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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흑마법사-488화 (488/633)

488. 악마와의 대화 (1)

필거렛을 입에 물고 들이키는 순간 올리버는 느낄 수 있었다.

생전에 던칸이 품었던 강렬한 감정을, 그가 살아오면서 느낀 수많은 기쁨과 슬픔, 분노, 좌절, 목표, 희망, 의지를.

그것은 한 사람에게서 짜낸 순수한 감정의 정수(精粹)라 할 수 있었고, 그 정수에는 그와 관련된 기억이 깃들어 있었다.

그것을 들이키는 건 뭐랄까······. 아주 오묘한 기분이었다. 다른 사람의 기억을 엿보는 것을 넘어 체험할 수 있는.

몸속에 담배 연기가 들어가자 올리버는 느낄 수 있었다.

마법사 가문에 태어난 것에 던칸이 가졌던 자긍심을.

자신이 마력비대증이라는 걸 알게 됐을 때 던칸이 느꼈던 절망감을.

그로 인해 주변에 배척당한 던칸의 분노를.

불량품으로 낙인찍혀 마탑과 집안에서마저 쫓겨났을 때 던칸이 느꼈던 배신감을.

그 분노와 배신감을 거름 삼아 자신을 증명하고, 복수하겠다는 던칸의 맹세를.

뒷세계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엿본 던칸의 희망을.

긴 시간이 흐르고, 실패를 맛봄에도 포기하지 않은 던칸의 의지를 말이다.

올리버는 찰나와 같이 짧으면서도, 한 사람의 인생이라 할 수 있는 시간을 던칸으로 살았다.

기이했다.

과거 두 차례 필거렛을 핀 적이 있었지만, 이 정도 효과는 볼 순 없었는데.

그때는 기껏해야 간접적으로 느껴질 뿐이었다. 그의 강렬하면서도 순수한 감정을. 그런데 지금은 그 이상이었다.

올리버는 던칸 그 자체가 되었다. 자긍심에 배신당해 복수에 평생을 바친 한 남자가 되었다.

그런 탓일까? 무표정한 올리버의 얼굴이 묘하게 떨렸다. 흡사, 가면이 생명을 얻은 것 같이 기괴했다.

‘정신 차려.’

이유를 알 수 없는 필거렛의 성능에 정신이 매몰되려는 순간, 올리버는 스스로에게 소리쳤다.

지금 눈앞에 있는 존재와 닥친 상황을 고려하면 의식을 놓으면 안 됐다.

다행히 올리버는 곧 정신을 차릴 수 있었고, 눈앞에 서 있는 불타버린 자를 볼 수 있었다.

그는 필거렛을 빨아 잠시 정신이 팔린 올리버를 기다려주고 있었다. 순수한 배려심으로.

올리버가 정신을 차리자 불타버린 자가 물어다.

[무엇이 과하다는 거지요?]

[······남의 가족을 그렇게 저주하는 건 좋지 않은 거 같습니다.”

올리버의 말은 평소보다 생기가 담겨 있었다. 필거렛의 영향일 터.

[저주가 아닙니다. 예언이죠.]

그 말을 듣자마자 올리버는 쿼터스태프 끝에 감정을 집중, 분노의 폭탄을 터트렸다.

완전히 밀착된 상태에서 일어난 흉흉한 폭발은 불타버린 자를 뒤로 멀어냈으나, 딱 그 정도였다.

당장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은 악마의 육신은 멀쩡했다.

예상한 바이긴 했지만, 직접 보니 그 위압감이 남달랐다.

척.

올리버가 쿼터스태프를 든 손으로 감정을 추출하려는 그때, 불타버린 자가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제스처. 올리버는 앞서 그가 기다려줬듯이 멈췄고, 곧 사방에서 음성이 메아리쳤다.

[왜 막으시는 겁니까?]

대비되는 질문이었다. 올리버가 요안나는 어찌할 건지, 도시는 어찌할 건지 물었을 때와.

악마는 진심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듯 물었다.

[이들의 죄악을 보지 않았습니까?]

“······저도 제 일이 있거든요. 지금 제 일은 성기사님을 보조하는 겁니다.”

[그렇습니까?]

필요한 말만 하던 악마가 되물었다. 그 탓인지 그 음성에서 감정 비슷한 게 느껴졌다.

[하나만 더 묻죠······. 정녕 그대께서 절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음······. 노력은 해봐야죠.”

올리버가 짧지만 깊게 고민하며 대답했고, 곧바로 자신의 감정을 추출했다.

올리버의 가슴에서 그 어떠한 것보다도 어두운 감정이 뽑혀 나왔다.

그 농도와 색은 여타 감정과 비교를 거부해 바라보는 것만으로 알 수 없는 불길함과 공포를 자아냈다. 망망대해 한가운데에서 바라보는 밤바다처럼.

그나마 양이 적기에 인간의 눈으로 감당할 수 있었다.

올리버는 그 소량의 감정을 바닥에 흩뿌리며 영창했다.

[헬 서먼(Hell Summon)]

투두둑. 영창과 함께 바닥 위에 뿌려진 검은빛 감정은 바닥에 닿자마자 증식해 대지를 전부 뒤덮을 뿐 아니라, 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까지 퍼져 그 영향력을 무한히 확대했다.

[임프리전(Imprison)]

공간을 장악하자마자 올리버는 앞서 그랬던 것처럼 정체불명 부정형의 검은 물질을 조작해 불타버린 자를 제압하려 했다.

올리버가 손을 쥐자 불타버린 자를 중심으로 검은 물질이 회오리치더니, 열 개의 촉수가 회전하며 그를 집어삼켰다.

빠져나갈 빈틈 하나 허용치 않고.

요안나는 물론, 아카이브 멀린조차 도망치게 만든 강력하면서도 알 수 없는 술법.

허나, 불타버린 자는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감상하듯.

검은색 촉수가 소리 없이 불타버린 자를 집어삼켰으며, 유일한 빛인 그가 사라지자 공간은 완벽한 어둠에 물들었다.

깊고 깊은 고요가 찾아왔다.

숨을 쉬는 건지, 눈을 뜬 건지, 감은 건지 알 수 없는 고요가.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고요에 완전히 집어 먹힐 것 같은 그때, 올리버 바로 앞에서 빛이 발했다.

불타버린 자가 다 타버린 자신의 육신을 다시 불태워 검은 물질을 재로 만들고, 빛을 밝힌 거였다.

정말 악마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처음으로 실패한 헬 서먼. 올리버는 다시 한번 악마를 집어삼키려 했으나, 이번에는 악마가 더 빨랐다.

후우.

그는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갈라진 입으로 짧게 호흡을 뱉었고, 호흡과 같이 나온 작은 불씨가 날아와 올리버 앞에서 폭발했다.

━━━━!!

현실감이 없는 폭발음은 그 위력을 대변해줬고, 올리버는 아슬아슬하게 검은 물질로 거대한 벽을 세워 1차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

그런 다음, 검은 물질을 몸에 둘러 블랙 슈트를 생성하고 그 위에 망토를 둘렀다.

재료 소모가 심해 정말 필요할 때 외에는 잘 두르지 않았건만, 그만큼 올리버가 위협을 느끼고 있다는 걸 의미했다.

필거렛을 피웠음에도 말이다.

올리버는 망토를 생성하자마자 바로 움직이려 했다.

악마를 직접 본 것도 상대하는 것도 전부 처음이었지만, 가만히 있는 순간 끝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직감했기에.

아니, 이것도 틀린 말이었다. 애당초 불타버린 자가 허락하지 않았다면 지금 이것도 불가능했다.

어쨌건 움직여야 했다.

꽈악.

올리버가 움직이려는 찰나 무엇인가 올리버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작게 느껴지는 손아귀 힘.

고개를 돌리자 올리버는 어둠으로 빗어진 아이들을 볼 수 있었다.

아까 전 홍인 아이뿐 아니라 공장에서 일하는 여공, 신문 배달부, 소매치기, 고아, 거지 세상에 넘치는 온갖 아이들이 있었다.

분명 가짜일 텐데, 그런데도 무척 실감 났다.

[도와주세요.]

[추워요. 배고파요.]

[아파요. 너무 아파요.]

[무서워요.]

[엄마가 보고 싶어요.]

아주 미약한 손아귀 힘. 올리버는 잠시 멈칫했으나 곧바로 망토를 당겼고, 어둠으로 빚어진 아이들은 망토를 놓치며 그대로 허공으로 사라졌다.

[너무 하는군요.]

사방에서 들리는 음성. 올리버는 불타버린 자의 위치를 그간의 경험으로 추측해 곧바로 쿼터스태프를 휘둘렀다.

비록 한쪽 팔로 휘둘렀다곤 하나, 몸에 두른 장갑(裝甲) 덕분에 소닉붐을 일으키며, 지축을 뒤흔드는 위력을 낼 수 있었다.

그 엄청난 공격마저 악마의 손가락 하나에 막혔지만.

불타버린 자는 평범한 자세, 손가락 하나만으로 올리버의 공격을 막아냈다. 너무나도 가볍게.

올리버는 몸에 두른 망토를 조작해 불타버린 오른팔을 대신할 새로운 팔을 만들어 쿼터스태프를 잡아 온 힘을 줬지만, 조금도 밀어낼 수 없었다. 오히려 올리버가 밀렸다.

맨몸으로 산을 밀어내는 느낌.

불타버린 자는 그 상태로 손가락에 살짝 힘을 줬고, 올리버는 보이지 않는 힘에 떠밀려 그대로 뒤로 날아가 버렸다.

마법, 흑마법, 자연의 힘. 그 어떤 힘도 아니었다. 그 이상의 무언가였다.

저 멀리 날아간 올리버는 쿼터스태프를 바닥에 박아 간신히 멈출 수 있었다.

올리버는 다시 검은 물질을 움직여 어떻게든 저항해보려 했으나, 악마가 허공에 손을 움켜쥐며, 올리버를 포함한 그 주변 공간 자체를 압축해 올리버를 붙잡았다.

꽈아아아아······!

[섀도 스파이크(Shadow Spike)]

장갑(裝甲)의 유무를 떠난 엄청난 압력. 올리버는 불타버린 팔에서 극심한 통증을 느낌에도 불구하고 흑마법을 사용해 불타버린 자 아래에서 거대한 말뚝을 솟구치게 했다.

그것도 그냥 말뚝이 아니었다. 말뚝이라 부르기도 뭣한 거대한 구조물이었다.

10미터가 넘는 거인조차 꿰뚫어버릴 크기에 표면에는 수많은 가시가 촘촘히 박힌 신화 속 형벌기구.

평상시였다면 사용하지 못할 규모. 그러나 소용없었다.

거대한 말뚝은 불타버린 자의 몸에 닿자마자 중간 과정도 없이 바로 재가 돼 바스러질 뿐이었다.

그저 몸에 닿았을 뿐인데.

악마는 여전히 그 자리 그대로 서 있었으며, 올리버는 보이지 않는 손에 붙잡혔다.

필거렛을 핀 상태였음에도 말이다.

[망설일 줄 알았습니다.]

악마가 대뜸 말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힘들었으나, 극심한 통증이 뇌를 자극해 곧 이해할 수 있었다.

아까 전 올리버의 망토를 잡은 아이들을 의미했다. 어둠으로 빗어진 허상 말이다.

[정말 허상(虛像)이라 뿌리친 겁니까?]

악마가 되물었다.

[단순한 허상이 아님을 알 텐데요.]

“······그럼 뭐죠?”

올리버가 온몸이 터질 것 같은 통증과 오른팔의 작열통을 견디며 간신히 되물었다.

[그건 제가 알려드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 정도는 스스로 아셔야지요······. 중요한 건 당신이 뿌리쳤다는 것입니다. 가까이 있는 더러운 비천한 계집을 위해.]

악마가 번개처럼 불타는 두 눈으로 요안나를 봤다. 그리곤 올리버에게 말했다.

[······실망이 큽니다.]

불타버린 자가 손을 더욱 옥죄였고 올리버가 몸에 두른 장갑은 으스러지며 몸에서 울리지 말아야 할 소리가 울렸다.

[역시 너무 일찍 나온 거 같군요. 아니면 그대께서 기대에 미치는 존재가 아니든가요.]

우드드드······.

[괜찮습니다. 그대는 존귀하며, 재밌는 존재지만, 딱 그 정도. 전 딱히 그대를 인정하진 않거든요.]

악마가 결론 내렸다. 감정을 꿰뚫어 볼 순 없었지만, 그는 진심인 것 같았고, 이를 증명해 보이듯 올리버를 쥔 손을 완전히 쥐어 비틀어 버리려 했다.

응애······.

불타버린 자가 완전히 손을 쥐어짜 올리버를 으깨버리려던 찰나, 그의 발밑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나지막이 울렸다.

바닥을 뒤덮은 검은 물질 밑에서 아기가 올라왔다. 진흙으로 만든 듯 검붉고 질척거리는, 신생아처럼 미숙한 아기가 하나둘 나왔다.

아기들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악마를 붙잡곤 작은 입으로 앙 벌려 깨물었다.

와직.

[태어나지 못한 생명. 그대가 존귀한 존재긴 한가 봅니다.]

악마는 아기의 이빨에 몸에 깨물렸음에도 악마는 평범하게 말했다.

그러는 사이 수많은 다른 아기들이 나와 악마를 깨물고, 다른 아기가 그 위에 올라타 악마를 부여잡고 깨물었다.

개미 떼와 같은 아기들이 악마를 감싸 뒤덮었다.

[살인합자(殺人合刺)]

불타버린 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올리버가 영창했다.

올리버가 외치자 그 등 뒤로 사람의 형상을 한 무언가가 나왔다.

타르에 뒤덮인 채 불탄 사람?

악마의 서적에서 읽은 악마로 추정되는 외형이었다.

허나, 이들은 악마가 아니었다.

올리버가 소환했지만, 올리버도 그들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그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을 뿐. 이들은 한때 사람이었다가 영락한 무언가였다.

올리버는 그 영락한 존재들에게 명령해 서로 합치게 했다.

올리버의 의지를 받든 그들은 한데 뭉쳐 자신의 뼈와 살을 자재(資材)로, 끈적한 피는 접착제 삼아 나이프를 쥔 거대한 손을 현상했다.

수많은 살인자로 이뤄진 살인자의 나이프. 인간의 죄악으로 만들어진 끔찍한 흉기.

보는 것만으로 눈을 뽑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는 나이프는 올리버의 의지대로 움직여 아기들에게 둘러싸인 불타버린 자를 찌르려 했다.

세상의 온갖 악의(惡意)와 살의(殺意)를 담아.

푹!

놀랍게도 살인자의 나이프는 아기와 같이 불타버린 자를 꿰뚫어버렸다.

올리버는 그 기세를 놓치지 않기 위해 망토로 만든 검은 손으로 각각 쿼터스태프와 핏빛 단검을 들곤, 바닥을 박차 거리를 단숨에 좁혔다.

거리가 좁혀지자 올리버는 확인할 수 있었다. 아기에게 온몸이 씹어 먹히고, 거대한 나이프에 몸통이 꿰뚫리고도 멀쩡한 악마를.

겉모습과 다르게 그는 손가락 끝이 베인 상처조차 입지 않았다.

아기와 나이프를 순식간에 재로 만드는 모습이 이를 말해 주었다.

[해잇 불릿(Hate Bullet)]

순식간에 공격을 재로 만든 불타버린 자. 그 모습을 본 올리버는 당황하지 않고 빈 왼손으로 총구를 만들어 증오의 탄환을 쐈다.

만 개의 총이 동시에 격발되는 소리가 울렸으며, 보이지 않는 탄환이 악마의 육체에 셀 수 없이 많은 구멍을 만들었다.

비틀거리는 악마의 육신. 아주 조금 통한 걸까?

올리버는 의문에 결론을 내리기 전에 망토로 만든 검은 손을 이용해 쿼터스태프와 핏빛 단검을 어지러이 휘두르며 맹공을 가했다.

생각할 틈을 조금이라도 줘선 안 됐다.

검은 물질로 감싸진 쿼터스태프는 문자 그대로 태풍을 일으키며 악마의 급소만 정확히 타격했고, 핏빛 단검은 그 여백을 채우듯 쉴 새 없이 휘몰아쳐 그의 몸을 난도질했다.

수천수만 가지의 질병이 깃든 단검은 불타버린 자의 육신에 상처를 남길 때마다 셀 수 없이 많은 질병을 부여했지만, 그의 몸에 남은 잔불에 모조리 불살라져 사라졌다.

모든 공격이 무의미했다.

탁. 탁.

공격을 당하던 불타버린 자가 양손의 검지와 엄지만으로 올리버의 쿼터스태프와 단검을 가볍게 잡았다.

[만망흑수(萬亡黑手)]

올리버가 외쳤다. 그러자 올리버가 몸에 두른 망토는 만 개의 손으로 변해 불타버린 자를 붙잡았다.

발목, 종아리, 허리, 어깨, 손목, 팔, 무릎, 머리, 목 가리지 않고 잡을 수 있는 부위는 전부.

흡사, 망자의 손. 그 망자의 손은 움켜쥔 대상의 체온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워 빼앗았다. 온기를 원하는 귀신처럼.

쩌저저적!

잔불만 남은 악마의 육신이 사그라들더니, 일부 피부가 갈리지는 소리를 내며 차갑게 식어버렸다.

악마의 육신이 식자 다시 어둠이 찾아왔으나, 올리버는 상관치 않았다.

이윽고 주변이 완전한 어둠에 잠겼고, 올리버는 검은 물질로 만든 블랙 슈트를 얼굴에 집중시켜 완전히 뒤덮어버렸다.

기괴한 형상이 된 얼굴. 입이 쩌적 벌려졌다.

[아웃 크라이(Out C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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