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 리매치 (3)
[냉림식화(冷林食火)]
즉석에서 영창하긴 했지만 사실 그리 대단한 술식은 아니었다. 온전한 하나의 술식도 아니었고.
별개의 술식인 [흑마법-창조계열 : 콜드 우드(Cold Wood)]와 [탐화(貪火)]를 합친 것에 불과했다.
장작과 불처럼.
허나, 그러한 사실과 별개로 위력 하나만큼은 진짜였다. 올리버가 보기에도 말이다.
콰화화화화화화화확!!
탐화가 사방을 둘러싼 차가운 나무에 접촉하자, 올리버가 설정했던 대로 차가운 나무와 그 안에 깃든 마력과 생명력, 감정을 먹어치우며 검은 화염은 폭발하듯 순식간에 성장했다.
흑색의 화염은 기름이라도 만난 듯 올리버조차 감당이 되지 않게 빠르게 번져나가 사방을 둘러쌌다.
그리고 그게 끝이 아니었다.
흑색의 화염은 멀린과 올리버 주변뿐 아니라 차가운 나무의 뿌리와 그 뿌리에 연결된 주변 공간까지 집어삼켜 단 1, 2초 만에 얼음의 땅을 흑색 화염의 땅으로 바꾸어 버렸다.
고유한 지형적 특성과 이곳에 있는 마력의 속성도 무시한 채.
아니, 무시하는 걸 넘어 오히려 먹어치웠다. 그도 그럴 게 이곳의 차가운 마력을 집어삼킨 차가운 나무에 맞춰 제작한 특제 탐화(貪火)였으니.
거대한 화염의 괴물은 태초의 본능대로 주변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며 자신의 크기를 무제한으로 불려 나갔다.
그것이 탐화의 본능이었다. 모든 걸 집어삼켜 자신의 생(生)을 유지하고, 힘을 키우는.
그 과정에서 공기를 불태우는 소리와 얼음이 증발하는 소리, 땅이 메말라 갈라지는 소리가 한데 뒤섞여 형용할 수 없는 소리를 냈다. 마치, 괴물의 울음소리와 같은.
거대한 화염의 바다는 주변의 모든 걸 집어삼켜 자신 외에는 무엇도 남기지 않았고, 그 열기는 생물과 무생물을 가리지 않고 불태웠다.
그렇게 그 누구도 정복하지 못했던 세상 끝 얼음의 땅은 흑색 화염에 점령당했다.
누가 보더라도 재앙이라고 할 광경 속에서 올리버는 두 가지 의문이 피어올랐다.
첫 번째 의문은 자신에 대한 의문이었다.
‘왜 멀쩡한 거지?’
블랙 슈트도, 감정 로브도, 몸 안에 저장된 마력도 탐화를 만드는데 모두 소진한 올리버가 생각했다.
지평선 너머에서도 볼 수 있을 높고 방대한 화염의 바닷속에서 어찌해 자신은 그렇다 할 위기도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지 말이다.
원래는 탐화를 통제해 자신을 보호할 생각이었건만, 그러한 행동 없이도 지금 아무런 불편함도 위험도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편하기까지 했다.
모든 걸 불태우는 뜨거운 공기가 폐 속에 들어와 아까 전 호흡기로 들어온 얼음을 녹여 줬고, 추위에 얼어가던 육체 역시 다시 데워줬기에.
‘인육 요리사 님 덕분인가?’
올리버가 의문을 가졌다. 운동능력과 반사 신경이 좋아진 것처럼 화염에 내성도 만들어 준 건가 싶어서.
‘마지막에 인육 요리사 님이 용으로 변했지······. 그거 때문인가? 용은 화염과 열기에 내성을 가지니까. 그래도 뭔가 아닌 거 같은데······.’
올리버는 계속해 추측했다. 오직, 멀린에게 유효타를 주기 위해 어느 정도 자신이 받을 피해도 각오를 하고 쓴 것이었는데, 이토록 멀쩡하다니 당혹스러웠다. 그 원인이 뭔지 몰라 더더욱.
‘물론, 저것도 당황스럽긴 매한가지지만.’
올리버가 두 번째 의문인 멀린을 봤다.
그 역시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 온몸의 수분이 증발해 죽을 수 있는 화염의 바닷속에서 멀쩡히 서 있었다.
올리버처럼 맨몸이 아닌 몸에 마법을 두른 상태였긴 했지만.
“드래곤 스킨(Dragon Skin). 화염에 절대적인 내성을 부여하는 마법이지. 정확히는 용의 피부를 마법으로 구현한 거지만.”
방대한 마력을 정교히 짜 구현한 반투명 비늘 갑옷을 전신에 두른 멀린이 설명해줬다.
올리버는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납득했다. 해당 마법을 책에서 한번 보았기에.
정말 용의 피부를 마법으로 구현한 드래곤 스킨이 맞았다.
그 증거로 얼음의 대지를 녹이다 못해 증발시키고, 그 아래 대지까지 불태우는 흑염의 바닷속에서도 멀린은 당당히 서 있었다.
하지만 아직 이해되지 않는 게 있었다.
“어떻게 드래곤 스킨을 쓸 수 있는 거지요? 제가 알기로 드래곤 스킨은 용의 혈통을 가진 자만 쓸 수 있는 고유마법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어르신. 용의 혈통입니까?”
“설마······. 난 생각만큼 혈통이 좋은 편이 아니야. 이건 선대 아카이브의 힘과 마력일세.”
올리버가 멀린의 한쪽 손에 들린 새로운 책을 봤다. 아주 오래된 헌 책으로, 책에서는 현재 멀린이 사용하고 있는 마력과 동일한 마력이 나오고 있었다.
“아카이브라는 거······. 선대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거군요.”
“정답.”
올리버가 추측했고, 멀린이 대답했다. 어쩐지, 이제 의문이 다 풀렸다.
아무리 드래곤 스킨을 썼다 해도 올리버의 탐화 역시 보통 화염은 아니었다.
왜냐면 멀린의 마력과 생명력으로 만든 차가운 나무를 먹어치우는 화염이었으니까.
그 말은 즉, 멀린의 마력에 더욱 강한 상성을 가지는 걸 뜻했다.
아무리 드래곤 스킨이라도 멀린의 마력으로 이뤄진 거라면 탐화를 완전히 막을 수 없었다.
드래곤 스킨의 특성이 있듯, 탐화 역시 올리버가 부여한 특성이 있었기에.
허나, 지금 멀린이 몸에 두르고 있는 건 멀린 본인의 마력이 아니었고, 그렇기에 탐화가 집어삼키지 못하는 거였다.
“후우······. 역시 어르신께서는 무섭군요.”
올리버가 진심으로 말했다.
차가운 나무를 만들어 멀린의 마력을 역이용하고,
수림(樹林)을 만들어 피할 수 있는 공간을 제한하며,
마지막 탐화를 이용해 절대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공격을 했건만 이토록 쉽게 막아버리다니. 정말로 무서울 지경이었다.
“나도 자네가 무섭네. 설마, 대련이라 해놓고 이런 식으로 공격하다니. 가슴이 아파.”
“죄송합니다. 이 정도는 돼야 공격이 닿을 거라 생각돼서요. 그런데 실패했군요.”
멀린이 고개 저었다.
“아니, 닿았네. 선대 아카이브의 힘을 썼다는 건 내 실력만으로는 막기 어려웠다는 거거든.”
틀린 말은 아니었다. 비록, 마력 통제력과 경험에서 비롯된 대응에서 올리버가 밀렸지만, 올리버는 감정과 마력, 생명력의 혼합과 드루이드의 주술을 복합적으로 사용해, 정면 대결은 피하면서도 멀린의 마력을 역으로 이용해 예상치 못한 역습을 가했다.
한 번의 공격만 허용해도 치명상인 초인들의 전투를 고려하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다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선대 아카이브의 힘을 소화하고 이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것 역시 멀린의 실력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었지만.
그렇기에 올리버는 이제부터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가늠할 수 없었다.
다양한 술식과 유동적인 대처로 불의의 일격은 줬지만, 결과적으로는 실패.
비슷한 경우 대부분은 성공했기에, 이리 실패하니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탐화에 다시 통제권을 발휘해 멀린을 밀어붙일까 했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멀린이 두른 드래곤 스킨을 뚫지 못하는 건 화력의 부족이 아닌 상성의 문제였다.
몸이 멀쩡했다면 주변에 퍼진 탐화를 둘러 직접 공격해 어떻게든 빈틈을 만들어 보겠지만, 오른팔에서 올라오는 작열통은 거친 움직임을 허용치 않았다.
‘빨리 이 통증을 해결할 방법을 생각해야겠네. 허기보다 훨씬 불편해. 잠자기도 힘들고.’
올리버는 다른 마법이나 흑마법을 써 제압해 볼까도 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압도적인 화염의 바다 탓에 올리버의 공격마저 불탈 테니 의미가 없었다. 그렇다고 탐화를 제거하는 것도 좋은 선택지는 아니었다. 그렇게 된다면 멀린의 공격도 허용해야 할 테니.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상황 속에서 올리버의 어깨 위로 무엇인가 토옥 떨어졌다.
“······눈?”
올리버가 어깨 위에 떨어진 새하얀 눈 결정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몇 초 후 퍼뜩 정신을 차렸다.
왜냐면 불가능했으니까.
대지마저 불태우는 화염의 바닷속에 어떻게 눈이 내린단 말인가?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불가능은 가능으로 변했다.
지평선 너머까지 확장하고, 하늘에 닿을 듯 솟구치는 화염 속으로 한 송이, 두 송이 눈이 떨어지고 있었다.
“스카디 학파의 정수, 만년설(萬年雪)이네. 선대 아카이브이자, 먼 과거 아이스아이 가문의 영웅인 용 살해자가 만든 마법이지.”
올리버는 점차 늘어나는 눈송이를 둘러보며 물었다. 아무런 물리적 위협도 없는 눈은 너무나도 차분하면서도 확실하게 화염의 기세를 꺾고, 열기를 누그러뜨리며 공간을 장악해나갔다.
“용 살해자요?”
“그래, 용들이 왜 멸종했는지 아나?”
갑작스러운 질문. 올리버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대략 400에서 500년 전 소빙하기가 와 멸종한 것 아닙니까? 추워져서요. 도서관 역사책에서 읽었습니다.”
“정답이야. 끔찍한 시대였지. 기온이 2, 3도 떨어져 농사와 어업을 시작으로 모든 게 뒤틀리기 시작했어. 식량부족, 전염병, 이상기후. 수많은 사람이 죽고, 수많은 나라의 흥망성쇠가 갈리며, 인간을 위협하던 용마저도 그때 멸종했지.”
올리버는 책에서 본 내용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2, 3도. 별거 아닌 작은 숫자처럼 보였으나, 그 여파는 멀린의 말처럼 상상을 초월했다.
역사의 큰 분기점이라 할 정도로. 그때, 용들이 멸종해 인간을 위협하던 다른 종은 사실상 사라진 거나 다름없었다.
이를 바탕으로 인류는 차근차근 꾸준히 문명을 쌓아 올릴 수 있었고.
즉, 지금 인류의 황금기인 마법과 산업의 시대는 400~500년 전 용이 멸망한 것에서부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었다.
“다만, 추위 때문만은 아니야. 결정적 요인인 것은 맞지만, 인류도 거기 한 숟갈 거들었거든. 추위로 약해진 용에게 대규모 반격을 가해.”
“반격이요?”
“그래. 아카이브를 필두로 수많은 용사와 마법사, 각국의 군대가 제각기 용들을 공격하기 시작했거든. 이 만년설이란 마법도 그때 만든 거야.”
“오······. 그렇군요.”
올리버가 흥미를 보였다. 이런 스토리를 가진 마법이라니.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았다. 대지를 집어삼킨 탐화마저 이토록 쉽게 꺾고 있으니 충분히 가능했다.
사실상 인간의 시대를 연 마법인 셈이었다.
“크나큰 실수였지.”
“무슨 뜻입니까? 어르신.”
“말 그대로야. 세상만사 모든 것에는 존재 이유가 있는 법인데, 멋대로 그것을 제거했으니, 조화와 균형은 깨질 수밖에 없지.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아카이브는 이를 실수라고 평하네. 끔찍한 실수.”
올리버가 잠시 고민했다.
“······그럼, 왜 용들을 살해한 것이죠? 용까지 쓰러트릴 수 있는 아카이브가 다른 아카이브보다 어리석은 것은 아니었을 텐데요.”
올리버가 정확히 맥을 짚었다. 그 아카이브 역시 선대 아카이브에게 선택돼 지식을 이어받은 존재. 어리석은 선택은 할 수 있어도, 어리석은 사람일 순 없었다.
애당초 그런 자는 아카이브의 무게를 감당할 수도 없었고.
멀린이 답했다.
“왜냐면 무한에 가까운 지식을 얻었다 해도 인간이란 본질은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지. 어리석고, 감정적인······. 그래서 나쁜 결과로 이어질 것을 알아도 저지르고 말지.”
알 수 없는 대답. 올리버는 의문이 들었다. 친절하게 해당 내용을 이야기해 준 이유를.
처음에는 마법의 배경과 관련 역사를 알려주려는 건 줄 알았는데, 지금은 다른 이유가 있는 거 같았다. 문제는 그게 뭔지 알 수 없다는 거고.
올리버가 물려보려는 찰나, 멀린이 반 박자 더 빠르게 입을 열었다.
“그보다 계속할 텐가?”
하늘에서 펑펑 내리는 새하얀 만년설을 배경 삼은 멀린이 물었다.
얼핏 평범해 보이는 눈은 탐화를 이미 반쯤 꺼트리는 것도 모자라 다 녹아내린 땅을 원래 모습으로 수복했다.
대자연에도 영향을 끼치다니. 마법이긴 했지만 마법과 달랐다. 그보다 더 높은······. 마치 불타버린 자를 보는 느낌이었다. 악마 말이다.
“예, 계속하겠습니다.”
올리버가 아직 잔존한 탐화에 통제권을 발휘하며 답했다.
만년설에 기세가 꺾여 생존에 위협을 느낀 탐화는 올리버의 의지에 저항하지 않고 재빠르게 몰려왔다.
생존할 방법은 오직 술사에게 협력하는 것뿐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안 것.
올리버를 중심으로 한 점으로 모이는 탐화(貪火).
멀린은 마력 사슬을 이용해 주변의 얼음을 붙잡아 투척했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는 거대한 얼음 덩어리.
올리버는 쿼터스태프에 블랙 재블린을 덧씌워 얼음 덩어리를 영격했고, 얼음 덩어리는 허공에서 다섯 조각으로 쪼개졌다.
촤르르르르륵!!
쪼개진 얼음 덩어리가 바닥 위에 떨어지자마자 마력광이 발광하더니, 바닥 위로 마법진이 전개됐다.
올리버를 순식간에 포위한 마법진.
마법진의 축 역할을 맡은 얼음 덩어리에서는 제각기 얼음 사슬이 튀어나와 올리버의 몸통과 팔, 다리 등을 포박해 각 방향으로 잡아당겼다.
쿠웅······치이이이익!
묵직한 물체가 떨어지는 소리가 울리며, 뜨거운 쇠가 물속에 담가지는 소리가 들렸다.
강철의 강도를 가진 얼음 사슬이 올리버를 묶은 뒤, 탐화를 꺼트린 것.
얼음 덩어리는 눈속임이었고 진짜가 이거였다.
“크아아악!!”
올리버는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 쳤다. 하필이면 얼음 사슬이 화상을 입은 오른팔을 묶고 잡아당겨 끔찍한 통증을 유발했다.
대련 중에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실수.
허나, 멀린은 비명을 지르는 올리버를 보고 뭔가 잘못됐음을 직감. 곧바로 사슬을 제거하려 했다.
올리버도 그래 주길 바랐다. 이미 탐화도 거의 다 꺼진 마당, 포박된 자신의 명백한 패배였다.
오른팔의 통증만 좀-
-차캉!
올리버의 오른팔을 포박한 얼음 사슬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끊어졌다.
술사의 해제가 아닌 다른 요인에 의해.
올리버는 고개를 돌렸고, 볼 수 있었다.
직접적으로 오른팔을 구속했던 사슬로 인해 벗겨진 오른팔 붕대를. 그 아래 드러난 우그러든 피부와 시커멓게 불탄 살점을.
놀랍게도 여태껏 통증만 선사해줬던 상처 사이에서 미약하지만 선명한 불빛이 빛나더니,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하늘에서 내리는 만년설조차 녹여버릴 열기가.
열기에서는 곧 불길이 뿜어져 나왔고, 끔찍한 기시감을 느낀 올리버가 멀린에게 도망치라고 소리쳤다.
바로, 그때였다. 새하얀 화염이 올리버의 의지에서 벗어나 사방으로 퍼져나가다가 그대로 허공에 그림처럼 멈춰 섰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화염이 말이다. 기이하기 그지없는 광경.
올리버는 본능적으로 멀린을 바라봤고, 열 개의 책을 허공에 펼쳐 술식을 전개한 멀린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책을 중심으로 어지러울 정도로 방대한 술식을 허공에 전개해 백화(白火)가 속한 공간만 잡아채 으스러트렸다.
그러자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백화(白火)가 깨지며 눈 속으로 사라졌다.
“내가 실수했구만.”
끔찍한 사태를 막은 멀린이 올리버에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