”
그는 다름 아닌 데릭이었다. 케빈의 수업을 듣다, 연구원까지 된 마탑의 학생. 올리버가 뒤를 돌아보자 그가 서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데릭 씨. 많이 나아지셨군요.”
올리버가 데릭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를 떠올리며 말했다.
테어도어의 음모에 휩쓸려 대량의 생명력과 마력을 빼앗긴 그는 오랜 투병 생활을 한 듯 체격이 왜소해지고, 얼굴도 핼쑥해지며, 선명하던 머리색도 탈색돼 그 빛깔이 옅어졌건만, 지금은 그때에 비하면 훨씬 좋아 보였다.
조금만 더 요양하면 예전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을 정도로.
“덕분에······. 넌 아닌 거 같지만.”
올리버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본 데릭이 말했다.
“이것저것 일이 있었거든요. 꽤 나아졌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데릭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한데, 꺼내질 못했다.
“저 책들······. 필요한 거야?”
“예. 개인적으로 필요해서요.”
올리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한 이유는 여러 가지인데, 써드가 작성한 드루이드의 지식과 비교 분석해보기 위해서가 첫 번째였고, 이를 통해 X구역의 숲을 어떻게 관리할지 계획을 짜고 싶은 게 두 번째였다.
대부분 업무를 써드에게 맡길 생각이긴 했지만, 그와 별개로 올리버 역시 알고는 있었어야 했기에.
그것 외에도 드루이드의 명상법을 통해 허기와 작열통을 덜 수 있지 않겠느냐는 기대도 있었다.
멀린이 효과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대답을 들은 데릭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저기······. 괜찮으면 좀 도와줄까? 책······. 일련번호를 보아하니 좀 돌아다녀야 할 것 같은데. 몸도 불편해 보이고.”
머뭇머뭇 빙빙 돌려 말하는 데릭. 올리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와주신다니 감사합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
타악. 탕.
몇 분 후 올리버와 데릭은 각자 책을 챙겨와 책상 위에 올렸다.
책의 양이 많아 책상 위에 올릴 때 약간 소리가 울렸지만, 문제는 없었다.
마탑의 대부분 도서관에는 마법으로 온도를 쾌적하게 유지할 뿐 아니라 구획별로 방음(防音) 마법에 걸려 있어 대화를 나누는 것도 문제가 안 됐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왜 다들 마탑에 남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요구하는 건 많았지만, 능력만 입증한다면 누릴 수 있는 대우와 혜택, 편의가 만만치 않았다.
“다 챙겨왔어. 확인해봐.”
데릭이 가져온 책을 늘여놓으며 말했고, 올리버는 확인했다.
“······네, 문제없습니다. 전부 챙겨와 주셨네요. 감사합니다.”
“감사는 내 몫이지.”
“예?”
올리버가 되묻자, 데릭이 마음을 다잡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우······. 감사는 내 몫이라고. 정말 고마워. 날 찾아와 수업 들으라 해준 것도, 레이크 빌리지에서 구해준 것도, 또 약을 준 것도 전부. 진심으로 고마워.”
진심. 데릭은 정말로 올리버에게 고마워하고 있었다.
꽤 이름난 가문 출신이라는 자부심과 오만도 한풀 꺾을 정도로 말이다.
“······그리 말씀해주시니 기쁘네요. 인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뭐, 당연한 건데······.”
“아뇨. 대단하신 것 맞습니다. 데릭 씨께서 그 감사 인사를 하기 위해 얼마나 마음먹었는지 보이거든요······. 쉽지 않은 걸 겁니다. 그런데 해주셨네요. 그게 절 기쁘게 합니다.”
데릭은 올리버를 빤히 바라봤다. 어떤 상황에서도 똑같은 표정을 짓는 탓에 기쁘다는 말이 믿기지 않았지만, 그래도 믿기로 했다.
올리버가 평소 보인 행적으로 볼 때 누굴 비아냥거리거나, 비꼬는 건 도저히 상상이 안 갔기에.
“그럼, 다행이고.”
“네······. 혹시, 그 말씀을 해주시려고 오신 겁니까?”
“그건 아니야. 도서관에 책 좀 빌리러 왔는데 우연히 본 것뿐이야. 교수님. 연구 자료 좀 찾아보게.”
케빈을 언급할 때 데릭의 모습에선 이제 존중과 존경이 자연스럽게 빛났다. 처음에는 홍인(紅人)인 케빈 탐탁지 않아 했던 걸 생각하면 엄청난 변화였다.
이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오늘 마탑을 오길 잘한 것 같았다.
“아, 질문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책을 확인하고 사서에게 대여 신청하기 위해 챙기던 중 올리버가 물었다. 데릭이 답했다.
“질문······? 뭔데?”
“펠릭스 씨께서 뒷거래하셨다고 하던데, 아셨나요?”
데릭은 잠시 침묵하다 답했다.
“······알진 못했지만, 딱히 이상하진 않네. 그 녀석 집안 알아?”
“예, 교수님 대신에 인원 정리할 때 확인했거든요.”
“그럼 그 녀석 집안이 그리 풍족하진 않은 것도 알겠네?”
올리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적사항을 볼 때 확인할 수 있었다. 펠릭스는 마법사 집안 출신이었으나, 그와 별개로 풍족한 편은 아니었다.
물론, 진짜 빈민가 사람들에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마탑의 높은 등록금과 생활비를 감당하기엔 약간 무리가 있었다.
“보통 그런 녀석들은 대부분 뒷거래에 발을 담가봤을 가능성이 커. 돈이 없으니까.”
올리버는 고개를 끄덕여 납득했다. 과거, 킴벨 가문의 마법주 사업을 위협하던 에이드리라는 전(前) 마탑 출신 학생의 일지를 봤기에, 해당 사실을 어느 정도 알았다.
적잖은 수의 학생들이 경제적인 이유로 뒷거래에 몸을 담갔다.
“그렇게 안 되려면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거나, 아니면 능력을 입증해 후원자를 얻어야지. 사업가든, 마법사든.”
데릭의 목소리에는 공감과 그로 인한 씁쓸함이 담겨 있었다. 레드힐 가문 출신인 그에겐 꽤 먼 이야기일 텐데······. 아닌가?
“뭐, 흔해 빠진 이야기지······. 내가 대신 옮겨줄까?”
데릭이 카트 위에 쌓인 책을 가리켰다.
올리버는 쿼터스태프를 쥔 자신의 왼손과 붕대를 두른 오른손을 번갈아 봤다.
“음······. 조금만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얼마든지.”
데릭이 흔쾌히 대답하며 카트를 잡아 대신 끌고 갔다. 이제 사서에게 대출 신청을 받고, 마법 가방에 챙긴 뒤 집으로 돌아가 읽으면 오늘 할 일은-
“-아, 저기 오시네요.”
도서관 사서가 한 남자와 대화하는 도중 다가오는 올리버를 조심히 가리켰다.
올리버는 반사적으로 맞은편 남성을 봤다. 낯설면서도 낯익은.
그는 사서에게 인사를 하곤 올리버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데이브 씨······. 아니, 여기선 제논 씨인가? 여하튼 오랜만입니다. 절 기억하시는지요?”
“예, 알버트 씨 아닙니까?”
“기억해주시는군요. 기쁩니다.”
ABC건으로 올리버와 잠깐 일했던, 모이라이 학파의 마법사가 말했다. 그가 올리버에게 부탁했다.
“괜찮으시다면 잠깐 이야기 좀 나눌 수 있겠습니까? 드릴 말씀이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