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4. 불탄 도시 (3)
연합 왕국의 제2위 왕위 계승자 알버트는 한마디로 표현하면 소년이었다.
좋은 뜻도 나쁜 뜻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소년이었다. 10대 초중반의 소년. 물론, 올리버가 봐온 연령대의 소년들보다 옷차림이나, 위생상태, 머릿결, 피부 등이 더 좋긴 했지만, 딱 그 정도일 뿐이었다.
올리버가 듣기로 대화재가 일어났을 때 총독과 함께 도시를 지키는 데 일조했다고 했는데, 그렇게까지는 보이지는 않았다.
‘아니지. 단순히 겉모습이나 평소 감정 상태로 평가하면 안 되지.’
올리버가 어리석은 자신을 나무랐다. 딱히, 안목이 뛰어난 것도 아닌데 함부로 평가하다니, 심히 잘못됐다.
신문에선 그가 형을 대신해 친(親) 왕실 인사를 데리고 프로메테우스 사(社)의 주주총회를 마무리하기 위해 왔다고 했으니, 그렇다면 뭔가 있을 터였다.
“데이브.”
생각에 빠진 올리버에게 누군가 말을 걸었다. 이곳까지 안내한 필립이었다.
올리버가 정신을 차리며 그를 봤고, 그는 눈빛으로 인사할 것을 권했다.
정신을 차린 올리버는 필립이 시키는 대로 자세를 잡곤 왕자에게 정중히 허리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왕자님.”
“만나서 반갑네.”
십 대 초중반의 소년은 입고 있는 옷처럼 빳빳하게 대답했다. 오만이나 그런 감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소년은 긴장하고 있었다. 행여 실수할까 싶어.
“갑자기 불러서 미안합니다.”
제3의 목소리가 자연스레 끼어들었다. 왕자의 등 뒤에 그림자처럼 서 있던 노신사의 목소리였다.
“왕실 비서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노신사가 예의를 갖추되 가볍게 인사했고, 올리버도 똑같이 인사했다.
“사전 통보도 없이 이리 부른 점 다시 사과드리겠습니다. 도시의 혼란이 가라앉지 않아 그런 것이니 이해 바랍니다.”
“전 괜찮습니다.”
“선생을 부른 이유는 선생께서 이 도시를 구하는 데 일조했다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감사와 거기에 걸맞은 포상을 드리기 위해서지요.”
스스로를 비서라 소개한 노신사가 신호를 줬고, 가구처럼 서 있던 또 다른 고용인이 은쟁반에 담긴 통장과 무슨 카드 같은 걸 정중히 내밀었다.
처음 보는 은행이었다.
“······랜드은행?”
올리버가 저도 모르게 따라 읽었다.
“수도에 본점을 둔 은행입니다. 그곳 통장에 소정의 보상금을 넣었습니다. 그리고 그건 랜드은행의 비밀 금고를 사용할 수 있는 권리증입니다.”
노신사가 통장 위에 있는 카드를 가리켰다.
“비밀 금고가 뭐죠?”
“몇몇 예외 사항을 제외하면 주인 외에는 그 누구도 열 수 없는 금고입니다. 비밀과 안전 모두 지키는. 랜드은행에서 소수의 고객을 위해 마련한 서비스죠.”
비서의 말은 사실이었고, 그의 감정 상태로 봤을 때 상당히 귀한 보상인 듯했다.
하긴, 안전한 금고라는 건 생각보다 드문 거였으니.
올리버가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다만, 제가 이걸 받아도 되나 싶습니다.”
왕자와 노신사가 고개를 갸웃댔다. 예상치 못한 대답이라는 듯. 특히, 노신사는 올리버가 무슨 속셈인지 의심했다.
올리버는 보상에 민감한 해결사였으니. 허나, 속셈 따윈 없었다.
“이번 임무는 필립 중장님의 의뢰를 받은 것뿐이라서요······. 의뢰인이 아닌 분들께 이런 과도한 보상을 받는 건 좋지 못하다고 배웠습니다.”
진심이었다. 돈이 많으면 편하고, 금고 역시 나중에 쓸 데 있을 거 같아 마음에 들긴 했지만, 그와 별개로 과도한 보상 역시 여러모로 거북한 게 사실이었다.
노신사가 뭐라 설득하려는 찰나, 왕자가 손을 저었다.
“아니네. 필립 경에게 그대가 도시를 지키다가 크게 다쳤다는 걸 들었네. 합당한 보상이니 거절하지 말게.”
왕자는 어색하게 어른 말투를 흉내 냈다. 그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노신사와 달리 속셈은 전혀 없었다.
“말씀 감사합니다.”
“왕자님이라고 호칭을 붙이게.”
“······왕자님.”
올리버가 필립의 조언대로 뒤늦게 호칭을 붙였다.
왕자를 만나는 게 이번이 처음인지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지만, 그냥 지금처럼 하면 되는 거 같았다.
왕자는 올리버를 살펴보며 입을 열었다.
“······팔은 괜찮나?”
왕자가 붕대를 칭칭 감은 것도 모자라 부목까지 한 올리버의 오른쪽 팔을 보며 물었다.
“듣기로 손가락의 화염에 당했다고 하던데.”
“아······. 화상을 입긴 했지만 괜찮습니다. 왕자님.”
올리버가 거짓말했다. 솔직히 오른팔의 화상은 썩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피하조직까지 불태운 악마의 화염은 올리버의 팔을 장작처럼 만들어 지속적인 통증을 줬다.
그 통증은 진통제나 포션으로도 덜 수 없었고. 치료는 당연히 불가능이라 올리버는 하루 24시간, 잘 때나 식사할 때 상관없이 작열통에 시달려야 했다.
꽤 괴롭다고 할 수 있었다. 행동이나, 체력에도 문제를 주고, 잠조차도 쉽사리 들 수 없었기에.
그나마 나은 점이라면 인육 요리사로 얻은 끔찍한 허기를 작열통이 어느 정도 달래준다는 거였다. 고통을 고통으로 잊는.
허나, 올리버는 이 사실을 굳이 말하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소년은 말 그대로 소년이었고, 자신의 부상과 일절 상관없었으니.
그런데도 왕자는 어느 정도 책임감을 느끼듯 올리버의 팔을 빤히 바라봤다.
무거워지는 공기 속. 필립이 입을 열었다.
“그래도 머리는 더 멋지게 변했습니다. 왕자님.”
“머리 말씀입니까?”
이해가 되지 않는 듯 왕자가 되물으며 올리버의 머리를 봤다. 오른쪽이 살짝 탈색돼 검정과 약간의 백색이 뒤섞인 올리버의 머리를.
올리버도 필립을 봤다. 왜 이 머리가 멋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어서.
“전통 학파에 소속된 마법사들 머리는 보통 이렇거든요. 좀 더 마법사다워진 머리라 할 수 있지요.”
필립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래서 의문이 들었다.
“필립 중장님. 전 마탑에서 이런 머리를 한 분들은 못 봤습니다만?”
“전통(傳統) 학파라 그러지 않았나? 마탑은 신식(新式)이고. 마탑은 그런 촌스러운 머리 안 하지.”
필립이 낮게 그러나 모두가 들을 수 있게 속삭였다. 참고로 이 말 역시 진심이었고, 올리버는 멀린을 바라보듯 필립을 바라봤다.
“풉······!”
올리버와 필립의 만담에 왕자가 그만 실소를 터트렸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고, 왕자는 민망한 듯 얼굴을 붉히며 목을 가다듬었다.
“큼, 큼······. 실례했네.”
“재밌으셨다면 다행입니다.”
올리버는 왕자에게 말했다. 누군가 재밌어서 웃어준 거라면 좋았다.
왕자는 그런 말을 한 올리버를 묘한 눈으로 바라보더니 비서의 귓속말을 듣고 정신을 차렸다.
“어쨌건 받아주게.”
왕자의 권고에 올리버는 통장과 카드를 품 안에 챙겨 넣었다. 이걸로 끝인가 싶은 그때 왕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본론이었다.
“괜찮다면 한 가지 제안해도 되겠나?”
“제안요?”
“그렇네. 필립 경에게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왕실은 거대한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네.”
“필립 중장님께는 들은 게 없습니다.”
“그럼, 내 설명해주겠네. 지금 왕실은 전통 학파와 협력해 새로운 마법 기관을 세우려고 하네.”
“예?”
올리버가 되물었다. 그런 이야기는 신문이나 라디오는커녕 마탑이나 포레스트에게도 들은 적 없었기에.
“비밀리에 진행 중인 이야기거든. 뭐, 곧 아니게 될 테지만.”
진심.
“우리 왕실과 중앙 의회는 마탑 못지않은······. 아니, 그 이상의 조직을 목표로 하고 있지. 그래서 최대한 많은 인재를 모으고 있어. 혹시, 생각 있나?”
예상치 못한 제안에 올리버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애당초 지금 처음 듣는 이야기라 생각하고 말 게 없었다.
왕자가 설득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고 싶은 욕구를 빛냈다.
“쉽게 말해 자네의 능력을 높이 사 초빙하려는 거네. 자네에 대해 나름대로 조사했거든. 현재 마탑에 평직원으로 있다지?”
“예.”
“직책과 연봉, 권한 모두 최고로 맞춰주겠네. 왕국을 위해 일해볼 생각 없나? 란다에서 벌이고 있는 사업은 관여하지 않을 테니.”
즉, 현재 올리버가 누리고 있는 자유는 최대한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보상은 최대한 맞춰준다는 거였다. 이런 문제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올리버였지만, 란다에서 살아온 세월 덕분에 얼마나 파격적인 조건인지는 알 수 있었다.
올리버가 솔직히 답했다.
“죄송합니다. 왕자님. 전 그 조건을 받을 정도로 뛰어난 마법사는 아닙니다.”
왕자가 약간의 불쾌함을 빛냈다.
“그대가 작성한 논문 이야기도 들었네. 다른 학파의 마스터들도 놀라운 논문이라고 했어.”
“아······.”
올리버가 탄성을 냈다. 혈마법과 생명학파를 기본 토대로, 핵(核)을 중심으로 세포를 재구성해 신체를 새로이 만드는 논문.
쓰기만 쓰고 이후로는 일정이 바빠 일절 손대지 않은 논문 이야기가 다시 나오자 조금 당황스러웠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선생. 난 거짓말을 싫어하네.”
왕자가 말했다. 허나, 올리버 역시 진심이었다. 혈마법은 그렇다 쳐도, 해당 논문의 또 다른 기둥인 의학 지식과 생명학파 지식은 올리버가 직접 쌓아 올린 게 아닌, 테어도어의 기억을 통해 공짜로 얻은 것이라 순전히 운이라 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입니다. 왕자님.”
올리버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다행히 이번에는 통한 건지 왕자는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설득되지 않은 것이 못마땅했는지 불만을 품었는데, 올리버는 그런 왕자에게 뒤이어 말했다.
“그리고 개인적인 이유로 그 제안은 거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왕자님.”
“······어째서인가?”
“현재 마탑에서 제 위치에 만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왕실에서 준비하는 프로젝트라면 상당히 중요한 것일 텐데, 전 제 개인 사정을 더 중시하는지라 기대하신 만큼 성실히 일할 사람이 못 됩니다.”
엄청난 자기객관화. 나름대로 배려한 말이었지만, 비서와 왕자 심지어 필립마저 입을 벌리며 놀랐다.
뭔가 실수한 걸까?
“죄송합니다. 왕자님. 이 친구가 왕족과의 만남은 처음이라······.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괜찮습니다. 필립 경······. 당황스럽긴 하지만 악의가 없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냥······. 진심일 뿐이죠.”
왕자가 올리버의 마음을 이해해 줬다. 올리버는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필립이 한마디 했다.
“고개 끄덕이지 마.”
“예.”
왕자가 아쉬워하며 입을 열었다.
“거절당한 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다시 한번 이 도시와 시민들을 위해 힘써 준 것 감사하네.”
“제 일이었을 뿐입니다. 왕자님. 그래도 말씀 감사합니다······.”
올리버가 말꼬리를 흐리며 뜸을 들였다. 왕자가 눈치챘다.
“······왜 그러지?”
“음······. 확실하진 않지만, 혹여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마탑이나, 혹은 중개인을 통해 연락해주십시오. 제가 도울 수 있는 상황이 되면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런가?”
“예. 저도 궁금하거든요. 왕실에서 준비하는 기관이요.”
올리버가 평소와 똑같이 본인 흥미 위주로 대답했다. 왕자와 필립, 노신사는 놀란 눈으로 올리버를 바라봤다. 뭐 이런 놈이 있냐는 식으로.
***
“허!”
왕자와 헤어지고 방 밖으로 나오자마자 필립이 한숨인지 웃음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아무리 왕실 사람을 만난 적이 없어도 그렇지······. 날 놀라게 하는군그래.”
“아······. 죄송합니다.”
“아니, 뭐 죄송할 것까지는 아니고······. 그래도 나중에 아카이브께 왕실 예법을 가르쳐달라고 해보게.”
“왕실 예법요?”
“그래. 정말 왕자께서 그대를 부를지 모르지 않나?”
음······. 올리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왕족을 만날지는 미지수였지만, 필요할 때 부르라고 말했으니. 중간중간 배워서 대비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았다. 어차피 멀린에게 볼일도 있었고.
“그건 그렇고 이제 뭐 할 생각인가? 자네가 원하는 대로 성기사도 만났고, 케니도 만났고, 내 부탁대로 오늘 시간도 내줬으니······. 아, 성기사, 케니와의 만남은 만족스러웠나?”
올리버는 잠시 고민했다.
케니와의 만남은 그런대로 만족스러웠다. 그가 정말 악마의 의식을 했는지 확인했고, 왜 아내까지 바쳤는지도 알 수 있었기에.
아이러니하게도 가족을 너무 사랑해 가족을 판 것이었다.
모순적이고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흥미로웠다.
다만, 성기사 요안나와의 만남은 그렇게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성기사 지부에서 다른 성기사들이 보는 앞에서 만난 거라.
‘······아주 수확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반응을 보아하니 뭔가 개운치 않나 보구만?”
“아뇨, 그건 아닙니다. 충분히 유익했습니다.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올리버가 필립에게 정식으로 감사를 표했다. 판도라 건도 그렇고 케니와 성기사까지. 필립은 이곳에서 올리버의 편의를 많이 봐주고 있었다.
아무리 고위층이라 해도 부담되지 않는 게 아닐 터인데, 왜 이토록 편의를 봐주는지 다소 의문일 지경이었다.
“같이 싸운 전우고, 휴식 때 술도 줬으니까.”
올리버의 의문에 필립이 호쾌하게 대답했다. 전부는 아니었지만, 진심이었다.
“친절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그럼, 식사나 같이하겠나? 자네가 먹성이 대단하다던데, 나도 한 먹성하지. 오늘 배 터지게 먹여주지.”
“아······.”
“아······. 는 싫다는 건데, 왜, 배가 안 고픈가?”
“아뇨, 고픕니다. 배 터지게 먹고 싶고요.”
진짜였다. 작열통 때문에 허기를 상대적으로 덜 느끼는 거지 배가 안 고픈 건 아니었다.
“그저 오늘 밤에 잠시 약속이 있어, 식사는 못 할 것 같습니다.”
“약속?”
“예, 내일 다시 란다로 돌아갈 예정이라서요.”
“헤······. 신대륙에 아는 사람도 있었나?”
당연한 의문이었다. 공식적으로 에디스를 제외하면 올리버는 여기 아는 사람이 없었고, 에디스는 이미 진즉에 떠난 후였으니까.
대화재로 인해 값이 폭락한 프로메테우스 사(社) 주식을 고점 3배 가격으로 팔고. 참고로 그는 새로운 투자처를 찾을 거라고 했다.
올리버가 필립의 의문에 답했다.
“예,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뭐, 어쩔 수 없지. 같이 술이나 먹으려고 했더니만. 이번엔 내가 양보하지. 나한테 빚진 거야.”
필립은 더 이상 묻지 않고 기꺼이 올리버를 보내줬고, 올리버는 다시 한번 그의 배려에 감사를 표하며 호텔 밖으로 나갔다.
요안나를 만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