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흑마법사-495화 (495/633)

495. 불탄 도시 (4)

우물······. 우물······.

폐쇄된 노예수용소 지하. 올리버는 마법으로 만든 빛 덩어리에 의지해 앉아 쿼터스태프를 벽에 세우고, 칼로리바로 배를 채우고 있었다.

배가 고팠기에. 다만, 과거와 달라진 점이라면 내키는 대로 입에 욱여넣는 대신, 화학 실험하듯 조금씩 조금씩 천천히 먹는다는 점이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오른팔. 정확히는 악마에게 불타버린 오른팔 때문이었다.

욱신······!

칼로리바를 먹던 중 오른팔에서 짧지만 강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역시, 배를 채울 때마다 통증이 조금씩 더 선명해졌다. 아니, 더 아프다는 게 맞는 표현이려나?

여하튼 허기를 채우기 위해 음식을 어느 정도 먹으면 통증이 평소보다 더 심해졌다. 그러다 다시 배가 꺼지면 통증은 상대적으로 나아졌고.

올리버는 자신의 몸을 실험하듯 칼로리바를 야금야금 먹어 어느 정도 음식을 섭취해야 가장 버틸만한지 알아보고 이를 수첩에 기록했다.

이래야만 몸이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다.

‘허기, 작열통······. 이것도 기록해야 하나?’

올리버가 광원(光源)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보며 생각했다.

그림자에서는 미약하지만 생명 반응이 포착됐으며, 간혹 스스로 꿈틀꿈틀 움직이기까지 했다.

이상한 건 아니었다. 의도치 않았지만, 올리버는 자신의 허기를 투여함으로써 그림자에 생명을 부여해 크리처로 만들었다.

형체가 없는 부정형의 크리처를.

문제는 불타버린 자가 만든 불꽃에 한 번 소멸했다는 거였다.

‘소멸한 게 아닌가?’

올리버가 추측했다. 그것도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술사와 강한 연결고리를 가진 그림자의 특성이라면. 그 일례로 팬의 그림자가 있었다.

팬의 그림자는 수만 가지 질병에 감염되고, 엄청난 피해를 입으며, 상당한 힘을 소진했음에도 팬이 없애기 전까지는 존속했다.

거기에 자신의 그림자는 용으로 변한 인육 요리사의 감정과 마력, 생명력을 머금고, 거기에 팬의 크리처도 다수 흡수한 상태였기에 불가능하진 않았다.

흑마법은 술사의 실력만큼이나 재료 역시 중요하였으니.

‘음······. 일단 지켜볼까?’

올리버가 결정 내렸다. 의도치 않게 만든 크리처였지만, 그렇기에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자신의 그림자를 매개로 만든 크리처가 어떤 모습, 어떤 형태일지 궁금했다.

크리처는 술사의 성향, 기질을 반영했으니. 스스로의 기질에 대해 알 수 없는 올리버는 자신의 크리처를 한번 관찰해보고 싶었다.

“와주셨군요.”

어느 정도 마무리를 지을 때 웬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요안나의 목소리였다.

“예, 기사님.”

올리버가 수첩을 품 안에 넣고 벽에 세워둔 쿼터스태프를 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무리해서 부른 건 아닌가요?”

“전혀 아닙니다. 예상치 못하긴 했지만요.”

오늘 오전 올리버는 성기사 지부로 가 요안나를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올리버는 다른 성기사와 사제들의 감시 아래 요안나를 만나 상투적인 인사를 나눴다.

그렇게 헤어지려던 찰나 요안나는 올리버에게 악수를 청했다. 쪽지를 몰래 쥔 손을 내밀며.

올리버는 말없이 쪽지를 받아 만날 시간과 장소를 확인할 수 있었다.

“왜 예상치 못하셨죠?”

갑작스러운 요안나의 질문. 올리버는 대답하지 못했다. 왜 예상치 못했을까? 아마, 신대륙에서 처음 만났을 때 요안나의 태도 때문일 터였다.

위축되고, 회피하려는 태도. 허나, 지금은 그런 기색이 느껴지지 않았다. 뭔가를 각오한 듯한 강인한 기운이 느껴졌다.

“······아뇨, 뭐······. 아, 그런데 이렇게 몰래 나오셔도 되나요? 저는 감사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지 않겠습니까?”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가끔 빈민가로 나와 순찰하는 건 모두 알고 있거든요. 이번 임무 덕분인지 어느 정도 절 봐주는 기색도 있고요.”

“아, 그렇군요······.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사실대로 이야기했어요.”

요안나가 올리버의 말을 자르며 다짜고짜 말했다.

“······.”

“폐광산에서 있었던 일요. 상부에 모두 사실대로 보고했어요. 상부에서는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고 함구령을 내렸고, 전 따르기로 했고요······. 죄송해요.”

요안나는 묻기도 전에 올리버가 궁금한 사실을 이야기해주고 사과했다.

올리버는 뭐라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아뇨······. 저도 함구하기로 했으니, 딱히 기사님께서 죄송할 건 아닙니다. 그냥 궁금했을 뿐입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올리버는 요안나의 달라진 모습에 고개를 갸웃댔다. 뭐랄까 구체적으로 말할 순 없었으나, 단단해진 느낌이었다. 뭔가를 각오한듯.

여기서 처음 만났을 때보다 나아 보이긴 했지만, 다른 의미로 위태로워 보였다.

“기사님.”

“예.”

“혹시, 제가 기절하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쭤볼 수 있을까요? 제가 분명 불타버린 자님을 쓰러트리지 못했는데, 어떻게 무사히 나온 건지 궁금해서요.”

“······악마는 올리버 씨에게 감탄하더니, 도시의 사 분의 일만 태우고 떠났어요. 저도 살려줬고요.”

진심이었다. 전부를 이야기한 것은 아니었지만 말 자체는 진심이었다.

“그렇습니까?”

“예, 올리버 씨의 활약을 보고 봐준 것 같아요······. 도시를 구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요안나는 자세를 고치더니 올리버에게 예를 갖춰 정중히. 아주 정중히 인사했다. 부담스러울 정도.

올리버는 그냥 자기 일을 한 것뿐이라며 그녀를 말렸지만, 요안나는 단호했다.

“아뇨, 올리버 씨. 이유가 뭐가 됐건, 당신 덕분에 그나마 도시의 피해를 줄일 수 있었어요. 감사받아 마땅한 일이에요.”

그 말에 올리버는 더 이상 요안나를 말릴 수 없었다. 그만큼 그녀의 감정은 단호했기에.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는 거 같았다.

“그리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이거 때문에 절 따로 보고자 하신 겁니까?”

“이것도 있지만 다른 것도 있어요.”

“뭐죠?”

“여쭤보고 싶은 게 두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게 한 가지, 선물해드리고 싶은 게 하나 있어요.”

마치 준비라도 한 듯 요안나가 깔끔히 정리해 말했다. 호기심이 동했다.

“물어보실 게 뭐죠?”

“아이는 어떻게 됐나요?”

요안나가 훅치고 들어왔다.

“생명학파 산하 마텔 연구소에 생체 실험목적으로 끌려간 열다섯 살 정도의 남자아이요······. 그 아이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있을까요?”

“······.”

“사실 그게 늘 궁금했거든요. 뻔뻔하게도요······. 알 수 있을까요?”

요안나가 괴로움, 두려움 그 이상의 각오를 빛내며 물었다.

올리버는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도움을 받아 구했습니다.”

“도움요?”

“예, 당시 제가 알던 분께서 도와주셨거든요. 그분 덕분에 큰 소란 없이 구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분의 도움을 받아 안전한 곳에 있고요. 편지도 받았습니다.”

“······아.”

요안나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신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겉으로는 별다른 동요가 없었으나, 그 내면에 들러붙은 긴장과 두려움이 한 꺼풀 벗겨지며, 가슴 속 깊이 우러난 감사와 안도, 기쁨이 빛났다.

그녀는 눈 주변을 닦으며 입을 열었다.

“말씀해주셔서, 정말······. 정말 감사해요.”

“딱히, 감사받을 일 아닙니다.”

올리버가 콜린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자신을 구원자라고 믿은 소년을 말이다.

빵 반죽처럼 몸이 부풀었던 소년은 죽어서 지옥에 가는 걸 두려워해 올리버에게 살려달라고 빌었으나, 올리버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었다.

기껏해야 손을 잡아, 이름을 묻고, 고해성사를 해주는 것뿐이었다.

그 어떤 자격도 없는 자신이.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자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피어올랐다. 뭐라 설명해야 할지 아직도 알 수 없었다.

그런 감정이 겉으로 새어 나온 것일까? 요안나는 올리버에게 아무 말도 못 했다.

올리버가 이야기 주제를 바꿨다.

“······질문할 게 두 가지 있다고 하셨는데, 나머지 하나는 뭐죠?”

“사실, 폐광산에서부터 묻고 싶었던 건데, 혹시, 제가 살던 고아원에 방문하신 적 있나요?”

“아······.”

올리버는 폐광산에서 요안나에게 했던 말을 떠올리며 탄성을 냈다. 솔직히 대답하기로 했다.

“예, 때마침 근처를 방문해서요······. 허락도 없이 방문해서 죄송합니다.”

“아뇨, 죄송하실 것 없어요.”

진심. 요안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들······. 잘 지내시나요?”

“글쎄요. 방문한 지 시간이 지나서······. 제가 방문했을 때는 좋아 보였습니다. 아이들은 밝고, 원장님과 직원분들은 친절하더군요.”

“······제가 란다에서 이곳으로 전입 명령을 받았을 때, 추가 지시를 하나 받았어요.”

“뭐죠?”

“고아원에 편지를 쓰거나 연락하지를 말 것을요. 당연히 고아원에서 보내는 편지도 제게 전해지지 않았죠. 사적인 감정 탓에 공적인 성기사의 임무에 집중하지 못한다고요.”

참으로 아이러니한 말이었다. 늦은 감이 있긴 했지만, 뭐가 됐건 요안나는 성기사 본연의 임무에 충실히 하고자 했다. 그런데 그런 말을 듣다니.

하긴, 성기사의 임무도 관점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었으니.

“제가 고아원에 대해 들을 수 있는 건 다른 성기사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듣는 소식뿐이었어요. 교단에서 지원금을 줄였다고 하더라고요.”

“······.”

“덕분에 잠시 위험할 뻔했지만, 란다 쪽에서 익명의 기부가 들어와 다시 나아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죠.”

“다행이군요.”

“예, 들었을 때 얼마나 기뻤던지······. 혹시 올리버 씨인가요?”

요안나가 질문했다. 그러나 정말 궁금해 묻는 거라기보다는, 확인하는 것에 더 가까웠다. 어떻게 눈치챈 거지?

“음······. 누가 도운 게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올리버는 고민 끝에 대답했다. 알려줘도 상관없었지만, 안 알려줘도 상관없었기에. 자칫 오해의 소지도 살 수 있었고. 시(市)를 통해 익명으로 기부한 거 그냥 끝까지 익명으로 가고 싶었다.

그런 올리버의 마음을 이해해 준 건지 요안나도 그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게 요안나는 마텔에 끌려간 아이도, 고아원 사람들도 전혀 지키지 못했건만, 정작 올리버가 대신 지켜줬으니.

아직 궁금한 게 산더미였지만, 자신에게 물어볼 자격이 없었다. 아직은 말이다.

“괜찮으십니까? 기사님.”

“아, 예······, 괜찮아요. 또, 감사해요.”

“네? 무슨······.”

“그냥 전부요.”

“음······. 괜찮으시다면 저도 질문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요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오는 길에 근처 빈민가를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상황이 많이 안 좋은 거 같더군요.”

“대화재의 분노가 홍인들에게 향하고 있으니까요. 경찰과 군병력, 저희 성기사가 막고 있긴 하지만, 보복 폭행과 살인이 산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어요.”

올리버가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이곳 신문에서도 홍인들이 합심해 대화재를 일으켰다는 추측성 기사와 그로 인한 보복 폭행, 살인이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고 했다. 하지만 가장 신경 쓰이는 건 따로 있었다.

“홍인들을 아예 도시 밖으로 이주시킬 거란 이야기가 있던데, 사실입니까?”

“······예.”

요안나가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터 논의되던 이야기라고 했어요. 홍인 추방요. 홍인 노예가 불법이 되고 대부분 홍인이 빈민층으로 내몰리자 나온 의견이에요······. 그래도 어디까지나 논의 수준이었는데, 대화재를 기점으로 동력을 얻은 것 같아요.”

음······. 올리버는 뭐라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홍인 흑마법사들이 복수를 위해 한 행위가 결과적으로는 동족에게 더 큰 위험에 빠트리다니.

아니, 자신이 방해했기 때문인가? 생각이 복잡해졌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의문이 들었다.

만약, 자신이 막지 않고 불타버린 자를 가만히 내버려 둬 도시를 전부 불태웠다면 빈민가에 사는 홍인들은 무사할지.

아마 힘들지 않을까 싶었다. 빈민가 역시 도시에 포함된 구역. 도시 전체가 불타면 빈민가도 무사하기 힘들었다.

“확정된 건가요? 뭐, 멈출 방법은 없나요?”

요안나는 슬픔 안타까움을 빛내며 고개를 저었다.

“죄송해요······. 현실적으로 어려울 거예요.”

올리버는 침묵으로 동의했다. 올리버도 어느 정도 예상한 바였다.

대화재로 삶의 터전과 재산을 잃은 수많은 사람을 달래기 위해서 프로메테우스 사(社)를 설립한 케니조차 제물로 바친 시점에서 홍인 추방을 막는 방법은 없을 터였다.

이런 문제에 관해 아둔한 올리버도 알 수 있었다.

굳이 방법을 찾자면 홍인을 제외한 왕국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는 것 정도?

허나, 그 역시 방법이라 할 수는 없었다. 그다음에는 군대가 올 테니까.

시(市) 내무부 장관인 폴 카버의 말이 맞았다. 이런 문제는 참으로 어렵기 그지없었다. 올리버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뼈저리게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어디로 추방되는지 아시나요?”

“아뇨. 그건 총독부의 소관이라······. 다만, 살기 좋은 곳은 아닐 거예요. 가져갈 수 있는 재산도 얼마 되지 않을 거고요. 그래서 홍인들도 자기들끼리 어떻게 할지 서로 의견을 나누고 있죠.”

“어떻게 아시는 거죠?”

“소소한 도움을 몇 번 준 덕분에 인연이 생겼거든요.”

아, 올리버는 바로 이해했다. 요안나는 자신의 사비와 기부금으로 물자를 지원해주고, 빈민가를 순찰해 치안에 도움을 줬으니.

“음······.”

올리버가 침음성을 내며 품 안을 뒤졌다. 곧 찾았다.

“이거 받아주십시오.”

올리버가 통장을 하나 내밀었다. 통장에는 랜드은행이라 적혀있었다.

“이게 뭐죠?”

“오늘 왕자님을 만났습니다. 알버트 왕자님요. 그분께서 주신 겁니다. 소정의 답례라고요.”

요안나가 랜드은행 통장을 열어봤다. 액수를 보더니 입을 가리며 놀랐다.

“이, 이건······?”

“받아주십시오. 애당초 제 돈이 아니라고 생각해서요.”

“하지만-”

“-애당초 제가 이번 일을 맡은 건 필립 중장님 때문이지, 왕자님 때문이 아닙니다. 그러니 저 돈을 받을 이유는 없죠. 또, 도시를 지켜줘서 고맙다고 주셨으니 기사님께서 받으셔도 문제없다고 생각합니다. 뭣보다 전 그 돈을 쓸데가 없지만, 기사님께선 있죠. 그러니 부디 받아주십시오.”

올리버가 말했고, 요안나는 고민하다 통장을 꼭 쥐며 받았다.

“정말······. 감사합니다.”

“기사님께서도 받을 자격이- 그건 뭐죠?”

통장을 품 안에 넣고, 다른 뭔가를 꺼내는 요안나를 보며 올리버가 물었다.

그녀의 손에는 오래된 책이 들려있었다.

“경전입니다.”

올리버가 요안나의 손에 들린 책자를 봤다. 그녀의 말대로 경전이었다. 그것도 성당에서 올리버가 요안나에게 돌려준 경전.

“이게 올리버 씨께 드리고 싶은 선물입니다. 다시 드리고 싶은······. 부디 받아주시겠어요?”

올리버는 경전을 본 다음 요안나를 봤다. 그녀의 감정도. 그녀는 괴로움과 죄책감, 혹시 거절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그 두려움을 감내하려는 각오를 빛냈다. 꽤 예뻤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정말요?”

“예. 때마침 경전을 하나 살까 고민 중이었거든요.”

올리버는 통장을 내밀었던 왼손으로 경전을 받았다. 그대로 품 안에 집어넣으려는 찰나 요안나가 올리버의 손을 잡았다.

각오, 간절함, 바람, 소망 등을 빛내며.

“기사님?”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물으셨지요?”

“예?”

“저에게 상담할 게 있어 왔다고요. 아무것도 못 느끼는 게 슬프다고요.”

“아······. 예, 가족을 잃어 슬퍼하는 아이에게 그 어떠한 공감의 감정도 느끼지 못했거든요. 전 그런 저에게 슬픔을 느꼈습니다. 이기적이게도요.”

“슬퍼하실 필요 없어요.”

요안나가 말했다. 각오에 찬 목소리로.

“슬퍼할 필요 없다고요?”

“예. 그게 제가 당신께 드릴 조언이에요. 당신은 생각하고 행동하니까요.”

“무슨 말씀이신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인간이란 본디 타인의 감정에 무감각해요. 특히, 요즘 같은 시대에는요. 무감각해질 수밖에 없는 사회죠.”

진심.

“처음 보는, 멀리 있는 사람에게 더더욱 무감각해질 수밖에 없죠. 감정 역시 한정된 자원이니까요.”

올리버는 부정할 수 없었다. 감정이란 게 얼마나 한정적인지는 흑마법사인 올리버가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래도······.”

올리버가 질문하려 하자 요안나는 올리버의 손을 꼬옥 잡았다. 그녀의 감정이 피부를 통해 전해지는 거 같았다.

“사람의 진정한 모습은, 말이나, 생각, 믿음이 아닌 행동에서 나타난다더군요.”

꼬옥. 요안나가 손에 힘을 줬다.

“전 어리석지만 단 하나 확실히 아는 건. 당신께서는 위기에 빠진 아이를 구하기 위해 움직였다는 거고, 자신이 잘못된 게 아닌가 걱정돼 바다 건너 절 찾아오셨다는 거고, 그 와중에도 도시를 구하고, 어려운 사람을 위해 자신의 돈을 기꺼이 내주셨다는 거예요.”

“······.”

“당신께서 잘 공감하지 못하는 건, 그저 어려운 날들을 보내셔서 그런 걸 거예요.”

“······아닐 수도 있지 않습니까?”

올리버가 의심했다. 그 누구보다 자신을 믿을 수 없었기에.

“그럼, 제가 믿을게요.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제가 당신을 믿고, 지지하며, 도울게요.”

요안나가 약속했다. 그 누구보다 강한 미소를 지으며 말이다.

***

“정말 지긋지긋할 정도로 깊잖아?”

늦은 새벽 시간대. 신대륙 퍼스트 스텝 지부에 속한 성기사가 서번트를 이끌고 한 지하 굴을 탐방하고 있었다.

요안나의 보고에 따르면 영원한 아이 팬이 크리처를 통해 파놓은 굴이라 하였는데, 그 말이 의심될 정도로 깊고 복잡한 굴이었다.

‘미로가 따로 없구만.’

때마침 같은 임무를 받은 성기사가 소리쳤다.

“이봐 그쪽 아니야! 조심해. 굴이 위아래까지 나 있어서 길 잃으면 큰일 나!”

그 말에 자칫 다른 길에 들어설 뻔한 성기사들 다시 제대로 방향을 잡으며 적정거리를 유지했다.

성기사들이 이곳을 방문한 이유는 다름 아닌 요안나가 말한 악마 소환 현장을 확인하기 위해서로.

보고를 듣자마자 방문했지만, 깊은 굴과 복잡한 지형, 곳곳에 설치된 함정 탓에 시간이 더뎌지고 말았다.

요안나가 어떻게 그 짧은 시간 안에 소환 의식 현장에 도착했는지 의문일 정도였다.

‘뭐 곧 알 수 있겠지.’

성기사의 생각대로 곧 일행은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성기사들은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성법을 사용해 해당 공간을 밝혀 둘러보았다. 말 그대로 거대한 지하 공동(空洞)이었다.

설마 도시 아래 이런 굴을 파놓았을 줄이야. 소름이 돋았다.

허나, 그러한 생각도 공간 한가운데 있는 끔찍한 의식의 흔적을 보자 눈 녹듯 사라졌다.

요안나의 말대로 홍인 전통의 토템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수백 명으로 추정되는 불타버린 사람들이 쌓여 있었고, 탄화한 시체들이 즐비해 있었다.

특히, 가장 끔찍한 것은 다리 사이가 찢어진 소녀로, 그녀는 입에 담기도 끔찍한 꼴을 하였는데, 그 주변에 검게 탄 인간들이 무릎 꿇은 채 기도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어 그 혐오감이 몇 배가 되었다.

성기사 생활을 한 게 6년째였지만, 이토록 소름 끼치는 광경은 처음이었다.

그 탓이었을까? 이 공간 자체가 현실이 아니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기사님. 사진 다 찍었습니다.”

사진기를 든 서번트가 보고했다.

이번 임무는 사진을 찍은 다음 주변을 살펴보고 현장은 보존, 특이점만 파악해 보고하는 거였다.

이제 성기사들이 움직일 차례.

성기사들이 발걸음을 떼자, 수백 구의 불탄 시체가 쌓인 시체 더미 위에서 무엇인가 꿈틀거렸다.

부패한 시체에 가스가 찬 것일까? 분명 다 불탔는데?

그렇게 성기사들이 의심하며 무기를 들며 대비하는 순간 한 남자가 벌떡 일어났다.

홍인이었다. 품 안에 작은 아이를 안고, 한쪽 다리가 살덩어리로 뭉쳐있으며, 피부는 얼룩덜룩 탈색된 홍인.

“아아······! 아아아아악······!!”

시체 더미에서 일어난 홍인은 세상이 무너진 듯 울부짖었다.

당황한 성기사들은 성법을 사용해 그를 제압하려 했으나, 홍인이 먼저 한쪽 팔을 휘둘렀고, 서번트를 포함한 성기사들의 머리가 몸통에서 떨어졌다.

기우뚱거리는 시야. 머리가 땅 위에 털썩 떨어졌고, 성기사는 거꾸로 뒤집힌 시야로 볼 수 있었다.

짐승처럼 울부짖는 홍인 흑마법사를. 그는 문자로 표현할 수 없는 괴성을 지르며, 품 안에 죽어가는 소년에게 빌었다.

“죽지 마! 아아아아!! 제발 죽지 마······!! 이 씨발 신 새끼야!!! 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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