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흑마법사-487화 (487/633)

487. 존귀한 존재 (2)

존귀(尊貴).

지위나 신분이 높고 귀함을 뜻하는 단어.

이것만큼이나 올리버와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없다고 할 수 있었다.

왜냐면 올리버는 천하디 천한 존재였으니까.

아비와 어미가 누군지 모르고, 고아원에서 자랐으며, 종국에는 광산에 팔렸다. 심지어 고아원과 광산에서마저 배척당해 가장 밑바닥을 기었다.

물론, 이후 행운이 따라 넓은 세상을 구경하고 많은 축복을 누릴 수 있었지만, 그렇다 해도 존귀한 것은 아니었다.

존귀하다는 건 행운, 노력을 넘어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무언가였으니.

그런데 악마가 올리버에게 말했다. 존귀한 존재라고. 참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감정을 꿰뚫어 볼 수 없어 더더욱.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찾을 수 없던 올리버가 질문하려던 찰나, 불타버린 자가 저벅저벅 앞으로 다가와 요안나를 향해 탄화한 손을 뻗었다.

물건을 집듯 평범하고 아무렇지 않게.

탁.

그 평범한 손짓에 올리버가 쿼터스태프를 들어 멈춰 세웠다.

갑자기 움직인 탓에 오른팔이 미친 듯이 아팠다.

“후우······.”

불타는 듯한 통증에 올리버가 호흡을 고르며, 식은땀을 흘렸다.

불타버린 자는 자신의 손을 멈춰 세운 올리버를 말없이 내려다봤다.

자신을 방해했다고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으나, 그렇기에 더 두려웠다.

감정에 지배되지 않는 하나의 작업 같은 느낌이라 더더욱 피할 수 없을 거 같았다.

잠시 동안 침묵이 공간을 지배했다.

요안나는 악마가 눈앞에 있음에도 몸이 얼어붙어 가만히 서 있었고, 올리버 역시 쿼터스태프로 악마를 막은 것이 고작이었다.

악마는 잠깐 올리버 바라보다 자신의 손을 막은 쿼터스태프를 매만지기 시작했다.

[······잘 관리한 물건 같군요.]

“선물 받은 거라서요. 매일 한 번씩 닦고 있습니다.”

[마음에 듭니다.]

“정말, 죄송하지만 드릴 순 없습니다.”

올리버가 악마를 앞에 두고 진심으로 말했다. 차라리 전 재산을 줬으면 줬지.

[그거 아쉽군요······. 이만 치워주시겠습니까?]

불타버린 자가 정중히 부탁했다.

그의 메아리 같은 음성에는 분명 마법도 흑마법도 어떠한 기운도 담겨 있지 않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힘이 실려 있었다.

순수한 말의 힘.

올리버 역시 그 힘이 눌릴 뻔했으나, 요안나를 한번 보고 참으며 질문했다.

“치우면 어떻게 하실 거죠?”

[손으로 얼굴을 잡을 겁니다.]

자신의 손으로 요안나의 얼굴을 잡는 다라······.

“그다음은요?”

[불타 사라지겠지요.]

불타버린 자가 평범하게 대답했다. 날이 흐리면 비가 온다는 듯이, 집이 더러워지면 청소하겠다는 듯이.

[그리고 이 위에 있는 도시도 불태울 겁니다.]

“······정말 궁금해 그러는데, 왜 불태우시려는 거죠? 홍인들이 소환했기 때문입니까?”

올리버가 곰곰이 생각하다 물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이런 질문을 할 때가 아니었지만, 올리버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질문밖에 없었다.

[복잡한 질문이군요.]

불타버린 자는 손을 거두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그러더니 손가락을 까딱여 주변의 어둠을 움직였다.

시커멓던 사방은 어둠의 음영(陰影)을 이용해 어떠한 공간을 재현했다. 광산?

자세하면서도 흐릿하고, 명확하면서도 모호하며, 현실감이 느껴지면서도 몽환적인 모순된 공간이었다.

[소환해 불태우려는 것. 아주 틀린 말은 아닙니다.]

“다른 이야기도 있다는 것처럼 들리네요.”

불타버린 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불타버린 육체가 움직일 때마다 바스러진 검부스러기가 흘러내렸다.

[타락한 도시니까. 정화해야지요.]

정화(淨化)라. 참으로 기묘하게 들렸다. 악마가 말한 탓일까? 아니, 그건 아니었다.

지금까지 알 수 없는 것투성이였지만, 단 하나 확실한 건 악마가 기존에 알려진 것과 다른 존재라는 거였다.

그렇다면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기묘한 말이군요.”

[······.]

“불태운다는 게 정화한다는 거라니. 어울리면서도 어울리지 말아야 하는 단어인 거 같은데요.”

불타버린 자가 올리버 쪽으로 정중히 손을 내밀었다.

[어찌해 그리 생각하십니까?]

“음······. 여기 사람들이 쓰레기 같다고 하는 거 같아서요?”

[쓰레기 맞습니다.]

불타버린 자가 짧고 간결하게 답했다. 메아리 같이 소리는 특유의 음색 탓에 감정이라곤 느껴지지 않아, 더더욱 진심처럼 들렸다.

증오, 분노, 기쁨, 슬픔도 없이 그저 치워야 하는 쓰레기로.

올리버조차 뭐라 형용하기 힘든 감각을 느꼈다.

“함부로 말하지 마시죠.”

동료들의 죽음, 압도적인 악마의 존재감에 얼어붙어 있던 요안나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결코, 힘으로 이길 수 없음을 앎에도 그 누구도 더럽히지 말아야 할 성역을 지키듯 그녀는 필사적으로 용기를 내 말했다.

“아무리 강대한 존재라 해도······. 함부로 남을 쓰레기라 비하할 수 없습니다.”

불타버린 자는 그 말에 처음으로 요안나를 의식했다. 아까 전 요안나를 붙잡으려 했을 때가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있으니 치운다는 느낌.

요안나 그 자체는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날파리를 개체 별로 의식하지 않듯이.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요안나란 존재를 명확히 인지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신경을 곤두세우며 기다리는 그때, 불타버린 자가 만든 어둠의 무대(舞臺)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알려주지.]

***

[엄마! 엄마!]

무대에 등장한 첫 번째 배우는 어둠으로 빚어진 아이였다. 겁에 질린 채 우는 아이.

뒤이어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배우가 나왔다.

어둠으로 빚어진 배우들은 구체적으로 확인하기 어려웠지만, 모두 홍인(紅人)이었다.

근거가 있냐고 물어본다면 답할 순 없었다. 그저 본능적으로 홍인이란 걸 느낄 뿐.

불타버린 자가 만든 무대 위에는 다섯 번째, 여섯 번째 등 헤아리기도 힘든 홍인 배우들이 나왔고, 뒤이어 총을 든 왕국 사람이 그들을 위협하며 한곳으로 밀어붙였다.

당연히 모두 처음 보는 얼굴. 그러나 올리버는 그중 한 명을 알아볼 수 있었다.

프로메테우스 사(社)를 세운 설립자이자, 얼마 전까지 최고 경영자로 있던 케니 미다스였다.

간혼 신문에 실린 그의 사진과 에디스가 보여준 사진을 통해 그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는데, 올리버가 알고 있던 것보다는 몇십 년은 젊어 보였다.

[사장님 정말 하는 겁니까?]

한 덩치가 떨며 물었다. 케니의 직원인 듯했다.

그는 척 봐도 한 힘 할 것 같았지만, 케니의 독기 탓인지 몹시도 겁에 질린 상태였다.

[당연히 해야지! 당연히······! 이 사업 실패하면 전부 끝이야! 끝!! 난 이미 내 마누라까지 바쳤다고!!]

케니는 권총을 꺼내 직원을 겨누며 협박했다. 그림자임에도 그의 광기와 두려움, 조급함이 생생히 느껴졌다.

[전부 기억해! 이제 물러날 곳이 없다는 걸! 빌어먹을!! 난 악마보다 돈이 무섭고, 지옥보다 가난뱅이가 되는 게 더 무서워! 너 석 달 전에 셋째 가졌지?!]

케니가 겁먹은 덩치에게 물었다. 덩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넌 할머니가 아프고?!]

또 다른 덩치에게 물었고, 그 덩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넌 동생이 학교 입학했다며? 너처럼 안 자라게 할 거라며?! 넌 결혼해야 하고! 씨발, 넌 보름까지 빚쟁이들에게 돈 갚아야 하잖아?! 아냐?! 아니냐고!!]

수많은 덩치가 케니의 말에 감히 반박하지 못했다.

그들은 단순히 케니가 무서워 여기 있는 게 아니었다. 지극히 평범하지만,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 때문에 여기 있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당장 의식을 시작하자고. 망설이는 놈은 내가 죽일 거야.]

케니는 명했고, 직원들은 그 명에 따르기 시작했다.

덩치 넷이 한 기계를 가져왔다. 어둠으로 빚어진 기계는 구체적인 형태를 가늠할 수 없었지만 무슨 압착기 같았다.

덩치 중 하나가 아이의 머리끄덩이를 붙잡았다.

첫 번째 등장한 배우로, 다른 직원이 다가와 입에 깔때기를 쑤셔 넣은 다음 그 위로 액체를 들이부었다.

[포도주 맞지? 붉은 포도주?]

[예.]

케니는 어떤 설명서를 읽으며 물었고, 직원이 대답했다.

대답을 듣자마자 케니는 어떤 책을 꺼내 알 수 없는 기도문을 읊기 시작했다.

아까 전 홍인들이 읊은 기도문과 비슷했지만 달랐다. 악마를 향한 저주받은 기도문이었다.

덩치는 배가 불룩해질 때까지 아이의 배에 포도주를 집어넣었다.

눈물을 흘리는 여성들, 겁에 질린 아이들, 반항하다 총에 맞은 남성들.

인사불성이 된 아이는 기계 위에 억지로 눕혀졌고, 가장 덩치가 큰 직원 둘이 기계 양옆의 원형 손잡이를 돌리기 시작했다.

끼리릭. 끼리릭. 끼리릭. 우두둑. 우두둑. 우두둑.

조용히 사방을 울리는 기계 소리와 뼈와 살점이 으깨지는 소리.

이곳이 바로 지옥이었다. 사람이 만든 지옥.

“우욱······!”

아이가 산채로 짜부라지는 광경에 요안나가 고개를 돌렸다.

이미 전의를 상실한 지 오래. 그러나 보이지 않는 손이 요안나의 고개를 억지로 움직여 눈앞에 광경을 관람케 했다.

끼리리······.

기계가 한계까지 압착해 소년을 짓뭉개버렸다.

남은 것이라고는 압착기에 들러붙은 살점과 뼈, 바닥에 고인 포도주 섞인 피뿐이었다.

[마, 마석이다! 마석입니다······! 사장님!]

곡괭이를 든 직원 하나가 주변을 파더니 소리쳤다. 그의 말대로 마석이 발견되었다.

아이의 피와 죄악이 이 땅을 풍족하게 했다.

아이가 산채로 짜부라질 때까지 흔들림 없이 기도문을 읊던 케니는 놀라며 그곳으로 달려가 확인했고, 곧 환호성을 질렀다.

환호성을 지른 건 케니만이 아니었다. 방금까지 두려움, 죄책감에 시달린 그들도 황금이나 다름없는 마석을 보자 언제 그랬냐는 듯 환호성을 지르며 서로 얼싸안았다.

이후로는 일의 진행이 몹시도 빨랐다.

무대에 등장한 순서대로, 여자, 아이, 노인, 임산부 가리지 않고 입에 깔때기를 쑤신 다음 포도주를 억지로 들이부었다.

부풀어 오른 배, 압착기, 기도문, 원형 손잡이, 터지고 부러지는 몸, 과즙처럼 흘러내리는 붉은 피.

제물을 제외한 모두가 환희하고 있었다. 신앙, 구원, 용서, 깨달음. 현재의 종교에서 말하는 무형의 가치보다 구체적이고 직관적인 결과물이 나왔기에.

끼리릭 소리가 울리 때마다 홍인들은 하나씩 사라졌고, 사람이었던 살점 덩어리가 쌓여갔다.

쌓이는 죄악의 흔적과 그 흔적에 비례해 마석이 깃드는 땅.

올리버는 그 누구도 불가능하다고 한 마석 채굴이 어찌 가능했는지 보고 있었다.

팬의 말이 사실이었다. 이곳은 죄악의 땅이었다. 홍인들을 바쳐 마석을 만든 피와 탐욕의 땅.

비유도 뭣도 아닌 말 그대로였다.

“으으······! 으으······!”

요안나가 새하얗게 질린 채 몸을 숙여 신음소리를 냈다.

의식을 잃지 않기 위해 애쓰는 거였다. 의식을 잃으면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테니까.

그녀는 형용할 수 없는 죄악감에 잠식돼 당장이라고 포기하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불타버린 자를 노려보았다.

요안나가 입을 여는 타이밍에 맞춰 불타버린 자가 말했다.

[혹시, 말하고 싶나? 모든 사람이 죄인은 아니라고?]

의표를 정확히 찔렀는지 요안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모두 알진 않았겠지. 하지만, 총독부와 파테르교는 정녕 몰랐을까?]

악마가 요안나에게 다가왔다.

[자신할 수 있나? 정말 조금도 몰랐을 거라고?]

불타버린 자가 말할 때마다 한 걸음씩 다가왔고, 요안나는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죄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죄인처럼.

[설사 사람들이 알았다고 멈췄을까?]

다시 불타버린 자가 발을 내디뎠다.

[홍인(紅人). 어차피 붉은 피부를 가진 야만인, 신의 자식이 아니니 괜찮지 않을까?]

요안나가 식은땀을 비처럼 흘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때, 뭔가가 그녀의 다리를 잡았다. 압착기에 짜부라진 아이였다.

[살려주세요.]

“히, 히익······!”

요안나는 악마의 강림을 봤을 때보다 더욱 공포에 질린 채 새된 소리를 지르며 주저앉아버렸다. 몸에 힘이 빠진 것.

압착기에 형체를 잃은 아이들이 그녀의 몸을 붙잡으며 살려달라 빌었다.

[이제 말 잘 들을게요!]

[게으름 안 부릴게요! 밥도 조금만 먹을게요!]

[살고 싶어요! 살려줘요!]

[아파요. 엄마! 엄마가 보고 싶어요. 아빠도요······!]

어둠으로 이뤄진 아이들은 실제 아이보다도 힘이 약했으나, 요안나는 그 아이들의 손을 뿌리치지도, 잡아주지도 못했다.

그저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댈 뿐.

실제로, 요안나는 물에 빠진 사람처럼 호흡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공포 이상의 죄악감이 그녀의 폐를 짓누르고 짓눌렀다.

그러는 사이 불타버린 자와 요안나의 거리는 더더욱 좁혀졌고 불타버린 자는 요안나에게 판사처럼 선고했다.

[성기사 요안나. 성기사로서의 본문을 망각한 죄인. 자신과 가까운 사람을 위해 멀리 있는 자를 외면하고 차별한 자. 신의 이름을 팔아 자신의 허영을 채운 더러운 창녀, 뒤늦게 움직여 자신의 죄를 덜려고 한 위선자.]

요안나는 벌벌 떨며 눈물을 흘렸다. 단순히 두려운 게 아니었다.

[거짓된 성기사여. 네가 어린양을 외면하면서까지 지키려 한 거짓된 가족은 끔찍한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 널 키운 여자는 가장 분노한 자에서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니게 될 것이며, 널 사랑하는 거짓된 동생들은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깊은 숲에서-]

-턱.

요안나에게 다가가며 저주를 퍼붓는 불타버린 자가 말을 멈췄다.

올리버가 쿼터스태프로 그를 다시 막아선 거였다.

올리버는 불타버린 오른손으로 힘겹게 필거렛을 피며 말했다.

“말씀이 과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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