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흑마법사-491화 (491/633)

491. 악마와의 대화 (4)

머리 한쪽이 탈색된 올리버는 그대로 의식을 잃으며 수직으로 무너져 내렸다.

매우 지친 모습. 무리도 아니었다. 악마라는 존재에 이 정도로 맞섰으니. 기록된 역사에도 기록되지 않은 역사에도 없는 유일무이한 일.

불타버린 자는 무너져 내린 올리버를 말없이 바라보다 한쪽 손을 움찔거렸고, 바로 그 타이밍에 바닥까지 쥐어짠 필사적인 고함이 울렸다.

“아아아아아아악!!”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요안나. 그녀는 생물로서의 본능을 억누른 채 필사적으로 뛰어와 불타버린 자를 향해 메이스를 휘둘렀다.

소용없는 공격이라는 건 요안나도 알았고, 불타버린 자는 더더욱 알았지만, 불타버린 자는 어째서인지 뒤로 한 발짝 물러나 피해 주었다.

허공을 가르는 메이스.

불타버린 자가 거리를 벌리자 요안나는 쓰러진 올리버를 한 손으로 받은 뒤 어깨에 들쳐멘 채 반대 방향으로 도망치려 했다.

어디로 도망쳐야 할지는 알 수 없으나,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분을 구하려고?]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리자마자 악마가 서 있었다.

분명, 반대 방향에 있었는데······. 순식간에 이동한 거였다. 결코, 도망칠 수 없다는 걸 알려주듯.

이 사실을 깨달은 요안나는 절망하는 대신 기절한 올리버를 자기 뒤로 두고 방패와 메이스를 들어 보였다.

이길 수 없음에도 싸우려는 것. 아니, 지키려는 거였다. 최소한 지킬 시도는 해야 하지 않은가?

요안나의 머릿속에 그간 올리버와 나눴던 대화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안녕하십니까?’

‘음······. 혹시, 제가 흑마법사라 이토록 경계하시는 건가요?’

‘그저 대화하기를 원할 뿐입니다.’

‘사람으로 사는 법이 뭐죠?’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세상은······. 꽤 재밌는 곳이더군요.’

‘예, 전 기사님이 좋거든요. 아름다워서요.’

‘여성분들은 초콜릿을 좋아한다고 해서요?’

‘친구란 게 뭔지 잘 모르겠거든요.’

‘······집에 돌아가 잠이나 잘 생각입니다. 오늘 많이 피곤하거든요.’

‘······오랜만입니다. 기사님.’

‘기사님께 상담하려고 왔습니다.’

‘그래도 구하라.’

올리버와 보낸 시간. 솔직히 그리 길지 않았으나, 막상 돌이켜보니 하나하나 너무나 소중한 기억이었다. 그런 관계는 처음이었다.

‘요안나 님 역시 절 도와주신 분이거든요.’

올리버가 아까 한 말. 요안나는 그 말을 떠올리며 자신에게 말했다.

이번에는. 이번만큼은 자신이 도와줄 차례라고.

성당과 폐쇄된 노예수용소 때처럼 그를 외면해서도 피해서도 안 된다고.

그 덕분이었을까? 요안나는 여전히 손이 떨려왔음에도 이전처럼 외면하지도, 도망치지도, 포기하지도 않았다.

온몸이 떨리고, 본능은 도망치라고 했음에도 악마를 상대로 여전히 방패를 들고 무기를 겨눴다.

겁먹을지언정 도망치지 않았다. 두려울지언정 비키지 않았다.

그렇게 죽음을 각오한 요안나. 그런 요안나 앞에서 악마가 갈라진 바위 틈새 같은 입을 벌려 작은 불씨를 허공에 몇 가닥 흩날렸다.

그 불씨는 몹시도 작았지만, 선명했고, 강력한 기운이 느껴졌다.

하늘 위로 사라지는 불씨. 요안나가 물었다.

“······지금 무슨?”

[죄악의 도시 사 분의 일을 방금 불태웠다. 나 역시 입장이란 게 있거든.]

신대륙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이며, 군사 요충지 겸 마석의 공급처인 퍼스트 스텝.

방금 악마는 그 퍼스트 스텝의 사 분의 일을 불태웠다고 말했다. 몹시도 사무적이게.

이야기의 내용과 맞지 않은 담담한 태도에 요안나는 몇 초가 지나서야 말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허나, 요안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왜 그랬냐는 질문도,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냐는 항의도, 악행에 대한 비난도.

단순히 퍼스트 스텝의 악행을 마주했기만은 아니었다. 그 이전에 더 큰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그분을 정말 걱정하는군.]

악마가 올리버를 바라보며 요안나의 감정을 대신 말해주었다.

부정할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 요안나에게 있어 도시의 재앙보다 올리버의 안위가 더 중요했다.

성기사임에도······. 성당 때와 달라진 게 전혀 없었다. 아무리 죄악으로 세워진 도시라도 이래서는 안 됐건만. 그럼에도 올리버가 더 걱정됐다. 그게 요안나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그런 요안나를 빤히 바라보던 악마는 질문했다. 아주 악의적인 질문을.

[그분을 사랑하나?]

너무나도 예상치 못한 말에 요안나는 깜짝 놀랐다.

“절 모욕하지 마시죠. 전 성기사입니다. 신이 부여하신 의무에 남은 생을 바치기로 맹세한! 그런 제가······! 올리버 씨를 구한 건 그저······.”

흥분한 요안나는 말을 제대로 끝마치지 못했다. 악마는 그런 요안나를 무시한 채 제 할 말을 했다.

[성법은 신이 주신 힘이 아니지. 성기사 역시 신에게 임무를 받은 존재가 아니고. 신을 위한 건 맞지만, 신에게 명받은 건 아니야.]

“제 귀에 거짓을 붓지 마시죠!”

[너희는 진실을 이야기하면 거짓이라 소리치지. 그분께서는 직접적인 개입을 지양해.]

악마가 요안나에게 말했다. 그의 음성에는 그렇다 할 설명이 없음에도 사람을 믿게 하는 힘이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중요한 건 그분을 지키고 싶냐는 거지.]

악마가 다시 주제를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요안나는 자기 뒤에 의식을 잃은 채 누워있는 올리버를 다시 봤다.

[그분을 지키고 싶나?]

악마가 다시 물었다. 요안나가 대답했다.

“······지킬 겁니다.”

[그분이 누군지도 모르지 않나?]

“그런 것은 상관없습니다.”

요안나가 확언했다. 솔직히 올리버의 정체가 궁금하진 않냐면 그건 아니었다. 악마에게 인사를 받으며, 대적 불가한 악마와 맞서 싸운 올리버의 정체가 어찌 궁금하지 않겠냔 말이다.

허나, 몰라도 상관없었다. 그는 자신에게 너무나도 고마운 존재였으니. 지금 이 순간만큼은 반드시 지킬 거였다.

[정말 상관없을까?]

“무슨 뜻이죠?”

악마가 육성(肉聲)으로 대답해줬다.

“진실을 감당할 수 있겠나?”

***

웅성웅성웅성.

셀랜드다운 우중충한 날씨. 그럼에도 수도에 자리 잡은 왕실 동물원은 매일 그러하듯 수많은 관람객으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수많은 볼거리와 전 세계를 지배하는 연합 왕국의 전리품 창고 같은 곳이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연미복을 입은 귀족, 값비싼 드레스로 차려입은 귀부인, 그 자녀, 군 장교, 여유로운 생활을 구가하는 중산층 가족 등. 이곳에서만큼은 신분의 벽을 허물고 다 같이 창살 속 진귀한 동물을 보고 똑같이 감탄했다.

새하얀 털을 가진 호랑이, 담배를 피우는 원숭이, 서커스를 하는 코끼리, 천년을 산 거북이, 사람 말을 하는 앵무새 수많은 볼거리가 있었기에. 하지만 그중 최고는 바로 여기였다.

“인간 동물원.”

수많은 인파가 모인 동물원 한 구역. 그곳 벤치 위에 앉은 한 노신사가 말했다.

척 보기에도 높은 학식과 연륜이 있는 것 같은 그는 평범한 차림임에도 심상치 않은 기운을 내뿜었고, 옆에 앉은 노인 외에는 아무도 접근하지 못했다.

기세만 본다면 고위 정치인, 명망 높은 귀족이었다.

“드시겠소?”

노신사. 아니, 퍼펫이 땅콩이 든 갈색 봉투를 내밀며 옆에 앉은 멀린에게 물었다.

“아니, 괜찮소.”

“땅콩에 아무것도 안 넣었소. 방금 산 거거든.”

퍼펫은 자신의 말을 증명하듯 땅콩을 입에 넣어 씹었다. 고소한 맛과 오독오독 씹히는 식감. 모두 축복이었다.

“입맛이 없어서 안 먹는 거요.”

멀린은 철장 안에 갇힌 식민지 원주민을 보며 다시 거절했다.

원주민들은 날씨와 무관하게 부족 전통복을 입은 채 모닥불에 둘러앉아 있었다.

원주민의 진짜 삶을 보여주겠다는 이유. 일말의 존엄도 느껴지지 않는 모습이었으나, 동물원을 방문한 관람객들은 개의치 않고 이를 흥미롭게 지켜봤다.

같은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여기가 불편한 것 같구려. 사과하겠소.”

“마음에 없는 사과는 필요 없소.”

“그렇다면야. 난 여기가 좋거든. 저런 걸 보고 있으면 마음이 한결 편해져.”

관객이 던진 빵 한 조각에 부족 전통춤을 추는 원주민을 보며 퍼펫이 말했다. 진짜 전통춤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빵을 던진 이는 아주 만족한 듯 껄껄 웃었다.

“내가 아주 평범하다고 느낄 수 있거든.”

수백 년을 살며, 그 누구에게도 본모습을 보인 적 없고, 셀 수도 없이 많은 인체실험을 자행한 퍼펫이 말했다. 자신이 평범하다고.

“저들은 저들의 욕망을 위해 같은 사람을 구경거리 삼고, 난 나만의 욕망을 위해 인체실험을 하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 그러니 전혀 죄책감을 가질 필요 없는 거 아니겠소? 평범한 거니까.”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날 부른 것이오.”

“그건 아니오. 딱히 이해해 달라는 것도 아니고. 특히, 그쪽의 이해는 더더욱 필요 없지.”

퍼펫이 담담하게 또 날카롭게 말했다. 왜냐면 멀린 역시 한때 인체실험에 미쳤었으니. 친구인 테오도어처럼 마법사 우월주의에 심취해.

아마, 아카이브가 되지 못했다면 지금도 인체실험을 하며 살았을지 몰랐다. 아니, 반드시 그랬을 터였다.

“날 부른 이유가 뭐요?”

퍼펫이 되물었다.

“그대가 날 만난 이유는 무엇이오.”

“이유?”

“그렇소, 이유. 만남을 청한 건 나나, 수락한 건 그대니까. 그대 역시 궁금한 게 있다는 거 아니겠소? 때마침 내가 왕실과 타 학파에 수작을 부리고 있으니까.”

“그런 걸 이야기해줘도 괜찮은 거요?”

“이미 아실 텐데 무슨 상관이요? 난 수백 년 동안 아카이브에게 쫓겨보기도 하고 싸워보기도 했소. 아카이브가 가볍게 볼 상대가 아니라는 건 알지.”

“······그리고 그대는 그런 아카이브에게서 수백 년 동안 살아남은 사람이고.”

퍼펫은 슬쩍 웃어 보일 뿐이었다. 씁쓸하다는 듯이.

그러나 멀린의 말은 사실이었다. 퍼펫을 없애기 위해 움직인 전대 아카이브가 몇몇 있었고, 퍼펫은 그런 아카이브에게서 살아남았다.

그건 대단한 거였다.

단순한 힘의 우열이 아닌, 생존과 목표 달성에 초점을 맞춘다면 현재 승자는 다름 아닌 퍼펫이었다.

“내가 그대를 부른 이유는 종말에 관해 묻고 싶어서요.”

“······.”

“아이러니하게도 종말에 관해 가장 잘 아는 건 흑마법사도, 파테르교도 아닌 아카이브니까. 종말이 어느 정도 진행됐소? 신대륙에 악마가 강림했잖소?”

“대화재 말하는 거요? 난 팬과 홍인 흑법사가 일으킨 것으로 알고 있소만?”

“날 바보 취급하지 마시오. 아카이브. 내 삶은 아카이브의 역사보다 짧을지언정 개체로 봤을 때, 난 그대보다 열 배 가까이 살았소. 악마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징조(徵兆)가 있었고, 신화 속 대화재가 일어났소. 모습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악마는 강림한 거요.”

“종말이 얼마나 다가왔는지 그게 궁금한 것이오?”

“꼭 그런 건 아니오. 난 그저-”

“-앗! 쓰러졌다.”

퍼펫과 멀린의 대화 도중 한 관람객이 소리쳤다.

그의 말대로 철장 안에 갇힌 원주민 중 하나가 쇠약해져 쓰러졌고,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제대로 먹지 못하고 관람객의 구걸로 식량을 구하니 당연한 결과.

곧 동물원 직원들이 나타나 동족의 죽음에 슬퍼하는 원주민들을 몽둥이로 내쫓고, 쓰러진 원주민을 데리고 나갔다. 아마, 시체는 박제해 인간 박물관에 전시할 터였다. 왕국의 과학과 발전을 위해.

동족을 묻어주지 못했다는 사실에 슬퍼하는 원주민들.

그때 누군가 다시 먹을 걸 던졌고, 잔혹하게도 원주민들은 훈련받은 대로 울면서 춤을 춰야 했다.

“······난 그저 내 연구가 완성되길 바랄 뿐이오. 종말이 도움이 될 수도 있고, 방해될 수 있어. 물어본 것뿐이오.”

“도움이 된다면 종말도 일으킬 수 있다는 거처럼 들리오.”

“그대는 종말을 막을 생각이 없는 거 같고 말이오.”

퍼펫이 지지 않고 말했다. 동시에 진심이기도 했다. 지난 수백 년을 살며 봐온 아카이브는 한결같이 종말을 막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무관심하다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그 누구보다 종말에 관심이 많았다.

허나, 그것과 별개로 종말을 막으려는 낌새는 없었다. 설명하기 다소 복잡했다. 종말은 바라는 것도 아니고, 피하고 싶어는 했으나, 정작, 막으려는 의지는 없었다.

모순으로 점철된 감정. 그 증거로 멀린은 자신을 앞에 두고도 죽이려고도 적대하지도 않았다.

“그대는 잠시 쓰러트릴 순 있어도 죽일 순 있는 상대는 아니니까. 영생의 퍼펫 아니오?”

“내가 지금 하는 계획을 방해할 순 있지 않소? 아니면, 뭐라도 묻던가.”

“질문은 때때로 대답보다 더 많은 걸 알려 주지.”

“아······. 내가 당한 거군.”

“그렇소. 난 충분한 질문을 들은 거 같으니 이만 물러나겠소.”

멀린이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멀린을 퍼펫이 불러 세웠다.

“데이······. 아니, 올리버.”

멀린이 멈칫했다.

“그대가 제자로 거둔 그는 종말과 얼마나 관련이 있는 거요?”

“어찌 그리 생각하는 거요?”

“척 봐도 보통 청년이 아니니. 무엇보다······.”

“······?”

“오염구역에서 악마가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다크호스 해결사들을 데려오라 했는데, 아무리 봐도 올리버 그놈을 노린 거 같거든.”

“······.”

“왜 악마가 그를 데려오라 한 걸까? 궁금하지 않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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