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흑마법사-498화 (498/633)

498. 리매치 (1)

“좀 의외구만.” 

구름이 낀 우중충한 하늘 아래에서 멀린이 입을 열었다. 푸른빛 마력을 머금은 굵은 눈송이가 그의 어깨 위에 쌓였다. 

“설마, 자네가 먼저 한판 붙자고 할 줄이야.” 

“한판 붙자는 게 아니라, 대련을 청한 겁니다. 어르신.” 

멀린과 함께 세상 끝 얼음 땅으로 온 올리버가 정정했다. 한판 붙자니······. 뭔가 무례하지 않은가? 

“솔직히 말해 그게 그거야. 오랜만에 만난 스승에게 다짜고짜 대련하자는 제자가 동서고금을 통틀어 얼마나 있을 것 같나?” 

올리버가 진지하게 고민했다. 오랜만에 만난 스승에게 대련을 청하는 제자가 정말 없을까 하고. 음······. 

“······임시 스승님이니까. 괜찮지 않을까요?” 

“허허, 미친놈.” 

멀린이 웃으며 말했다. 과거보다 한층 두터워진 마력의 벽 탓에 그의 감정을 읽을 수 없어 진심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지만, 최소한 불쾌해하는 거 같지는 않았다. 

“뭐 그래도 나쁘진 않군. 약간 추억도 떠오르고.” 

멀린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고, 올리버도 멀린을 따라 주변을 둘러봤다. 

언덕조차 없는 탁 트인 얼음의 땅을. 신기하게도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도 지금처럼 대련하기 위해서였다. 

“차이가 있다면 그땐 내가 요구했는데, 지금은 자네가 요구한다는 거지······. 역시 시간은 젊은이의 편이야. 빠르게 성장해 늙은이를 잡아먹으려고 하니.” 

“어르신. 정말 그런 뜻으로 부탁드린 게 아닙니다.” 

“알아. 나도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그리고 그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 젊은이들은 자고로 늙은이들을 뛰어넘으려고 해야지. 그게 발전이란 거 아니겠나?” 

올리버가 고개를 갸웃댔다. 듣고 보니 틀린 말 같지는 않았다. 

어른을 공경하는 것도 맞았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을 뛰어넘을 필요성도 있었다. 멀린의 말처럼 그게 발전이었으니. 그렇지 못하면 그건 퇴보였다. 

새것은 늘 옛것을 뛰어넘어야 했다. 

“다만, 그와 별개로 이유가 궁금하긴 하군. 갑자기 왜 한판 붙자고 하나? 갑자기 내 가치를 평가해보고 싶은 건가?” 

올리버가 과거 멀린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마텔에서 올리버와 로스번, 그리고 다른 아이들을 구해준 그는 대뜸 인간의 가치는 힘이라 말하며 싸울 것을 종용했다.

“아뇨. 어찌 제가 어르신의 가치를 감히 평가하겠습니까? 또, 힘이 가치라는 것도 아직 동의하지 않아서요.” 

“그런가?” 

“예, 그저 제가 약하다는 걸 실감했기에, 얼마나 약한 건지 확인하고 싶은 것뿐입니다.” 

“듣기에 따라 약간 오만해 보일 수 있는 말이구만.” 

“말하고 나니까 약간 그런 거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말주변이 없어서요.” 

내뱉고 난 후 올리버가 후회했다. 얼마나 약하고 싶은지 알고 싶다니. 하지만 진심이었다.

“왜 갑자기 그런 게 궁금하나? 솔직히 자네 힘에 관심 있는 편은 아니지 않나?” 

올리버가 고개를 끄덕였다. 멀린의 말마따나 올리버는 힘 그 자체에는 크게 관심 없었다.

흑마법과 마법, 혈마법, 송장인형, 드루이드의 주술, 근거리 격투술, 공간마법 술식을 부여한 종이 등등 강력한 힘을 얻을 수 있는 수많은 지식을 공부하고 배웠지만, 힘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다. 

정확히는 배우는 게 목표였고, 그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강해진 것에 불과했다. 물론, 어떻게 활용하냐에 따라 전투력이 크게 올라갈 거 같다는 계산은 한 적 있었지만, 그 역시 해결사 일을 좀 더 수월하게 하기 위한 일환일 뿐이었다. 

그 증거로 올리버는 딱히 자신의 힘을 과신하지도, 내세우지도 않았다. 대화로 해결할 수 있으면 대화로 해결하고, 불가피하게 싸워야 하면 싸웠을 뿐이었다. 

그렇게 하고도 대부분 문제를 해결했으니. 문득, 돌이켜 생각해 보니 참으로 운이 좋았던 것 같았다. 

“신대륙에서는 운이 좋지 않았나?” 

“운이 안 좋기도 했고, 좋기도 했습니다. 악마를 만났거든요.”

멀린이 침묵했다. 

“별로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신대륙에서 징조(徵兆)가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 

이번엔 올리버가 침묵했다. 하긴, 가만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오른팔의 화상도 알았다면 징조도 모를 수가 없었다. 

올리버는 수통을 확인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분명, 폐광산 안에서는 물이 붉게 변하며, 거기서 개구리도 나왔건만 병원에서 다시 열어보니 그냥 평범한 물로 돌아가 있었다. 

“도시의 짐승이 날뛰고, 물이 붉게 변하며, 개구리 떼가 창궐했다고 들었지. 그건 악마가 강림하려는 징조 중 하나고. 그때 그 상황에서 누가 악마를 소환하려던 건지는 예상하기 쉽지.”

“그렇군요.” 

올리버가 멀린을 관찰하며 답했다. 역시 이상했다. 악마가 강림하는 것은 작게도 재앙이고, 크게도 재앙이었다. 

악마를 만나본 올리버는 이를 더욱 뼈저리게 알았고. 그런데, 멀린의 태도는 뭐랄까······, 일반적인 그것과 궤를 달리했다. 

감정을 꿰뚫어 볼 수 없어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힘들지만 뭔가 담담한 느낌이었다. 사사롭지 않고 객관적인. 그렇다고 무관심한 것은 아니었다. 

‘뭐라 표현할지 모르겠네. 차분하고 객관적이나 무관심하진 않다니.’ 

다른 사람과 다른 의미로 공감할 수 없는 반응이었다. 

“악마와는 싸워봤나?” 

“예······. 일단은요. 그걸 싸웠다고 표현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요.” 

올리버는 세상 끝 얼음의 땅에서 파테르교와의 약속을 잠시 잊고, 불타버린 자가 강림한 후부터, 기억을 잃을 때까지 일을 소상히 설명했다. 

어렵지 않았다. 하나하나 충격적인 것뿐이라 뇌리에 깊이 박혔으니. 

소녀의 다리 사이에서 나와, 호흡 한번 만으로 핑크맨을 불태우고, 목소리와 눈빛만으로 사람을 터트리고 소금 덩어리로 만든 모습은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전 제가 불타버린 자와 싸웠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불타버린 자는 제가 죽지 않게 배려해 주셨거든요. 그냥 죽일 수 있었는데도요.” 

악마의 몸에 손을 박아 넣어 거대한 백화(白火)를 일으킨 올리버가 말했다. 보통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업적이었지만, 올리버에게 있어 그건 전혀 자랑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 백화(白火)조차 악마가 봐줬기에 가능한 행위였기에. 

“근데 왜 막은 거지?” 

“예?” 

“불타버린 자를 왜 막은 거냐고 물었어. 악마. 이길 수 없다는 것도 알았고, 도시의 치부도 알게 됐지 않았나?” 

예상치 못한 질문. 올리버는 뺨을 긁적이며 고민했다. 

“어······. 물어보니까 잘 모르겠네요. 어쩌다 보니까요? 불타버린 자께서 요안나 님을 죽이려 했고, 전 막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필거렛을 피우고 싸웠고, 어쩌다 보니 계속 싸웠습니다.” 

“중간에 멈출 타이밍은 없었나?” 

올리버가 또다시 고민했다. 생각해 보니 있는 거 같기도 했다. 

“그래도······. 막아야 할 것 같아서요?” 

“어째서지?” 

“음······. 일단 성기사님들을 보조하는 게 당시 제 일이었으니까요.” 

“또.” 

“또······. 좀 그렇지 않습니까?” 

“······?” 

“도시를 다 불태운다는 거요. 남자, 여자, 노인, 아이, 임산부 심지어 빈민가에 사는 홍인까지······. 다 불태우는 건 좀 그렇지 않습니까?” 

올리버가 이 이상은 설명이 어렵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지극히 정상적이면서도 비정상적인 반응에 멀린은 지그시 올리버를 바라봤다. 

“나중에 또다시 악마가 강림할 때를 대비하고자 하는 건가?” 

“대비라고 하긴 뭣하지만 뭔가 하기는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악마가 소환된 걸 보니, 시계가 움직인다는 게 약간은 실감이 돼서요.” 

올리버는 종말론을 처음 이야기해준 퍼펫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이제는 신화의 영역에 들어선 악마 소환이 성공했다는 건 그것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래, 뭐라도 하는 게 맞긴 하겠지. 그런 의미에서 말하는 건데, 자넨 날 따라와선 안 됐어.” 

“그게 무슨 뜻이죠?” 

“싸움의 첫 번째 규칙. 상대가 장소를 선점하지 않게 할 것.” 

딱! 

멀린이 마력을 응축시킨 손가락을 튕겼다. 

그것을 신호 삼아 손가락 끝에 응축되어 있던 멀린의 순수하고도, 방대한 마력이 엷은 막을 형성하며 구(球) 형태로 빠르게 퍼져나가 얼음 땅의 자연 마력과 연결돼 멀린의 통제하에 놓였다. 

순식간에 이곳 장소를 장악한 것. 장소를 장악하자마자 멀린은 통제하에 놓은 마력을 조작해 온도를 더욱 낮추며, 더 많은 눈을 내리게 했다. 체감상으로도 확실히 느낄 수 있게. 

그는 자신의 방대한 마력과 자연의 마력을 뒤섞어 날씨와 기온을 조종한 거였다. 이론상으로 가능한 거였지만, 어디까지나 이론상. 그걸 단신의 힘으로 선보이니 당혹스러웠다. 

“이렇게 될 수 있거든. 그러니-” 

-[해잇 불릿(Hate Bullet)] 

멀린이 말하는 도중 올리버가 검지로 총구를 만들어 증오의 탄환을 쐈다. 갑작스러운 공격은 간혹 놀라운 효과를 냈으니. 

“좋은 공격이야. 예의는 없지만.” 

그러나 상대는 멀린. 그는 마술처럼 허공에서 책을 꺼내 종이를 찢어 던져 바로 응수했다.

대량의 마력을 머금은 종이는 명검처럼 증오의 탄환을 양단하며 올리버에게 날아왔다. 

촤아악······쾅!! 쾅!! 

증오의 탄환도 자르며 날아온 종이는 올리버가 몸에 순식간에 두른 감정 로브의 저항을 이기지 못하고 궤도가 꺾이며 애꿎은 지면에 부딪혀 거대한 눈먼지를 일으켰다. 

기시감이 느껴지는 전개. 

멀린은 퍼트린 마력을 이용해 새하얗게 피어오른 눈먼지를 움직여 올리버의 시야를 가렸다. 

그와 동시에 눈먼지가 가로로 갈라지며 날카롭고도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촤앙! 

“그때와 똑같은 공격 방식이군요.” 

쿼터스태프를 들어 간신히 방어에 성공한 올리버가 말했다. 

“실력이 얼마나 좋아졌는지 알아보려면 이게 가장 좋은 방법이거든.” 

어느새 올리버 뒤로 이동한 멀린이 대답했다. 그의 손에는 처음 싸웠을 때처럼 종이가 한 장 들려있었으나, 그때와 다르게 올리버를 베진 못했다. 

좋은 소식이었다. 당시엔 반응조차 하지 못했건만, 지금은 막기까지 했으니, 장족의 발전이라 할 수 있었다. 

“실력이 좋아졌구만, 그래.” 

“칭찬 감사합니다······. 어르신도 대단하십니다.” 

“뭐가?” 

“특정 공간을 압축해 이동한 거요. 역시, 단순한 고속 이동이 아니었군요.” 

“······호.” 

멀린이 미세하지만 확실한 반응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게 멀린의 고속 이동을 간파한 자가 손에 꼽을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대부분 반응도 못 하고 죽었고, 산다고 해도 뭐에 당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보통은 단순히 마력을 이용해 신체를 강화한 것으로 이해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그런 강렬한 움직임은 자연스레 주변에 영향을 줬지만, 멀린의 이동 방식은 어떤 의미에서는 너무나도 고요했다. 

마치 죽음처럼. 조용하지만 강력한. 

“공간 마법을 응용한 간단한 원리의 이동법이네. 특정 지점과 지점은 이어, 해당 공간을 접는 거지. 종이처럼. 어떻게 알았나?” 

“신대륙에서 악마가 비슷한 걸 선보인 적 있습니다. 마법과는 좀 다른 것 같았지만요······. 어르신께선 그게 어떻게 가능하신 거죠?” 

멀린이 빙긋 웃었다. 

“아카이브니까.” 

그 말과 함께 멀린이 올리버에게 종이를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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