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9. 악마와의 대화 (2)
[아웃 크라이(Out Cry)]
올리버가 영창하자 쩌저적 입이 갈라졌고, 갈라진 입을 통해 올리버의 숨결과 발밑에서 끌어모은 검은 물질이 하나로 응축됐다.
대지를 뒤덮은 것도 모자라 어둠까지 장악한 무한한 기운.
올리버는 자신의 흑마법과 육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까지 힘을 압축하고 또 압축한 뒤. 한계에 다다랐을 때 갈라진 입을 통해 물리력을 지닌 포효를 뿜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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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가 검은색을 띠는 포효를 내뿜었다. 그 소리는 너무나도 커 주변의 모든 것을 집어삼켜 침묵시켰다.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곤 포효가 찢어발기는 공기와 지축을 뒤흔드는 울림뿐이었다.
그렇게 분노를 담은 포효는 올리버 전방의 모든 것을 휩쓸었다.
“후우우우우······.”
먼지가 잦아들고, 찢어진 공기가 원래의 색을 되찾으며, 어둠이 자신의 자리를 되찾을 때 올리버는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첫 번째는 이곳이 폐광산과 연결된 굴이 아니라는 거였다.
아까 전 말뚝에서도 느낀 거지만 이 공간에는 끝이 없었다. 무한한 광활만 존재했다.
원리와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이곳은 폐광산과 연결된 굴이 아닌 다른 이공간(異空間)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두 번째 사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덜 중요했다.
검은 물질을 압축하고 압축한 포효를 맞고도 멀쩡한 불타버린 자에 비한다면 말이다.
검은색 연기 속에서 불타버린 자가 서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그 자리 그대로.
태풍 같은 쿼터스태프에 맞고, 수만 가지의 질병이 깃든 단검에 베이며, 망자의 손에 체온을 빼앗기고, 거대한 함성을 정면에서 맞고도 그는 그 어떠한 피해도 입지 않았다.
생채기조차. 올리버의 성과라곤 십몇 초 동안 시간을 끈 게 전부였다. 딱 그 정도.
올리버는 광산에서 나온 후 처음으로 마음이 꺾인다는 게 뭔지 실감했다.
고아원과 광산 시절 이후에는 제대로 맛보지 못한 감정.
아이러니하게도 올리버는 이런 상황이 되고 나서야 자신이 얼마나 큰 축복을 받고, 동시에 지금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 실감했다.
[괜찮았습니다. 그럭저럭.]
악마가 몸에 묻은 먼지를 털며 말했다. 상대방을 위축시키기 위한 허세도, 조롱도 아니었다. 정말 먼지를 턴 거였다.
[문제는 딱 그럭저럭이란 수준입니다. 72개로 나뉜 지옥 중 하나를 지배하는 제가 지옥의 힘과 죄인들을 이용한 공격에 정녕 당하길 바라신 겁니까?]
악마가 정말 궁금한 듯 물었다. 그 물음에도 아까와 같은 실망감이 담겨 있었다.
그리 날 선 감정도 아니었건만, 올리버는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이 느낌 기억났다······. 고아원과 광산. 흑마법이란 학문을 배우기 전 느낀 감정이었다.
저항할 수단은 전무하며, 도저히 맞설 수 없는 상대를 마주한 기분.
무력감, 두려움, 공포, 생존 욕구였다.
물론, 고아원 원장과 광산 감독관, 힘센 아이를 악마를 비교할 순 없었지만, 근본적인 차이는 없었다.
딱 하나 차이라면 올리버가 체감하는 감각뿐이었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에는 무력감, 두려움을 느껴도 차분히 담담하게 반응할 수 있었던 것 같았는데, 지금은 필거렛의 영향 탓인지 아주 조금 더 생생했다.
그 탓일까? 올리버는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또 도망치고 싶었다.
도저히 맞설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기에.
몸은 머리보다 솔직했고, 올리버는 주변을 빠르게 훑어보며 도망칠 방향을 찾았다.
그때, 올리버는 보았다. 성기사 요안나를.
그제야 오랜만에 맛보는 공포와 무력감에 마비된 뇌가 자신이 애당초 왜 노력하고 있는지 알려주었다.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 혹시, 저희 누나 알아요? 요안나라고 엄청 대단한데.’
‘우리들의 자랑이죠.’
‘그 아이는 참으로 특별했죠. 자기 역시 버려진 아이임에도 이 고아원에 온 걸 감사히 생각하고, 다른 아이들은 물론 저 같은 어른에게도 힘이 되어 주려고 했으니까요.’
아르크 고아원에서 들은 이야기였다.
[캄(Calm)]
[어웨이크(awake)]
[스투폴(Stupor)]
[노 패인(No Pain)]
[래이 더 파운데이션 (Lay The Foundations)]
[하이 덴시티 본(High Density Bone)]
[스틸 본(Steel Bone)]
[머슬 업(Muscle Up)]
[머슬 하이퍼플레지아(Muscle hyperplasia)]
[머슬 컴프레션(muscle Compression)]
[버닝 라이프 (Burning Life)]
[리플렉스 리인포스먼트 (Reflexes Reinforcement)]
[널브 액설레이션(nerve acceleration)]
[매드니스 인젝션(Madness Injection)]
[테러블 앵그리(Terrible Anger)]
[퓨리(Fury)]
[머슬 앵그리 프로포셔널(Muscle Anger Proportional)]
[멘탈 어웨이크닝(Mental Awakening)]
올리버는 열 개를 가뿐히 넘기는 질병-강화계열 흑마법을 자신의 몸에 투여했다.
흑마법사가 되고도 거의 사용하지 않은 방식. 그 이유는 너무나 간단했다. 몸에 엄청난 부담을 줬으니까.
그럼에도 올리버는 대항 불가한 존재를 앞둔 상황과 인육 요리사의 살점을 먹어 강화된 육체를 고려해, 자신의 몸에 질병-강화계열 흑마법을 있는 대로 때려 박았다.
다섯 개만 돼도 과다투여인 걸 고려하면 실로 엄청난 양.
허나, 올리버는 개의치 않았다.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올리버는 우선 캄과 어웨이크로 침착함을 회복한 다음,
스투폴, 노 패인으로 몸의 통증을 차단,
래이 더 파운데이션으로 다량의 흑마법을 감당한 육체의 토대를 다진 뒤,
하이 덴시티 본으로 골밀도를 높인 다음 스틸 본으로 뼈의 강도(剛度)를 높였다.
그런 다음 머슬 업과 머슬 하이퍼플레지아로 근육량을 기하급수적으로 늘리곤, 머슬 컴프레션으로 근육을 최대한 압축해 최적의 효율을 낼 수 있는 상태로 만들었다.
덕분에 올리버의 몸에선 증기기관 같은 수증기가 배출됐다. 허나, 끝이 아니었다.
올리버는 육체를 한계까지 강화한 다음, 생명력을 신체능력으로 바꾸는 버닝 라이프, 반사신경을 높이는 리플렉스 리인포스먼트, 널브 액설레이션, 분노를 힘으로 바꾸는 매드니스 인젝션, 테러블 앵거, 퓨리, 머슬 앵거 프로포셔널 연속 투여했다.
올리버의 체온은 흑마법이 투여될 때마다 배로 올라갔고, 몸에서 뿜어지는 증기는 붉은빛을 띠기 시작했다.
피가 들끓는 것.
육체를 장악하는 분노와 신경의 과부하. 올리버는 멘탈 어웨이크닝을 진통제 삼아 이성을 유지하며, 마지막 흑마법을 사용했다.
[시널스 아머(Sinner's Armor)]
올리버의 마지막 영창에 타르를 뒤집어쓴 뒤틀린 존재가 대거 나와 올리버의 몸에 들러붙었다.
그들은 앞서 그랬던 것처럼 자신들의 뼈와 살점, 피를 자재 삼아 해골과 시체가 뒤섞인 갑옷을 만들어 올리버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덮어버렸다.
그 모습과 위압감은 불타버린 자와 같은 결을 가졌다. 현실에서 벗어난 모습.
올리버는 그대로 바닥을 톡 찼다.
바닥을 톡 차자 올리버는 순식간에 사라지며 그가 서있던 지면에서 작은 폭발이 일어나 바람 가르는 소리가 울렸다.
그리곤 불타버린 자 앞에 올리버가 갑자기 나타나 있는 힘껏 맹공을 퍼붓기 시작했다.
한계까지 강화한 육체와 마지막 존엄까지 판 지옥의 죄인으로 만든 갑옷을 두른 채.
진부하기 그지없는 표현이었지만, 올리버의 공격 하나하나는 공기를 요동치게 하고, 땅을 뒤흔들며, 사방에 천둥 같은 소리를 유발했다.
인간의 형상을 한 자연재해. 두 발 달린 재앙이나 다름없었으나, 끔찍하게도 진짜 재앙에겐 상대가 못 됐다.
지옥 중 하나를 다스린다는 불타버린 자는 손가락 하나로 올리버를 맞상대해줬다.
태풍을 일으키는 올리버의 쿼터스태프도, 수만의 질병이 깃든 단검도 말이다.
아까 전과 차이가 있다면 그나마 뒤로 몇 걸음씩 물러난다는 것뿐.
올리버는 이 흐름을 놓치지 않기 위해 타격을 주지 못함에도 계속해 맹공을 퍼부었다.
쿼터스태프를 휘두르고. 핏빛 단검을 휘두르며.
허공에 흑마법진을 형성해 증오의 탄환을 쏘고,
분노의 폭탄을 터트리며 쿼터스태프를 휘두르고.
얼굴의 갑주를 이용해 분노의 함성을 뱉으며.
핏빛 단검을 휘두르고.
몸에 두른 망토로 망자의 손을 만들며.
검은 물질로 만든 투창을 던지고.
핏빛 단검으로 찌르며.
검은 촉수로 붙잡아 쿼터스트프로 후리고.
주먹을 휘둘렀다.
[주먹······?]
불타버린 자가 올리버의 주먹에 한 대 맞으며 말했다.
수많은 맹공 중 하나가 복부에 닿은 것. 타격은 주지 못했지만 불타버린 자는 놀란 반응을 보였다.
설마, 검은 손을 만들어 쿼터스태프를 휘두르게 하고 올리버가 직접 주먹을 휘두를 줄 예상 못 한 듯했다.
예상 못 한 건 올리버도 마찬가지였다.
강대한 상대를 앞에 두고 마구잡이로 공격하다 보니 이리된 거라······. 허나, 불타버린 자의 반응을 보니 나쁘지 않은 거 같았다.
휙!
불타버린 자가 반격했다. 그는 손가락을 휘둘렀고, 반사신경과 신체능력을 높인 올리버는 이를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그런데도 완벽하게 피하진 못해 갑주(甲冑) 겉면이 갈려 나갔다.
등골이 섬뜩해졌다. 최강의 갑옷조차 악마에겐 종이 갑옷.
올리버는 저도 모르게 뒤로 주춤 물러날 뻔하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며 파고들었다. 어차피 뒤로 물러나도 답은 없었다.
올리버가 쿼터스태프를 내질렀다.
불타버린 자는 이를 튕겨내며 바로 손가락을 내질러 면갑 테두리를 부쉈다.
핏빛 단검의 날을 흑마법으로 늘려 악마의 목을 노렸고, 흑마법으로 늘어난 날은 악마의 목에 닿자마자 재가돼 바스러졌다.
불타버린 자는 가볍게 손가락을 휘둘러 갑주에 대각선 자상을 만들었으며,
올리버는 망가진 갑주를 보강하는 동시에 분노의 함성을 내질렀다. 비록, 불타버린 자가 내지른 손가락에 꿰뚫려 상쇄되고 얼굴까지 꿰뚫릴 뻔했지만.
올리버는 훽하고 고개를 틀어 피하며 주먹을 휘둘렀다.
멀쩡한 왼쪽 손과 불타버린 오른쪽 손 둘 다.
파방-!
짧고 간결하게 울리는 소리. 올리버는 작게 비명을 질렀다.
분명, 통증을 차단하는 흑마법을 썼음에도 올리버의 오른팔에서 참을 수 없는 통증이 밀려왔다.
당장이라고 주저앉아 비명을 지르고 싶을 만큼. 허나, 그럴 수 없었다.
한순간 오른손에 맞고 배를 한번 쓰다듬은 불타버린 자를 보았기에.
통했다. 아주 미약하지만 올리버의 공격이 통한 것이었다.
후우······.
불타버린 자는 깊게 숨을 내쉬었고, 형용할 수 없는 열풍(熱風)이 파도처럼 밀려와 올리버가 두른 갑주를 불 없이 불태우며, 올리버를 뒤로 날려버렸다.
거리가 갑자기 벌려졌지만, 올리버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기회를 만난 듯 바로 자신의 허기를 직접 추출해 그림자에 투여했다.
인육 요리사의 감정과 마력, 생명력을 머금고, 그 상태로 팬의 크리처까지 다수 흡수한 자신의 그림자에게.
올리버가 자신의 허기를 투여하자, 그림자는 생명을 얻었다.
형체가 없는 부정형의 크리처로.
크리처가 가진 신체 부위라고는 배고픔을 해소하기 위한 거대한 입과 기분 나쁠 정도로 가지런한 치아뿐이었다.
[아아······아······.]
의도치 않게 생명을 얻은 올리버의 그림자는 본능이 시키는 대로 불타버린 자에게 달려들었다.
기분 나쁜 외형 탓인지 불타버린 자는 검지와 엄지를 모으곤 손가락을 튕겼다.
딱.
소리가 울리자 강렬한 불빛이 발하며, 주변의 모든 색을 하옇게 탈색시켰다.
그와 함께 올리버의 그림자는 별다른 활약도 하지 못하고 강력한 화력에 불타 붕괴했다. 하지만 괜찮았다.
그림자의 바로 뒤에 따라붙은 올리버가 이미 거리를 좁혔기에.
세상이 원래의 색으로 돌아올 때, 올리버는 불타버린 오른손에 장갑을 집중, 주먹을 내질렀고, 불타버린 자도 올리버에게 주먹을 내질렀다. 더 빠르게.
***
주먹과 주먹이 교차되고 순간 올리버는 의식을 잃었다. 아주 짧게.
눈을 뜨자 기억나는 거라곤 자신의 주먹과 악마의 주먹이 교차됐다는 것뿐이었다······. 아, 더 있었다.
악마의 주먹이 자신에게 먼저 닿았다는 거였다.
한순간 악마의 주먹이 더 크게 보이며 움츠러든 것이 실책.
주먹에 맞자마자 올리버가 몸에 두른 갑주는 산산이 조각나 여기까지 날아와 버렸다.
온몸에 통증이 밀려왔다.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주변을 뒤덮은 어둠과 이제 시간이 다 돼 사라지는 검은 물질, 겁먹은 요안나 뿐이었다.
그녀는 겁을 집어먹은 채 올리버를 바라보고 있었다. 올리버가 두려운 거였다. 머리로는 그러지 말아야 하는 걸 앎에도, 생물로서의 본능이 공포를 느꼈다.
요안나는 올리버에게 두려움과 공포, 죄책감 등 여러 감정을 빛내며 뭐라 말하려 하였으나, 불타버린 자가 다가오며 이를 가로챘다.
[그대에게 겁먹었나 보군요.]
사방에서 메아리치는 음성. 올리버는 그 소리를 듣고 몸을 일으켰다. 몸이 부서질 것 같았다.
“······예.”
[그대께서 구해주려고 하는데 말이죠. 하긴, 성기사로서의 본분도 망각한 계집이니 당연하지만요.]
온몸에 통증이 밀려왔음에도 올리버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누굴 구해줄 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동의합니다. 그대 역시 눈앞에 죄악을 외면하고 그저 가까이 있다는 이유로 절 막으시는 거니까요.]
불타버린 자가 힐난했다. 말 자체는 그리 날 서 있지 않았지만, 그렇기에 상대를 아프게 후비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올리버는 고민에 빠진 듯 침묵했고, 불타버린 자는 대답을 재촉했다.
[부정하십니까?]
잠시 후, 생각을 마친 올리버가 입을 열었다.
“대답에 앞서. 질문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시죠.]
“다 불태운 다음 무엇을 하실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